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아카이빙 용도. 사견이 뒤섞여 있음.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서사물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서사는 놀랄 만큼 다양한 장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들 각각은 마치 어떤 재료라도 인간의 스토리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다는듯이 다양한 매체와 형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영상(정지된 그림과 동영상), 몸짓, 그리고  모든 매체들이 혼합된 일련의 연쇄 등이 가능하다. 서사는 신화, 전설, 우화, 소설류, 서사시, 역사, 비극, 드라마, 코미디, 마임, 회화(카르파치오의  우르술라 연작화를 생각해보라), 스테인드글라스로  , 영화, 만화, 뉴스, 그리고 일상의 대화 속에 들어 있다. (중략)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라는 구분과는 상관없이, 서사는 초국가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Roland Barthes, “Introduction to the Structural Analysis of Narratives”, A Barthes Reader, ed. Susan Sontag, New York: Hill and Wang, 1982, pp.251~252

재인용) 박진,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토도로프에서 데리다까지”, 랜덤하우스중앙, 2005, 15p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 동문선, 1997

텍스트ㆍ즐거움ㆍ권력ㆍ도덕성」, 김희영, 7-24p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oeuvre)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텍스트(texte)이다. 작품은 항상 상징적인 /비상징적인 ,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지금까지 해석 비평이 추구해  것이 항상  마지막 시니피에, 총체적이고도 단일한 의미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선조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의미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층과 이탈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바르트는 크리스테바 작업의 도움을 받아 텍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ㆍ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ㆍ의사소통ㆍ재현의 산물이라면(현상 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ㆍ상징화ㆍ생산성(발생 텍스트) 영역이다. ... 작품과 텍스트, 현상 텍스트와 발생 텍스트의 구별은 시간적 상황이나 작품의 현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를 작업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은 소비의 대상이나,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에서 구해 내어 유희ㆍ작업ㆍ생산ㆍ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 존재할 뿐이다.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ㆍ감정ㆍ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자체도 기호드르이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저자의 죽음>, 본서 33) 그러므로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것은  이상 의미가 없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의미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비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 뿐이다. 글을 쓰는 <> 종이 위에 씌어진 <> 불과하듯, 독자도 글을 읽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ㆍ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저자의 죽음>, 본서 33)

 

... 글읽기의 체험을 바르트는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이 바로 즐거움(plaisir) 즐김(jouissance)이다. ... plaisir 텍스트는 문자를 인정하지만(즐거움은 말해질  있는 것이기에), jouissance 작가와 더불이 <감당할  없는 텍스트, 불가능한 텍스트> 시작된다(왜냐하면 jouissance 텍스트는 말해질  없는 것이기에, 혹은 말해진  사이에 놓여 있기에. <텍스트의 즐거움>, 본서 68). 따라서 joussance 텍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그것을 쓰는 것만이 가능하다( 구별은 《S/Z》에서 읽혀지는[lisible] 것과 씌어지는[scriptible] 것의 구별과도 흡사하다). 그렇지만 plaisir jouissance 문학비평의  척도가   있다.  plaisir 텍스트는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글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 주는 텍스트이다. 이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전ㆍ문화ㆍ섬세함ㆍ행복감> 동의어라   있다. 그러나 jouissance 텍스트는 독자ㅢ 역사적ㆍ문화적ㆍ심리적 토대나,  가치관ㆍ언어관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자아가 회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성도 가지지 아니하며, 모든 규범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변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plaisir jouissance 구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으며,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 인류의 태고적부터 권력이 기재된  대상이 바로 언어,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표현인 언어체이다.』(<강의>, 본서 119-120)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위해 하는 』(<강의>, 본서 120)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이처럼 바르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언어의 권력성을 문제시한다. ...

그렇다면 이런 언어의 권력성, 지배 견해의 폭력, 상투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 바르트의 초기 저술에 나타난 것은 우선 역사성의 회복에 의한 권력의 자연스러움의 추방이라고 설명된다. ...

