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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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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

2019. 6. 5.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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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찰스 그리스월드는 자신의 책 <<용서>>에서 말했다.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오래된 상처를 어떻게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나는 잘 안다. 이야기를 하는 이는 물 긷는 장치에 묶인 낙타처럼 계속 원을 그리고 돌면서 부지런하게 비극을 길어 올리고,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그때의 감정도 되살아난다.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39-40)

 

 

 

   얼마 전에, 화가 아나 테레사 페르난데스가 얼음을 깎아 만든 하이힐을 신고 한밤중에 도심의 차도와 인도 사이에 있는 배수구에서 얼음이 녹아 맨발이 될 때까지 서 있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것은 그녀 몸의 온기와 신발의 냉기가 벌이는 대결이자, 본인의 맹렬한 의지와 신데렐라 이야기라는 감옥이 벌이는 대결이었다. 신발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답고,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당신의 발을 죽이려는 신발. 신고 걷기엔 너무 부서지기 쉬운 신발. 정말로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뾰족해서 '단검'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신발. 고문과 같았던 두 시간을 단 40분으로 압축해 놓은 비디오를 보면, 신발은 천천히 형태를 잃어 간다. 흩어진 이야기처럼, 희미해진 믿음처럼, 녹아 사라지는 두려움처럼.
   추위로 손발의 감각이 없어지고 나면,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다시 따뜻해진 후에야 비로소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혈액순환이 멈추고 잠이 들어 버릴 때가 아니라, 다시 혈액이 깨어나고 팔다리가 아플 때와 비슷하다. 큰 키에 운동선수 같은 몸을 지닌 아나의 말에 따르면, 꽁꽁 언 발이 녹기 시작하면서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신데렐라>>라는 해로운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또한 자신의 열정적인 페미니즘과 빛나는 상상력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통을 견뎠다. <<신데렐라>>에서 여성은 신발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몸을 변형시킨다. 반면 아나는 신발을 부수고, 맨살과 얼음 사이의 투쟁을 통해, 그리고 현실에 맞지 않는 동화와 그녀 자신이 가진 굴복하지 않는 온기 사이의 투쟁을 통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ㅡ이지나 온기를 지닌 것은 아니다. (48-49)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영웅이다. 다른 이야기라는 무대에 우리를 세워 놓고 그렇게 작아진 스스로를 보는 것, 당신과 관련이 없는 세상의 광활함을 보는 것도 바라보기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능력을 보고,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나가고, 다른 사람의 삶을 만들고 혹은 그것을 부수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 의해 이야기되기보다는 우리가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이야기하지만, 장소가 되돌려 주는 사랑,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장소는 우리에게 우리가 되돌아갈 어딘가, 즉 연속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우리 삶의 일부분을 서로 연결하고 일관성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친숙함을 준다. 장소가 제공하는 커다란 눈금 안에서 우리의 문제는 어떤 맥락을 얻고, 광활한 세상은 상실이나 문제 혹은 추함을 해결하고 치유해 준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장소들은 그곳에 우리 자신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곳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또는 다른 자아를 상상하게 해 준다는 이유로, 혹은 그곳에서는 술을 잔뜩 마시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안식처가 되어 준다.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나는 종종 오션비치에 가곤 했다. 도시 끝자락의 출렁이는 태평양을 마주하고 있는 그 긴 모래 해변에서 나는 다시 힘을 얻었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관점이란 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하다. 도시가 모래로 바뀌고, 모래는 파도로 바뀌고, 파도는 대양으로 바뀐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대양이 수천 마일이나 이어지고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의 이야기, 아니 사람들의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경계가 있음을, 그 너머에는 다른 어떤 것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미지의 끄트머리가 그렇게 익숙한 모습으로, 영원히 해변을 적시고 있다. (52-54)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위험하다. 본인과 다른 사람에게 모두 그러하다. 파괴하는 이, 큰 고통을 일으키는 이는 먼저 자신의 일부를 죽여 없애거나,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볼 수 없게 된다. 그의 내적 풍경은 칸막이와 동굴, 지뢰밭과 공터, 함정 같은 것이 가득한,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는 풍경, 자신을 알지 못하는 풍경, 본인도 길을 잃어버리는 풍경이다. 이런 상황은 전쟁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죽음이라는 실재, 뜨끈하고 엉망이 된, 고통스럽게 절단된 인간의 몸과 피와 절규, 살아남은 자의 상실감 같은 것은 부수적 피해라는 말로 추상화되거나 완전히 무시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적은 인간이 아닌 무엇으로 재규정된다.
   이는 일상생활의 작은 행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본인이 완벽히 정당하다고 느끼는 사람, 자신이 해를 끼쳤음을 모르는 사람, 보인만 모르고 다른 사람은 다 아는 의도가 담긴 어떤 말을 하는 사람, 늘 복잡한 이유를 들이대거나 그저 잘 까먹는 사람. 우리는 모두 한때 그런 사람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건 살인자의 정신 상태이며, 크게 보면 전쟁에 임하는 정신 상태다. 자신을 보지 않는 방식은 정교하다. 분열, 투사, 기만, 망각, 정당화 등 많은 방식으로 사람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이라는 장애물을, 우리 자신의 얼굴을 한 괴물이 숨어 있는 미로를 피해 간다. [...]
   우리 시대의 많은 위대한 인도주의적 활동과 환경 운동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현실로 드러냈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여 주었으며, 멀리 있던 것을 가까이 끌어왔다. 덕분에 착취당하던 노동자와 고문의 피해자, 매 맞는 아이의 고통, 심지어 다른 종이나 오지를 파괴하는 행위까지도 사람들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쳤고, 아마도 실천을 위한 자극이 되었다. 또 이런 활동은 당신이 먹는 음식이나, 당신이 입는 옷, 당신의 나라와,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당신도 한몫하고 있는 고통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서사 예술이기도 하다. 가끔은 당신의 집이나 침대, 삶에서 벌어지는 눈앞의 고통을 보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마치 나 자신의 자아를 보는 것이 더 어렵듯이 말이다.
   자아라는 것 역시 만들어지는 것, 당신의 삶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자, 모든 이로 하여금 예술가가 되게 하는 어떤 작업이다. 늘 무언가 되어 가는 이 끝없는 과정은 당신이 종말을 맞이할 때 비로소 끝나며, 심지어 그 후에도 그 과정의 결과는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만들어 가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아라는 작은 우주와 그 자아가 반향을 일으키는 더 큰 세계의 작은 신이 된다. [...]
   작가가 홀로 들어가 자신이 마주친 미지의 영역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책이라는 신기한 삶이다. 만약 작가가 그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훗날 다른 이들이 그 길을 따를 것이다. 한 번에 한 명씩, 그 역시 홀로 떠나는 여정이지만, 작가의 상상력과 교류하며, 작가가 닦아 놓은 길을 가로지른다. 책은 고독함,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고독함이다. (83-86)

