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16.1. 일기.

지진계 2017. 1. 1. 17:41



10. 20.

1.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죽어버리는 대신으로 시를 쓰는 일.

2. 살면서 한 번도 내 뒷모습을(등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건 타인이 없으면 내 등 뒤가 영영 금지된다는 것. 외로움은 필연이며 우리는 타인을 계속 찾아다닌다.

3. 말들은 번식한다.


9.25.

1. 소실점을 생각한다. 어디론가 선이 사라진다. 소실점을 향해 끊임없이 뻗어나가다가. 원근법 때문에 선들은 끝나지 않는 걸음을 걷게 됐다.

글씨들도 마찬가지다. 말할 수 없는 점 하나를 위해 끊임없이 구불구불 걸어가야 하는 선이 있다.

2. 어느 저녁, 사랑해, 라고 쓰는 데 필요한 잉크의 질량을 재고 싶다는 함정에 빠졌다.


9.22.

1. 별을 보다가 문득.

<선생님 : 별및은 수억 년을 달려서 우리에게 와요.> <좀 삐딱한 학생 : 그럼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우리가 죽을 때까지도 별들은 모르겠네요.> 한 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엇갈림에 대하여. 눈이 마주치려면 얼마나.


9.12. 지진.

1. 공명, 진동, 살아있다는 것, 꿈틀대는 힘,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들.

1.1. '죽은 듯이' 사는 X. 어느날 지진이 도시를 치고 고등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뜻하지 않는 소란과 묘한 축제의 분위기. 비일상의 설렘.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두려움을 나눈다. 죽어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살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뜻하지 않은 진동으로 사람들은 공명하고, 보이지 않는 것의 힘과 그 꿈틀대는 생명력이 가시화된다.

좀 더 큰 여진이 찾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진동 이전의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여진의 세계가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두려움이든 설렘이든 몸을 떨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운동장에 모여 공명할 수 있는 세계다.


9.6.

1. 내 다락 어디엔가 웅크리고 있는 것들.

2. 시를 쓰고 싶다. 내 나라의 말. 내 가장 사소한 습관. 가장 절절하게 보잘것없는 것들. 이왕이면 아름답고 절절하게. 사랑하면 사소해진다.


8,29,

1. 담배 연기가 떠오르는 아침. 변해버린 날씨처럼 나도 어딘가 변해버린 아침. 구름의 뒷면이 궁금해지는 아침. 풀벌레 소리들. 우는 입은 없고 우는 소리만 있는 아침. 우리는 서로 볼 수 없는 곳에서 깜박이고 있다.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나까지 사라져버렸다. 데카르트는 거짓말쟁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근거는 불충분해진다. 나는 어떤 발음으로 울어야 하는지. 깜박이는, 깜박이는 우리.


8.28.

1. 손에 딱 잡히는 얇은 펜이 더 편하다. 비가 하루종일 왔고, 얼룩이 하나 졌다. 담배연기가 뭉실뭉실 떠오르는. 그런 사랑스러운 방식들이 있다. 점점 사소해지게 된다.


8.26.

1. 몸속에 뜨거운 점들이 박혀 있다.

1.1. 내 안에는 열이 자라고 있어요. 나를 죽이거나 죽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그걸 알려면 얼마나 더 자라야 할까요. 나는 해로운 걸 너무 좋아해요. 끊임없이 중독을 찾아다니고 계속 뜨거운 것이 자라요. 가끔은 성가셔요. 왜 불안에 떨어야 하죠. 내 몸도 나의 적. 내 편은 내 것 중에서는 없는 걸까요. 언젠가 이 열이 내 살을 찢고 나올 때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요.


8.19.

1. 팬이 된다는 것. 결정정애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아닐까. '네가 좋아'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일. 내게도 기호라는 것이 있고 그것으로 정체성의 한 축을 세울 수 있다는 일.

1.1. 이진아의 화성. 묘하게 상승하는, 풍선을 매단 듯한 화성.


8.13.

1. 사라지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잔인하다. 사라짐 자체는 아름답지 않다. 사라진 것, 사라지는 모습이 아름다울 때가, 아름다워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사라지면서 반짝이는 것들. 태어나면서 죽어버리는 것들.


7.13.

1. 구름을 핀셋으로 집어 노트 사이에 끼워두고 싶은 저녁이었다. 구름의 분홍색 살은 배일까 등일까, 어느 쪽일 지 생각해 보는 게 재미있었다.

2. 고정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책갈피처럼. 세상은 멈추지 않고 가끔은 닻이 필요하다. 박제된 채로 서로를 영영 바라볼 수는 없는 걸까.

