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d는 내가)


Michel Foucault, 「비판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철학협회보』, 1990. 이상길 옮김, 「비판이란 무엇인가」, 『세계의문학』76, 1995년 여름호

   비판은 관련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비판은 스스로는 출현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 혹은 진실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입니다. 비판은 잘 관리하고자(police) 하지만 법칙을 제정할 능력은 없는 영역에 대한 응시입니다. ... 만일 통치화가 사회적 실천의 현실 속에서 진실을 자처하는 권력 메커니즘에 의해 개인을 복속시키는 동시에 주체화하는 문제와 관련된 동향이라면, 저는 비판이 진실에 대해서는 그것이 유발하는 권력 효과를, 권력에 대해서는 그것이 생산하는 진실 담론을 문제삼을 수 있는 권리를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동향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판은 자발적인 불복종이자 성찰을 통한 비순종의 기법일 것입니다. 비판은 한마디로 진실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게임 속에서, 본질적으로 탈예속적일 것입니다. ... 만일 지식 문제를 지배와 맺는 관계 속에서 질문해야 한다면, 이것은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통치당하지 않으려는 결정의 의지에서부터일 터인데, 이는 칸트가 말했듯이 미성숙 상태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태도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태도의 문제이지요.


이현우, 『인문학서재』, 산책자, 2009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 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 행위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는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된다.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Roland Barthes(김희영 옮김),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997(Le plaisir du texte, 1973)

   <저자의 죽음> 中 : 저자가 멀어지면,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 된다. 텍스트에 저자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안전장치를 부과하고, 최종적 기의를 제공하고 글쓰기를 봉쇄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비평과 걸맞는다. 비평은 작품 아래에서 저자를 발견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는다. 그리하여 저자가 발견되면, 텍스트는 <설명되고> 비평은 승리한다. 따라서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이런 비평이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는 일은 놀랍지 않다. ...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 할 것이 아니다. ...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끝없이 의미를 상정하지만, 언제나 의미를 증발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해서 문학은, (글쓰기라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인데) 텍스트에 하나의 '비밀'을, 최종적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른바 반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을, 진정으로 혁명적인 그런 활동을 분출시킨다. ...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 글쓰기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저자가 아니라 바로 독자이다. ... 독자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작품oeuvre에서 텍스트로> 中 :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구해 내 유희, 노동, 생산, 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텍스트는 글쓰기와 글읽기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파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 안에서 독자의 투사를 강화함으로써가 아니라, 동일한 의미실천 안에 글쓰기와 글읽기를 연결시킴으로써 가능하다. 쓰기와 읽기를 가르는 거리는 역사적이다. ... 소비로서의 읽기는 텍스트와 유희하는 것이 아니다. 유희jouer라는 말은 다의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서 유희한다. 그리고 독자는 두 번 유희한다. 독자는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하며 그것을 재생산할 실천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실천이 수동적, 내적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텍스트를 연주한다jouer. ... 연주자는 일종의 공저자로서, 악보를 표현하기보다 악보를 완성하는 자이다. 텍스트도 이런 종류의 악보와 아주 유사하다. 독자에게 실질적 협동을 요구한다. ... 오늘날에는 비평만이 작품을 집행/연주한다. 현대적 텍스트(난해한)나 전위적 영화, 혹은, 그림 앞에서 느끼는 <권태>는 바로 독서를 소비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권태란 텍스트를 생산, 유희, 해체할 수 없다는 것을, 시동을 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Roland Barthes, 「비평이란 무엇인가」(김현 편역, 『현대 비평의 혁명』, 기린원, 1989)

   비평은 적분이다 : 세계가 있고 작가는 말한다. 그것이 문학이다. 비평의 대상은 아주 다르다. 그것은 세계가 아니라 담론, 타자의 담론이다. 비평은 담론에 대한 담론이다. 그것은 일차 언어에 작용하는 이차 언어, 혹은 메타언어이다. 거기서 비평 활동은 두 종류의 관계, 대상작가의 언어와 비평언어의 관계, 세계와 그 대상으로서의 언어와 관계를 그려내야 한다는 결과에 이른다. (그리하여) 비평이 메타언어라면, 비평의 임무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을 발견하는 것을 뜻하게 된다. 자체로서 언어는 진실하거나 거짓이 아니다. 그것은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않다. 여기서 정당하다는 것은 논리 정연한 기호 체계를 이룬다는 뜻이다. ... 비평이 모순되게도 그러나 진정으로 객관적이면서 주관적이고, 역사적이면서 실존적이며, 전체주의적이면서 자유주의적일 수 있는 것은, 비평이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더 정확히 말해서 메타언어)라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한편으로 비평가 저마다가 그것으로 말하기를 선택한 언어는 하늘에서 그에게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의 시대가 그에게 제시한 몇 개의 언어 중의 하나이며, 객관적으로 지식, 사상, 지적 정열의 역사적 어떤 성숙의 끝이며, '필연'이다. 한편으로 이 필연적 언어는 비평가 저마다가 어떤 실존적 조직에 따라, 그에게 그의 것으로 속하게 된 지적 기능의 '행사exercise', 그 속에 자기의 온갖 '깊이', 다시 말해 그의 선택, 쾌락, 저항, 집념을 다 집어넣은 행사로서 선택한 것이다.


