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요약.


   # 바슐라르와 상징론사 (권두, 역자 곽광수. 30p 분량.)


  바슐라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편의상 1960년대 프랑스의 신구비평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면, 바슐라르의 문학사상은 신비평 중에서도 '테마비평'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비평 : 전기적 비평, … / 신비평 : 정신분석적 비평, 맑스주의적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실존주의적 비평, 테마비평 등)

  이런 맥락상에서 바슐라르의 문학 연구를 특징지어보자면, 그의 이론은 구비평이었던 전기적 비평과 대립하며 동시에 같은 신비평인 맑스주의적, 정신분석적 비평과도 대립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비평론은 '결정론적'인 입장인데 반해 바슐라르의 비평론은 작가의 상상력을 독자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비결정론적'인 입장에 속한다. (전기적 비평론은 작가의 전기와 작품을 '유사'관계에 있다고 하는 반면 정신분석적 비평, 맑스주의적 비평은 두 항을 '상동'관계, 즉 '구조적 등가'관계로 인식하고 있어 좀 더 복잡하다, 고 한다.) 「공간의 시학」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가 있다면 바로, 바슐라르의 이론이 '이미지'를 중시하는 상상력 이론이며 상기한 결정론적 경향들과 그 '이미지'라는 공통 대상을 놓고 대립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저서 내내 전기적, 정신분석적 비평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에서 바슐라르는 '시적 교감의 현상'을 통하여 상상력의 독자성을 논증해내려고 한다. (다른 방식의 논증으로 「공기와 꿈」에서 '운동의 상상력에 의한 논증'을 시도했으니 참고하여도 된다) 전기적, 정신분석적 비평에서 시적 이미지는 '인과성'에 의해 설명된다. 당대 실증주의적 기류의 영향이었다. 하지만 바슐라르는 시적 이미지의 교감은 사실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실 자체가 곧 상상력의 독자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바슐라르는 '상상력은 이미지를 기억하는 정신적 기능'이라는 통념과 달리 '상상력은 기존 대상의 이미지, 그 재현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이는 상상력을 경험론의 영역에서 이탈시켜서 전에 없던 독자성을 확보하게 한다. 특히 그는 시적 이미지와 관련해 '존재론'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상상력의 소산인 시적 이미지가 독자적인 존재이며 그래서 '존재론적'인 수준에서까지 연구되어야 한다는 의도이다.

   바슐라르의 이러한 '관념론적' (비경험론적) 상상 연구를 세 부분으로 나누자면, 1. 상상력은 어떻게 대상의 이미지에 독자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 2. 그 작용 양상은 어떠한가, (이미지의 현상학에 해당) 3. 상상력의 궁극성은 어디에 있는가, (원형론에 해당) 의 물음들로 환원된다. 하지만 이 셋은 전체의 부분이다. 즉, 각각의 결론이 무엇이든 '상상력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대상의 이미지를 '그 자체로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간다'는 대답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이 '독자적'이라면 바슐라르의 논증 방식인 '시적 교감'이 가능한 것인가? 바슐라르의 주장은 이렇다 : 상상력은 '개인에 대하여' 독자적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이다. 그래서 시적 교감은 가능하다. 이는 또한 상상력의 '원형'적 지위를 이야기해준다. 상상력은 그 보편적 궁극성으로서, '원형'으로서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상상력은 보편적 가치를 창조하기에까지 이른다. 상상력의 독자성, 즉 '자유'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이끌어낸다는 역설이다.

   따라서 시적 교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원인'이 아니라, 상상 가운데서 그 이미지가 창조되는 '과정', 즉 '이미지의 현상학'이 필요한 것이다. 상상력의 독자성, 그리고 자유에 기반하여 그 과정의 보편성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이미지의 존재론'을 연구하는 방법론에 해당한다. 이미지의 현상은 존재와 동일시된다. 결국 바슐라르의 문학 연구에서 현상학적 태도는 아주 중요한 토대를 이루고 있다.