고정되어버리는 순간도 있다. 내 어느 만큼쯤은 아직도 다리 위에 있을지도.


6.25.

1.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점점 증거가 불충분해진다는 뜻. 골다공증에 대해 생각한다. 점점 텅 비어버리는 일이다.


6.9.

1. 누구에게나 마법은 있었다. 욕망과 의지를 믿지 않아서 떠나가버린 거지.

2. 공중에서 유리 공들이 기포처럼 돋아나. 나는 그 안에 나 대신 사랑할 심장들을 키우지.

상상, 상상! 남의 상상에 대한 관음.

3. 눈이 아니라 심장이다. 이름붙일 수 없는, 그러고 싶지도 않은 감정들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큰 축복이다. 자그마한 심장 자체가 말 아닌 말로 돋아나는 순간. 어떤 공감도 불가능한 특이점. 이로써 한 사람은 대체불가능한 것이 된다.

4. 솔의 블로그. 그동안 나는 생의 언저리에서 맴돌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본질에 가까워지기. 왜 나는 절절한 말들을 할 수 없는지. 피부의 말이라도 심장을 말하자.


5.23.

1. 작업하면서. 초여름을 견디지 못한 봄꽃들을 봈다. 물 먹은 종이처럼 문드러지고 있었다. 가지에서 떨어지지도 못하고. 은근슬쩍 내가 떨어트려줬다. 그때 느낀 건 안쓰러움이었을까.

토끼풀의 꽃(으로 추정)을 봤다. 상속(전승, 구전)되지 못하는 이름들을 생각한다. 길에서 숲에서 들에서, 꽃과 나무와 풀들의 이름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 어머니들에게로, 그리고 그 아들 딸들에게로 대물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단종되어가는 이름들이 너무 많음을 생각한다.

돌틈 바위틈에서 아등바등 자라고 있는 무명의 풀들을 뜯어내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다. 어느 만화나 영화 대사처럼, 직시해야만 하는 걸까. 사람의 일에서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가해'들을 똑바로 쳐다봐야 하는걸까.


5.19.

1. "나는 옷을 좀 크게 입는다. 아직 살이 되지 못한 질문들이 잠을 잘 곳이 필요하다."

2. 황석영의 바리데기. 가엾은 사람들. 레미제라블의 황석영판.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그리고 어른이 되기.


5.14.

1. 만화 <클레이모어>를 봤다. 중학생 때 학원에서 잠깐 읽었는데 어느새 완결이 나 있었다. 27권의 짧지 않은 분량을 이틀만에 읽어치웠다.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내 안의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 이유 없이 괴물이 되기란 참 쉬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전사들이다. 매 순간 또 다른 자신과 싸운다. 욕망은 힘이다.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욕망일수록 강하다. 잡아먹히면 분열증, 외면하면 신경증이 된다. 몰락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몰락하며 짓는 표정도 선택할 수 있다.

1.1. 몰락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패배함으로써 패배하지 않는다. (ㅈㅈㅇ 누나의 눈. 우울과 퇴폐, 그리고 선택한 패배의 다각형 사이 어디쯤.)


5.7.

1. 이병률의 여행산문집을 읽다가 : 고향을 여행하는 것은 고향을 얻는 것일까, 잃어버리는 것일까. 고향에서 느끼는 낯섦을 생각해봤다. 유목의 종착지는 모든 공간을 타지로서 재사유하는 것일까. 익숙함과 낯익음에 결별을 고하는 일.


5.2.

' 1. 아픔에 대해 생각한다. 뭐든지 의욕이 없어진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통증만이 중요해진다. 벌거벗는 시간이다.


4.21.

1. 박완서 단편집. 문장이 정말 정갈하다. 웬만한 다른 작가들과는 비교조차 안 된다. 과장이려나. 노작가는, 처음엔 분노와 증오를 증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감정이 다 깍이고 나서 남은 건 사랑이랬다.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통계가 되게 하긴 싫었다고. 이 작가의 단편들은 비극이었지만 단편들을 빛나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문장을 그녀는 아주 따듯하게 말하고 있다. 정말 닮고 싶은 마음이다.


4.19.

