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Heidegger.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기상 . 서울:서광사. 1995. 인쇄도서.

 

기울임체는 사견. 인용은 < >. bold 밑줄 또한 발췌  임의로 편집.

 

역자 서문 ;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분과도 아니요 임의적인 착상의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인간)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다. 그것은 (인간) 현존재 자체이다.”> 4p

<연도 순으로는 본문, “보탬말”, “머리말순이다.  책의 머리말은 하이데거 본인이 자기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와 사상적/역사적 배경에 해당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형이상학과 밀접하다. “새로운 형이상학의 이해 마련하기 위해 형이상학과 벌이는 싸움의 연속이다.”> (6p)

 

 

1. 본문

 

직접 형이상학 안으로 들어가 사유하기 위하여,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먼저 묻지 않고 ‘형이상학적 물음 먼저 분석할 것이다. ‘ 형이상학적 물음의 전개’, ‘ 물음의 정리 구성’, ‘ 물음에 대한 대답순으로  강의는 구성되어 있다.  이유는 텍스트를 읽다 보면 그려질 것이다.

 

 형이상학적 물음의 전개

형이상학적 물음은 이중적인 특성을 안고 있다. 첫째, <모든 형이상학적 물음은 언제나 형이상학의 문제를 전체  자신 안에 포괄하고 있다. 개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이  자체로서 나름대로 전체를 대변한다.  다음으로 개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은 모두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  물음 속에서 함께 물음이 되는 식으로만 물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물음은 전체로서 물어져야 하며 묻고 있는 현존재의 본질적 상황에서부터 물어져야 한다.> (59-61)

개별적인 형이상학적 물음도 항상 전체를 담지하게 된다. 그리고 개별적인 형이상학적 물음은 묻는  스스로를 문제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묻고 있는 현존재에서 시작해야 한다. (비약으로 보일  있지만…)

그러니까 지금 여기 있는 우리, 학문을 앞에  현존재로서의 우리에서 시작하자. 현존재는 학문 안에서 다른 존재자 관계 맺는다. 다른 말로, 학문은 존재자를 다룰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학문들에서 …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차원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수행하는 것이다.> (63) 학문적 현존재 특수한 지위를 갖는 것인지, 단순히  ‘강의공간 인간들이 “학문적 현존재여서택한 접근법인지는  모르겠다.

이는 존재자를 향하는 뛰어난 ‘세계 관련이다. 그리고 학문적 세계 관련은 특히 인간 실존에 의해자유로운 선택과 태도에 의해 견인된다. <학문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명확하게 그리고 오직 사실 자체에게만 시종 말할 권리를 주고 > 때문이다.  사실성에 의해 존재자는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낼  있게 된다. 학문의 이런 특수한 세계 관련 속에서 인간은 ‘존재자  하나로서 학문을 ‘해나간.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해나감속에 … 인간이라고 불리는  존재자가 존재자 전체에로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침입 안에서 그리고  침입을 통해서 존재자는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열어 보인다. 그리고  열어 제치는 침입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존재자를 이제 비로소  자체가 되도록 도와 준다.>

세계 관련’, ‘태도’, ‘침입 학문적 현존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키워드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학문적)세계 관련이 향하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태도를 이끌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침입에 있어 탐구의 논쟁이 다루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것을 넘어선 아무것도 아니다.> (65)

그런데  말들 자체에 주목하라. ‘존재자 자체라고 한정하는 순간 우리는 나머지 부분을 배제하게 된다. ‘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und sonst nichts)  ‘아무것도 아닌 ’,  ‘ 도대체 무엇인가. 존재자 자체를 향한다고 생각했던 학문적 현존재( 드러나는 현상)에서, ‘ 발생하는 것은 어떻게  일인가.

 

 물음의 정리 구성

물음의 정리 구성으로  물음의 대답 가능성을 드러내려 한다.

