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정독 중.

지진계 2016. 7. 10. 13:49




16. 1.14.


   노에마noema. 한 순간 대상을 새롭게 보고 나를 이입시키는 사유작용.


   11:45.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컨테이너 안에서. 기숙사나 학교 서문에 살던 때,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방 안까지 들어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햇살을 기억한다. 그걸 꽤 좋아했었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시계가 째깍거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뭔가에 대한 의지가 생길 때까지 계속 뒹굴거리곤 했다.

   그건 '대상 없는 향수'가 충족되는 느낌이었다고 쓰겠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가고, 거기서 튕겨나가 미아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어떤 확신이나 안도감이라고도 쓰겠다. 시간의 흐름이 그 햇빛과 온도로 육肉화하는 것, 피부와 냄새까지 동원해 그것을 온전히 느끼는 일. '닻'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어릴 적, 주말 같은 날에 늦잠을 자고 있으면 엄마가 내 옆에 와 누웠다. 그러고 한참을 같이 반쯤 자다가, 일어나자, 하고 엄마는 내게 속삭이곤 했다. 서로 먼저 일어나라고, 먼저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겠다고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일어나기로 한다. 하지만 셋을 세고도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고 그저 웃는다.

   영원히 뒹굴거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행복. 영원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은 우리가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동시에 시간 밖으로 튕겨나가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이다. 그러니까 다시, 어떤 '닻'에 관한 이야기.






1.15.


   불침번 근무를 마치고 들어와 침낭 속에서 쓴다. 추운 밤에 혼자 컨테이너 앞을 걸어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다. 춥지라도 않으면 좀 나으련만.

   외로울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외로울 때면 추억들을 땐다. 선명하지는 않다. 뭐랄까. 뼈같다. 조문이라도 하듯, 죽고 없어진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 때 어땠는지는 상상해야 한다. 가끔은 그게 더 외로울 때도 있지만, 어쨌거나 내가 시간 위에 있다는 것, 현재만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 삶이 '0초'가 아니라는 것에 조금 덜 외로워진다.





1.18.


   내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라지는 것들에 아무래도 미련이 남아서다. 태어나는 순간 죽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사진은 태생적으로 영정사진이다. (영정사진이 묘한 아우라를 가지는 게 그래서다. 동어반복적 제스처.)

   이것은 죽고 없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유령입니다. 나는 추모합니다. 저렇게 사라진 것들, 사라지고 있는 것들, 사라질 것들을.





1.21.


   이야기가 고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소용없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타자의 세계를 우리가 '먼저' 알 방법은 없지만, 상대 쪽에서 먼저 열어 보여주는 것,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 시작되고 나면, 어쩌면 그 때부터는 소용없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세상이 글 한 편으로 요약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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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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