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요즘들어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만나고 있다. 실제로 근 몇년 간 수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또 도저히 어루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아픔들이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을 냉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SNS만 열면 쏟아져 나오는 타인의 아픔들, 그 아픔들을 ‘위로’하는 수많은 발언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만 하겠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고통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고통까지 상품화해버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진열대의 상품을 보듯이 타인을 만날 수 있다. 터치 몇 번으로 내 눈앞의 액정 안에서 편리하게 보고 듣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말도 가벼워졌다. ‘그래서는 안 돼’, ‘저런, 아프겠다’, ‘우리 바르게, 착하게 삽시다’ 따위의 말들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약속이 돼 버렸다.

말은 화폐와 닮았다. 사람들과 소통(교환)할 수 있는 합의 혹은 약속이다. 그런데 닮는 정도를 넘어서 말이 정말 화폐로 기능할 때가 있다. ‘다른 말’이 용납되지 않을 때다. 그 때 말은 발화자가 정체성을—특히 ‘바람직한 것’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어떤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돈으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시장교환 체계와 같다. 문제는 물건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물신화의 사태이며,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말한다’는 일에 이런 물신의 논리가 그대로 기입되어버리는 것이다. 좋아요 몇 번, 리트윗 몇 번이면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 된다. 대신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말들이 생긴다. 복잡한 것은 나쁜 것이 되고 단순하게, 좋은 게 좋은 것이다.

그래서 도발적인 질문을 하나 해야겠다.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할 수 있다, 라고 쉽게 말하고 쉽게 슬퍼할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 모든 게 가능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다음 ‘가능하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굳건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어서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타인의 고통을 쇼핑몰 진열대에서 빼낼 수 없다. 이를테면 진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나로서 타인을 만나는 것인지, 만들어진 의무감으로 만나는 것인지. 어려운 문제이며, 어렵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일 테다. 문학은 타자를 담을 수밖에 없다. 타자를 편리하게 소비하지 않으면서, 무신경하게 동일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결국 타자를 말해야만 하는 장르다. 그러나 언어를 통하는 한 그 시도는 실패한다. 문장을 쓴다는 것—누군가를 주어 혹은 목적어의 자리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동시에 대상을 어떻게든 규정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런 모순에 대한 고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런 고민 자체다.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일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일은 그러므로, 문학의 목표이며 과정인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두 편의 작품—박솔뫼의 「겨울의 눈빛」,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을 다룰 것이다.1 두 작품 모두 타자에게 다가간다는 일의 의미를 엄밀하게 곱씹고 있다. 비교가능한 부분들도 분명히 있어서, 서로 교차하면서 그 차이에 의해 어떤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지도 눈여겨봐야 하겠다.

 

1. 무력감, 혹은 모멸감

편리함의 반대편에는 무력감이 있다. 타자와 나는 공약 불가능한 남, 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엄밀히 말해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에서 온 무력감은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한다. 0에서 다시 시작할 때에야 가식 없이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렴풋하게나마 열린다.

이를테면, 내가 있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박솔뫼의 「겨울의 눈빛」에서 화자는 고리발전소의 사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리핵단지는 혹은 고리발전소는 뭐랄까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뉴스에서 나오는 말 같은 것이고 지난 정권의 금융정책이나 무역지수, 여야결의안 같은 그런 말 있잖아.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알아야 할 것 같지만 영영 알지 못하는 그런 수많은 말들 있잖아.”(135p) SNS에서 접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실감할 수 있는가. 너무나 거대한 일들이 너무나 빠르게 소식이 되어 날아온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은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것들을 내 시야 안에서 감당해야 할 때, 단지 ‘여기가 거기가 아니라는 사실’로 위안해야 할 때 사람은 쉽게 무력해진다. “지금 우리는 K시에 있다. 그렇지? 고리가 아닌 K시에 있지. 그러므로 우리는 괜찮으며 괜찮겠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질문이란 질문은 모두 고개를 젓게 만든다. 질문 앞에 서지 못할 사람으로 간신히 어딘가에 서 있다. 그러니까 K시에. 고리와 70km쯤 떨어진 K시에. … 왜 나는 모든 질문 앞에서 비틀거리나? 나의 이 모든 이유들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나?”(149p)