그렇지만 이런 역사성의 회복이 ... 유일한 전력은 아니다. ... 『우리에게는 언어체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 언어체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다』(<강의>, 본서 122) 바로 이것에 바르트에 의해 제시된 권력 담론에 대항하는 두번째 전략이다.  속임수를 그는 글쓰기라 부른다. 언어 안에서 언어와 투쟁하는 작업을 보여 주는 글쓰기,  언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다른 언어를 억압하지 않으며, 미래의 주체가 <어떤 후회도 억압도 없이>, <욕망의 수만큼이나 많은 언어를> 구사하며 즐기는 글쓰기, <법칙이 아닌 변태> 의해 이런저런 언어를 말할  있는 글쓰기, ... 그렇다면 글쓰기의 속임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무한한 이동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파솔리니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언어가 체제에 수렴되면  그것을 버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  언어가 권력으로 행사하려고 하면,   언어를 과감하게 버리고 <욕망의 진실> 따라 끝없이 자리를 이동해야 한다. 자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 권력이 우리를 이용할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동 작업은 글을  때는 단상으로, 강의를  때는 이탈이나 소풍으로 나타나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언제나 죽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있다』(<강의>, 본서 141)라고 표현된다.

 

 

34p. 「저자의 죽음.

 

발자크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아무도(어떤 <인간>)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 하나의 정확한 사례가  사실을 보다 분며이 해줄 것이다. 최근의  연구는 그리스 비극의 구성상의 모호성을 밝혀 주었는데,  텍스트는 이중적인 의미의 단어들로 짜여져 있어 각각의 인물들은  말들을 일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오해가 바로 <비극적>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각각의 말들을  이중성 속에서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다시 말해 자기 앞에서 말하는 인물들의 귀먹음까지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독자라는 것이다(혹은  경우에는 청자). 이렇게 해서 글쓰기의 총체적 존재가 드러난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에 집결되는  장소가 있는데,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목적지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독자는 역사도 전기도 심리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37-47, 「작품에서 텍스트로

 

1)

텍스트를 계산할  있는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된다. 텍스트로부터 작품을 물질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텍스트> 있을  있으며, 오늘날의 문학적 산물 안에서도 전혀 텍스트가 아닌 것이 있다.  차이는 다음과 같다.  작품은 책들의 공간의  부분을 차지하는 실체(substance) 단편이나(이를테면 도서관에서), 텍스트는 방법론적인 영역이라는 점이다.  대립은 라캉의 구별을 상기시킨다.  <현실>(realite) 보여지는 것이나, <실재>(reel) 증명될  있다는. 이와 마찬가지로 작품은 보여지는 것이나(서점ㆍ서류함ㆍ시험 일정표 안에서), 텍스트는 장명되는 것이며, 몇몇 규칙에 의해 (혹은 반하여) 말해진다. 작품은  안에 쥐어지나,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유지된다. 그것은 단지 담론의 움직임 속에서만 존재한다. ... 텍스트는 작품의 분해가 아니며, ... 혹은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있는 것이다.  결과 텍스트는 결코 멈출  없다(이를테면 도서관의 서가에). 텍스트의 구성 운동은 횡단(traversee)이다(특히 그것은 작품을, 여러 작품들을 관통할  있다).

 

2)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는 (좋은) 문학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위계 질서나, 심지어 단순한 장르 구분에도 포함될  없는 것이다. 반대로 텍스트를 구축하는 것은 과거의 분류에 대한  전복의 힘이다. ... 만약 텍스트가 분류의 문제를 제기한다면(게다가 이것이  <사회적>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텍스트가 언제나 어떤 한계 체험을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 텍스트는 언술행위의 규칙들(합리적인 , 읽혀질  있는 ) 한계까지 나아간다. 텍스트는 정확히 일반 견해(doxa)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 텍스트는 언제나 반론적인(paradoxal) —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반 견해 밖에 있는것이다.

