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1.

    한국 아침 드라마 보는 기분이었다. 사랑은 정말 강력한 주제다.


    2.

    나는 어떻게든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사람임을 확인했다. '슬픔이 종이 밖으로 흘러넘치는' 이야기를 읽으면 너무 먹먹해진다.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다. 캐릭터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을 내 몫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러브 레터>나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영화를 보고 끙끙 앓아 누웠던 건 그래서다. (이 작품들이 새드엔딩이라는 이야기까지는 아니고.)


    3.

    '다아시 씨'와 '엘리자베스'의, '리지'와 '일라이자'의, 매력! 캐릭터들이 너무 선명해서 외모와 몸짓, 습관과 말투와 목소리까지도 상상할 수 있었다. 작가는 창조주가 될 수 있다.


    4.

    제인 오스틴의 위트에 반해버렸다. 증오 없는 냉소. 그 시니컬한 포즈는 오히려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세련되고 날카롭고 분별 있는 입담꾼. '오만'과 '편견'을 난도질하면서도 그녀는 분명,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문득 제인 오스틴 같은 유머 감각을 가진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5.

    '고전'의 무게감. 아침드라마와 고전, 이런 이질적인 두 수사가 동시에 가능한 이유는 뭘까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그 힘은 제인 오스틴의 시선에 있다. 위트에 실려 있는 날카로운 통찰과 시선.

    '시차'에 대해 생각했다. 시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창조성을 가진다면, 그건 바로 그 '시차의 각도'를 인식하는 지점에서다. 시차를 가진다는 건 그냥 다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다르게 보는 것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이 관건이다. 새로운 가능성은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너와 다르게 생각해'가 아니라(여기에서 그치는 건 위험할 뿐이다!) '나는 너와 이렇게 다르게 생각하는데, 이 시차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시차는 창조적이다.

    다른 것을 보는 게 아니라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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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1.

    뒤에 작가의 말을 보면 '한일관계를 연애의 관점에서 다시 풀어보는 소설'이라는 기획이란다. 읽고 풉, 하고 웃었다. 생각도 못했었는데 말이 되긴 돼서. 출판사 수준 기획의 산물이었나보다.


    2.

    공지영은 확실히 글을 잘 쓰는 작가다. 하지만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묘사들, 표현들이었지만 대다수는 안 읽고 넘겼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다. 이 단절은 내 생각에 문학에서 중요한 문제다. (미니멀리즘에 대해 지금 내가 가진 긍정적 견해)

    공지영이 쓴 묘사들은 아름다운 문장에 지나지 않았다.


    3.

    상기! 수많은 상기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현재의 일들은 홍이 준고를 회상하는 촉매 역할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예외 없이 그런 구성이다. 문득 길고 긴 꼬리들을 생각했다. 우리는 도마뱀이 될 수는 없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추억만 씹다가 끝난듯한 작품이다. 주인공 혼자 추억하고 혼자 슬퍼하다가 혼자 결론내려 버리는. 다 읽고 한참 동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게 뭐지!


    4.

    하지만 결론으로 악평까지는 쓰지 않아야겠다. 평소에 글을 쓰는 일에 대해 내가 하곤 했던 말인데, '삶과 세상을 사랑하면' 글을 잘 쓸 수밖에 없다. 공지영이 좋은 예가 아닐까 한다. 


    0.

    포스팅하기 직전에 공지영을 검색해 봤다. 초기에는 특유의 감성과 참신함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최근작들은 문학적인 무엇을 해냈다기보다 그냥 대중적이라는 평이 전반적이다.

    어쩌면 작가는 장작 같은 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다 타버리고 남은 재를 뒤적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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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 3.26. 이정우, 「탐독」




    1.