그들의 고통과 멀리 떨어져 안전한 ‘여기’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기력한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다. 아픔이 꼭 ‘그들’의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나였을 수도 있는데 하필 그러지 않아서, 나는 살아남은 사람이 된다. 이로써 살아남은 자들의 지반이 흔들린다. ‘여기’에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은 일종의 모멸감이다. “내가 아는 누구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148p) 혹은, “남자의 친구는 빚을 갚으러 고리에 갔고 나의 친구는 회사에 매일같이 지각을 하고…”(149p) 살아남은 자로서 무거운 질문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박솔뫼의 소설에서 화자의 삶에 다른 곳의 사건이 끼어들고 있다면, 한강의 소설에서는 화자가 타인들의 서사에 기입된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화자 k씨는 그녀와 상관없었던 갈등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럼으로써 의도치 않게 갈등의 증인이 되었고, 당사자들이 먼저 죽어버린 후 그들의 고통을 곱씹는 사람이 되었다. “나만 살았어.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내 중얼거릴 뻔했다.”(306p) 우연 위에서, 혹은 시간 위에서 k씨는 ‘나만 살았다’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그녀가 희곡을 마무리하지 못했던 것은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이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녀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319p) 때문이었다.

이런 무력감의 반대편에서 편리함이 자란 것이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데는 왜 하필 저 아픔이 나의 것이 아닌지를 고민할 틈이 없다. 대신 짊어진 질문에 대답했다는 착각이, 타인의 고통에 참여했고 이걸로 됐다는 위안이 있다. 이에 대한 박솔뫼의 냉소는 신랄하다. “감독은, 모자는 마치 ...... 마치 무언가를 잊고 싶다는 것처럼 자다가 고개를 흔들었어요 하고 말했고 나는 그 대사가 좀 웃긴다고 생각했고 이건 뭔가 좀 뻔하잖아 싶어서 웃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는 그 장면을 혼자서 곱씹었다. 개가 사고에 대한 공포로 악몽을 꾸는 것이라 모두들 생각하고 싶어했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개의 꿈을, 개가 꾸는 꿈을 하고 입에 올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바로 웃음이 나왔다.”(139p)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 사건은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게 편집된다. 자극적인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건 간에 슬퍼하기 쉬운 모습으로 각색되고 유통되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런 편집의 결과물을 두고 사람들은 사건을 직접 목격했으며 그로써 고통을 분유하고 참여했다는 착각을 한다. 무력감을 피하기 위하여 사건에 참여한다는 감각을 강박적으로 찾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솔뫼가 지적하듯이, 그건 여지없이 기만이다.2

 

2. 서사—타자. 시공간에 대하여.

그러나 두 작품이 무력감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잠깐 서술했듯이, 박솔뫼는 타인의 고통이 나의 삶에 끼어드는 형태로, 한강은 내가 타인의 고통 속에 기입되는 형태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바로 이 전개 방식 자체에 나름의 답이 있다.

소비적인 사건 참여에서 배제되는 것은 타인의 ‘서사성’이다. 어떤 시점의 한 사람이 만들어지려면, 혹은 사건 하나가 구성되려면, 거기 얽힌 수많은 인물들과 다른 사건들이 필요하다. 인간 그리고 세계는 그 자체로 잘 짜여진 이야기인 것이다. 소비하기 편하게 사건을 편집하는 과정에서는 그 사연들이 배제된다. 소비자들에게 닿는 것은 고통을 위한 고통일 뿐, 사건의 본질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그 서사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동일화하게 된다. 결국 편집 이전의 온전한 상태로 ‘그들’을 만나는 것이 문제다.

