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2015. 10月~11月 讀

 

 

 

 

어느 푸른 저녁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름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바람은 그대 쪽으로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침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박명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밤 눈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병病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主語를 잃고 헤메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비가 2 ― 붉은 달


1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그대여, X자로 단단히 구두끈을 조이는 양복

   소매끈에서 무수한 달의 지느러미가 떨어진다.

   떠날 사람은 떠난 사람. 그대는 천국으로 떠난다고

   장기 두는 식으로 용감히 떠난다고

   짧게 말하였다. 하늘나라의 달.


2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사상은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말리우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나의 추상이나 힘겨운 감상의 망토 속에서

   폭풍주의보는 삐라처럼 날리고 어디선가 툭툭 매듭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가 떠나기 전에 이미 나는 혼자였다. 그런데


   너는 왜 천국이라고 말하였는지. 네가 떠나는 내부의 유배지는

   언제나 푸르고 깊었다. 불더미 속에서 무겁게 터지는 공명의 방

   그리하여 도시, 불빛의 사이렌에 썰물처럼 골목을 우회하면

   고무줄처럼 먼저 튕겨나와 도망치는 그림자를 보면서도 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떨리는 것은 잠과 타종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 유약한 의식이다.

   책갈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우리들 창백한 유년, 식물채집의 꿈이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무더웠다.


3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던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 꾸며 살아 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얇은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가끔은 시간을 앞질러 골목을 비어져나오면 아,

   온통 체온계를 입에 물고 가는 숱한 사람들 어디로 가죠? (꿈을 생포하러)

   예 누가요 (꿈 따위는 없어) 모두 어디로, 천국으로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턱턱, 짧은 숨 쉬며 내부의 아득한 시간의 숨 신뢰하면서

   천국을 믿으면서 혹은 의심하면서 도시, 그 변증의 여름을 벗어나면서



 

 

도시의 눈―겨울 판화 2

 

   도시에 전쟁처럼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가로등 아래 모여서 눈을 털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 털어야 할까?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가득 아직도 무꽃이 흔들리고 있을까? 사방으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하구河口로 뛰어가고 너는 말했다. 물이 보여.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 빛,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그대 소중한 웃음. 안개 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

 

 

 

 

 

소리 1

 

   아주 작았지만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하여 내가 무심코 커튼을 걷었을 때, 맞은편 3층 건물의 어느 창문이 열리고 하얀 손목이 하나 튀어나와 시들은 푸른 꽃 서너 송이를 거리로 집어던지는 것이 보였다. 이파리들은 잠시 공중에 떠 있어나볼까 하는 듯 나풀거리다가 제각기 다른 속도로 아래를 향해 천천히 떨어져내렸다. 나는 테이블로 돌아와 묵은 신문들을 뒤적였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스위치를 내릴까 하고 팔목시계를 보았을 때 바늘은 이미 멈춰 있었다. 나는 헛일삼아 바늘을 하루만큼 뒤로 돌렸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내가 대답을 들을 필요조차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을 때 그는 소란하게 웃었다. '그냥 거리로요' 출입구 쪽 계단에서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 명함꽂이, 만년필, 재떨이 등 모든 형체를 갖춘 것들마다 제각기 엷은 그늘이 바싹 붙어 있는 게 보였고 무심결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꺾었다. 아주 작았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다시 창가로 다가갔을 때 늘상 보아왔던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거리의 아주 작은 빈곳까지 들추며 지나갔다. '빈틈이 없는 사물들이 어디 있을려구요' 맞은 편 옆 건물 2층 창문 밖으로 길게 삐져나온 더러운 분홍빛 커튼이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버려두세요. 뭐든지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는 깜빡 잊었다는 듯이 캐비닛 속에서 장갑을 꺼내면서 덧붙였다. '아니, 그냥 움직이고 있는 것일지라두 말이죠.' 먹다 버린 굳은 빵쪼가리가 엄숙한 표정으로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듯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둠과 거리는 늘상 보던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천장에 대고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압핀처럼 꽂혀 있답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빛깔이 조금 고여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는 발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법이죠' 스위치를 내릴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내 가슴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익숙한 그 소리는 분명히 내게 들렸다.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착時着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나의 플래시 속으로 들어온 개


   그날

   너무 캄캄한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익숙한 장애물을 찾고 있던

   나의 감각이, 딱딱한 소스라침 속에서

   최초로 만난 사상事象, 불현듯

   존재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날, 나의 플래시 속으로 갑자기,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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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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