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아카이빙 용도. 발췌와 사견이 뒤섞여 있음!!





 

텍스트의 즐거움」,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김희영 , 동문선

 

어떻게 타자에 의해 진술된 즐거움(꿈이나 파티 이야기의 지루함)에서 즐거움을 느낄  있단 말인가? 어떻게 비평을 읽을 것인가? 거기에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비평에서의 나는 2단계의 독자이므로 이런  위치를 이동시켜야 한다.  비평의 즐거움의 속내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는 대신이것은 즐거움을 놓치게  것이 확실하므로비평의 즐거움을 엿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은밀히 타자의 즐거움을 관찰하며, <변태/뒤집음>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 주해는  눈에 하나의 텍스트, 허구, 찢어진 봉투가 된다. 작가의 변태(그의 글쓰는 즐거움에는 어떤 직책도 없다), 그를 읽는 비평가의 변태는  배가 되고, 작가와 비평가를 읽는 독자의 변태는  배가 되어 끝이 없다. // 65p




 

조르주 풀레, “비평적 의식”, 조한경ㆍ이현진 , 지식을만드는지식, 395-429

 

책은 무기력한 물질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책은 인간이 그것을 읽을  새로운 존재 형태를 부여받는다. 그때 책은  이상 사물이 아니다.

책과의 만남은 표면에서 그치지 않는다. 책을 읽을  독자와  사이에는 아무런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는  안에, 책은 독자 안에 있다. 안팎이 사라진다.

기이한 상호교류 이어진다. 책을 펼치면 수많은 단어, 이미지, 개념이 솟아오른다. 그때 책은 사물이 아니라 그런 사유를 독자와 공유하는 무엇이다.  책은 사물이 아니라 사유가 되어 독자의 안으로 들어온다.  관계는 전적으로 독자의 의식에 달려 있다. 사물은 스스로 존재할  있지만 사유는 누군가가 사유함으로써 존재한다. 심적 대상으로서의 사유.

이때 심적 대상으로서의 사유 또한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 물질성(사물성) 포기한다. 종이가 아니라 언어, 허구가 된다. 그런데 이로 인해 독자도 객관적 현실 세계에서 벗어난다. 물렁물렁하고 신축적인 상상 세계. 주체와 대상의 대립, 일상적인 부조화가 완화된다. 이렇게 독서는 객관적 현실을 무화하여 독자와 ‘사유 내밀한 관계를 탄생시킨다.

 ‘내밀성 일으키는 현상. 독자는 타자(작가) 사유를 자기 사유인 것처럼 사유한다. 터무니없는 현상. 그것을 타자의 사유인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유한다. 그런데 타자의 사유가  사유가  수는 없으므로, 반대로 나는 타자가 된다. 다른 주체가 된다. ‘ 것이 아닌 다른 술어들의 주어 된다. (나는 나의 사유를 사유한다. 타자는 타자의 사유를 사유한다. 그런데 내가 타자의 사유를 사유하게 된다) 영역의 무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사유하는 ,   심적 세계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타자의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주체가 타자화하는 현상까지 포함한다. 이때 랭보의 “나는 타자다라는 발언이 성립한다. (풀레는 ‘낯선 주체가 설정된다 말하는데, 조금 변주하고 싶다 ; “정확히 말해서 독서란 단순히 일련의 낯선 단어들, 이미지들, 개념들에 자리를 내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들을 발화하고 엄호하는 낯선 원칙에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다”)

(보론 ; 이런 상상이 가능한 이유는 독서 대상으로서의 사유,  독자가 사유하는 사유,  어떤 결과가 아니라 과정적인 , 실천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 ‘풀레의 사유의 결과 정적인 무엇으로 존재할  있다면, 나는 타자화(풀레화)하지 않고 그것을 사유할  있다. 그러나 풀레의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사유 과정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풀레의 사유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 사이에 약간의 간극이 있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풀레가 되어서 사유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 독서란  자신에 대한 나의 지속적인 지각 행위이기도 하다.” 독서를   나는 독서하고 있지 않은 ‘일상적인 상태의  사유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분열이 일어나는 셈인데, 새로이 탄생한  낯선 주체는 누구인가. ‘나를 대자로서 취급하는또다른 나는 누구인가. 전기적 비평의 맥락에서, 이는 작가일  있다. 그러나,

내가 보들레르나 라신에 대해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그들의 천재성에 아무리 가까워졌다고 해도, ... 그것들은 개별 작품을 생동케 하는 주어의 원리, 고유한 기조, 형태적 완벽성을 명료하게 밝혀 주기에는 부족하다. 그때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책의, 오로지 책과 함께하는 동일한 관계를 재부에서 절감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작품 외부에는, 지금 작품이  안에서 누리는 특권을 받을 자격이 아무것도 없다. 작품은 나를 밖으로 몰아 작가에게 가게 하기는커녕 나를 온통 붙들어 작품 안에 끌어들일 태세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2 나는 바로 작품이다. 독서에서 작품은 생명을 얻는다.일단 어떤 문학작품이 독서를 통해 생명을 얻으면, 독자는 자기의 삶을 유보하는 대가로 대상에 대한 주체로서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할  있겠다.”






문강형준,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문학동네 16` 봄호 394-412p

 

비평이란 무엇인가? 한자어로 ‘비평이란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한다 뜻이다.

라는 글자는 ‘  ‘견줄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손으로 사물들을 서로 견주고 비교한다 의미를 가진다.