    한 언어가 가장 섬세하고 풍부하게 사용되는 장소는 문학이다. 그래서 어떤 외국어를 공부할 때 그 외국어로 씌어진 문학작품들을 읽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럴 때에만 그 언어의 심층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2. 시론

    세계와 인간의 관계맺음에서 감각적인 것과 가지적인 것의 관련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신체적 실존과 이성적 사유 사이의 관련성이기도 하다. … 시는 … 자연히 사물의 시간적 유동성, 질적인 총체성, 조작 이전의 사물성의 추구를 함축한다. … 부분과 전체의 투명한 그림이 그려졌을 때 합리적 사유가 형성된다. 그러나 시적 명징성은 … 사물들을 분절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은유는 하나의 예이다. 은유는 일반적으로 형성된 존재론적 분절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존재들을 창조해낸다. 즉 시는 동일성과 차이의 격자를 무너뜨린다. 이렇게 형성된 시어들은 합리적 사유에서와는 다른 방식의 정확성을 형성한다. … 시는 시적으로 정확해야 하는 것이다. … 시가 드러내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실이다. 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던 진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의 역할이다. 대신 시는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으나 우리의 둔한 지각이나 때묻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낸다.


    3. 카뮈, 「이방인」

    의미가 완전히 발가벗겨진 세계, 그 세계에서 인간은 완벽한 무의미 앞에 서게 된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이방인이다. 「이방인」은 이런 세계 앞에 우리를 세운다. 그러나 그 세계는 무의 세계가 아니라 '주어진 것'과의 원초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그 세계 위에 두려운 의미의 두께가 쌓인다. 「이방인」은 그 두께를 덜어냈을 때 드러나는 무구한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거기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자신의 의미, 세계의 의미, 삶의 의미를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이방인」은 존재론적 의식의 통과의례이다.

    (원관념에의 도달?)


    4.

    맑시즘 경제학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되 주류 경제학의 과학적 성과들도 부지런히 흡수할 때 과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정치경제학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5.

    철학적 사유는 오직 텍스트, 오로지 텍스트와 더불어 논의할 때에만 정식으로 철학적 사유라 할 수 있다. … 철학은 오로지 원전 텍스트, 그것도 원어 텍스트를 가지고서 이야기할 때에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이다. … 오직 어려운 텍스트들을 붙들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사유를 단련시킬 때에만 그 내용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6. 포스트모더니즘, 탈근대에 대한 '흥미로운'  코멘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호한 사조가 (솔직히 지금도 나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다.) 지식 세계를 뒤덮었고 이 와중에 프랑스 철학자들도 휩쓸려 들어가 우스꽝스럽게 패러디되었다. '유목', '해체' 같은 말들이 그 본래의 철학적, 정치적 맥락에서 탈각되어 어이없게도 저질 딴따라 문화들을 서술하는 용어들로 둔갑했다. … 내게 이렇게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은 문화적 모순으로서 인식되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말은 이중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부정적 뉘앙스에서는 후기자본주의 사회 (특히 신자유주의적 상황) … 시대가 '포스트모던' 시대이다. 그러나 이말을 '탈근대'라는 말로 번역할 때에는 긍정적 뉘앙스를 띠며, 오히려 초超근대에 이르러 극에 달한 근대성을 비판하고 삶의 새로운 철학을 찾아내려는 운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 '포스트모던'은 서술적 용어로서 초근대라는 뜻으로 쓰고, '탈근대'라는 말은 근대성이 배태한 모순들을 극복하려는 사유 운동의 뜻으로 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면 1990년대 한국 사회의 현실은 '포스트모던'적이고, 근대성 및 그 극단화인 '포스트모던'에 대한 극복의 노력은 '탈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7.

    텍스트를 치밀하게 독해하지 못했기에, 한 문장 한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 전체가 '흐리멍덩'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흐리멍덩'한 것은 그 텍스트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인간들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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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 1월, 김연수의 수상소감. 스페인에서의 일에 대하여.>


    낯선 도시의 카페에서 … 저는 제 주위의 사람들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자로 글을 썼습니다. … 그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사실은 저를 한없이 외롭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제가 적는 문자들은 지시대상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그제야 저는 모국어가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형용사들이나 부사들, 관형절이나 조건절은 그 외로움 앞에서 한없이 부서졌습니다. 저는 악착같이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 따위에 매달렸습니다. 문장들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들에. 거기에서 더 물러서면 이 연약한 모국어 체계는 단숨에 무너져내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모국어는 무중력 공간에 있는 것처럼 순수해져 언어 그 자체로 돌아가더군요. 결국 외로움의 끝에는 순수한 언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언어는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 외로움의 끝에 우리의 모든 삶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허무가 있는 게 아니라 순수한, 어쩌면 따뜻하다고 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게 이번 여행의 성과였습니다.