 

 

 

   그림으로 들어가는 로드러너와 우다오쯔의 행동은 문자 그대로 생각하거나, 특정 환경에 놓고 보면 역설적이고 불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늘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이야기와 아미지 속에서, 마치 그것들이 우다오쯔의 먹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에 흠뻑 젖어 지낸다. 우리는 이야기의 가정들을 들이켜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내뱉는다. 우리 서구인들은 예술은 모방이며 환상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에 속아 왔다. 우리는 예술이란 별도의 영역이고, 예술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돼 있으며, 우리는 예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
   "막대나 돌은 뼈를 부러뜨릴 수 있지만, 말은 절대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라고 어머니는 자주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말 때문에, 그 뒤에 숨은 이야기 때문에 늘 다치고 있었다. 그건 세상은 어때야 하는지, 본인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아버지, 사회, 교회, 그리고 광고에 등장하는 결점이 없는 여성들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미지와 이야기의 세계에 살고 있고, 대부분은 이런저런 이야기에 상처를 입으면 살아간다. 운이 좋으면, 우리를 받아 주고 축복해 주는 다른 이야기를 찾거나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93)

 

 

 

   만드는 이가 된다는 것은, 다른 이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일, 그저 물질적 세상뿐 아니라 그 물질적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의 세계, 우리가 희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꿈까지 만드는 것이다. (95)

 

 

 

   작가가 된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책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마치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듯 그 안으로 사라졌다. 나를 놀라게 했고, 지금까지도 놀라게 하는 것은 이야기의 숲과 고독 그 너머에 건너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나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95-96)

 

 

 

   도서관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성지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지휘소다. 이 고요한 방들에 크레이지 호스와 아웅산 수치의 삶이 있고, 백년전쟁과 아편전쟁을 포함한 추악한 전쟁이 있고, 시몬 베유와 노자의 사상이 있으며, 당신이 탈 배를 만드는 법과 결혼 생활을 잘 끝내는 법이 있고, 독자들이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무장시켜 주는 허구의 세계와 책들이 있다. 도서관은 이상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지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저장되어 기억되고 삶을 되찾는 장소, 종이가 가득한 상자에 세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곳이다. 책 한 권 한 권이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며, 어린이 책에서 말하는 마법이라는 것도 그에 대한 비유일지 모른다. 도서관은 세상으로 가득 찬 은하수다. 모든 독자는 우다오쯔이며, 상상력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책은 독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풍경이다.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진짜 책이 아니라, 그 책이 지닌 가능성, 음악의 악보나 씨앗 같은 것이다. 책은 읽힐 때에만 온전히 존재하며, 책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은 독자들의 머릿속, 관현악이 울리고 씨앗이 발아하는 그곳이다. 책은 다른 이의 몸 안에서만 박동하는 심장이다.(99)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 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 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100)

 

 

 

   고통이 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함으로써, 어떤 사회 구성체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들의 즐거움 역시 전염성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 사람 혹은 그런 사람들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그런 감정이입이 차단될 수도 있다. 사회 전체가 자신은 경계에 있는 소수자들과 무관하다고 여길 만큼 무감각해지도록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마치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맺은 인간적 관계를 지워 버리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감정이입 덕분에 당신은 고문, 배고픔, 상실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다.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 다음엔 마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 버린다.
   [...]
   자아의 경계가 당신이 느끼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면, 자신을 느낄 수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경계 안에서 수축할 것이다. 반면에 다른 이의 것까지 느끼는 이들은 확장할 것이며, 모든 존재에 공감하는 이들의 경계는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홀로 있지 않으며, 외롭지 않고, 우리 자신이라는 섬에 발이 묶여 버린 이들과 달리 취약하지 않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취약하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 지닌 위험은 상당히 강력해서, 많은 이들이 그 앞에서 물러나고, 그런 물러남을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고안해 낸다.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수축해 버렸음을 잊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156-159)

 

 

 

   수술 전날, 샘과 캣이 나를 데리고 나가서 함께 저녁을 먹었고, 캣이 리허설에 간 후에 샘과 나는 밤늦게 오션비치로 갔다. 썰물 때의 단단하고 축축한 모래 위로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다시 밀물이 들어와 지나온 흔적들을 깨끗하게 지우기 전까지는 그렇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각자 뒤에 남긴 그 긴 선을 바라보는 걸 나는 좋아한다. 가끔은 나의 삶도 그런 식으로 상상해 본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느질의 한 땀 한 땀인 것처럼, 마치 내가 바늘이 되어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내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세상이 꿰매지고 있는 것 같은 상상. 다른 이들이 만들어 내는 길과 교차하기도 하면서 , 비록 흔적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방식으로 그 모든 길이 누비이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로 엮인다. 꾸불꾸불한 선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하나로 합쳐 나가는 것이, 마치 그 걸음이 바느질이고, 바느질은 곧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며, 그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삶인 것 같다.
   [...] 팔뚝이나 실패에 섬유 뭉치를 놓고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자아낸 실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 가락에 감기는 과정은 보고만 있어도 황홀한 예술이었다. 아무 형태가 없던 섬유 뭉치가 그런 동작을 거치며 실이 되고, 그 실이 만드는 선을 따라 세상이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처럼, 시간이 순환하면서 거기서 한 줄의 실처럼 선적인 시간이 만들어진다. '잣다(to spin)'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그저 뭔가를 만드는 행위를 뜻하다가, 빠르게 돌아가는 건 뭐든 뜻하게 되었고, 결국 '이야기를 하다'라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
   그러나 진정 놀라운 점은 실을 잣는 이들이 모두 아직 형태가 없는 덩어리를 앞에 놓고, 거기서 실을 뽑아내고, 그것으로 고기 잡는 그물이나 잠옷 같은, 세상을 담을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실 잣는 이는 형태가 없는 것에서 형태를, 조각들로부터 연속된 것을, 흩어진 사건들에서 서사와 의미를 만들어 내는데, 왜냐하면 이야기꾼은 또한 실을 잣는 이, 혹은 천을 만드는 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굽이굽이 흐르며 우리들 각각을 서로에게 이어 주고 , 목적과 의미, 우리가 반드시 가야만 하는 어떤 길처럼 보이는 그곳으로 이어 준다. 그것은 그날 늦은 밤까지 해변에서 우리가 했던 일처럼 우리 뒤로 바늘땀 같은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다. (192-195)

