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밤의 마침」

2017. 4. 10. 10:27

다른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상의 소설 「실화」의 첫 문장) 모든 것을 내보인다고 해서 진실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지켜야 할 진실이 없다는 것과도 같다. 얼마나 대단하거나 대단치 않든, 혹은 자랑할 만한 것이든 부끄러운 일이든 간에, 죽을 때까지 혼자 복기해야만 할 일들이 있다. 그런 비밀이 하나 있다면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홀로 “노인이 될 때까지 비밀을 기억할 것”이지만, 삶 내내 ‘비밀의 문장’이 이따금 찾아올 것이다. (편혜영, 「밤의 마침」, 57p)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삶의 한 조각을 떼어 줌으로써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기억 하나를 끌어안음으로써 함부로 사라질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어떨 땐, 함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다. 그건 외롭고 두려운 일이다.

소설의 비밀 엽서는 그런 의미에서 복잡한 역할을 가진다. “엽서는 세상의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일러줬다. 세상의 누군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는 비밀 때문에 괴롭고 외롭다는 것도 가르쳐줬다.”(39p) 비밀을 공유하는 것과 비밀엽서의 기능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비밀엽서는 비밀이 아니라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엽서의 발신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엄밀히 말하여 비밀을 고백하지 않는다. 주어 없이, 비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해진다. 비밀 엽서는 그런 편리한 방식으로 화자의 외로움을 덜어 준다.

그러나 소설의 사건을 촉발하는 한 장 엽서는 그 성격이 다르다. 엽서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의 비밀이 적혀 있다. 그는 다시 문제의 그날을 회상하고, 아내와 ‘그 애’가 무엇을 알고(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결국 엽서는 단지 우연이었음을, 그의 비밀을 아는 것은 그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세계는 이미 이전과 달라져 있다. “한 편으로는 두려웠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결국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그는 엽서에 비밀을 적은 사람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이 세상에 자신과 비밀이 같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뭔가 고백하고 싶어하는 게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껏 비밀을 담은 엽서가 그를 외롭지 않게 해줬다면 앞으로는 비밀의 동조자 때문에 두고두고 외로울 것 같았다.” (56p) 같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은 고백하려 했다. 결국 그의 비밀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다. 이 사실은 그를 외롭게 한다. 무게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밀을 지키고 있었지만 감당하고 있지 않았다.

엽서 탓에 실감하게 된 비밀의 무게는 그의 비밀을 불가해한 것으로, 그에게도 비밀인 것으로 만든다. 이제 그는 비밀을 감당해야 하고 홀로 복기해야 한다. 비밀은 문제가 되었고, 아무에게도 떠넘길 수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오직 그만이 그리고 좁은 골목과 어두운 밤만이 노인이 될 때까지 비밀을 기억할 것이다.”(57p) 그는 이제 함부로 잊어서는, 마음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아무도 기억하고 감당하지 않았던 밤은 그렇게 끝난다.

인용 : 편혜영, 「밤의 마침」, 『밤이 지나간다』, 창비, 2014, 31-57p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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