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커튼」 타이핑





17p

   헨리 필딩은 이 장르를 정의 내리고자 즉 그 존재 이유를 규명하고 또한 그것이 해명하고 탐구하고 포착하고자 한 현실의 경계를 확정 짓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양식은 인간 본성이다.” 이 명제는 겉보기와는 달리 결코 진부하지 않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소설에서 재미있고 교훈적이며 기분 전환이 되는 이야기 그 이상을 보지 못했던 터였다. 따라서 아무도 소설에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만큼 일반적인 목표, 다시 말해서 엄격하면서도 진지한 목표를 부여해 주지 못했으며, 또한 아무도 소설을 인간에 대한 성찰의 경지에 올려놓지 못했다.

   톰 존스에서 필딩은 등장인물 한 사람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며 서술을 도중에 갑자기 멈춘다. 그 인물의 행동은 필딩에게 인간이라는 이 기이하고 놀라운 피조물의 머릿속에 결코 자리 잡을 수 없는 모든 부조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 기이한 피조물에게 존재하는 설명할 수 없는 것앞에서의 놀라움은 사실 필딩에게 소설을 쓰는 첫 번째 동기, 즉 창작의 이유다. ‘창작(영어로 invention)은 필딩에게 핵심어다. 그는 그 기원으로 라틴어 inventio를 제시하는데, 이 단어는 발견(discovery, finding out)을 뜻한다. 소설을 창작하면서 소설가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설 창작은 그러므로 인식의 행위다. 필딩은 이를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신속하고 명민하게 꿰뚫어 보는 것(a quick and sagacious penetration into the true essence of all the objects of our contemplation)"이라고 정의한다.(훌륭한 문장이다. 형용사 신속한(quick)’은 이 행위가 직관이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특별한 인식 행위임을 잘 보여 준다.)

 

19p

   세르반테스는 전설적인 인물을 낮은 곳, 즉 산문의 세계로 보낸 것이다. 이 산문이라는 단어는 운문이 아닌 언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삶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육체적인 성격 또한 의미한다. 소설을 산문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이 단어는 이 예술의 심오한 의미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들의 미덕 때문에 찬양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인물들은 이해받기를 원하는데 이는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혹은 패배했다 해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24p

   필딩이 말한 바를 되새겨 보자. “여기에서 우리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양식은 인간 본성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극적 행위들이 진실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열쇠일까?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가리는 장벽이 아닐까?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가 무의미 아닌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운명은 우리의 행운일까, 불운일까? 우리의 굴욕일까, 혹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위안, 탈출구, 이상향, 피난처일까?

 

25p

   돈키호테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질녀가 먹지 못하거나 가정부가 마시지 못하거나 산초의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짧은 순간 동안 이 문장은 삶의 산문성을 가리는 커튼을 살짝 걷어 올린다.

   규정상 화자는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각각의 작은 사건은 과거가 된 이후부터 구체적인 특색을 잃고 윤곽으로 변화한다. 서술은 기억이다. 즉 그것은 요약, 단순화, 추상화다. 삶 그리고 삶의 산문성의 진짜 얼굴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어떻게 지나간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그 사건들이 잃어버린 현재 시간을 재구성해 줄 것인가? 소설의 기술은 대답을 찾았다. 바로 장면(scenes) 속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장면은 문법적으로는 과거로 이야기된다 해도 존재론적으로는 현재다. 즉 우리는 장면을 보고, 듣는다. 장면이 지금 여기, 우리 앞에 펼쳐지니까.

   19세기는 전 유럽을 여러 번 그리고 완전히 변화시킨 수십 년간의 분쟁 동안 태어났다. 인간 존재에서 근본적인 어떤 것이 그때 바뀌었으며 그 후로도 지속되었다. 역사는 누구나의 경험이 되었다. 인간은 그가 태어난 곳과 같은 세계에서 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시계는 어디에서나 큰 소리로 시간을 알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시간이 당장에 헤아려지고 날짜가 매겨지는 소설들 내부에서도 그러했다. 의자나 치마 같은 작은 대상 각각의 형태는 곧바로 그것의 소멸(변형)로 표시된다. 묘사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묘사 : 일시적인 것에 대한 연민, 소멸적인 것에 대한 구원.) 소설 각 장면에는 한번 그늘에서 나오자 끊임없이 세계의 얼굴이 형상을 만들고 또다시 만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32p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에서 250쪽 정도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열다섯 시간이 지났고, 겨우 네 개의 무대 배경, 즉 기차, 예판친의 저택, 가냐의 집, 나스타샤의 집이 등장할 뿐이다.