 

 

 

   그 군도에 관해 쓰고 있는 지금, 친구 앤의 마지막 작품이 생각난다. 하얀 벽 위에 석고로 만들어 붙인 섬들을 빨간 실로 이어 놓았던 그 작품. 아이슬란드의 섬을 잇는 것은 바닷새들이었고, 배가 섬 사이를 오가기도 했다. 앤이 죽어 가며 만들었던 그 작품은 모든 것의 지도이자, 연결 그 자체에 관한 작품이었다. 뇌의 신경, 몸 속의 혈관, 땅 위의 길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하나의 실처럼, 시간에 따라 풀려나가는 하나의 서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하나의 실인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들 각각은 그저 하나의 섬이고, 그 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실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일 뿐이다. (213)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 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지만 그 순간부터는 정말로 중요해진다. 이 순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손님은 때로는 안내인처럼 친절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거의 시간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우리를 문밖으로 난폭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순간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바로 그 순간 이후에 살아가게 될 삶이다. 가끔은 나쁜 소식이 우리를 진실한 삶의 길로 이끌어 주기도 한다. 난폭하게만 보였던 손님에게 나중에 감사하게 되는 경우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대부분 꼭 변해야 할 때가 아니면 변하지 않게 마련이고, 위기가 변화를 강요하기도 한다. 국가적인 위기든 단 한 사람의 개인적인 위기든,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목표를 정해야만 극복할 수 있는 위기가 있는 것이다. (223-224)

 

 

 

   오래전 중남미의 활화산 근처에서 나이 든 농부 한 명이 땅에 난 작은 틈을 보여 주며, 나에게 손을 한번 넣어 보라고 재촉한 적이 있었다. 그 틈은 마치 입 모양처럼 작게 갈라져 있었고, 그곳에서는 수증기 같은 따뜻한 기운이 서늘한 밤공기 사이로 올라왔다. "땅이 숨을 쉬는 거야."라고 농부가 말했다. 암석은 대부분 수백만 년에 걸쳐 형성되지만, 이곳에서는 땅에서 계속 용해된 용암이 분출되고, 밤새 벌겋게 익어 있던 용암은 곧 공기 방울을 품은 검은색 덩어리가 된다. 불과 몇 분 전에 만들어진 암석은 여전히 만들어질 때의 그 열기를 품고 있다. (241)

 

   로니 혼도 이 온화한 섬과 어울리지 않게 종종 위험한 야수로 변하는 날씨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정치나 도덕 따위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날씨가 부리는 무심한 폭력은, 주의하지 않으면 살인적일 만큼 무섭게 변하기도 한다. 그 거대한 힘을 인정하지 않으면 말이다." 날씨는 강을 움직이고, 때로는 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날씨는 산에서 바위를 굴려 도로를 막아 버린다. 빙하와 가까운 육지에서는 바람이 너무 심해서 바닥에 엎드린 채 기어서 그 바람을 뚫고 가야 할 때가 있다. 심지어 실눈도 뜰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바람이 회초리처럼 매섭게 몰아치기 때문이다. 정말 회초리나 채찍으로 맞은 것처럼 화끈거린다. 모래바람 때문이 1미터 앞도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길을 잃고 그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빙하가 아주 조금이라도 녹으면, 무서운 기세로 땅이 갈라지고 새로운 강이 생겨난다. 바다에서 물기둥이 치솟고, 호수에 고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아이슬란드에서는 사람들의 사망 원인 중 1위가 기상재해다. (248)