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우선, ‘ 존재자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건 모순이다. 대답 또한 ‘무란 이런 것이다같은 모습일텐데, 마찬가지로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도대체 무를 대상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의도가 좌절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대한 우리의 물음 제기와 함께 이미 종착역에  있는 셈이다.>

대신 이는 논리학을 최고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무를 파악하고 드러내기 위한 수단은 지성, 방법은 사유라는 것이다. 무는 ‘부정이기 때문이다. <부정은 지배적이고 결코 침해할  없는 “논리학 가르침에 따르면 특수한 지성의 활동  하나이다.> (71)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 ‘부정이라는 상위의 규정 아래에서 정의될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무가 있기에 부정이 있다. 그렇다면 전도가 일어난다. 지성은 무에 예속되어 있다. 무에 대한 물음 제기는 ‘형식적으로는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무를 묻고 있다. <어떻게든지 무가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자체는우선 주어져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를 만날  있어야 한다.> (73) 그런데 어떻게 만난 것인가? 또는 어떻게 만날  있을 것인가?

<무는 존재하는  일체의 완전한 부정이다. 무의 이와 같은 특성이 종국에는 우리가 무를 유일하게 거기에서 만날  있는 바로  방향을 손가락으로 지시하고 있는  아닐까? 존재하는  일체는  자체가 부정될  있기 위해서, 그리하여  부정 속에서 비로소  자체가 스스로를 알려   있기 위해서, 우선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한다.> (75)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어떻게 우리가유한한 본질 존재로서존재자 전체를  총체성에 있어  자체 그리고 우리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  있는가?> 아마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전체를, 기껏해야 관념적으로 상상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존재자 총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무를 얻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무의 근본 경험> 통해서만 무를 만날  있다.

우리는 존재자 전체를 파악할  없지만,  전체의 한가운데에 존재자 하나로서 ‘처해 있다.’ 파악하는 것과 처해 있는 것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 생활은 언제나 존재자에 대해 … “전체를하나의 단일성 안에 견지하고 있다.> (77)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자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존재로서 존재자 전체와 만나고 있다. <우리의 현존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권태 있다. <깊은 권태는 현존재의 심연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몰아치면서, 모든 사물들과 인간들을,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자신까지도 모두 기묘한 무관심 속으로 휘몰아 넣는다.  지리함이 존재자를  전체에 있어 드러내 보인다.>

존재자 전체를 드러내는 것은 그런 <기분 상태Gestimmtsein> . 이는 <우리를 … 존재자 전체의 한가운데에 처해 있게끔 한다. 기분의 이러한 처해 있음은 그때마다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자 전체를 드러낼  아니라, 이러한 드러냄은 동시에단순한 우연적인 발생과는 거리가 우리 -존재의 근본 사건이다.> (79)

그러나 무를 만나는 것은 아직은 다른 이야기다. 기분은 이따금 전체로서의 존재자 앞에 우리를 데려다주지만, 무는 보통 은폐되어 있다. 그런데  와중에 <인간의 현존재 안에 인간을  자체 앞으로 데려오는 그러한 기분 상태> 있긴 있다. 바로 <불안이라고 하는 근본 기분>이다.

불안은 공포와는 다르다. 공포는 특정 존재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불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불안은 언제나 ~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불안은 아니다. … 불안해하는 그것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결코 단지 규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규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81)

불안은 분명 대상이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규정할  없다. 그러니까, 특정한 존재자를 불안의 이유로서 귀속시킬  없다. 존재자 전체가 그렇게 불안 앞에서 미끄러진다.’ 그런 방식으로 불안은 무를 드러낸다.

<불안이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빠져 나가게 하기 때문에, 불안이 우리를 공중에  있게 한다. 바로 거기에 우리 자신도 존재하고 있는 인간도존재자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우리의 손아귀를 미끄러져 빠져 나간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근본에 있어 ‘너에게또는 ‘나에게섬뜩한 것이 아니라 ‘ 누구에게그러한 것이다. 붙잡을 것이란 아무것도 있을  없는  둥실  있음이 모든 것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가운데 오직 순수한 -존재만이 아직 거기에 있을 뿐이다.> (83)

이제 우리는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과 더불어 우리는 현존재라는 사건에 도달하였다.  현존재 안에서 무는 드러날  있고 거기에서부터 무는 물어져야 한다. 무는 어떻게  일인가? (무는 도대체 어찌  셈인가?)> (85)

 