그때까지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에 그렇게 밀도 있게 사건들이 집중되는 것은 연극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 극도로 극화된 행위들(가냐는 미슈킨의 뺨을 때리고, 바랴는 가냐의 얼굴에 침을 뱉고, 로고진과 미슈킨은 동시에 한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뒤로 일상적인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스콧,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시학이다. 즉 소설가는 장면들 속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장면 묘사는 공간을 너무 잡아먹고, 긴장을 유지할 필요성은 행위들의 극단적인 밀도를 요구한다. 그로부터 모순이 생겨난다. 소설가는 산문적 삶의 진실성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장면 속에 사건이 너무 많아지고 우연이 넘쳐나서 산문적인 성격과 그 진실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연극화된 장면을 단순히 기술적인 필요 때문이라든지 결함에 의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의 축적은 예외적이고 믿을 수 없지만 그 무엇보다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에 들어오게 될 때 얼마나 우리를 경탄하게 하며 매료시키는가!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발자크 혹은 도스토옙스키(소설적 형식의 위대한 마지막 발자크주의자)의 장면들은 아주 특별한 아름다움, 너무나 희귀한 아름다움, 그러나 확실히 실재하며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에 갖게 되는 (혹은 최소한 스쳐 가는)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35p

   일상. 그것은 단순히 권태, 사소함, 반복성, 범용성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공기의 마법과도 같은 것. 각자는 자기 삶에서 그것을 깨닫게 된다. 옆집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사랑의 고통에 사로잡힌 학생이 한쪽 귀로 흘려듣는 교수의 단조로운 목소리. 이러한 사소한 상황들은 내적 사건에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함을 새기고, 이로 인해 그 사건은 날짜가 매겨지고 잊히지 않게 된다.

 

79p

   나는 프랑스로 이주해 왔던 처음 몇 주를 떠올린다. 파리에서의 이 첫 만남에서는 박해, 포로 수용소, 자유, 조국으로부터의 추방, 용기, 저항, 전체주의, 경찰에 대한 공포와 같은 거창한 말들이 떠돌아다녔다. 이 엄숙한 유령들의 키치를 쫓아 버리기 위해 나는, 미행당하고 있으며 아파트에도 경찰의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속임수를 배울 수밖에 없었노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 중 하나와 나는 서로 아파트와 이름을 바꾸었고, 엄청난 난봉꾼인 내 친구는 마이크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 아파트에서 그의 거창한 사업을 수행했다. 모든 연애담의 가장 어려운 순간이 이별이라면, 내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그 친구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 숙녀들과 부인들은 내 아파트가 명패도 없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시간에 나는 파리에서 내가 본 적도 없는 일곱 여인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내 서명이 담긴 편지를 받아 보고 있었다.

   나는 내게 소중했던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싶었지만 그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는 단두대의 날처럼 차갑게 제겐 전혀 재미있지 않군요.”라고 말했다.

   우리를 갈라놓았던 것은 두 가지 미학적 태도의 충돌이었다. 키치를 유난히 참지 못한 사람이 천박함을 유난히 참지 못하는 사람과 부딪혔던 것이다.

 

87p

   예술은 모두 같지 않다. 그것들 각각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을 통해서다. 이 문 가운데 하나는 전적으로 소설의 몫이다.

   나는 전적으로라고 말했는데, 이는 소설이 내게는 하나의 문학 장르’, 나무의 여러 가지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그 고유한 여신을 부정하거나, 소설에서 고유한 독특함이나 독자적인 예술을 보지 못한다면, 소설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소설에는 자신만의 기원과, 그에 고유한 시기들의 리듬이 있는 자신만의 역사가 있다. 소설은 자신만의 도덕을 갖고 있으며 (헤르만 브로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 실존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단면도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이 곧 비도덕적이다. 그러므로 사물들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과 훌륭한 모범을 보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의도다.) 작가의 자아와 특수한 관계에 있으며(‘사물의 영혼이 내는 잘 들리지 않는 은밀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소설가는 시인이나 음악가와는 반대로 자기 영혼의 외침을 침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창조의 지속적 순간을 지니며 (소설 쓰기는 작가의 삶에서 한 시기를 차지하고 있어 작업이 끝나면 작가는 시작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모국어를 뛰어넘어 세계로 열린다.