 

 

 

   지진은 오랜 시간 쌓여 온 긴장이 낳은 결과다.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지던 그 긴장이 쌓이는 과정은 볼 수 없다. 긴장은 오직 그것이 터져 나올 때만 볼 수 있다. 아픈 사람과 노인,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 그런 광경이 우리 안에 쌓이고, 어느 시점에선가 우리의 삶이 바뀐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갑자기 바뀌고 그 모습이 영원히 유지된다. 편리하고 극적이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우리는 무언가와 거리를 두고, 되돌아가고, 결심하고, 다시 시도하고,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변화는 대부분 천천히 이루어진다. (259-260)

 

 

 

   저 먼 북쪽의 땅은 이 세상 같지 않은 세상이다. 온대 기후에 사는 사람에게 보편적이라고 알려진 것이 그곳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거기에서는 사람이 물 위를 걸어 다닌다. 물은 액체가 아니라 고체다. 겨울에는 그 위에 눈으로 궁전이나 집을 지을 수도 있다. 얼음은 파란색이다. 눈은 단열 효과가 있다. 물이 얼어서 떠다니는 산이 되고, 그 산은 자신과 부딪히는 것은 무엇이든 파괴해 버린다. 그 밖에도 많은 사물들이 추운 날씨 때문에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아무것도 부패하지 않는다. 덕분에 살아 있는 이에게는 해당되지 않지만 죽은 이에게는 시간이 멈춰 버린다. 냉기는 안정된 것이고, 온기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269)

 

 

 

   어둠 속에서는 여러 가지가 하나로 섞인다. 그렇게 열정은 사랑이 되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의 결과로 모든 자연과 형체가 생겨난다. 섞이는 것은 위험하다. 적어도 자아를 규정하는 경계의 차원에서는 그렇다. 어둠은 무언가를 낳고, 그렇게 생겨나는 것은 그것이 생명이든 예술이든, 미지의 것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어떤 영역, 다음에 무슨 일이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일어난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을 때만 일어난다. 창조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빛 속에만 머물지 않음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빛이 비치면 생각의 구체적인 생김새나 그림자가 드러나고 다른 이들도 알아보겠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곳은 그 빛 속이 아니다. (272-273)

 

 

 

