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 「고래」

지진계 2015. 7. 19. 14:34




제 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고래」







1.

좋은 서사에는 개인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2.

    권말, 은희경의 심사평 중 : <그러나 한편으로 이 모든 이야기의 성찬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 역시 떨쳐버릴 수 없었다. 소설이란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 소설 장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미적, 예술적 긴장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체 무엇을 위해야 한다는 걸까? 고래를 읽기 전까지는 나도 은희경에 동의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아니다. 서사로써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의 덩어리, 존재를 흔드는 새로운 세계, 그냥 여운 있는 이야기만으로도 문학, 소설은 충분히 가치있다. 최소한 무언가를 전달하고야 마는 이야기면 된다. 투박한 감정 덩어리, 날것의 세계에 불과하더라도 그거만 된다고 생각한다.


3.

    세계는 앞으로 걸어나가는데, 그 속의 개인들은? 세계의 진보, 이데올로기, 민족, 인류사, 그 모두에 개인이 동참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나 개인은 그저 강제로 휩쓸릴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진보와 역사의 경과는 '휩쓸린' 개인들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자기로써 구성되지만 자기의 의사는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 역사 속에서 살아간다. 이 구성적 모순은 어떻게 가능한가?

    금복을 움직였던 것은 결국 '고래'로 표상되는 니체적 의지라고 말해보고 싶다. '평대'라는 소설 속 공간의 운동은 그 욕망, 의지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의사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 충동, 어떤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슬로건이 아니라 욕망이다. 이는 역사의 구성적 모순에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결국 욕망의 파노라마 이상은 될 수 없다. 그저 살려고 발버둥치는 강인한 생명력의 결과물이다.

    거기에는 어떤 당위도 설명도 필요 없다. 춘희를 보라! 본능과 욕구와 사랑밖에 없지만 그것만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거시적인 차원에서든 역사는 만들어진다.


4.

    마지막에 울 뻔 했다. 정말로 힘 있는 서사다. 강렬한 세계를 만나면 내 세계는 해체된다. 그리고 아예 새로 구성된다. 그 다음엔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떤 선을 넘어 어디론가 흘러가버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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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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