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지진계 2015. 1. 1. 01:11

두서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단면을 끄집어내서 온갖 아픔을 다 보여주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형사는 이 무자비한 접속사를 이기지 못해서 쎄느 강으로 뛰어 내린 것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비참하든지, 얼마나 불행하든지, 무슨 시련이 있고 슬픔과 절망이 있든지,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살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살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네들이 모여서 부대끼고 부서지고, 거기 남은 파편과 부스러기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세상은 결국 이야기들의 합집합이다. 계속해서 이야기들이 생성하고 투쟁하는 유동의 장. 거기에 영원한 선악은 없다. 18세기나 19세기나 멍청한 건 매한가지니까. 그 사이사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가 있다. 끝까지 살아 내라, 용서하고 이해하고 의지하면서, 사랑해라, 사랑해야 한다고, 불변하는 것은 사랑밖에는 없다고, 위고는 상처뿐인 빠리의 단면을 하수도까지 해부해 보여주면서 억지를 부린다. 그런데 꽤나 설득력 있는 억지다.
   혁명은 그래서 단순한 시대상이 아니다. 바리케이드는 이 접속사의 총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뤄내야 하는 것들. 산탄과 포화를 뚫고, 죽음을 불구하고서도 해내야 하는 것들. 사랑으로 환원시키려면 환원시킬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 그래, 쏴라!
   그의 삶에서도 내내 이 접속사가 끊임없이 연쇄한 것이다. 굳이 아프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수하고 고백하고 혼자 롬므 아르메의 골방에서 죽어 가고. 그저 종달새를 사랑하면서. 양심이든 신앙이든 뭐든, 2000페이지에 달하는 서사 내내 핍진을 부여한 것은 하나의 접속사였다. (주교는 그렇다면 접속사의 화신인가?)
   정말 잔인한 말이다. 채찍질 같이. 다분히 희생적이고 미련한. 우직하게, 우직하게.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몇 천 년 동안.

   백석은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라는 여인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에포닌! 비쩍 마른 몸으로 말없이 사랑만 하다가 결국 구멍 뚫린 조개껍질처럼 죽은. 이마에의 마지막 키스를 그녀는 느꼈을까. 지층의 최저에서 앙상한 화석처럼 야위어 가는데도, 그 심연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 씨, 저는 당신을 조금 사랑했었던가봐요. 그렇게 담담하게, 당신을 조금 사랑했었던가봐요. 몸에 총구멍이 났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조금 사랑했었다고. 이 말은 해야겠다고.

   그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중요한 건 정밀 묘사가 아니다. 대상들의 삶, 그 방식 자체다. 문학은 사진기가 아니기에. 케이크 자르듯 사회를 툭 세로로 잘라서, 자, 잘 보시오, '불행한 사람들'은 이렇게 생겼소, 가 아니라, 이들의 불행을 보시오, 삶을 보시오. 다 봤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랑하고, 살아간다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들을 들려 줘야 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부딪히고 깨지고 박살나고 가끔은 겹치기도 하는. 그 파편과 부스러기들을. 그리고 접속사를. 가장 처절한 핍진으로 이야기들을 밀고 나가는 접속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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