 

91p

   카프카가 심리학에서 벗어나 상황의 검토에 집중하게 된 것은 그의 인물들이 심리적으로 설득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들이 배면으로 물러났음을 뜻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뒤집고, 인간의 삶에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함으로써 카프카는 과거의 문학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동시대인들인 프루스트나 조이스와도 구분된다.

   여기에 소박하지만 근본적인 미학적 전환점이 있다. 어떤 인물에 관해서 모든 정보가 주어져야만 그 인물이 생생하고 강렬하며예술적으로 성공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처럼 실재적인 존재라고 믿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소설가가 그를 위해 창조한 상황의 공간을 가득 메우기만 하면 된다.

 

96p

   고유한 특수성과 본질에 최대한 다가가려는 각 예술 분야의 노력에서 종종 모더니즘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서정시의 경우, 순수한 시적 환상의 샘이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 수사적, 교훈적, 장식적인 것들을 모두 버렸다. 회화는 다른 수단(예를 들어 사진과 같은)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 기록적이고 모방적인 기능을 버렸다. 그렇다면 소설은? 소설 역시 역사적 시대 설명이나 사회의 묘사, 이데올로기의 옹호 수단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사회 운동, 전쟁, 혁명과 반혁명, 국가의 굴욕 등 역사 그 자체는 소설가에게 그려야 할 대상,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관심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

 

102p

   소설의 하늘을 환하게 비추었다. 꿈과 현실의 융합을 매력적으로 호소한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의 별이다. 카프카는 너무 일찍 죽어서 그 작가들과 그들의 강령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쓴 소설들이 이 두 미학적 경향을 예고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그 둘을 서로 연결하고 하나의 관점 안에 묶고 있음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발자크나 플로베르, 프루스트가 구체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묘사하고자 할 때 개연성을 위반하면 모두 부적절하고 미학적 일관성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설가가 실존적 문제 제기에 목표를 둘 때, 독자를 위해 개연적 세계를 창조해야 할 의무는 더 이상 규칙이나 필수품이 아니다. 작가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제와 같은 외양을 덧입혀 줄 정보와 묘사와 인과 관계들에 훨씬 더 무심해져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물들을 명백한 비개연성의 세상에 배치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조차 있다.

   카프카가 경계를 뛰어넘은 후로 비개연성의 국경은 경찰도 세관도 없이 영원히 열려 있다. 이것은 소설의 역사에서 위대한 순간이었다.

   현실을 주의 깊게, 집요하게 들여다볼수록 실제 현실과 모든 사람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프카의 오랜 응시 속에서 현실은 점점 비상식적이고, 따라서 비이성적이고, 따라서 비개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 세상에 대한 이 길고 게걸스러운 시선이 바로 카프카와 그 후의 다른 위대한 소설가들을 개연성의 국경 너머로 이끈 것이다.

 

107p

   농담, 기담, 우스운 이야기. 이것들은 비개연성 속을 모험하는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 완벽한 한 쌍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다.

 

123p

   소설가를 누구와 견주어 볼까? 서정 시인과 견주어 보자. 헤겔에 의하면, 서정시의 내용은 시인 그 자신이다. 서정 시인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 언어를 부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느끼는 감정과 영혼의 상태를 독자의 심중에서 일깨우려 한다. 시가 시인의 삶과 동떨어진 객관적인주제를 다룬다 할지라도 위대한 서정 시인은 아주 빨리 그 주제에서 벗어나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초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stellt sich selber dar.)”

   헤겔은 음악과 시가 그림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이 서정성(das Lyrische)이라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정주의에서 음악은 시보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음악은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내면세계의 가장 은밀한 움직임들을 포착해 낼 수 있으니까. 서정시보다도 훨씬 더 서정적인, 음악이라는 한 예술이 존재한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다. 서정성의 개념은 문학 분야(서정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존재하는 어떤 방식을 가리키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정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영혼과 그 영혼을 들려주고 싶은 욕망으로 빛을 발하는 사람의 가장 대표적인 구현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나는 젊은 시절은 서정적 시기라고 생각해 왔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이러한 가설(필연적으로 도식적일 수밖에 없는 가설이지만 도식으로서 내가 보기에는 적절한 가설)을 근거로 보자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소설가의 형성 과정을 표본이 될 만한 이야기의 형태, 신화의 형태로 상상해 보니, 이 과정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로 드러난다. 사울은 바울이 된다.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

 

128p

   반서정주의로의 개종은 소설가의 이력서에라면 반드시 들어 있는 기본 항목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진 소설가는 갑자기 거리를 두고 자신을 본다. 그러고서는 자신이 그렇다고 여기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이런 경험을 해 봐야 소설가는 누구나 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아니라는 점과, 이러한 오해는 그런 다음 이런 사람들에게 희극의 희미한 빛줄기를 던질 줄 알게 되는 것이다.