타인의 서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공간’에 주목해야 한다. 「겨울의 눈빛」 은 도입부에서 K시의 극장을 이야기한다.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 설명이 자세하다. “그 극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는 극장이 서 있는 거리에서 시작하여 그 반대편 극장까지 머릿속으로 한발씩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133p) 말하려는 ‘단 하나의 극장’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두 개의 극장까지 이야기하는 구체성을 보여준다. 이로써 확보해내는 것은 K시의 구체적인 공간감이다. K시라는 공간을 극장에 정확히 정박시키는 것이다. 이는 해운대라는 공간을 실감하는 열쇠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요트 경기장 인근에 있던 작고 오래된 극장. 나는 K시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아 저 오래된 극장은 저것대로 해운대의 유일한 극장이었겠구나 생각한다.”(137p) 화자가 K시의 극장에서 그녀 나름의 시간을 보냈듯이, 해운대의 사람들도 그 극장, 혹은 그런 성격의 어딘가에서 그들 나름의 시간을 보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는 해운대와 그곳의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실체임을 감각하는 일이다. ‘여기’가 아닌 ‘그곳’이지만, 그곳과 그들의 서사성이 성공적으로 확보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삽입된 다큐멘터리는 ‘모래밭’과 ‘파라솔’ 등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삶의 터전으로서의 해운대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면 “해운대, 이제는 갈 수 없는 곳, 그런데 거기가 어떤 곳이었냐면.”(138p) 이라는 연결이 비로소 자연스러워진다. 이제 해운대의 사건은 SNS로 접하는 뜻모를 아픔이 아니라 그곳을 터전삼아 살던 사람들의 서사 전체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까지가 ‘공간’으로서의 해운대가 화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끼어드는 방식이라면, 다른 편으로 ‘누군가와의 경험’으로서의 시간축이 있다. 소설은 잊었던 K시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악을 듣는 것으로, 그리고 특별한 이름을 만나는 것으로 화자는 K시를 떠올린다. 수평적으로 K시와 해운대를 연결시켜 놓고, 시간이 지난 후 수직적으로 K시의 극장에서 일어났던 ‘그 일’과 ‘그 사람’을 귀환시키는 방식이다.

극장에서 해운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화자는 어떤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해운대의 서사 속에 있었던 사람이고, 그와의 교감을 통해 해운대의 서사는 화자의 서사의 일부가 된다. “남자의 친구는 빚을 갚으러 고리핵발전소 사고 복구사업에 지원했다가 죽었다고 했고 또다른 예술가 친구는 개인작업을 위해 고리로 갔다고 했다. ... 그때는 죽은 사람은 없고 모두 살아 있었고 신기하게도 지저분한 사람 없이 모두 청소를 열심히 했다고 했다.”(147p) 살아있었던 해운대의 사람들이 ‘남자’를 통해 화자의 이야기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찾아온 그날의 시간을 우연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3년 전의 일들이 시간축을 타고 ‘지금 여기’로 넘어온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미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해운대의 서사는 화자 자신의 서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라앉아 있던 것은 떠오를 때가 되어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은 것이다.”(133p) ‘그곳’의 ‘그들’이 온전한 서사로서 내 삶에 기입된 후에는 우연과 필연의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이미 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은 언제든지 내 삶에 호출될 수 있다. 그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아픔을 ‘분유’할 수 있게 된다.

한강의 작품에서 k씨가 임 선배와 경주 언니의 이야기에 엮여들어가는 것은 십칠 년 전 김포 바닷가의 콘도에서부터다. 둘이 해변을 걸으며 뒤따르는 k씨를 돌아보는 시선은 “제발 이곳에 둘만 남겨놓지는 말아달라고, 이 시간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곤란과 괴로움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것 같은 이상하게 간절한 시선이었다.”(296p) k씨는 일찍이 구성되어온 일련의 사건들에 의도치 않게 ‘기입된’ 존재다. 말하자면 ‘하필 내가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하필 나인 것’이다. 우연히 끌어들여진 제3자이지만 어떤 요청으로 인해 제3자일수만은 없게 된 이 사태는 k씨의 위치를 사건의 안도 바깥도 아닌 곳으로 부유시킨다. 이 부유성이 바로 k씨를 둘의 ‘서사’에 온전히 참여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k씨는 작품 내내 지난 일들을 반추하는 것이다. k씨는 임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계속해서 과거로 되돌아간다. 박솔뫼의 작품이 먼저 공간적인 연결에 공을 들였다면, 한강의 작품은 시간축을 주로 넘나들며 타자를 재구성하는 셈이다. k씨가 그들과 보낸 시간은 주로 그들의 아픔을 듣고 목격하는 시간이었다. 기나긴 사연을 나눠 가지는 것만으로 그녀는 이미 둘의 사건에 참여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죽고 3년이 지나 임 선배가 k씨 앞에 나타난 것의 이유는 충분하다. 불가해한 것으로 남았던 셋의 고통을 어떻게든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셋의 이야기를 반추해 보는 방식으로.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k씨의 미완성 희곡은 그런 서사성의 은유일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 장면이다. 그녀의 희곡에서 소녀와 승려는 이야기를 나눈다. 소녀는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만 함께 있어달라고 승려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눈 한 송이는 녹지 않고, 승려는 왜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눈이 녹지 않냐고 소녀에게 묻는다. 소녀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317p)