 물음에 대한 대답

현상학적 방법의 고수 : <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안이 일어나도록 하는 변화, 다시 말해 인간을 그의 -존재에로 바꾸는 그러한 변화를 뒤따라 수행함으로써  안에서 밝게 드러나는 무를 그것이 스스로를 알려 오는 그대로  붙잡아야 한다. 이로써 또한 동시에 무를 말하며 이야기하는 가운데에서 자라 나오지 않은 무에 대한 특징들은 단연코 멀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불안은 무를 ‘드러낸다.’ 이는 파악의 방식이 아니다. 존재자가 빠져나간 곳에, 그러니까 비켜난 존재자의 옆자리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존재자 전체와 함께 무를 대하게 된다고 해야 한다. 여기서 “~ 함께”(in eins mit) 중요해 보인다. 불안이 존재자를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존재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이 부정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무에 닿기엔 항상   늦는다. <무는  이전에 대면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미끄러져 빠져 나가는 존재자 전체와 함께 무를 대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87) 존재자와 무가 함께 드러난다.

지금이 가장 난해한 대목.

<불안에는 ~로부터 물러서 피한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  ~로부터 물러서 피함은 무에서부터 시작된다. 무는 어떤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거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쪽에서부터의 거부는  자체 가라앉아버리는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빠져 나가게 하면서 가리킨다. 미끄러져 빠져 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이렇듯 전체적으로 거부하며 가리키는 무는 이러한 가리킴으로써 불안 속에서 현존재를 죄어 온다이것이  무의 본질  무화(die Nichtung)이다. 그것은 존재자를 없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화를 없앰이나 부정에 포함시켜 생각할  없다. 무는 스스로를 무화시킨다.>

그러니까, ‘무가 드러나는 방식으로부터 ‘무화라는 ‘무의 본질 끌어내는 과정. 챕터 전체는 ‘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여전히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무화 작용은 존재자 전체를, 새로운 형태/방식으로, 타자화한다(타자로 드러낸다).

방법낯설게 함으로써 드러내기. 이는 존재자를 ‘무가 아니라 존재자 열어젖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존재자의 <근원적인 열려 있음(Offenheit)> 생긴다. 무의 무화를 거치고서야 현존재는 존재자  자체를 대면한다. <오직 무가 근원적으로 드러날  있다는 근거 위에서만 인간의 현존재가 존재자에 접근할  있으며 존재자에 관여할  있다.> (89)

정리하자면, 무는 무화 작용을 통해 인간을 존재자  자체 앞으로 데려다 놓음으로써 ‘비로소현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현존재는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 존재자를 ‘낯설게만남으로써, 존재자를 넘어서게 된다. 이를 ‘초월Transzendenz’이라 하자.

<오직 무가 근원적으로 드러날  있다는 근거 위에서만 인간의 현존재가 존재자에 접근할  있으며 존재자에 관여할  있다. … -존재란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현존재는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으면서 각기 나름대로 이미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있다. 이렇듯 존재자를 넘어서 있는 것을 우리는 초월이라고 부른다. 만일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의 근거상 초월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만일 현존재가 애초부터 앞서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현존재는 결코 존재자에 관계할  없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에도 관계할  없을 것이다.> (89)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하자. 형이상학적 물음의  가지 특색에서 시작했다. <형이상학적 물음은 전체로서 물어져야 하며 묻고 있는 현존재의 본질적 상황에서부터 물어져야 한다.> (61) 라는 이유로, ‘지금 여기서 학문을 하고 있는 우리 현존재에서 사유를 시작했다. (현상학적 방법의 단면으로 보이는 경로설정)

 ‘학문적 현존재 ‘모든 존재자 실존적으로 추구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관련하고 있다.  와중 ‘오로지 존재자를 묻는다 지점에서  잉여분,  ‘ 관한 물음이 돋아난다. 이로써 ‘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했다. ( = ‘ 형이상학적 물음 전개)

다음은  물음의 ‘정리구성이다. 그러니까  물음 자체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대답 가능한 것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사유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논리학적 접근(무는 ‘무엇인가, 혹은 무는 X) 불가능하다고 보고 ‘무의 근본 경험 접근 경로로 설정했다. 그리고 ‘존재자가 모두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상태로서의 ‘근분 기분’,  ‘불안 가져왔다.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무를 ‘만난다.’ 이런 방법, 말하자면 현상학적 접근으로만 무를 물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남 천착한 것이 지금의 ‘ 물음에 대한 대답부분이 된다. 무는 무화 작용을 통해 현존재(현존재함, 현존재됨) 가능케 한다.

