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Ida

지진계 2016. 6. 5. 12:04



   엔딩크레딧이 다 지나갈 때까지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다ida(2013)는 참 오랜만이었다.


   이다의 수녀원과 (담배와 술과 공산당, 창녀와 재즈가 있는) 속세가 묘하게 교차한다. 대비가 아니라 교차다. 흑백 색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다는 그 어느 곳으로도 가지 않고 교차각 사이 어딘가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전후의 60년대 폴란드는 그런 면에서 더없이 좋은 무대였다고 본다. 여느 전후의 도시들처럼, 너무 많은 것들이 무너져 있는 곳이었을테니까. 지금과 다를 바 없지만 좀 더 가시적인 배경.


   '뿌리가 없는' 이다의 좌표는 그래서 절절하다. '왜 나만 살아남은 거죠?'라고 묻는다는 것은, '굳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불충분하다'는 뜻이다. 이건 부모님을 살해당한 전후의 한 소녀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상징적인 삶이 아니더라도, 이건 인간에게 대대로 물림되는 불안이다. 우리는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던져지고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스케치는 인상깊다. 담배가 있고 술이 있고 창녀가 있으며, 재즈 음악과 색소폰이 있고 사랑도 있다. 흑백 화면이 주는 퇴폐감은 강렬하다. 하지만 낭만적인 색채도 강렬하다. 이다의 이모 완다는 이다를 데리고 다니며 그런 낭만을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완다 스스로가 무너져가고 있듯이, 도시에서 중요한 건 낭만도 퇴폐도 아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요?'


   엔딩씬은 길을 걷는 이다Ida. 걸어가는 이다.


   이다가 어디로 걸어갔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물으며, 그 다음을 위하여.

뿌리가 없다는 것은 반대로 온전한 '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경험해 보지 않으면 선택할 수 없다. 후반부에서 이다가 완다가 '되어 본'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타자의 영역에 발 내딛기.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정체되지 않는 일. 수녀원에서 기도하는 삶도 아니고 도시에서 소모되어 가는 삶도 아니고, 계속해서 길을 걷는 일.


   (완다와 이다의 엇갈린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 둘이서 찾아낸 같은 진실 앞에서, 완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지만 이다는 완다가 되어 보기까지 했으나 자살하지 않았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계속해서 질문했을 뿐이다. 우울과 증오, 적의에 잡아먹히지 않기. 삶을 찾아오는 거대한 고독과 슬픔과 불안 앞에서,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요? 묻는 일.)


   엔딩 씬의 hand-held 기법은 그래서 선명하게 남았다. 카메라 구도에서 절절함이 느껴지는 것은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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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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