   그해 여름 아이슬란드에서 어둠을 볼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 뿐이었다. [...] 엘린은 '진로(Path)'라는 제목의 미로를 제작했다. [...] <진로>에는 한 번에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관람객이 미로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직원 둘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구조 요원처럼 그 안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
   관람객의 예상은 계속해서 뒤바뀐다. 미로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어디가 막힌 부분이고 어디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인지 알 수 없게 되어, 관람객은 계속해서 시험하고 또 시험해야만 한다. <진로>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는 것, 말 그대로 한 번에 한 걸음씩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 길이 꺾인 걸까. 한 가지 길밖에 없는 걸까.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출구와 입구가 같은 걸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정 중에 자신의 손과 눈 그리고 발로 찾아야 한다.
   미로 안에는 희미하고 낮은 베이스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계속 울린다. 그 소리는 관람객에게 자신이 어딘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자신이 갇혀 있고, 어딘가에 담긴 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조금씩 어디론가 가는 중이다. 아무런 확신 없이, 알지도 못한 채,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나아간다. 막다른 곳에 이르면 벽과 벽 사이가 좁아지고, 처음 미로에 들어와 뒤에서 문이 닫혔을 때처럼 깜깜한 암흑이 된다. 그러면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 마치 폐소 공포증에 걸린 것 같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둠이 나를 껴안는 것을 느꼈다. 종착지, 일부러 만들어 낸 밤이었다.
   [...]
   미로는 한 여정을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넣는 고대의 발명품이다. 실패에 감긴 실처럼, 길이 감겨 있다. 출발과 혼란, 인내, 도착 그리고 귀환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 안에서는 삶이라는 형이상학적 여정과 당신이 내딛는 실제 발걸음이 하나가 된다. 그 둘이 같아진다. 길을 헤맬 수도 있고,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때로는 등을 돌려야 할 때가 있음을 배우기도 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그러다가 길 자체에 압도되어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어느새 도착한다. 그런 식으로 실제로 멀리 나아가지 않고도 대단한 여정을 마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미로는 미궁과 정반대다. 미궁은 하나의 복잡한 길이 아니라 여러 개의 길이며, 때로는 중심도 없다. 그 안에서 헤맴은 끝이 없고 최종적인 도착지도 없다. 미궁이 대화라면, 미로는 주문이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미로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꺾이고 뒤틀린 곳에서 길을 잃게 마련이지만,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어딘가에 이른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 된다.
   미로 속 여정의 끝은 사람들의 짐작과 달리 한가운데가 아니라, 다시 입구로 나오는 것이다. 출발했던 곳이 또한 진짜 끝이기도 하다. 그것은 순례나 모험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집과 같다. 미로 안에서는 볼품없던 모퉁이나 여백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여정은 어딘가로 들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어 나오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타 섬의 미로에 갇힌 테세우스의 탈출을 돕기 위해 빨간 실이 감긴 실패를 전해 준다. 미궁의 중심으로 가는 동안 실을 풀었다가, 그 실을 따라 다시 탈출하는 것이다.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 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모든 이야기가 이런 형태를 가지지만, 특히 동화는 유난히 미로 같은 구조를 가진다. 무슨 사건이 벌어지고, 주인공은 미로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를 향해 가는 것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바로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가장 멀리 있는 다른 곳들을 지나야 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동화의 주인공은 계속해서 방해받고 저주받고, 쫓겨나며 버려지고,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북풍이 시작되는 곳으로 가고, 유리로 만든 산의 정상에 올라가야 한다. 곧장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거의 없으며, 출발했던 그 자리에서 여정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만약 <진로>가 책이었다면, 그것은 미지의 것, 길을 잃는다는 것에 관한 책이자, 내부 깊은 곳의 어둠에 관한 책, 두 발로 읽어야 하는 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은 말이 없고, 보잘것없는 시각예술의 특권에 힘입어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많은 의미를 생각나게 했다. 또 그 의미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에 있다. 그것은 어둠이었고, 둘둘 감긴 길이었으며, 공간에 울리는 소리였고, 희미하게 비치는 빛이었으며, 혼란스러운 감각이었다. 몸을 부딪쳐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공간이었다.
