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세 개념에 기초한 인간 행동 세계의 시적 통찰과 창작의 원리」

* 이 글은 다음 글을 수정, 보완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세 개념에 기초한 인간 행동 세계의 시적 통찰과 창작의 원리」, 『인간연구』제7호, 2004   

* ‘시학’보다는 ‘비극론’이 더 적합한 명명일 수 있다. 혹은 poietike를 시작술이라기보다 창작술-창작의 기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시학』, 혹은 『peri poietikes포이에티케(창작술)에 관하여』는, 당대의 작품들을 분석하여 창작의 주요 개념과 원칙을 도출, 창작 기술을 이론으로 정립했다. 이는 작품 구성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들에 관해 성찰함으로써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과 원리를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세 가지 개념은 포이에티케poietike, 미메시스mimesis, 카타르시스 katharsis다. 이 세 개념의 의미를 서로와의 깊은 연관 속에서 밝히려 한다. 이것들은 『시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서 제대로 정의되지 않고 있다. 당시 『시학』의 목표 독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 즉 뤼케이온의 학생들에게 이 개념들이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 세 개념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엮여서 분석의 구조물, 혹은 ‘비판의 그물망’을 형성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카타르시스는 감상자의 감정과 관련하여 이해되곤 하지만, 창작 행위와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조작의 효과이며 절차라는 점에서 미메시스와 상통한다. 미메시스 또한 모방이나 흉내를 뜻하는 것이지만 포이에티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세 개념은 등식이랄만한 관계로 튼튼하게 맺어져 있다.

  포이에티케

poietike는 ‘poie’, ‘t-ike’로 분석된다. ‘poie’는 ‘만든다’는 뜻의 동사에서 왔다. 따라서 포이에티케는 일반적인 의미로 ‘만드는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정신활동dianoia를 ‘praktike실천~’, ‘theoretike이론~’, 그리고 ‘poietike제작~’로 나눈다. tekhne기술, 혹은 dunamis능력과 어울려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이에티케를 ‘시학’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이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 내는 모든 기술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해야 한다. 다만 『시학』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의 의의는, 더 이상 영감에만 의존하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품으로서의 시를 조명했다는 데 있겠다.

시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조금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시인이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짓는 수단과 표현하는 방식은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표현하는 대상이 ‘내용’에 해당한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표현의 수단에 따라, 표현하는 대상에 따라, 그리고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작품을 구분하고 있다. 음악적 운율은 시의 표현 수단이며 방식이다. 형식에 담기는 내용이 중요하다. 바로 이야기muthos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들로부터 분명한 것은 운율보다는 오히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학』) 따라서 시인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며, 시는 이야기, 특히 음악적 운율(리듬과 화음)을 갖춘 언어 속에 담기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없다면 시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시와 비극, 희극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서정시를 다루지 않았다. 서정시는 개별적인 사실을 드러낼 뿐,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즉 시를 짓는poesis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이 할 일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일들을,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가능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만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한다) ... 보편적인 것이란 여하한 성격의 사람이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여하한 말을 하고 여하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인물들에게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하면서도 시가 추구하는 바다.” 시인의 역할은 개별성을 떠나 보편성을 밝혀 주는 것이다. 경험하는 개별적 사실은 우연적이다. 시인은 이야기를 구성하여 인간 세계의 사건이나 행위를 보편으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비극은 우연성에 의한 존재 세계를 인식 가능하게 해” 준다. (골드슈미트) 시가 되려면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하며, 시인 자신은 숨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전면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상으로써 포이에티케란, 『시학』에서는, 보편성에 잇닿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기술로 정의된다. (물론 근현대적 관점에서 개인의 표현은 중요한 문제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이제 시의 본질은 오로지 이야기 만들기다. 여러 가지 사건들pragmata을, 단순한 시간축이나 한 인물을 중심으로 열거하지 않고, 즉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재구성하여 하나의 단일한 행동praxis으로 구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롯의 창작이다.