(이를 두고, ‘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무를 기능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라고 해도 될까. 곧바로  본질을 겨냥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가 존재자와 현존재 그리고 존재와 관련해 ‘어떻게 현상하는지 묻는 일로 보인다.)

<이로써 무에 대한 물음의 대답은 얻었다. 무는 대상도 아니고 존재자도 물론 아니다. 무는  자신을 위하여 발생하지도 않으며, 또한 존재자의 곁에 다시 말해 무가 흡사  존재자에 매달려 있는 듯한  존재자의 곁에 있는 것도 아니다. 무는 존재자가  자체 인간 현존재에게 드러날  있게끔 해준다. 무는 이제 비로소 존재자에 대한 대립 개념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근원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자체에 속해 있다. 존재자의 존재에서 무의 무화 작용이 일어난다.> (91)

 

이렇게 답을 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남은 의문이 있다. <만일 현존재가 오직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으면서만 존재자에 관계할  있다면, … 그리고 무가 근원적으로 불안 속에서만 드러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실존할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불안 속에서 둥둥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자신이 이미 그러한 근원적인 불안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든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안은 드물게 일어난다 사실에서 시작하자. 이는 무가 근원적으로 위장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는 자연스런 일이다. 무는 애초에 계속 무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무화 작용은 모든 존재자를 빠져나가게 하면서  존재자들을 ‘가리키고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무에서 돌아선다면 존재자에 몰두하게  것이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자들을 빠져나가지 않게 잡아두려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완전히 존재자에 잃어 버림>이다. (93)

 사이에는 무를 부정으로써 사유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주장을 반복.

그러니까 불안은 대개 억눌려 있다. 불안은 <자신을 소모하고 있는, 그렇게 해서 현존재의 궁극적인 위대함을 보존하려는> 사람(현존재)에게 보다 확실하게 나타난다. (97) <근원적인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어느 순간에라도 고개를 디밀  있다. 그러기 위하여 불안이 어떤 특별한 사건에 의하여 자극되어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동기가 이렇듯 대수롭지 않다는 사실은 불안의 지배(영향력) 그토록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은 언제나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만 뛰어들어 우리를 동요 속으로 헤집어 놓는다.> (97) 완결성을 위해 주석을 달자면, 불안은 드물게 나타나지만 그것은  본질에 의한 것이며 ‘은폐되어 있지만 우리 곁에 상주하고 있다 식의 전개로 보인다. <감추어져 있는 불안 때문에( 불안에 근거해서) 현존재가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을 무의 자리지기(Platzhalter des Nichts) 만든다. … 감추어져 있는 불안에 근거해서 현존재가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은 존재자를  전체에 있어 넘어서는 것이다.  초월이다.> (99) 무를 만나는 일로서의 ‘초월 불안의 은폐적 본질에 관련하여 다시   있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적 인상을 해소하려는 의도일까 싶다.

 

여기서부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의 제목을 특히 유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러한 <무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형이상학 자체를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어원적으로(어원적으로), 존재자 너머를 묻는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란, 존재자를  자체 그리고  전체에 있어 파악할  있게끔 다시 소급해 잡기 위해 존재자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껏 무에 관한 물음이 정확히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을 확인해온 셈이다. 처음에 지적했던 형이상학의  특징을 모두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에 대한 물음에서 존재자를  자체  전체에 있어 넘어서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써  물음이 하나의 “형이상학적인물음임이 입증되었다. 그러한 종류의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앞에서 다음과 같은  가지의 특징을 부여하였다. 첫째, 모든 형이상학적 물음은 각기 나름대로 형이상학 전체를 포괄한다. 그리고 둘째, 모든 개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에서는 그때마다 묻고 있는 현존재가 물음 안으로 함께 끌려 들어오고 있다.>

무에 관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이어진다. < 변변치 않은 역사적 회고는 무가 본래적인 존재자의 대립 개념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 그것의 부정이라는 것을 내보여 준다. 그러나 무가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 이러한 대립 관계는 좀더 뚜렷한 규정을 받게   아니라, 이제 비로소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물음 제기가 깨어나게 된다. 무는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대립자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존재자의 존재에 속하여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103)