   말은 어렵지만 결국 이미지의 현상학이란 독자들의 의식 체험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시적 교감은 그 체험의 묘사에 해당한다.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미 현상학자인 것이다.

   바슐라르의 또다른 독창성은 문학이 독자들의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한 데 있다. 문학으로 얻는 감동이나 존재론적 영향을 그는 '울림'이라고 표현한다. '울림'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지가 우리 존재를 생성(니체적 의미에 가까운 것 같다)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인간 사유의 매개로서 언어가 가지는 힘을 드러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슐라르의 이미지 존재론은 '인간존재론'에 필적하는 지위를 획득한다. 바슐라르가 실존주의적 맥락 위에도 놓이게 되는 것이다. 상상하는 존재는, 실존한다. 그에게 있어서 '자유는 자유화'이다. 자유는 존재의 생성, 능동적 쟁취로 얻어진다. 다만 바슐라르는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세계에 감싸안긴' 존재들을 상정하는 데에 차이가 있다. 즉, 자유로운 존재라는 키워드에 있어서는 기존의 실존주의와 일치하지만, 상상력의 독자성-보편성이 개인들을 어떤 보편적 본질로 나아가게 한다는 입장에 있어서는 실존주의 특유의 불안과 우울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는 상상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성하지만, 존재는 그 와중에도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이상을 종합해봤을 때 바슐라르는 이 책에서 <우리들의 삶에 대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정될 수 있을 듯한 상상력, 문학과 예술, 심미적 체험이 기실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여 이끌어 갈수도 있다는 것, 그 본질적인 차원에서 우리들의 삶에 바로 닿아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하는 것이다.


*


   내재적 문학관은 독일 낭만주의에서 시작되었다. 고전주의의 모사imitation설에 대한 반항이었다. 고전주의 문학은 자연의 진리를 그대로 재현하려 했다. 즉, 당시 문학은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에 종속되어 있었다.

   보편성과 상대성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다. 고전주의는 저연적 진리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보편적이었다. 반면 낭만주의는 그 반동이니만큼 작가와 시대, 사회에 따라 상대적인 문학을 추구했다. 이 상대성은 고전주의와는 다른 의미의 mimesis를 출현시켰고,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나 민족문학 같은 갈래를 배태했다.

   이 상대성의 극단적인 형태가 바로 내재적 문학관이다. 내재적 문학은 문학 외적 맥락의 상대성 차원을 넘어서, 모든 개별 문학이 내재적 가치를 지니므로 저마다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독일 낭만주의의 상징 이론이 나온다.

   상징이 '뜻 있는 이미지'라고 한다면, '이미지'는 감각적 지각의 대상, 의미 차원이 사상된 감각적 표상으로만 한정된다. 이것이 바로 바슐라르의 입장이다. 이는 '내재성의 심화' 과정 위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의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맥락에서의 내재성이다. 이 때 이미지의 차원에서 내재성을 더욱 심화해보자면, 기의마저 배제하고 기표 자체가 독자적 지위를 획득하는 수준까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이미지는 기표(소리와 언어) 자체가 된다. '언어의 사물화'라고 말해지는 단계다. 여기까지 다다른 언어(문학)의 지위를 바슐라르는 확신하고 있고, 자기의 상상력 이론에 통합시킨다. 독일 낭만주의, 상징 이론 맥락에서 바슐라르를 요약한다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내재적 문학관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바로 보편적 가치의 사상 문제다. 아무리 문학이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해도 그 상대성 때문에 보편성이 사상되어 버리면 문학의 가치가 전복된다. 바슐라르의 묘는, 대범하게도, 미적 가치의 전달 가능성(보편성)을 자기 상상력 연구 (특히 시적 이미지에 대한) 중심에 가져왔다는 것이다. 정공법이다. '인류의 보편적인 심미적 토대' 위에서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이 지점에 바슐라르가 내재적 문학 이론 중에서도 특별히 돋보이는 이유가 있다.