    <문학적 자서전 中>


    그때 나는 내가 간절히 읽고자 하는 바로 그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그때까지 나는 그런 종류의 소설을 한 번도 써본 일이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설을 써온 것이다.


    <김연수가 가장 좋아하는 자기 글귀.>


    어둠 속에 머물다가 단 한 번뿐이라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은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과거는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면서 그들을 습격하고 복수하지만, 그리하여 그들은 때로 사기꾼이나 협잡꾼으로 죽어가지만 그들이 죽어가는 세계는 전과는 다른 세계다. 우리가 빠른 걸음으로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 침대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눈 뒤 식어가는 몸으로 누웠을 때, 눈을 감고 먼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몇 개의 문장으로 자신의 일생을 요약한 글을 모두 다 썼을 때,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는 몇 번씩 그 모습을 바꾸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모습의 세계가 탄생했다. 실망한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자! 그들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그렇게 여러 겹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 모든 세계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믿자! 설사 그 일이 온기를 한없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사기꾼이자 협잡꾼으로 우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가 바로 우리에게 남은 열망이므로.


    <문평가 손정수의 김연수論 중에서. 김연수의 서사 방식에 대하여.>


    때로는 소설의 형식 역시 이와 같은 소통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 김연수는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되, 그 결과를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것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모자이크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조각난 퍼즐을 맞춰가듯 얼핏 보기에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서사의 부분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시켜 나가는 방식은 그 자체가 참신한 서사를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작가가 염두에 두고 있는 소통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서사의 조각들이 하나라도 없을 때 전체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 각각은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되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차원들이 관념적인 방식에 의해 하나로 지양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도 그 각자의 방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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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의 황혼」


    1.

    … 문제는 자신의 '왜'에 대하여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자신이 왜 그것을 하고 싶은지, 왜 그것을 원하는지, 왜 그렇게 되고 싶은지, 왜 그 길을 가고자 하는지 ……. 그 같은 물음에 깊이 사고하지 않고 명백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왜'라는 의문에 명백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후의 모든 것은 매우 간단해진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곧 알 수 있다. 일부러 타인을 흉내 내면서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자신의 길이 눈 앞에 명료히 보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 뿐이다.






    「즐거운 지식」 中


    1.

    과거에는 틀림없는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 그 같은 변화를 자신이 어려서, 깊이가 없어서, 세상을 몰라서라는 이유로 그저 묻어두지 마라. 그 무렵의 당신에게는 그렇게 사고하고 느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인간은 늘 껍질을 벗고 새로워진다. 그리고 항상 새로운 생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필요했던 것이 지금은 필요치 않게 되어버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비판하는 것, 타인의 비판에 귀 기울이는 것은 자신의 껍질을 벗는 일과 다름없다. 한층 새로운 자신이 되기 위한 탈바꿈인 것이다.


    2.

    동일한 것을 상대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한두 가지 정도의 것밖에 이끌어내지 못한다. … 그러나 사실 사람은 대상물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물에 의해 촉발된 자신 안의 무언가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끌어내는 것이다. 결국 풍요로운 대상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의 능력을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요,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3.

    일단 자신의 것이 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쓸데없는 것인 양 느껴지기 시작한다. … 이미 손에 넣어 익숙해졌기에 싫증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싫증나 있는 것이다. 손에 넣은 것이 자기 안에서 변하지 않기에 질린다. 즉, 대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흥미를 잃는다. 결국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쉽게 싫증을 느낀다. 오히려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변화하기에 똑같은 사물을 가지고 있어도 조금도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


    4.

    어떤 기발한 일을 벌려 대중의 이목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사람이 독창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주목받길 원하는 사람이다. 독창적인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이미 모든 사람들의 눈 앞에 있으나 아직 알아차리지 못해 이름조차 가지지 못한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나아가 그것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름이 주어지고 비로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함으로써 인간은 깨닫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탄생한다.


    5.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결점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처신한다. 이것은 허영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언젠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혐오감을 갖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결점을 고치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좋은 인간으로, 어쩌면 신과 비슷한 완전성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中


    1.