 결과를 왜곡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일이  ‘이다.

비평에서 ‘ 가치를 판단하고 비교하는  자체로, ‘해석이라   있고, ‘  해석을 통해 얻은 결과를 다른 힘에 흔들리지 않은 채로 정확하게 말하는 ,  ‘비판이라   있다.

다시, ‘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독해와 평가라면 ‘  평가의 힘을 믿으며 그것을 내세우는 일일 터이다.

(지적인 작업과 공적인 행위)

... 다시 말해 비평은,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텍스트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읽는 데에서 그치는  아니며, 자신이 파악한 깨달음과 진리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행동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   있다.

(고등정규교육과정에서 배우는 문학 수업은 , 까지인  아닐까)

 

지식은  안에 이미 세상의 옳고 그름을 바라보는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고, 정치는 지식을 통해 권력의 메커니즘을 배치한다.

 

판단과 평가는 텍스트 자체를 넘어서야만 한다.

 

(비평가들의 텍스트는 대개 예술 작품일진대) 예술은 반드시 다른 이들(대중) 의해 ‘수용되어야만 한다. ... 사회적 수용과정에서 생겨나는 예술은 궁극적으로 특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 개인의 경험이 사회의 다른 공동체의 경험과 교감하는 것이다. ... “예술은 ...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조직에 작용하고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어떤 “정신의 특별한 영역 작용하는 미적인 것에서 그치는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감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인 행위이다. ...

예술 하나의 ‘사회적 행위이자 삶의 능력이라고  , 비평의 대상은 ‘예술 자체 아니라 ‘ 자체 된다. 급진적으로 말한다면, 예술은  삶이다. ... 비평적 판단은 좁은 미학적 범주를 뛰어넘어 예술 작품과 우리의 삶이 공통으로 놓여 있는 특정한 , 특정한 시대에 대한 넓은 시야를 요청하는 일이다. 미학적 판단을 (포함하되, 이를) 넘어선 사회적 판단이야말로 우리 시대, 비평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핵심적 기능이다. 이제 비평가의 공부는 텍스트에서 사회로, 예술에서 삶으로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텍스트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하기 위해서 비평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태도는 ‘비판적인(critical)’ 태도이다. ... (요약 ; ) 푸코에 따르면 ‘비판적인 태도 어떤 종류의 명령에 의해 항시적으로 지탱된다.  명령이란, 15-16세기 ‘통치 기술 확산하면서 “어떻게 통치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항하여 생겨난 저항의 질문이다. ‘통치 기술이란 “기독교에서 신도 개개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생애에 걸쳐 누군가와 총체적이고, 세세한 복종관계를 맺으며 통치되어야 한다는 관념이다.” 비판의 태도가 내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저런 원리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정신 규범으로, 그리고 저러한 절차에 의해서, 저런 식으로가 아닌, 저것을 위해서가 아닌, 저들에 의해서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통치하는가라는 억압의 질문은 이렇게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저항의 질문을 낳는다.

 

요컨대 비판적인 태도란 통치하려는 권력이 내세우는 진리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태도, 그럼으로써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 그것으로 통치에 저항하는 거점을 마련하는 태도이다.

 

비판이란 권력의 효과를 유발하는 진리와 진리의 담론을 말하는 권력에 질문을 던질 권리를 주체가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발생하는 움직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렇다면! 비판이란 자발적 불순종의 기술이자 성찰하는 고집스러움의 기술일 것이다. 비판은 우리가 한마디로 진리의 정치라고 부를  있는 것의 맥락 속에서, 주체가 불복종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보증하는 일일 것이다.”

 

비평은 이러한 비판의 태도를 가지고 텍스트를 판단하는 일이   비로소 ‘기예 넘어 “ 영역으로 진입한다. 비평에는 지식이 있고(진리인가 아닌가), 윤리가 있고(옳은가 옳지 않은가), 무엇보다 정치가 있다(어떻게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비평은 그래서 단순히 ‘텍스트 읽기’(지식) ‘정치 참여’(정치) 사이의 이항 대립이나 선택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코가 우리에게 말하는바, 비평은 “진리의 정치속에서만 가능하다. 진리와 정치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언제나 요청한다. 진리는 권력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정치는 진리(라고 믿길  있는 ) 정당성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비판적인 태도는  둘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권력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로 권력에 복종하지 않기 위해서 진리를 탐구한다.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글쓰기는 특권적인 행위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쓰기로 자기와 타자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글쓰기 특권적이면서 타자를 일방적으로 표상한다는 점에서 월권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때 침해받는 것은 일방적으로 타자로 표상되는 사람의 권리, 특히 /그녀들이 스스로를 표상하는 권리이다. 따라서 ’글쓰기라는 행위, ’글쓰기 타자를 표상하는 행위는 지배의  형태이다.” (55p) “위장된 보편성의 ’글쓰기 타자를 표상함으로써 이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술렁거림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말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 알아듣는 귀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그렇다면 텍스트를 읽는 것은 권력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텍스트들의 인용으로 텍스트 하나가 탄생한다고 했을   텍스트가 “대상을 표상하는 방식 지금 사회가(텍스트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하는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비판의 방식이 문제이다.”

 

과연 개개의 인간이 좋든 싫든 처해 있는  위치성별이나 민족, 계급 와는 전혀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말할  있을까?”




Posted by 습작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