 

130p

   전설들로 짜인 마법 커튼이 세상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떠나보내면서 그 커튼을 찢었다. 아무런 장식 없는 희극적 산문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기사 앞에 세상이 활짝 열렸다.

   첫 만남을 위해 서둘러 가기 전에 단장을 하는 여자와 같이, 세상은, 우리가 막 태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달려온 구 세상은 단장을 마친 상태, 가면을 쓴 상태, ()해석이 가해진 상태다. 오로지 순응주의자들만이 이 세상에 잘 속는 것은 아니리라. 여하간 반역을 꾀하는 존재들, 즉 모든 것에 그리고 모두에게 너무도 반기를 들고 싶어 하는 존재들은 세상의 어떠한 부분에 순응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저항할 만해 보이는 해석된(선해석이 가해진) 것에 대해서만 분노할 것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 유명한 그림은 들라크루아가 선해석의 커튼에 있는 장면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한 젊은 여자가 심각한 얼굴로 가슴을 드러내 놓고 겁을 주고 있다. 그 여자 옆에는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쥔 코흘리개가 있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그림이 명화의 대열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진부한 그렇고 그런 산문과 낡아 빠진 상징으로 유명세를 얻은 소설은 소설사에서 제외된다. 실제로 세르반테스가 새로운 소설 기법을 개척했던 것은 바로 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이 파괴적 행위는 소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설이라면 그 어느 것에서나 반영되고 이어진다. 이것은 소설이란 예술임을 증명하는 표시이니까.

 

133p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영광이 가장 끔찍하다. 왜냐하면 그 영광이 불멸할 것이라 생각하니까. 그것은 악마가 파 놓은 함정이다. 예술가의 마음속에 불멸을 바라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과대한 야심이 반드시 있어야 예술가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정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영구적인 미학적 가치를, 즉 작가의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야망 없이 글을 쓰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배관공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들을 만들어 내는 평범한 소설가들은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성실함이 그 지나친 야망이라는 고약한 기둥에 묶여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에게 내려진 저주다.

 

139p

   작품은 미학적인 설계도를 따라 아주 긴 작업을 거친 끝에 나오는 것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작품은 소설가가 결산의 시간에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짧고 독서는 길고 문학은 엄청난 증식으로 인해 자멸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솔선하여 부차적인 것은 전부 다 잘라 내야만 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핵심의 윤리를 권장해야만 한다!

 

153p

   국가를 구성하고 조직, , 재판,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행정, 청사, 경찰 등을 갖춘, 이 사는 도덕적 원칙을 개인에게 부과하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은 자신의 인격보다는 외부에서 비롯된 익명의 의지들에 의해 훨씬 더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소설이 탄생한 곳은 바로 이런 세계다. 예전에 서사시가 그랬듯이 소설 또한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행위가 문제시되고, 다음과 같이 복잡한 문제로 나타난다. 행위가 복종의 결과에 불과한데도 그것은 여전히 행위인가? 그리고 행위와 일상의 반복되는 동작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또 행위의 가능성이 아주 적은 현대 관료 세계에서 자유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 (in concreto) 무슨 뜻일까?

 

155p

   로렌스 스턴은 자신의 요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젤라스트(agelaste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라블레가 웃을 줄 모르는 이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리스어로 만들어 낸 신조어다. 라블레는 아젤라스트들에게 진저리를 쳤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비난으로 인해 더는 한 글자도 쓰지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참 똑똑하고 정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과 있을 때면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쁘게 보이지 않고, 시니컬하게 비춰지지 않으며, 그냥 아주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로 그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다 신경 써 가려야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희극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근엄한 척하는 태도가 그들에게 깊이 뿌리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을 아니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을 멀리 피하게 된다.