  미메시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muthos를 “행위의 미메시스”라고 정의한다. 『시학』에서 그는 포이에티케를 서술하겠다면서 난데없이 미메시스를 언급한다. 이는 어떤 등식이 이미 전제되어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포이에티케와 미메시스 둘 다 『시학』에서는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대신 그와 마찬가지로 포이에티케와 미메시스를 연결시켰던 플라톤의 입장을 요약하자. 플라톤 또한 포이에티케의 핵심을 미메시스로 파악했다. 그러나 모방이 과연 창조인가? 플라톤은 그렇다, 라고 말하며 창작 활동 자체를 폄하한다. 포이에티케는 본질적으로 미메시스에 불과하며, 창조자는 허상을 진짜인 양 속이는 모방자다. 플라톤은 특히 참된 인식을 가로막으며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참된 행복을 앗아간다는 이유로 시인을 박해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포이에티케의 본질이 미메시스임을 계승하면서도, 그리고 대상과 표상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거리와 괴리 또한 인정하면서도, 시인들의 미메시스가 가지는 긍정적인 가치를 높이 산다. 미메시스로 생겨나는 대상과의 거리는 적극적으로 인식론적인 역할을 한다. 감각적 경험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차이 때문이다. 플라톤은 감각 경험을 진리에의 방해 요소로 생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대상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지식의 출발점으로 본다. 경험을 존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메시스는 단순한 조작이 아니라 감각적 대상과 그것에 내재한 형상, 진상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재현하는 창조 행위다. 이로써 시인들은 지위를 회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의 인식론적 가치를 재정립한다. 미메시스는 인간이 최초로 경험하는 학습이다. 미메시스에서 얻는 기쁨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본성이다. 이 기쁨은 단순히 미학적인 쾌락이나 감성이 아니라 지성적인 것이다. 미메시스를 통해 인간은 대상과 표상 사이의 차이, 혹은 표상의 결핍 같은 것을 감지하고 그로써 대상의 본질에 다가간다. 즉, 미메시스는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 때 시적 추론이라는 것은, 창작자에게는 대상의 본질을 작품이라는 표상으로 담아내려는 시도에서, 감상자에게는 표상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미메시스는 대상의 본질을 재현하고 파악한 결과다. 이런 까닭에 시적 추론 혹은 활동은 미메시스로서 확고한 인식론적 지위를 얻는다.

만약 미메시스의 대상이 감정이나 관념일 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 시인은 이야기 구성을 통해 우연적, 개별적인 행위와 사건들의 본질을 개연성이나 필연성으로 꿰뚫어 보고, 그것을 통일된 무엇으로 재구성하여 가능성의 세계 속에 표상한다. 그 결과는 우연성과 개별성을 극복하여 현실에 내재해 있는 개연성, 필연성, 그리고 보편성을 드러내 준다. 감상자는 그것을 보고 추론을 통하여 인간 행동의 본질과 보편 원리를 배운다. 이런 통찰은 일차적으로 지성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감성적이며 미학적이다.

