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Nietzsche, <우상의 황혼, 반 그리스도>, 청하, 1984

 

 

 

<우상의 황혼>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 최고의 현인(賢人)들은 인생에 대해 다 같이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인생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27)

 

   우리는 당대 최고의 현인들이라는 사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죄다 다리가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발육부진이거나 절름발이거나 데카당들이 아니었을까? 지혜란 썩은 시체 냄새를 맡은 까마귀처럼 지상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28)

 

   과연 어떤 특이 체질로부터, 저 소크라테스식의 등식, 즉 이성=미덕=행복이라는 등식이 나오는가를 나는 알고 싶다. 등식 중에서도 가장 괴이한 등식, 그리고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의 모든 본성을 거스르는 그 등식이 말이다. (29)

 

   사람들이 변증법을 사용하는 것은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을 때뿐이다. 사람들은 변증법이 불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변증법이란, 수중에 다른 무기를 이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 최후에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30)

 

   도처에서 같은 종류의 퇴락이 조용히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 아테네는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 도처에서 사람들이 무절제의 몇 보 직전에 있었다. 정신의 괴물 상태 (monstrum in animo)가 보편적인 위험이 되어있었다. 「본능이 폭군 노릇을 하려고 한다. 우리는 더 강한 폭군의 대항자를 만들어 내야 한다.」(31)

 

   소크라테스처럼 이성을 폭군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다른 것도 덩달아 폭군 노릇을 할 위험이 적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합리성이 그 당시에는 구세주로 여겨졌었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거니와 그의 <환자들>도 자기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합리적이 되고 안 되고 할 수는 없었다. — 그것은 예의상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리스의 사고(思考) 자체가 합리성에 경도할 때 보여주는 열광은 하나의 위급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한 가지 선택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멸망하든가 — 터무니없이 이성적이든가…… 플라톤 이후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도덕주의는 병리학적인 조건 속에 있었다. 그들의 변증법 존중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미덕=행복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소크라테스를 모방하여 영원한 햇빛 — 이성의 햇빛을 창출해 내어 어둠의 욕망과 맞서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신중하고, 명철하고, 총명해야 한다는 것. 본능과 무의식에 굴복하는 것은 모두 타락의 길을 걷게 될 터이니까…… (32)

 

   그들은 어떤 일을 탈(脫)역사화 시키면서, — 다시 말해 어떤 일을 미이라로 만들면서,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sub specie aeterni) 자기들이 그것을 영예롭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만지작 거려온 것은 죄다 개념의 미이라들이었다. (35)

 

   「찾았다」하고 그들은 기뻐서 소리 지른다. 그건 감각이다! 다름 아닌 이들 감각들, 그지없이 부도덕하기도 한 이들 감각들이 우리에게 실재 세계의 모습을 속이고 있다. (35)

 

   감각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 <이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증거를 곡해시키게 하는 원인이다. 감각이 생성, 쇠퇴, 변천을 보여 주는 한, 그것은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존재는 공허한 허구(虛構)라고 생각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점에서 영원히 옳으리라. <감각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것이다. <실재의> 세계란 날조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 (36)

 

   다시 말해 형이상학이라든가, 신학, 심리학, 인식론 등. 또는 논리학, 응용 논리학인 수학과 같은 공식의 과학, 기호학 등. 그것들을 통해서는 현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37)

 

   그들은 맨 나중에 오는 것을 — 불행하다!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도 — <최고의 개념들>을, 즉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공허한 개념들을, 증발하는 현실의 최후의 향훈을, 최초의 것인 양 맨 앞자리에 놓는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자기네의 존경하는 방식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높은 것이 낮은 것으로부터 생겨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생겼다고 해도 안 된다……교훈! 일류급에 속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가 원인 causasui이어야 한다. 무엇인가 다른 것에 유래를 두게 되면 반박을 사게 되고 가치를 의심받게 된다. 모든 지고의 가치는 일류급이다. 모든 지고의 개념, — 존재, 절대, 선, 완전 등 — 생성되었을 리가 없는 모든 것, 그것들은 따라서 반드시 스스로가 원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지고한 개념들은 서로 비교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며 양립 불가능한 것들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신(神)」이라는 엄청난 개념을 획득한다…… 맨 나중의 것, 가장 희박한 것, 가장 공허한 것이 최초의 것, 그 자체가 원인인 것, 그리고 가장 실제적인 것 ens realissimum으로 자리 잡는다…… 인류가 병적인 망상가의 미친 공상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었다니! ……하긴 인류는 그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 오고 있지만……

 

   언어의 형이상학, 즉 이성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의 미개한 배물주의(拜物主義)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이성이 도처에서 행위와 행위자를 보며, 바로 이 이성이 일반적인 원인으로서의 의지를 믿고, 바로 이 이성이 <자아>와, 존재로서의 자아, 실체로서의 자아를 믿고, 자아라는 실체에 대한 믿음을 모든 것에 투사시키는 것이다. — 그렇게 해서 비로소 그것이 <물(物)>의 개념을 만들어 낸다. (38)

 

   근본적이고 새로운 하나의 통찰을 내가 여기서 네 개의 명제로 압축시켜 준다면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해를 더 쉽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순을 반박하게 될 것이다.