   미학 개념이라면 어느 것이나(그리고 아젤라스티(agelastie)도 미학 개념 중 하나다.) 끝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은 미적 부조화였다. 즉 진지하지 않은 것과의 뿌리 깊은 부조화. 부적절한 웃음에 의해 일어난 소란에 대한 분노.

   아젤라스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희극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은 희극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해 희극을 도박이나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하여 희극의 끔찍한 본질을 폭로하니까.

 

159p

   명석한 이에게 찬사를 보내는 미치광이와 미치광이의 찬사를 믿는 명석한 이, 둘 중 누가 더 미치광이일까? 이렇게 우리는 더 섬세하고 너무나도 귀중한 다른 차원의 희극을 경험했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스꽝스럽게 되고, 조롱받거나, 심지어 치욕스러운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웃지 않는다. 대신에, 한 현실이 느닷없이 모호한 상태로 드러나고, 사물이 자기 본연의 명백한 의미를 잃으며,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웃는다. , 이게 유머(옥타비오 파스에 의하면, 세르반테스에게서 나온, 현대의 위대한 발명인 유머).

 

162p

   인간의 크나큰 싸움을 선악의 다툼으로 보는 고지식한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이 싸움을 비극의 조명 아래서 이해하는 것, 이것은 정신이 이룬 엄청난 성과였다. 이 성과로 인해 인간이 따르는 진리의 숙명적 상대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적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를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전쟁, 시민 전쟁, 혁명, 반혁명, 민족 전쟁, 저항과 억압들은 비극의 영역에서 쫓겨나 징벌을 내리고 싶어 안달이 난 재판관들의 권위에 휘둘리며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이것은 퇴화일까? 비극 이전의 단계로 인류가 다시 추락한 것일까? 그런데 이 경우에는 무엇이 퇴화되었던 것일까? 범죄자들에 의해 찬탈되어버린 역사 그 자체일까? 아니면 역사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일까? 나는 종종 우리에게 비극이 사라졌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징벌일 것이다.

 

165p

   역사와 역사의 거창한 명분들과 그 영웅들이 사소하게, 심지어는 희극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역사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어렵고 비인간적이며 게다가 초인간적이다. 아니, 어쩌면 탈영병들에게는 이 일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법률적, 도덕적, 어느 모로 보나 탈영병은 유쾌하지 못한 존재, 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 겁쟁이와 배반자에 속하는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가의 시선은 그를 다른 식으로 바라본다. 동시대인들이 벌이는 싸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자로 말이다. 그는 엄청난 살육의 현장에서 비극적 위대함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역사가 벌이는 코미디에 어릿광대로 출현하기를 싫어한다. 사물에 대한 그의 이해는 종종 명석하다. 아주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로 인해 그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그의 동료들과의 연대가 힘들어진다. 또 인류와도 멀어진다.

 

167p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것일지라도 정적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의 결과로서 또 다른 행위가 일어나 사건들의 연쇄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이처럼 셀 수 없는 끔찍한 변화를 초래하며 계속 이어지는 행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어디서 끝이 날까?

 

171p

   미학 개념들은 끊임없이 질문들로 변형된다. 나는 자문한다. 역사란 비극인가? 이를 다른 식으로 말해 보자. 비극의 개념은 개인의 운명 밖에서 의미를 갖는가? 역사가 군중, 군대, 고통과 복수를 자극할 때면 우리는 개인의 의지를 구별해 낼 수 없다. 세상을 덮어 버린 시궁창의 범람이 비극을 완전히 삼켜 버리는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 우리는 공포의 파편들에 감추어진 비극성을, 진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용기를 가졌던 이들이 받은 최초의 충격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으로도 비극의 아주 작은 잔해조차 찾아내지 못하는 공포도 있다. 돈 때문에 일어난 살육. 더 끔찍한 경우는, 환상을 좇다가 벌어진 살육.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난 살육.