    함께 침묵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동일한 체험을 하고, 함께 감동하고 울고 웃으며 같은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멋진 일이다.


    2.

    창조적인 일을 할 때는 물론, 일상적인 일을 하는 경우에도 경쾌한 마음으로 임하면 순조롭게 잘 진행된다. …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경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느낀다면 되도록 많은 지식과 만나고 많은 예술과 접하라.


    3.

    지나칠 정도로 친밀한 태도를 보이는 것. 이것저것을 구실 삼아 상대와의 친밀함을 얻어내려 하고, 필요 이상의 연락을 빈번히 해오는 사람은 상대의 신뢰를 얻었는지 전혀 자신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미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면 친밀한 감정에 의지하지 않는다. 제삼자의 눈에는 오히려 무미건조한 교제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4.

    자신이 가진 힘의 4분의 3 정도의 힘으로 작품이나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5.

    고귀한 자신과 불현듯 만나는 날이 있다. … 그 순간을 소중히 여겨라.






    「권력에의 의지」 中


    1.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기에 명랑하게 살아라. 언젠가는 끝날 것이기에 온 힘을 다해 맞서자.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기회는 늘 지금이다. 울부짖는 일 따윈 오페라 가수에게나 맡겨라.

    





    「방랑자와 그 그림자」 中


    1.

    살아 있는 물고기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 스스로 낚아 올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견을 가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깊이 파고들어 언어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물고기 화석을 사는 것보다 나은 일이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는 것이 성가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 상자에 든 화석을 산다. 이 화석은 곧 타인의 낡은 의견이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주고 산 의견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는다. 그런 그들의 의견은 살아 있음의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항상 그 상태로 정체해 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인간이 수없이 많다.


    2.

    지금 가장 알맞게 불어오는 바람이 돛을 활짝 부풀려 이끄는 항로가 목적지를 향한 최단거리 … 현실의 그 '무엇'이 먼 길을 가장 짧은 길로 만들어 준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사전에 알 수 없으며, 현실에 발을 내딛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3.

    '몽블랑은 가장 높은 봉우리로 천연의 아름다움에 싸여 있다'는 관광적인 지식 때문에 사람들의 눈은 몽블랑에만 머무른다. …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눈이 지금 보고 있는 아름다움을 인정하라.






    「아침놀」 中


    1.

    타인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 말 것. 타인을 평가하지도 말 것. 타인에 대한 소문도 입에 담지 말 것. 그 사람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생각도 애당초 하지 말 것. 그 같은 상상이나 사고를 가급적 하지 말 것. 이 같은 것에 좋은 인간성의 상징이 있다.


    2.

    잘못에는 책임을 지려고 하면서 어째서 꿈에는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꿈이지 않는가? 내 꿈은 이것이라며 드높여야 하지 않는가? 그만큼 유약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인가? 애초 자신의 꿈에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면, 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3.

    사람은 사랑하는 것을 잊는다. 그렇게 되면 다음에도 자기 안에도 사랑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자신마저 사랑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만다.


    4.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습득하면 된다.


    5.

    결국 가지고 있는 언어가 빈약하면 표현도 빈약해지고, 실제로 사고와 감정이 충분히 표현된다고 할 수 없다. 동시에 그 언어의 질과 양이 자신의 사고와 마음을 결정하기도 한다.


    6.

    가진 언어의 양과 깊이가 빈약하면 우리 사고의 폭과 깊이도 빈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언어를 아는 것은 많은 사고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고를 가지면 보다 넓게 생각할 수 있고, 훨씬 폭넓은 가능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선악을 넘어서」 中


    1.

    어떤 이상을 단지 가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선은, 어떻게 해서든 이상을 향한 지름길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행동,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전혀 정해지지 않은 채로 머물게 된다. 이상이라는 것을 멀리 있는 별처럼, 자신과 상관없는 듯 멀거니 바라보며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상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지리멸렬한 삶을 살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1.

    이상을 버리지 마라. … 그것이 과거의 일이었다며, 청춘 시절의 일이었다며 그리운 듯 떠올려서는 안 된다. …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결코 이상과 꿈을 버려서는 안 된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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