Rebecca solnit(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창비, 2015

   위대한 비평은 예술작품을 해방시킴으로써 작품을 더 완전히 보여주고, 계속 살아 있게 하며, 끝없이 이어지면서 끝없이 상상력을 북돋는 대화로 끌어들인다. 해석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구속에 반대한다. 영혼을 죽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 비평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이다. ... 그런 비평은 비평가를 텍스트에 맞세우지 않고, 권위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작품에 담긴 생각들과 함께 여행한다. ... 최악의 비평은 자신이 최종 선고를 내리고 싶어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 침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최고의 비평은 언제까지나 끝날 필요가 없는 대화를 시작하려고 한다.


岡眞理(김병구 옮김), 『기억 서사』, 소명출판, 2004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것인가.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해서 '사건'은 우선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전달되어야만 한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진정으로 나누어 갖는 형태로 '사건'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와 같은 서사는 과연 가능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정교함의 문제인 것일까. 그렇지만 리얼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수많은 물음이 생겨난다. 다양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의 항쟁 그 한복판에 우리가 서 있는 현재, '사건'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는 비평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岡眞理(이재봉, 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2016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타자의 존재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그와 같은 특권적인 망각을 가능케 하는 장 - 미리 망각된 장 - 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를 망각하고 있는지 - 그것은 또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 는 우리가 말을 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비로소 명백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거기서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를 망각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와 같은 망각 속에 살아갈 수 있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말해야만 한다. 또 그와 같은 망각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사회적, 물질적 여러 조건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것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말해야만 한다. ... 나는 어떤 사람일까? 이는 내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 그들과 그녀들의 존재를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나에게 어떤 아픔도 주지 않는. 내가 내 사고의 바깥으로 그 존재를 괄호 쳐버린 사람들. 말하자면 '타자'의 시선 속에서 나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타자'와 만난다는 것의 원리적 곤란함이 여기에 있다. '타자'란 그 존재의 가능성이 내 사고의 외부로 미리 배제되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그/그녀(들)와 만날 수 없다. 원리상 내 사고의 내부에서 만나야 할 대상으로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타자'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잊어버린 것이라면 생각해내면 된다. 그렇지만 망각하고 있다는 것조차 망각한 것이 '타자'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타자'와 만나기를 바라면서도, 내가 그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망각 상태마저 망각하고 있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나의 몸짓은 언제나 나의 의도를 넘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다.


문강형준,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문학동네』, 2016년 봄호

   '비평'이란 무엇인가. ... '비'가 대개 '지적인 작업' 전반과 관련되어 있다면, '평'은 그 작업이 '공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정치적 과정을 지칭한다. ... 다시 말해 비평은,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텍스트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읽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며, 자신이 파악한 깨달음과 진리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행동까지는 포함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 '비평가'는 언제나 위기 상황 앞에 서 있는 사람이다. 눈에 보이는 겉으로의 평온함이 가리고 있는 그 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판단하는 것, 평온함과 모순을 정확히 분리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평온함 아래의 소용돌이를 밖으로 드러내어 사실 우리는 위기 속에 있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것. ... '분리/선택/판단/결정'이라는 뜻이 한자어 '비'와 닿아 있다면, '싸움'이라는 뜻은 '평'과 호응한다. 서양어 'criticism' 역시 지적인 작업(선택/판단/결정)과 정치적 행위(싸움)를 결합하여 비평의 근본적 뜻을 새긴다.