   다시 이야기한다. 내재적 문학관에서 개별 문학 자체가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보편적 심미 가치를 상실함을 뜻하고, 바슐라르는 앞서 요약했었던 '상상력의 보편성'으로 이 상실을 회복한다. 자연의 진리를 기준으로 하면 (보편성이 진리의 미메시스에서 담지되는 것이라면) 내재적 문학은 보편성을 상실하겠으나, 심미적 차원에서 '상상력'을 매개로 한다면 '다른 기준'에서의 보편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 것들을 기준으로라면 소통은 유예된다.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세상 밖에 있는 것들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런 식이다.

   이상이 바슐라르의 문학 사상에 대한 요약.


   바슐라르 이론의 장점은, 문학 외적 연구 없이도 작품의 비평과 연구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반면 감상주의, 인상주의로 저질화될 여지가 많다는 게 단점으로 꼽힌다.




   #머리말 (역자의 글에 이어, G.B. 34p 분량.)


   1.

   시적 문제에 있어 일체의 합리주의, 인과주의는 쓸모가 없다. 시의 철학은 고립된 이미지 자체에 집중한다. 시적 이미지란 인과와는 상관없는 어떤 정신psychime의 '융기'이다. 거기엔 어떤 인과적 과거도 없다.

   시적 이미지에는 어떤 '원형'이 있지만, 그마저도 인과와는 다른 이야기다. 과거에 의해 이미지가 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과거가 울린다.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론을 가지는 것이며 우리는 그 존재론에 주목해야 한다.

   시적 이미지는 인과와 반대 방향인 '울림'으로 가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상상력의 현상학'이다. 시적 이미지가 의식에 떠오를 때, 그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2.

   어떻게 특정한 이미지가 보편적 정신의 응축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것이 상상력의 현상학의 문제다.

   이 이미지의 '통주관성'은 오직 현상학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미지는 독자적인 것이며, 상상력의 적극적인 활동이 독자와 시적 이미지를 연결한다. 이 때 이미지는 항상 새로우며 사상보다 앞서 있다. 상상력의 현상학은 이상의 의미에서 미시적 현상학이며 영혼의 현상학이다.

   예술의 생산과 감상은 그러므로, 양측의 영혼이 그 이미지를 되사는(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영감)과 정신(재능)의 구분은 필요하다. 정신은 영혼을 재구성하여 작품의 얼개를 짤 수 있지만 개별적 이미지의 차원에서 '현전'하는 것은 영혼, 즉 시적인 몽상, 상상 뿐이다.


   3.

   시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를 심화/확장하기 위해서는 '반향'과 '울림'을 구분해야 한다. 반향은 삶 속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 존재를 건드린다. 시작품의 심리적 작용은 반향을 통해 표면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울림을 통해 영혼이 존재론적인 깊이를 가진다. 이는 현상학적 분석의 두 축이 된다.

   울림이라는 축을 통해 우리는 기존의 인과적 비평감상을 극복한다. 그리고 울림을 통해 표현과 존재가 생성(니체적 의미)한다. 심지어는 표현이 존재를 창조한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론을 요약하고 있다. 우리에게 언어logos는 기저basis다. 시적 이미지는 logos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력의 현상학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생성하며 시적 언어는 '번역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영혼과 영혼 사이의 작용으로서, 인과를 벗어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말하는 존재의 창조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창조성에 의해 상상적인 의식은 아주 단순하게 그러나 아주 순수하게 하나의 기원이 되게 된다. 상상력의 연구에 있어서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이 애써야 할 일은 바로, 여러 다양한 시적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기원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4.

   현상학적 관찰에서 작시, 혹은 작품 전체의 조직, 종합은 '겸손하게' 배제하고 개별적 이미지 차원에서의 '울림'에만 집중해야 한다. (조그만 차원의, 오만함) 이를 통해 우리는 온전한 체험으로서의 감상을 즐길 수 있다. 비평적 성찰과 대비되는 이야기다. 이미지에서 '현상학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언어를 '떠오르게' 하는 시적 이미지 개별에서 존재론적 도약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이 때 말은 '예측불가능'해지며 언어 (시적 이미지) 자체의 내부에서 '자유의 현상'으로서의 시가 출현할 수 있다.