1. 최인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쉽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그리 가독성이 좋은 문체는 아니어서 솔직히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굉장이 심층적인 상징들이 잘 기획된 작전 아래 배치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게 오정희의 평이었는데, 내 생각에 더 중요한 키워드는, 욕망, 페르소나, 억압, 원죄의식, 정도였다. '낯익은 타인들'은 걸어다니는 가면들, 혹은 '역할'로서의 빈 자리들이다. 거기에 어ㅓ떤 존재가 들어오든 사실 상관없는 것이다. '낯익은 것'이 평소 주체와 관계를 맺던 수많은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타인들'은 그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내용들, 실제의 존재들이다. 가면극에서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들인 것이다. 그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통합될 수 없는 욕망으로 정신분열을 보인다. 존재는 욕망이지만 존재의 현상은 페르소나다. K는 그 균열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 그 자신이 분열된 욕망, 그저 페르소나의 뒷면을 채우는 존재임을 인지하게 되는 결말이다.


4.16.

1. 겹벚꽃나무, 홀아비바람꽃, 제비꽃.


4.15.

1. 김경주의 기담을 읽다가. 마슐라르를 생각. 이미지의 해석이 아니라, 직접 그 이미지를 체험하는 것. 시는 읽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다, 라는 진부한 설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 어스름한 밤. 나뭇가지들의 뒷면. 하늘에 난 건열. 시를 쓰고 싶어진다.


4.9.

1. 송형과의 고가근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시실이 너무나도 설레는 저녁. 그 모든 절절함을 전부 다 헤아리고 싶은 저녁. 한없이 작아지지만, 동시에 녹아내려서, 내가 아닌 게 되는 저녁. 그렇게 세상의 표정을 조금씩 그려가는 저녁.


4.4.

1. 바슐라르를 읽다가. 비동일성의 지양에 대해. 지금까지의 독해로는, 바슐라르식 몽상, 그리고 시학은 끊임없는 자기로의 천착에 그 본질이 있는 것 같다. '상상'이라는 개념을 '자기'를 기준으로 안이나 밖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더 두고 봐야겠으나, 바슐라르는 세계를 몽상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본인은 그 과정이 반대라고 주장하겠지만) 끊임없이 어떤 특정지점으로 동일화한다.

이건 낭만적인 억지일 수 있다. 하지만 바슐라르 식 사유가 최근의 많은 회의에 해답을 줄 수 있다면, 그건 몽상이라는 세계외적 혹은 前세계적 지점의 힘에 있다. 가능성에 대한 미신이다. 상상, 미개척지, 혹은 원시림.

1.1. 원시림. 말과 사유, 그 모든 '인위'의 이전. 前세계. 환상적 공간. 욕망의 나체. 무엇보다 먼저 태어난 힘. 최초의, 그리고 기저의 의지.


3.26.

1. '뒤틀리는' 꽁트. 사람들의 몸이 뒤틀리고 배배 꼬이는 전염병. 심사가 뒤틀린다는 표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은 배배 꼬여 있다. 그 배배 꼬임이 배배 꼬여서 세상이 굴러간다. 어쩔 수 없지 뭐.


3.11.

1. 이전에 꿩 새끼들을 봤을 때가 기억났다. 대여섯이서 줄줄이 어미를 따라가다가 배수로에 죄다 빠져버렸다. 어미가 그렇게도 울었다. 구덩이는 새끼들 키의 열 배 남짓이었고, 익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몇 마리를 구했다. 그 새끼들은 다시 어미를 따라갔다. 아마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을 것이다. 꿩은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다. 가끔씩 운이 나쁘면 배수로를 만날 뿐이다.


3.8.

1. 비를 맞으며 구름을 피다가 문득, 깊은 바다의 바닥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력에 닻을 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바다의 바닥께를 휘적휘적. 달을 걷는 기분도 그랬을까.

공기의 밀도가 높은 날이면 세계의 질감(질량)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럴 때면 모순에 빠진다. 아득해지면서 선명해진다. (무엇이...?)

2. 빗소리. 비에 젖고 있는 땅. 나는 녹아내리고 넓게 퍼진다.


2.25.

1. 또 복학하는 꿈을 꿨다. 대학로를 혼자서 돌아다녔다. 사람이 많았다. 어쩔 줄 모르고 돌아다니기만 하다가 힘들어서 방으로 왔다. 13년 봄여름의 그 서문 단칸방과 비슷했다. 어둡고 음산한 골목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좁은 길을 지나서 방문을 열었다. 그 때와 똑같이 입구에서 두 번째 방이었다. 단칸은 아니었다. 거실과 방 몇 개가 있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건 똑같았다. 꿈속의 빈방에서 혼자 드러누웠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2. 사람에 무심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나를 침범하려는 것을 악에 받쳐 방어한 걸지도 모르겠다. 쿨한 게 아니라 그냥 고슴도치인 걸지도.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과소평가했는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계속 무언가 잘못되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량이 넓다거나 성격이 둥근 것이 아니라 긴장 가득한 휴전 상태 같은 것. 그건 선명한 경계선과 타자에 대한 적의를 동반한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좀 더 신중하고 섬세하게 적극적이어야 한다. 타자의 세계를 장악할 수는 없음에, 그래서는 안 됨에 유의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으 하고 내 세계를 열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함부로 이해하려고 하지난 말되 함부로 회의해서도, 함부로 적대해서도 안 된다.