   오래전에 해부학자들은 사람의 귀 안에 있는 돌돌 말린 기관, 청각과 균형을 담당하는 그 통로를 미로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암시하는 건, 만약 그 귓속의 미로가 소리와 정신을 이어 주는 통로라면, 미로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우리 역시 알 수 없는 커다란 존재에게 들려지기 위해 다가가는 어떤 소리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 길을 걷는다는 건 우리라는 소리를 전하는 일이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들려주는 일은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욕망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들려주는 걸까. 무엇을 들려주는 것일까. 정신을 향해 다가가는 소리가 된다는 것은 이 길, 이 여정, 그렇게 풀려 나가는 실타래를 상상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274-279)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작품 속에 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가파른 경사면에 세워진 건물에 있다. 경사면 위쪽에서 보면 1층인 곳이 아래쪽에서 보면 2층이다. 누군가 이 장소를 끊임없이 고민하여 꼭 어울리는 건물을 설계했다. 다른 누군가는 해안을 따라 들어선 숲에서 목재를 구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건물의 기초를 세우고, 벽을 바르고 참나무 마루를 깔고, 관을 설치하고 배선도 마쳤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도 누군가가 디자인하고, 다른 누가 만들었다. 그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졌다.
   [...] 지금의 나는 오래전의 어떤 장인들, 그들의 생각이나 노동의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방 안의 책 속에, 다른 목재에, 내가 쓰는 말에, 조상의 적응과 실패가 담긴 내 몸에, 나를 둘러싼 도시에, 세상을 만들어 온 수많은 몸짓, 행동, 헌신에 깃든 유령에 둘러싸인 셈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 각자는 겹겹이 싸인 러시아 인형의 가장 안쪽에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해 만들어 놓은 한 겹의 인형에 싸여 있다. 내 이야기가 당신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서로의 생각이나 작품 안에 살고 있으며, 이 세계 또한 언제나 우리 모두에 의해, 우리의 신념과 행동과 정보의 물질로 만들어지고 있다. 심지어 황무지를 여행할 때도, 여정은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나 중요성 혹은 즐거움에 따라 결정되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이 만든 신발이나 지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수십 년 전, 모든 경험은 중재를 거친 것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불안이 만연한 적이 있었다. 불안에 빠진 사람들은 최초의 직접적인 경험은 이미 지나갔다고 믿었다. 그들은 마치 애초에 중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세계의 일부이자 늘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사색이 없는 세상, 문화가 없고 언어가 없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누군가 그 세상의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외부야말로 선망의 장소라고 여겼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경험이 얼마나 중재되었는가, 당신이 그것을 얼마나 알아보는가였다.
   당신은 연습을 통해 대화를 잠시 멈출 수 있다. 머릿속으로든 실제 행동에서든 그런 정지는 가능하지만, 대화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 대화가 당신이며, 만약 운이 좋다면 당신이 대화가 되어, 우리 주변에 혹은 당신 내부에 존재하고는 있지만 형체가 없는 세계를 만들어 가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당신은 스스로 힘들게 찾아내고 선택하여 손에 넣은 재료를 가지고 당신의 정체성과 신념, 인간관계, 애정 관계, 가정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모든 일에서 다른 이보다 선택의 폭이 훨씬 넓기도 하다. 당신은 빵을 소화하듯 어떤 생각이나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 역시 빵처럼 당신의 일부가 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자기 몫의 기여를 하고, 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서 당신이 맡은 대사 같은 것이다. 수감자, 실업자, 선거권이 없는 사람 그리고 주변인의 비극은, 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사들이 만들어 내는 교향악은 세상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280-282)