   5.

   그렇게 하여 고립된 개별 시적 이미지에서도 현상학적 울림이 생성된다. <시적 상상력에 대한 최초의 현상학적 탐구에 있어서는 고립된 이미지, 그것을 전개시키는 문장, 시적 이미지가 빛나고 있는 시행 또는, 때로는 연 등이, 말하자면 장소분석 같은 것으로 연구해야 할 언어적 공간을 형성한다.> <독서로 체험된 말들의 단순한 충돌이 돌아다니는 그 섬유같은 언어적 공간>이 있다.


   6.

   '작품 외적의 무엇을 승화'하는 시적 이미지는 정신분석이나 심리주의의 것이다. 상상력의 현상학은 '순수한 승화'에 주목한다. 시적 이미지는 그 존재 자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는 그간의 '의미와 감각과 감정' 등에서는 단절된다. 대신 '행복한 인간'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지배 밑에 놓인다. 언어와 이미지 자체가 주는 행복을 독자들은 체험하는 것이다. 어떤 음울한 정신분석적 동기도 여기서는 배제된다.

   정신분석적 '승화'의 심리적 현실성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삶이 마련하는 게 아니라 시인이 창조하는 이미지들을 현상학적으로 찾아가는 것>, <시인이 살지 않았던 것을 사는 것이며 언어의 개방성에 몸을 여는> 것이다. '순수한 언어 형태'의 영역에서 정신분석은 무용해진다. 시적 이미지는 인과를 벗어나며 예측불가능하다. 곧, 절대적인 창조 작업인 것이다.

   조금 온건하게 다시 말하자면, 시를 단순한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리지 않기 위해서 정신분석적 승화와 상상력의 현상학적 승화를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7.

   이를 작시의 영역에서 조금만 살펴보자면, 습득과 동시에 망각되는 지식, 앎의 초월, 전적으로 자유로운 언어(시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일이 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이미지를 '재체험'하고 새로운 충격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예술가는, 그가 사는 것처럼 창조하지 않는다. 창조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8.

   시적 이미지는 메타포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미지는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 메타포는 기억과 재현에 따른 말장난일 뿐이지만 상상력이 산출하는 시적 이미지는 언어를 개방하고 존재를 참여시킨다.

   그래서 상상은 미래로 열려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과거와 현실의 기능을 담당하는 '기억'과 대비된다. 다시 말해, 기억은 현실적이고 과거지향적이지만 상상은 비현실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인간 정신의 이 두 가지 기능이 길항하여 리듬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기억 가운데 잠들어 있는 존재를 상상력이 깨워버리는 순간이 바로 시적 '떠오름'의 순간인 것이다.


   9.

   이 책에서 우리는 상상력에 의해 파악된 공간에서 그 공간의 실제성이 아니라 상상력의 편파성을 가지고, 그 경계선 안에 우리 존재를 응축하는 '체험'(존재론적 되살기)을 한 것이다.

   <상상력은 끊임없이 상상하고, 새로운 이미지들로써 스스로를 풍요롭게 한다. 우리가 탐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상되는 존재의 풍요로움인 것이다.>

   (이후로는 책의 개요)






0.

   1989년에 번역되어 2003년 초판으로 (?!) 출간된 책이다.

   바슐라르의 이론 전반은 매력적이다. 실제로 바슐라르의 여진은 쉽게 인지되지는 않는 형태로 계속 내 앞에 나타나는 것 같다. 아니, 나타나왔던 것 같다.

   다만 그 디테일들, 그러니까 연구 전개의 개별 대상들(공간, 불, 물, 공기, ...)까지는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항목 하나하나가 전체를 엮는 씨실과 날실이겠지만, 파고들기엔 지나치게 '특수하다'는 느낌이 있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라고 우스갯소리나 해 보겠다.

   어쨌든 많은 것에 있어서 발판이 되어줄 만한 책이다. 하지만 머리말까지만 요약하고 덮으려 한다. 관심이 있다면 제6장 <구석> 정도겠는데, 머리가 아파서 조금 미루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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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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