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末, 「채식주의자」



1. 채식주의자.


   뭐라고 해야 할까. 재정의된 '퇴행.' 작중의 채식주의는 선택이 아니라 상실이라고 쓰겠다. 그 상실의 대상이 코드화된 영역 밖으로 주체를 데려갔다는 점에서, 특히 영역 안쪽 사람들의 감정(반응)이 적대, 염증, 두려움 등이 아니라 '철저한 몰이해,' 혹은 '안타까움'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작가가 그린 것은 '퇴행'이라고 쓰겠다. 물론 인간(동물)의 계열선상에서다.

   다만 한강은 퇴행을 재정의했다. 무작정 뒷걸음질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빛나는 점을 향해서 주체의 모든 세포가 수렴하는 것이다. (혹은 수축, 이라고도 하겠다. 작가가 그린 식물적 이미지의 맥락에서.) 대리석 안에서 완성된 조각의 형상을 찾는 장인들. 작중에서 주인공은 삶에서 거북한 것들을 다 깎아내버리고 어떤 본질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그본질이, 된다! Devenir (들뢰즈적 '되기') 바로 이 지점에서 퇴행은 통상적 계열선상에서 벗어나 '변신'의 의미에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한강이 그려낸 것은 한 여인이 온 몸으로 살아내는 혁명 자체다.

   라고, 쓰겠다.


2. 몽고반점


   읽는 내내 태고의 원시림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추상적인 형태의 뿌리'가 떠올랐다. 작가 한강은 어쩌면, 상처(고통)에 직면하면 '응축'이나 '정제'랄만한 현상이 일어나고, 그 끝에는 '본질로서의 순수'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식물적'인 의미에서의 순수) 『몽고만점』의 주체가 느낀 에너지는 바로 그 순수, 혹은 '뿌리'라는 이미지에 대한 강렬한 리비도였다.

   그를 과연 미쳤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충만한 생명력을 얻지 않았나. 시작은 가장자리에서부터, 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의 아무리 구차한 디테일이라도 그 뿌리는 식물적 순수에, 우리가 서 있는 국경 너머에 있다고 써 두겠다.


3. 불꽃 나무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동물적 공격성. 증오. 과장한다면, 프로이트의 어휘로 타나토스. 위 구절은 연작 중 첫 꼭지 『채식주의자』에 나오지만 여기 적는다. 영혜가 나선 여정은,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반대편이었다. 하지만 그게 에로스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타나토스의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꽉 압축된 것에 가깝다. 라고 말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동물의 코드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열선상을 벗어나라. 퇴행이나 장애가 아니라, 변신이다! 이것은 작가가 상상할 수 있었던 최강의 윤리적 강령일 것이다, 라고 쓰겠다. 뒤집어지는 좌표계. 영혜가 물구나무섰듯이. 그러면,

   가장 정적인 생물인 식물들이, 불꽃으로 핀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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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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