 

 

 

   내 앞에 놓은 두 개의 유리병은 받아 적은 이야기 같다. 두 유리병에는 그렇게 보관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 담겨 있다. 어떤 이야기는 사라지게 두는 편이 나았겠지만, 무언가를 적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이야기를 그 모습 그대로, 설탕물에 담근 살구처럼 고정시키는 일이다. 그러고 나면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라 독자에게 속하게 된다. 그리고 생략된 것은 영원히 잊힌다.
   [...]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살구가 일종의 권유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집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그 이야기를 하라는 권유 말이다. 마치 어머니의 선물처럼, 혹은 어머니의 나무가 남긴 선물처럼, 그 살구 더미는 그 시기의 혼란을 하나의 이야기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촉매제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바꾸어 가는 일을 꼼꼼히 살피고, 그 사이사이에 침묵을 배치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적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갈라진 조각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글을 쓰다가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를 발견할 때 느끼는 희열도 그렇다. 여기서 나는 내

 

 

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도달한다. 어찌 되었든, 원단의 뒷면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그 패턴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 세계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우리는 그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 말이다."
   갑작스레 등장한 세계의 패턴이라는 표현은 어떤 일관성이나 모든 것을 잇는 연관성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오래된 표현을 빌리자면, 이야기는 직조된다. 이야기는 대상을 묶어 내는 실이었고 그 실로 세상이라는 천이 직조되었다. 강력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그렇게 이어져 패턴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이야기가 되어 그것을 말하고 또 누군가에게 말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349-351)

 

 

 

   물리치료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성 통증 같은 경우에도 환자가 그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352-353)

 

 

 

   가끔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삶 하나는 이야기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완성된 이야기를 전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삶은 온갖 사연으로 가득한 은하수 같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몇 개의 성운을 고를 수 있을 뿐이다.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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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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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2

2019. 5. 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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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1

2019. 5. 4.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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