 스스로가 존재자의 존재에 속하여 있다는 . 그러므로 헤겔의 명제, ‘순수한 존재는 순수한 무와 동일한 것이다 옳다. 그러니까 <만일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 형이상학 전체를 포괄하는 물음이라면, 무에 대한 물음이 형이상학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종류의 물음이라는 것도 입증이 된다.> 또한 지금의 형이상학이 논리학에 지배되어 있다고 할때, 무에 대한 물음은 논리학의 기저인 ‘부정 근원에 대한 물음과 같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을 속속들이 장악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학문적 현존재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학문적 현존재는 존재자에 천착하는 방식의 실존(세계연관) 추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학문적 현존재가 ‘무의 물음으로 끌려들어간다는 것은 일견 의문스러울  있다. (다소 의역)

그러나 도입부에서도 잠깐 엿보았듯이 <학문적 현존재는 애초부터  속에 들어서 머물러 있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며 <학문적 현존재는 무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그가 무엇인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 무가 드러나고 있는 바로  이유 때문에, 학문은 존재자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만들  있는 것이다. 학문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존하고 있을 때에만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를 언제나 새롭게 획득할  있다.  과제는 지식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에 관한 진리의 ()영역을 언제나 새롭게 열어 밝혀 보이는  있다.>

105~ ; <오로지 무가 현존재의 밑바탕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로  까닭에, 존재자가 아주 낯설게 우리를 엄습해   있다. 오직 존재자의 낯설음이 우리를 압박해  때에만, 존재자는 경이를 불러일으키며  자신 경이의 대상이 된다. 오직 경이의다시 말해 무가 드러나는근거 위에서만 “라는 물음이 튀어 나온다. 오직 “ 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근거에 대하여 물을  있고 근거를 제시할  있다. 오직 우리가 물을  있고 근거를 제시할  있기 때문에, 탐구자의 운명이 우리 실존의 손에 주어진 것이다.

무에 대한 물음은 우리묻고 있는 존재자자신을 물음 속에 몰아 넣는다. 따라서  물음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물음이다.

인간 현존재는 그것이  속으로 들어서 머물고 있을 때에만 존재자와 관계할  있다. 존재자를 넘어서는 사건이 현존재의 본질 속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바로  넘어섬이 ( 넘어섬, 이야말로!) 형이상학 자체이다. 바로 여기에 형이상학이 “인간의 자연 본성 속한다는 사실이 작용한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분과도 아니요 임의적인 착상의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다. 그것은 현존재 자체이다. …

지금까지 풀어 헤쳐  무에 대한 물음이 실제로 우리 자신에 의해 함께 물어져 왔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을 밖에서부터 우리 앞으로 갖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제 처음으로 형이상학 안으로 우리 자신을 “옮겨놓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형이상학 안으로 옮겨 놓을  없는데,  까닭은 우리가실존하고 있는 이미 항상  안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이 실존하고 있는 , 어떤 방식으로든지 철학함이라는 사건은 일어난다. 철학은우리가 그렇게 부르고 있는  그것은형이상학을 궤도에 올려 놓는 것으로서, 형이상학 안에서 철학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며 자신의 명확한 과제에 도달한다. 철학은 고유의 실존이 전체로서의 현존재의 근본 가능성 안으로 독특하게 뛰어들 때에만 일어난다(궤도에 올려진다). …  자체가 강요하고 있는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은 이것이다. “도대체  존재자가 있고 도리어 () 없는가?”>

2. 머리말 : 형이상학의 밑바탕으로 파헤쳐 내려가기

 

데카르트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이렇듯 철학 전체는 하나의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줄기는 자연학이요, 그리고  줄기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은 여타의 다른 학문들입니다.” 형이상학이 철학의 뿌리라면, 형이상학은 어느 땅에 내려진 뿌리인가? 하이데거의 작업은 형이상학이라는 뿌리가 의지하고 있는 토양을 묻는 일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다룬다. 그리고 <…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존재의 빛안에서 나타난다.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표상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미 존재가 빛을 밝히고 있다. 존재는 이미 일종의 비은폐성(Άλήθεια=감추어져 있지 않음, 드러나 있음, 진리) 도달해 있는 것이다. 존재가 과연 그러한 비은폐성을 수반하는지, 수반한다면 어떻게 수반하는지, 존재 자신이 형이상학 안에서 스스로를 (알려 오며)  비은폐성으로서 알려 오고 있는지, 어떻게 알려 오고 있는지 등은 어둠에 싸여 있다. 존재는 그것의 탈은폐적 본질에서, 다시 말해 그것의 진리에서 사유되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은 존재자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대답함에 있어 존재의 이러한 사유되지 않은 개방성(드러나 있음)에서부터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의 진리가 철학이라는 나무의 뿌리인 형이상학을 떠받치고 길러 주는 바로  밑바탕이라고   있다.> (15)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자에게 머물러 있게 되고 존재로서의 존재에로 향하지 않게 된다.> (15-17)