   지옥(이 세상의 지옥)은 비극이 아니다. 어떠한 비극적 흔적도 없는 공포,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175p

   별 볼일 없는 시골 신사 알론소 키하다는 편력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라 만차의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는 그가 아닌 사람이다. 그는 이발사의 면도용 놋대야를 투구라고 생각하고 빼앗는다. 이발사는 나중에 우연히 돈키호테가 있는 술집에서 자기 대야를 보고는 그것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당당히 자신이 쓴 투구가 면도 대야가 아니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간단한 것 같은 물건이 이제 문젯거리가 된다. 하기야 머리에 쓴 면도 대야는 투구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함께 있던 짓궂은 무리들은 재미있어 하면서, 진실을 증명할 유일한 객관적인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비밀투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투표에 참여한다. 결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 물건은 투구로 인정받는다. 그야말로 경탄할 만한 존재론적 농담이다!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사랑한다. 사실 그는 그녀를 스쳐가며 봤거나 어쩌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랑에 빠지긴 했지만 그건 자기 스스로도 말하듯이, 단지 편력 기사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부정과 배신, 사랑의 환멸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든 서사 문학에 등장한다. 그런데 세르반테스에게는 연인들이 아니라 사랑 자체, 사랑의 개념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사랑한다면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단순히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모방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의 예들을 보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한 보잘것없는 시골 신사 알론소 키하다는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질문과 함께 소설이라는 예술의 역사를 열었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183p

   정치적 태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상(너무나 연약하고 어렴풋한 그것!)이 아니라 덜 이성적이고 더 견고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185p

   플로베르에게서 어리석음은 예외도, 우연도, 결점도 아니다. 말하자면 교육으로 고칠 수 있는, 지성의 어떤 분자가 부족해서 생기는 양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고칠 수 없다. 천재나 바보나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 본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생트 뵈브가 플로베르에게 했던 비난을 기억해 보자. 마담 보바리에는 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아니, 마담 보바리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난점은 다른 데 있다. 거기에는 어리석음이 너무 충만한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샤를은 생트 뵈브가 보고 좋아했을 멋진 장면에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멋진 장면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상황들의 정수에 도달하고자 했다. 상황들의 정수, 모든 인간사의 정수에. 그는 어디에서나 어리석음이라는 연약한 요정이 춤추고 있음을 본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요정은 선도 악도, 지식도 무지도, 에마도 샤를도, 당신도 나도, 있는 그대로 훌륭하게 받아들인다. 플로베르는 이 요정을 존재의 커다란 수수께끼라는 무도회에 초대했다.

 

189p

   카프카는 (플로베르의 표현을 다시 쓰자면) ‘다소 재치 있는 독특한 작품을 쓰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더 큰 영향력을 부여하기를, 그것을 세세하게 파고들고 발전시켜 가기, ‘그 이야기를 믿는 듯이보일 수 있도록 개연성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그렇게 해서 심각한, 심지어 끔찍하기까지 한 것을 만들어 내기를 원했다. 농담의 검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리석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성은 그럴듯한 거짓말 뒤에 숨어 있는 악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에 직면할 때 이성은 속수무책이다. 폭로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리석음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결백하다. 솔직하다. 벌거벗었다. 그리고 정의할 수 없다.

   털끝만 한 의심도 없이, 털끝만 한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사상을 고수할 힘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어리석음 아닐까? 대리석에 조각된 듯 당당하고 위엄 있는 어리석음 아닐까? 옛날 올림푸스의 여신이 죽을 때까지 영웅들을 따라갔듯이 어리석음이 이 세 인물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 아닐까?

   맞다, 내 생각은 이렇다. 어리석음은 비극적 영웅의 위대함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본성과 떼어 낼 수 없이 어디서나 항상 인간과 함께 존재한다. 침실의 어슴푸레한 빛 가운데서나, 환하게 조명된 역사의 길에서나.

 

203p

   파브리스 델 동고, 아글라야, 나스타샤, 미슈킨, 주위에서 그들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되는지! 그들은 모두 미지로의 여행의 출발점에 있다. 물론 그들은 방황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방황이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방황하는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 거리를 두고 볼 때에야 방황이 방황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거리를 둘 때에만 방황의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미래의 어느 날 지나간 젊음을 향해 어떤 시선을 던지게 될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이미 경험한 어른들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옹호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실존적 증거들은 명백한 것일수록 덜 드러나 보인다. 삶의 나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214p

   확실한 것이 속하는 좁은 가장자리 이면에는 무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다. 대략적인 것, 꾸며 대는 것, 변형된 것, 단순화된 것, 과장된 것, 잘못 이해된 것의 공간, 즉 쥐처럼 서로 교미하여 그 수를 엄청나게 불리어 영원히 소멸치 않는 비진리들의 무한 공간이.