   ... 판단과 평가는 텍스트 자체를 넘어서야만 한다. 비평가는 해당 텍스트가 생산된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도 판단의 촉수를 세워야 한다. ... 텍스트는 언제나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다. ... 따라서 어떤 텍스트를 읽고 판단하는 행위는 텍스트가 존재하는 더 거대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비평가의 판단 행위가 텍스트 바깥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예술'이 하나의 '사회적 행위이자 삶의 능력'이라고 할 때, 비평의 대상은 '예술 자체'가 아니라 '삶 자체'가 된다. 급진적으로 말한다면, 예술은, 곧 삶이다. ... 이러한 비평적 판단은 좁은 미학적 범주를 뛰어넘어 예술작품과 우리의 삶이 공통으로 놓여 있는 특정한 삶, 특정한 시대에 대한 넓은 시야를 요청하는 일이다. 미학적 판단을 포함하되, 이를 넘어선 사회적 판단이야말로 우리 시대, 비평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핵심적 기능이다. 이제 비평가의 공부는 텍스트에서 사회로, 예술에서 삶으로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텍스트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하기 위해서 비평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태도는 '비판적인critical' 태도이다.

   ... '비판적인 태도'는 이 통치 기술(푸코)의 확산에서 기원한다. 이 비판의 태도가 내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저런 원리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정신 규범으로, 그리고 저러한 절차에 의해서, 저런 식으로가 아닌, 저것을 위해서가 아닌, 저들에 의해서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통치하는가how to govern'라는 억압의 질문은 이렇게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how not to be governed like that'라는 저항의 질문을 낳는다.

   ... 요컨대, 비판적인 태도란 통치하려는 권력이 내세우는 진리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태도, 그럼으로써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 그것으로 통치에 저항하는 거점을 마련하는 태도이다.

   ... 푸코가 말하는 '비평'은 그런 '해석 기술'과 '읽기 능력'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비평은 무엇보다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에 그 본령이 있으며, '비판적인 태도'라는 '비평'은 "진리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맥락 속에서 주체가 불복종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보증"하는 일을 하나의 "명령"으로 삼는다. 비판은 불순종과 고집스러움과 불복종의 기술이며, 비평은 이러한 비판의 태도를 가지고 텍스트를 판단하는 일이 될 때 비로소 '기예'를 넘어 "덕"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비평에서는 지식이 있고(진리인가 아닌가) 윤리가 있고(옳은가 옳지 않은가), 무엇보다 정치가 있다(어떻게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비평은 그래서 단순히 '텍스트 읽기'(지식)와 '정치 참여'(정치) 사이의 이항대립이나 선택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코가 우리에게 말하는바, 비평은 "진리의 정치" 속에서만 가능하다. 진리와 정치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언제나 요청한다. 진리는 권력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정치는 진리(라고 믿길 수 있는 것)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비판적인 태도는 이 둘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권력에 질문을 던지고, 또 반대로 권력에 복종하지 않기 위해서 진리를 탐구한다. 그런데 비판적인 태도, 곧 비평은 아무런 사심 없이,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이런 식의 태도를 유지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유일한 목적을 가진다. "주체가 불복종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보증하는 일." 비판적인 태도란 그래서 '부정성'을 그 근간으로 한다. 이건 '흠잡기'나 '과실찾기'도 아니고 '장점을 부각시키기'도 아니다. 비판적인 태도란 권력에 대한 근원적 회의 속에서 진리를 통해 불복종을 보증하려는 '정치적' 목적 속에서 탄생했다. 비판적인 태도로 텍스트를 읽는 비평은 진리 판단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심미적' 비평에서 멈추지 않고 '정치적' 비평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심미적 비평이 텍스트의 미학적 요소와 구성에 대한 분석을 핵심으로 삼는다면, 정치적 비평은 미학적 요소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미학적 요소를 만들어낸 사회, 역사, 정치, 경제적 맥락에 집중하며, 텍스트의 미학이 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에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더불어민주당이나 정의당에 가입하거나 세월호 천막이 있는 광화문 거리에 나가는 직접적인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평이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 혹은 투쟁이나 싸움으로서의 비평이라는 말은 주체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려는 모든 통치에 불복종하기 위해 진리를 둘러싼 싸움과 투쟁에 참여한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말은 기본적으로 텍스트가 놓인 '진리의 정치'의 맥락을 파악하면서 그것의 정치적 효과를 미학적 효과 속에서 간파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여기에는 물론, 푸코가 말하는 '불순종과 고집스러움의 기술'로서의 '비판적인 태도'가 전제되어 있다.




17년 봄학기 수강한 강의 하나, 에서 교수님이 나눠주신 자료를 토대로 2차 발췌.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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