 

3)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signifie) 닫혀진다. 이런 기의에  가지 의미작용의 양상이 부여될  있다. 기의를 명백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헌학), 또는  기의가 은밀하고도 최종적인 , 우리가 찾아내야만 하는 (맑시스트적ㆍ정신분석학적ㆍ주제적, 해석)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러하다. 요컨대 작품은  자체로서 하나의 일반적인 기호처럼 작용하며, 따라서 그것이 기호(Signe) 문명의 제도적 범주를 표상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와 반대로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후퇴를 실천한다. 텍스트는 지연시킨다. 그것의 영역은 기표(signifiant)이다. 기표는 <의미의  부분>이나  물질적인 입구가 아닌, 오히려 반대로 의미의 뒤늦음(apres-coup)으로 이해되어야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표의 무한성은 뭔가 <말로 표현할  없는 >(ineffable. 명명할  없는 기의) 관계된 것이 아니라, 유희의 개념에 관계된다. 텍스트 영역에서의 기표의 지속적인 생성은, 성숙의 유기적인 진로나 해석학적인 심화의 진로가 아닌 분리ㆍ중복ㆍ변주의 계열적인 움직임에 따라 이루어진다. 텍스트를 지배하는 논리는 이해(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 정의하는) 아닌 환유이다. 연상ㆍ인접ㆍ이월(移越) 작업은 상징적 에너지(그것이 없다면 인간이 죽어갈) 분출과 일치한다. 작품은 평범하게 상징적인 것이나( 상징성은  고갈되어 정지된다), 텍스트는 근본적으로/완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의 전적으로 상징적인 속성 안에서 구상되고 인지되고 수용되는 작품이  텍스트이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는 언어로 회수된다.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나 탈중심적인 것이며, 닫힌 것이 아니다.

 

4)

텍스트는 복수태(pluriel)이다.  말은 단지 텍스트가 단지 여러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의미의 복수태 자체를, 환원 불가능한 복수태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텍스트는 의미의 공존이 아닌 통과이자 횡단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진보적인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해석이 아니며, 폭발ㆍ분산이다. 텍스트의 복수태는  내용의 모호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짜고 있는(어원적으로 말하면 텍스트는 직물이다) 기표들의 입체적인 복수태라고 불릴  있는 것에 달려 있다.

텍스트의 독자는 한가로운 주체 비유될  있다(자신의 마음속에서 모든 상상계의 긴장을 늦추는). ... 그가 인지하는 것은 이질적이고도 분리된 실체와 전망에서 오는 복수태적인 환원 불가능함이다. , 색채, 초목, 열기, 공기, 미세한 소리의 폭발, 새들의 가냘픈 지저귐, 골짜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지나가는 소리, 몸짓,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주민들의 옷차림.  모든 사건들(incidents) 반쯤 알아볼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기존의 약호(code)들로부터  것이지만  배합은 유일하며, 그래서 산책을 차이로서만 반복될  있을 뿐인 차이로 설정한다.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 개별성이 아니라) 속에서만 존재할  있다.  독서는 일회적(semelfactive.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모든 연역적ㆍ귀납적인 과학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텍스트의 <문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것이지만, 전적으로 인용과 지시물ㆍ메아리들로 짜여진다.  과거, 혹은 현대의 문화적 언어들이 하나의 거대 입체 음향 속에 텍스트를 여기서 저기로 횡단한다. 다른 텍스트의 <사이 텍스트>(entre--texte) 해서, 모든 텍스트를 사로잡는 상호 텍스트성은 텍스트의 어떤 기원과도 혼동될  없다.

작품의 <원천>이나 <영향> 대한 연구는 계보의 신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텍스트를 이루는 인용은 익명의, 인지할  없는, 그렇지만 이미 읽혀진 것이다. 그것은 인용부호를 붙이지 않은 인용이다.

 

5)

텍스트는 아버지의 기재 없이도 읽혀진다. ... 텍스트는 아버지의 보증 없이도 읽혀진다. 상호 텍스트성의 복원은 역설적으로 유산을 파기한다.  말은 저자가 텍스트로, 그의 텍스트로 <회귀할>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손님의 자격으로 초대된다는 뜻이다. ...  이상 특권적ㆍ가부장적ㆍ비은폐적인(alethique) 것이 아니라 유희와 관계된다. 말하자면 그는 종이 저자가 된다.

