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에우로파> 中


   그날 밤 세 사람은 엉망으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인아는 마치 평균대 위를 걷는 듯 두 팔을 양옆으로 길게 뻗어 균형을 잡으며, 수차례 비틀거리며 휘황한 밤거리를 앞장서 걸었다. 그녀가 대학 시절 동아리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자작곡을 노래했다는 말을 그때까진 실감할 수 없었는데, 어둡고 인적 없는 골목에 다다르자 인아는 낯선 노래의 후렴부를 불렀다.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그 목소리의 개성에 나는 놀랐다. 대화할 때는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노래하는 인아의 목소리는 무척 맑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맑기만 하던 그 목소리가 높은 음역대로 들어갈 때마다 미묘하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유리잔처럼 섬세한 그 목소리의 표면에, 기묘하게 처연한 슬픔 같은 것이 자잘한 물방울들처럼 응결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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