존재라는 ,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무엇으로서의 존재.  존재의 빛됨,  비은폐성을, 기존의 형이상학은 사유 없이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자를 가시화하는 빛으로서의 존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탈은폐적 본질’ = ‘존재의 진리 형이상학의 토양이다.

존재의 진리 형이상학의 ‘토양이라는 비유를 조금  확장해서,  물음이 정확히 어느 영역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철학이라는 나무가 있고 형이상학이라는 뿌리가 있으며, 존재의 진리라는 토양이 있다. 뿌리는 토양에서 자라지만 토양이 ‘나무가 되도록완전히 흡수해버릴 수는 없다. 도리어 뿌리는 토양에 속한다.

이런 이야기다. <어떤 사유가 형이상학의 밑바탕을 경험하려고 시도하는 ,  사유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하는 대신에 존재의 진리 자체를 사유하려고 시도하는 ,  사유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형이상학을 떠난 것이다. … 그렇게 되면 형이상학의 본질 역시 형이상학이 아닌 어떤 다른 무엇일 것이다.> (17-19) 존재의 진리는 형이상학의 토양-밑바탕이다. 그러나 형이상학 밖에 놓인 물음일  있다. 철학이라는 나무에 속하지 않지만  밑바탕으로서 철학 전체를 가능하게 한다. 혹은 붙잡아 둔다. 다만 형이상학 밖의 사유라고 해서 형이상학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은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는  사유 안에서 극복된다.> (19) 형이상학을 없애는 극복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극복이다. 여전히 형이상학은 철학의 뿌리다.

그러니까 철학을 송두리째 바꿔버리자는 말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동물이라는 , 형이상학적 물음은 여기 ‘있는우리 인간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진리에 관한 물음에는 <단순히 철학의 구성틀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철학 자체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며, 존재자  자체를 표상하는 사유로서의 철학이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본질과 필연성을 받고 있는 바로  존재로부터의 가깝고 멀고가 걸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될 것으로 걸려 있는 것은, 존재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진리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의 관련을 발생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형이상학이 자신의 밑바탕에 계속 등을 돌린 채로 남아 있어 인간에 대한 존재의 관련이  관련 자체의 본질에 의하여 밝혀지기를여기서의 밝혀짐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에 귀를 기울이게 해준다거부하는가 하는 것이다.> (21-23)

 

그렇다면  지금까지 형이상학의 ‘표상하는 사유  진리와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는가? 그런 ‘인식의 진리또는 ‘명제의 진리  비은폐성을 본질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는가? < 까닭은 비은폐성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비은폐성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것(das Wesende, 현성하는 )  은폐성이 말하자면 존재자로서 나타나고 있는 비은폐된 것을 위하여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숨어 있기 때문이다.> (25) 은폐되어 있는 비은폐성의 은폐성, 이라고 말해도 될까. 빛이 있어서 우리가 사물을  , 사물에만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빛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물을 밝히는 빛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다.  비은폐성,  ‘드러냄’, ‘열어젖힘이라는 토대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비은폐성 자체의 본질에 의해 이중으로 은폐된다.

 

문제는  <인간 본질에 대한 존재의 원초적인 관련>(27) 잊어버린 것이 현대 세계를 규정해왔다는 것이다. <존재의 부재가 인간을 오로지 존재자에게만 떠맡기어, 인간이 그의(인간의) 본질에 대한 존재의 관련을 거의 떠나다시피 했고  동시에  떠나 있음이 가리어진 채로 남아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것인가? 상태가 실제로 그러하고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그러했었다면 어떻게  것인가? 만일  망각이 앞으로도 더욱더 결정적으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가려는 징조가 엿보인다면 어떻게  것인가?> 반복이지만, 그러므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지금 사유의 가장 필요한 역할이다.