 

219p

   소설가는 황폐화시키는 이 망각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만 할까? 소설가는 독자가 결코 자신의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오로지 건성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 곧장 잊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망각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설을 잊힐 수 없는 것의 파괴되지 않는 성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221p

   망각이 장악하는 광대한 시간 속으로 이야기는 결국 용해되고 마는 광활한 공간의 세계, 톨스토이는 그런 세계에다 안나의 이야기를 위치시킴으로써 소설이라는 예술의 본질적 성향을 따랐다. 실제로 태고 때부터 존재해 오던 모습 그대로인 서술은, 작가가 더 이상 단순한 스토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위에 펼쳐진 세계로 난 아주 커다란 창들을 활짝 열어젖힐 때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이렇게 스토리들중 한 스토리에 에피소드, 묘사, 관찰, 성찰 등이 덧붙여진다. 작가는 아주 복잡하고 정말 이질적인 소재와 대면하여, 건축가처럼 그 소재에 형식을 입히는 데 몰두했다. 이처럼 소설 기법에 있어서, 그 기법이 생긴 이래부터 계속, 구성(건축술)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이와 같이 구성이 차지하는 예외적 비중은 소설이라는 예술의 발생론적 표지 중 하나다. 구성은 소설을 다른 문학 예술, 즉 희곡(희곡 건축술의 자유는 상연 시간과 쉼 없이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아야 할 필요에 의해 제한된다.) 또 시와 구별되게 만들어 준다. 시의 독창성은 상상력에 의해 발현되지 전체의 건축술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까. 반대로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소설의 건축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방금 아름다움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구성은 단순한 기술적 기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은 그 자체로 한 작가 표방하는 스타일의 독창성을 보여 준다.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소설은 동일한 구성 원리에 기초한다.) 그리고 구성은 각각의 독특한 소설을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동일한 원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각각은 모방할 수 없는 건축술로 이뤄져 있다.)

   어느 날 소설의 역사가 끝이 난다면 끝난 이후에도 남아 있을 위대한 소설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어떤 소설들은 줄거리를 말하는 게 불가능하고, 또 그런 이유로 각색도 안 된다. 이 소설들은 있는 그대로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소설들은 품고 있는 스토리덕택에 줄거리를 말할 수 있는 듯이 보이므로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만화로 각색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불멸은 한낱 공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한 소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소설의 구성을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스토리만 남게 된다. 형식은 포기하고 말이다. 아니, 예술 작품에서 형식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각색을 통해서 위대한 소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화려한 무덤을 만들 뿐이다. 그 무덤의 대리석 묘비의 짧은 글귀만이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이름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239p

   문법은 마술을 부려서 다수의 개체를, ‘우리그들로 지칭되기는 하지만 구체적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실체, 단 하나의 주어, 단 하나의 주부主部로 변형할 줄 안다. 그러나 포크너는 소설 형식을 통해서 복수複數라는 마법의 신기를 벗긴다. 단 한 명의 서술자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소설에는 열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그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예순 개의 짧은 장들로 구성된) 이 원정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다.

   복수의 문법적 기만과 더불어 단 한 명의 서술자가 가진 지배력을 없애려는 경향, 포크너의 이 소설(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상당히 부각되는 이 경향은 초기 소설의 기법에서부터 그리고 18세기에 아주 널리 퍼진 서간체 소설의 형식에서 이미 싹을 틔워 가능성으로서 제시됐다. 이 형식은 스토리와 인물들 사이의 세력 관계를 단번에 무너트렸다. 그로 인해 어떤 인물을 등장시키고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를 스토리의 논리가 독단으로 정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이번에는 인물들이 해방되어 말할 자유를 온전히 얻고 그들 스스로가 놀이의 주인이 되었다.

   하나의 스토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자신의 소설을 각각의 개별적 진실들과 그 환원될 수 없는 상대성의 카니발로 만들 줄 알았던 대담함

 

241p

   한 예술의 역사(한 예술의 총체적 과거’)는 그 예술이 창조했던 것뿐만 아니라 창조했을 수도 있었던 것에 의해, 또 완결된 모든 작품과 더불어 있을 수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던 작품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해 본다.

   모든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설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는 소설끼리 다양한 상호 관계를 맺도록 하니까. 그럼으로써 소설의 의미는 명확해지고 그 명성은 유지되고 망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예술 작품들은 그 역사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 훌륭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244p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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