이와 같은 예술적 재구성의 작업은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요소들을 제거함과 동시에 일상적 사건들의 고통스러움과 추함을 제거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메시스는 카타르시스가 된다.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여러 장르들 중 우선적으로 비극을 정의한다. “비극이란 진지하며 완결된, 일정한 크기를 가진 행위의 미메시스인데, 각 부분들에 각각의 종류대로 따로 뿌려진 양념된 언어를 수단으로, 낭송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며,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와 같은 격정들의 카타르시스를 수행하는 미메시스다.”(『시학』) 포이에티케, 혹은 포이에티케가 적용되는 포이에시스의 장르로서의 비극은 미메시스로 정의된다. 포이에티케를 미메시스로 정의하는 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에 이어, 비극을 ‘카타르시스를 수행하는’ 미메시스로 정의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다만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에 대한 언급은 위에서 인용한 구절 한 군데에서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와 같은 격정들의 카타르시스를 수행하는 미메시스다.”라는 문장에서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해를 온전하게 건져내어야 한다.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부르는 사건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비극 시인은 그 고유한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사건과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내부에 일어난 연민과 공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전통적으로는 비극의 감상자 내부에 새로이 생겨난 부정적 감정이 그 이전에 존재하던 부정적 감정을 씻어낸다고 해석한다. 이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에 기초한 감정의 순화 및 치유 방법의 유비이다. 혹은 프로이트로부터 라캉에 이르는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정신적 충격으로 생긴 정신 질환을 동일한 유형의 충격을 통해 해소시키는 치료법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언급들에 의하면 감상자가 공포와 연민을 느끼기 위해 비극을 관람한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카타르시스를 감상자 내부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작품 내부의 사건 자체가 전개 과정 속에서 정화된다거나, 시인의 미메시스 활동 자체가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설득력을 가진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현실에서 연민과 공포는 고통이지만, 비극을 통해 그 감정은 ‘카타르시스된다.’ 카타르시스된 감정은 감상자에게 고통이 아닌 쾌락을 준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부정적 감정인 연민과 공포가 비극 작품을 통해 감상자의 눈앞에 재현될 때는 그 부정성이 정화되어 감상자에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사건과 행동 속에 보편, 혹은 본질로서 내재되어 있는 비극성이 드러날 때는 개별자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실제 사건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표상으로 재현된 사건을 통하여 삶의 비극성을 통찰할 수 있으며, 앞서 미메시스에 관한 절에서 언급했듯이 추론과 배움을 통한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근거로서 들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보면 고통스러운 사물이라도 그것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진 표상을 바라볼 때는 즐거움을 느낀다.”(『시학』) 대상이 미메시스라는 예술적 조작을 통해 재현될 때, 대상은 쾌적한 형태로 바뀐다. 이때 느끼는 즐거움은 단순한 심미적 쾌락이 아니라, 추론과 배움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성/지성적 즐거움이다. “모든 사람들은 본성상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형이상학』)

미메시스를 통해 감상자가 느끼는 즐거움은, 재현한 표상을 매개로 한 추론을 통해 표상과 대상 사이, 혹은 현실 세계와 구성된 세계 사이에 작가가 파 놓은 쾌적한 거리를 넘어다니면서 양자 사이의 일치를 파악하는 즐거움이다. 이 거리는 작가가 현실적 대상의 본질을 가리는 추하고 우연적이며 부차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 생긴다. 이 때 예술적 표상은 모든 방해물과 껍질을 벗고 현실적 대상의 본질과 아름다운 부분을 드러낸다. 이런 예술적 생산은 허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깨끗하게 드러내는 카타르시스이며, 대상을 표상 속에 재구서아는 포이에티케이며, 대상의 본질을 재현하는 미메시스이다.

카타르시스가 없는 미메시스, 즉 역겨운 재현만을 보여주는 미메시스는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미메시스나 포이에티케는 아니다. 참된 미메시스는 대상을 카타르시스하며, 숭고하고 쾌적하게 재구성한다. 일치와 불일치의 함수 관계 속에서 대상은 카타르시스되어 쾌적한 감상거리로 감상자에게 주어진다. 여기에서 부정적 감정은 연출되는 과정과 감상되는 순간에 기쁨으로 역전한다. 카타르시스에 의한 이 역전이 바로 미메시스의 본질이며 효과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포이에티케다.

  맺는 말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언어를 통한 예술적 창작의 핵심에 인간 행동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두고 있다. 포이에티케는 허위의 조작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한 인식이다. 진리의 핵심과 본질을 보여 주는 창작 행위는 개별적 현실을 요령 있고 아름답게 재현하는 행위, 즉 미메시스다. 이는 또한 본질을 성찰하는 시인, 그리고 시인을 통해 세계를 재인식하는 감상자에게 있어 지성적 정화작용, 즉 카타르시스다. 시의 창작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각각 다른 면을 차지하면서도 하나의 축으로 결합하는 세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Posted by 습작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