 

존재와 시간 그런 길을 향해 있는 것이다. 사유에 빠져들다 보면 주어진 것을 사유하는  그치기 쉬워진다. 지금의 형이상학이 그런 꼴이다. 이미 사유된 (존재자)들을 반복해서 사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유로 하여금 존재의 진리가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갖는 관련에 이를  있는 길을 마련하고, 사유로 하여금 존재 자신을  진리에 있어서 알맞게 사유하도록 하나의 작은 길을 열어 주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도된 사유는 바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다.> (29-31)

다시말해 존재의 진리를 묻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을  주체성으로부터 묻지 않고,  기존의 방법을 답습하지 않고,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련하여 사유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존재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 바로 이런 의도였다. <존재의 인간 본질과의 관련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존재자  자체의 개방성(“거기에”)과의 본질적 관계를  낱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안에 들어서 있는 본질 영역을 지칭하기 위해 “현존재”(거기에 있음)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31)

권말의 이기상 논문 중에서 ; <인간 현존재란 “ 존재와 더불어 존재자에로의 침입이 일어나고 있는 거기에(현장)”이다.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들)  이름은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존재의 진리의 자리로,  존재의 진리의 마을로 경험되고  그에 상응하게 사유되어야  그것을 지칭한다.”(본문33) “존재 진리의 자리”, “존재의 밝힘으로서의 현존재는 또한 항상 다른 존재자에게 개방되어 있는 존재자이며, 다른 존재자가 스스로를 알려 오고 파악되고 장악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존재와 시간강독에서 유의해야   하나가 여기에 있다. 현존재라는 개념은 단지 인간을 다르게 이름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방법론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또한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 이렇게 정의해뒀다. <현존재의 ‘본질 그의 실존에 놓여 있다.> (33) 실존은 존재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열려 있음에 대해 열린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35)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를 묻는 존재자(그렇다면 현존재) 존재방식. 현존재는  ‘존재자에로의 침입 일어나는 공간, 혹은 ‘이며, 거기에  있는 존재자이기도 하다. 실존은  곳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는 자세나 방식이다. <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생각되어야  것은만일 존재의 진리를 향해  진리에서부터 사유하는 바로  사유의 영역 내에서 사용된다면―“들어서 있음”(Instandigket)이라는 낱말로 가장 멋있게 표현할  있을 것이다.> (35)

 모든 것이 결국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토대를 탐구하려는 작업을 “ ‘존재 시간으로 이름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은 <존재의 진리에 대한 앞선 이름으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존재의 진리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것(das Wesende des Seins)으로서 존재 자신>(39)이었다. 존재는 그렇다 치고,  하필 ‘시간인가?

(‘존재 관한 그리스 어원을 따지다가) < 현전에는 사유되지 않고 감추어진  현재와 지속이 작용하고 있으니,  시간이 현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는 시간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시간은 비은폐성을, 다시 말해 존재의 진리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유되어야  시간은 존재자의 변화하는 흐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 시간은 분명 전혀 다른 본질을 가지며,  본질은 형이상학의 시간 개념을 통해서는 아직 사유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사유될 수도 없다. 이렇게 시간은 처음으로 경험되어야  존재의 진리를 지칭하기 위해 이제 비로소 숙고되어야  앞선 이름이 된다.> (41) 그러므로 <존재의 진리를 기획 투사하면서 열린  견지하고 있는 존재의 이해는 존재 이해의 가능한 지평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된다.> (43)

 

그러므로 “존재와 시간 작업은, 혹은 존재-물음은, 이름 붙이자면 ‘기초 존재론 것이다. 존재론을 위한 기초를 찾는 , 형이상학의 근거의 근거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기초 존재론은 존재론이 아니다. 시작 부분의 나무-비유에서 ‘존재진리 묻는 일이 어느 영역에 있는지 확정했듯이, <형이상학의 근거에로 파헤쳐 내려가려고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는  사유는 이미  걸음을 떼는 순간  모든 존재론의 영역을 떠난 셈이다.> (51)

 

그렇다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은 <표상하는 사유로부터 회상하는 사유에로 넘어가는 계기의 마련>이다. (51) 형이상학은 습관적으로 존재자 자체를 표상하게 됐으며 형이상학적 사유는  표상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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