   제 1명제. <이> 세상을 가상적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었던 것들이 오히려 그 실재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 다른 종류의 실재성은 절대 입증될 수가 없을 테니까.

   제 2명제. 사물의 <실재적 존재>에 부여해 온 여러 특징들이 바로 비존재의 무(無)의 특징들이다. — <실재 세계>는 현실 세계와는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이룩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이 정신적-시각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한 그것이 실은 이상적 세계이다.

   제 3명제. 이 세상 아닌 <다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생을 헐뜯고, 깔보고, 탓하는 본능이 우리 안에 강하지 않는 한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한 본능이 강할 경우, 우리는 <다른>, 그리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환각을 가짐으로써 삶에 대해 복수를 하는 셈이 된다.

   제 4명제. 기독교식이든 칸트식 (결국은 약아빠진 기독교식이지만)이든 세계를 <실재> 세계와 <현상> 세계로 나눈다는 것은 퇴폐의 암시에 불과하다. — 쇠퇴하고 있는 삶의 한 징조인 것이다…… (39)

 

 

 

<실재 세계>가 마침내 어떻게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는가. (41-42)

 

하나의 오류의 역사.

 

1. 실재 세계. 현명한 사람, 신심(信心)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그는 그 세계 안에 살고 있으며, 바로 그 세계 자체이다.

(비교적 지각 있고, 단순하고, 설득력 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관념. 「나, 플라톤은 진리이다」는 명제를 바꿔 쓴 것)

 

2. 실재 세계. 아직 도달할 수는 없으나 현명한 사람, 신심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그리고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약속되어 있는 세계.

(그 관념의 진보. 그것은 더욱 정묘하고, 더욱 솔깃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된다—그것은 여성이 되고, 그것은 기독교적이 된다…)

 

3. 실재 세계. 도달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고, 약속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의 위안으로서 생각될 때조차 하나의 의무이며 하나의 명령인 세계.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옛날의 태양. 그러나 안개와 회의를 통해 빛나는 그것. 숭고하고, 창백하고, 북국적이며, 쾨니히스베르크적이 된 그 관념)

 

4. 실재 세계—도달할 수 없다? 어떻든 도달되지 못한 세계. 그리고 도달되지 못했다면 알 수도 없는 세계. 따라서 위안도, 보상도, 의무도 없다.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의무를 질 수 있겠는가?

(여명의 어스름. 이성의 첫 하품. 실증주의의 닭 울음소리)

 

5. 「실재세계」—더 이상 쓸모가 없고, 더 이상 의무감도 느낄 필요가 없는 하나의 관념—쓸모없고, 불필요하게 남아돌고 있는 하나의 관념, 따라서 논박되어 버린 관념. 자, 그 관념을 없애 버리자!

(밝은 햇빛. 아침 식사. 유쾌함과 양식(良識 bon sens)의 복귀. 플라톤이 무안하여 얼굴 붉히고, 모든 자유로운 정신이 왁자지껄 내달린다.)

 

6. 우리는 실재 세계를 없애 버렸다. 무슨 세계가 남아 있을까? 보이는 세계일까? 아니다. 실재 세계와 함께 우리는 보이는 세계도 없애 버렸다.

(대낮. 그림자가 가장 짧은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정점. 비로소 짜라투스트라의 등장(INCIPIT ZARATHUSTRA))

 

 

 

 

 

<반 그리스도Der Antichrist>

 

머리말

 

     이 책은 극소수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그 독자들은 아직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 「짜라투스트라」를 이해하는 독자들일 것이다. 내가 어찌 오늘날의 청중을 가진 자들과 나 자신을 혼동할 수 있겠는가?—내일 이후의 날만이 나의 날이다.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 태어난다.

     누구든지 나를 이해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또 그 조건 하에서는 나를 필연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조건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우선 내 진지와 내 열정만을 견뎌내기 위해서도 지적인 문제에 있어서 냉혹할 만큼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산 위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야 한다. 정치와 민족적 에고이즘의 그 가련하고 덧없는 요설을 내려다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가 유용한지 혹은 숙명적 불행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가 되어 있어서 물어보지 않아야 한다……오늘날 아무도 감히 제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더 좋아하는 용기. 금지된 것을 할 수 있는 용기. 미궁에 이르도록 예정된 운명. 일곱 가지 고독을 통해 얻는 한 가지 체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귀. 가장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 이제껏 침묵하고 있었던 진리에 대한 새로운 양심. 그리고 장대한 방식의 경제(經濟)에의 의지. 즉 자신의 에너지와 자신의 열의를 지켜 두려는 의지……자신에 대한 존경.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무제약적 자유……

     좋다. 그러한 자들만이 내 독자들, 내 올바른 독자들, 예정된 내 독자들이다. 나머지야 무슨 상관인가?—나머지는 그냥 인간들일 뿐이다—우리는 힘, 영혼의 드높음—그리고 경멸에 있어서 인간들보다 우월해야 한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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