2.24.

1. CT를 찍었다. 낯선 기계 아래에 바지를 벗고 드러누웠다. 짧은 (얕은) 플라스틱 터널 안을 몇 번 왔다갔다하는 동안, 어쩌면 멀리 잊고 있었던 감정 하나가 되살아난 건지도 모르겠다. 아득함. 깊숙한 아가리. 크레바스의 이미지. 나는 혹시나, 혹시나 싶어서 괜히 심란해지는 보잘것없고 보잘것없는 짐승 새끼 한 마리다. 죽음은 언제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작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나약한 건가. 링거액이 혈관으로 흘러들어왔다. 차가웠다. 그렇게 응급실에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건 처음이었다. 유쾌하지는 않았다. 푹 가라앉았다. 혈관에 심해가 흘러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한 번씩 응급실에 실려가 링거를 맞으면 사람도 무거워지는 걸까. 차갑게 차갑게. 어디로 가라앉는 걸까.


2.21.

1. 누군가의 비밀을 듣는 일.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그 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에 빠진다. 나의 X를 너도 아는 일. 그런 음모로 우리는 이어질 수 있다. 그건 우리들을 혼자가 되게 하려는 세상, 운명에 대한 반항 같은 것일지 모른다.


2.3.

1. 메멘토 모리, 의 마침표를 찍었다. 언어에는 관성이 있어서 말이 말을 달고 돋아난다. 나는 영매처럼, 깜박이는 말들이 흩어져 저승으로 가기 전에 주섬주섬 받아적는다.


1.31.

1. 사연 모를 골동품이 있다. 연애하던 A와 B는 그 골동품을 우연히 구하고 호기심이 발하여 골동품의 행보를 거슬러올라간다. 그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헤어진다. "이 물건이 ~했다면, 난 널 사랑할 수 없는 거야." 뭐 이런 식. A는 그 일을 계속한다. "세상은 이런 맹목적인 충동으로 이어져나가는 거야. 알 수 없는 중독. 멍청한 짓인 걸 알면서도." 온갖 모순과 어두움, 회의적인 징조로 가득한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그런 인간의 모순이 가장 강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


1.30.

1. 보르헤스 알레프. 환상으로 환상을 폭로하기.


1.22.

1. "터울". 어원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아름다운 말들이 너무 많다. 입에서 가만 굴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는, 사탕같은 말들.


1.19.

1. 한파. 한 사람의 경험의 끝을 생각한다. 자기 세계의 끝에 선 사람을 생각한다.


1.15.

1. 희망이라는 이름의 미신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끌고 나간다. 확신같은 건 사실 착각이다. 가능한 제일 구차하고 정확한 말은 미신이다. 배신당할 수 있다고 해도 속아넘어가줘야 한다. 불리한 게임이다. 변화의 미분을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에겐 그런 감각기관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게 옳은 길인지 아닌지도, 점점 나아지는 게 맞긴 한건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해내려면 미신인 줄 알면서도 속아넘어가줘야 한다. 그래, 어디 한 번.


15` 가을께, 수첩에서.

   1.

   중요한 것은 한낱 언어로 된 기록이나 기억이 아니라 그 날들에 내가 띠던 빛이다. 그리고 아직도 오늘을 스치며 어딘가로 뻗어나가고 있을, 그 빛들의 살이다.

   2.

   '그 여자애의 정수리에서는 파란 풀내가 났다. 가끔 모자를 쓰고 나온 건 머리카락 대신 돋아난 이름 모를 들꽃 들풀들을 숨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 풀꽃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15` 봄여름 언젠가, 수첩에서.

   1.

   "사랑받는 사람은 우리와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본질과 하나다. 우리는 단지 사랑받는 자 안에서 우리를 본다. 그러나 사랑받는 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에서 출발한다." - 헤겔.

'지진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하나  (0) 2018.04.17
15.8.15.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에서.  (0) 2017.01.02
아이디어. 일기.  (0) 2016.12.31
Artem Chebokha, 하늘과 고래. 일러스트 화가.  (0) 2016.12.19
문득  (0) 2016.11.16
Posted by 습작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