시간 밖에 있다는 것. 이것은 한강이 선택한 작품의 전개 방식 자체다.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의 제약을 초월한다는 뜻, 즉 시간 밖에서 서로를 만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임 선배가 꿈에서 k씨를 만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서로 악수 한 번 나누지 않았던 둘은 딱 한 번 맞닿았다고, k씨가 임 선배의 딸만큼 어려진 모습으로 만났다고 서술되고 있다.3 이를테면 ‘무시간성’이라 하겠다. 시간축을 넘나들어 서로의 과거를 떠올림으로써, 타인의 고통은 접근가능해지는 것이다.

 

 

3. 나가며 : 부처가 아니라 갱스터

k씨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가 되지 않고 관음보살이 되지 않고, 나무 욕조에 담긴 물이 황금이 되지 않고 그들이 평화를 얻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한강, 320p) 또 박솔뫼의 작품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차라리 한국수력원자력공사를 폭파하고 그곳의 간부들을 납치해서 인질극을 벌이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영화를 보고 싶었다.”(박솔뫼, 143p) “꼭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다면 갱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죄책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저어함이라는 것을 원래부터 모르는 사람들인 것처럼 뭔가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146p) 우리는 어쩌면 스마트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하는 것만으로 더 나은 세상을 오기를 바란 건지도 모른다. 상처와 고통이 없는 세상이라는 불가능한 기적을 너무 손쉽게 바란 건지도 모른다.4 그러나 그렇게 편리한 방법으로 평화는 오지 않는다.

박솔뫼는 ‘차라리’ 가식 없이 깨부수는 영화를 만들라고 말한다. 강아지가 핵발전소 사건을 두려워한다고 믿어버린다든가 하는 편리한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상품화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소설의 화자가 바라는 것은 “비에서 시작해서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고 그저 비를 따라가는 것”(150p) 이야기와 ‘모멸감’을 끌어안고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래 살아남”(152p)는 것이다. “내가 손에 쥔 이 감정을 마음을 잊지 않는”(149p) 것이다. 이런 서술들에서 박솔뫼는 냉소적인 문체 사이로 일말의 빛을 보여주고 있다.

한강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조금 더 적극적이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은 일종의 비평적 성격을 지닌다. 앞서 살펴봤듯이 작품은 시간축을 넘나들며 지난 일들을 반추하는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과거와 과거의 일들을, 그때 그곳에 있었던 타인들을 서사화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비평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대상은 단순 대상 이상으로 의미화하고 온전한 서사로 보존될 수 있다. 이때 비평이라 함은 ‘분리하다’, ‘선택하다’, ‘판단하다’, ‘결정하다’, 심지어 ‘싸우다’라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즉, 텍스트를 왜곡하는 것들을 치우고 어떤 지배나 억압 구조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5 혹은 ‘타자—고통의 물신화’를 전복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손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타인과 타인의 고통은 진열대의 상품이 아니라 지난하게 구축된 서사, 온전히 보존해야 하는 세계 자체다. 그 앞에 서서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회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비평가로서 우리는 무엇이든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배제되었는지를 발견할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다. 발화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누구를 잊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6 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SNS나 하며 부처를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때려부수는 갱스터가 되어야 한다.

 

나가며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타자에 참여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타인의 고통이 범람하는 지금, 이 질문들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SNS 장에서 활성화되는 공론들의 순수한 의도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엄밀’해져야 할 때가 있으며, 바로 지금이라는 이야기다. 진정성의 문제며 보다 굳건한 가능성의 문제다. 0에서 시작해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손쉽게 소비하지 않고 궂은 비평가의 일을 떠안아야 한다. 무력감에서 출발해서 가능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는 수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텍스트를 타자에게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이미 스스로 말하고 있는 서사 자체로서의 타자를 맞이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말하건대 우리는 모두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결국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각주>

1) 박솔뫼. (2013). “겨울의 눈빛”. 창작과비평, 41(2), 132-152.

  한강. (2015).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창작과비평, 43(2), 289-326.

2) 박솔뫼, 147p

3) 한강, 151-152p

4) 김사과. (2017). “우산 속 세계”. 문학3, 통권 제 1호, 창비, 248p

5) 문강형준. (2016).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문학동네, 2016년 봄호

6) 오카 마리. (2016).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182-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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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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