 

6)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구해 (만약 작품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유희ㆍ노동ㆍ생산ㆍ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말은 텍스트가 글쓰기와 글읽기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파기할 (적어도 축소시킬 )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작품 안에서 독자의 투사를 강화함으로써가 아니라, 동일한 의미실천 안에 글쓰기와 글읽기를 연결시킴으로써 가능하다. ...

사실, 소비로서의 읽기는 텍스트와 유희하는 것이 아니다. <유희>(jouer)라는 말은, 여기서  모든 다의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것이다. 우선 텍스트는  자체로써 유희한다(놀이가 가능한 문이나 기구처럼). 그리고 독자는   유희한다. 그는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하며(놀이의 의미에서), 그리하여 그것을 재생산할 실천을 추구한다. 그러나  실천이 수동적ㆍ내적인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텍스트는 바로 이러한 축소에 저항한다)그는 텍스트를 연주한다(jouer). ...

텍스트도 이런 새로운 종류의 악보와 아주 유사하다. 그것은 독자에게 실질적인 협동을 요구한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이다. ... 오늘날에는 비평만이 작품을 집행/연주한다. 현대적인 텍스트(난해한) 전위적인 영화, 혹은 그림 앞에서 느끼는 <권태> 바로 독서를 소비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권태란 텍스트를 생산ㆍ유희ㆍ해체할  없다는 것을, 시동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마지막 접근,  즐거움의 문제를 상정(제안)하게 한다.

즐거움(plaisir???) 아무리 생생하고,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부분적으로는(예외적인 비평의 노력을 제외하고는) 소비의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저자들을 읽을  있다는 것은, 오늘날 그들처럼 다시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오늘날 <그렇게>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소간에 서글픈  인식은,  작품들의 멀어짐이  현대성을 상정하는 바로  순간에, 나를  작품들의 생산으로부터 분리시키기에 충분하다(현대적이란, 우리가 다시 시작할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텍스트는 즐김jouissance?? 연결된다. 기표의 범주에 속하는 텍스트는 나름대로 사회적 유토피아의 성질을 띤다. 역사 이전에(역사가 야만성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텍스트는 사회적 관계의 투명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언어 관계의 투명성을 구현한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우세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언어들이 자유롭게 순환하는 바로  공간이다.

 

 

  개의 명제가 텍스트론의 분절을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 텍스트의 이론 자체가 메타 언어적인 나열로 충족될  없기 때문이다. ... 텍스트에 대한 담론은  자체가 텍스트, 연구, 텍스트에 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무관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며, 어떤 언술행위의 주체도 심판ㆍ선생ㆍ분석자ㆍ고해 신부ㆍ해독자의 입장에 두지 않는, 그런 사회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론은 다만 글쓰기의 실천과 더불어서만 성립될  있다.

 

 




박진,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랜덤하우스중앙, 2005

178-9p

바르트의 S/Z 하나의 구조, 혹은 모델로부터 모든 서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이런 관점은 텍스트의 ‘차이 사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차이는 텍스트의 개별성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들과 언어들과 체계들의 무한성에 연결된 차이로서, 각각의 텍스트는  차이의 귀환이다. 바르트는 차이의 무한한 패러다임을 통해 개별 텍스트를 놀이(jeu) 되돌릴 것을 제안한다.”

“ ‘읽는 텍스트(le texte lisible)’(S/Z p.10)” ; 닫힌 체계, 단일한 구조, 화석화, 다시   없는 과거적 텍스트.

읽는 텍스트의 독자는 놀이의 즐거움 대신에 수동성과 진지함에 빠져든다. 바르트는 그러한 독서가 순수한 놀이가 아닌 언어의 노동이며, 독서를 통해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씌어진 것들의 거대한 체계를 견디는 일임을 폭로한다.”

읽는 텍스트와 대비되는 개념은 ‘쓰는 텍스트(le texte scriptible)’(p.11) 이다. 쓰는 텍스트는 그것을 다시 쓰는 독자에 의해 무한한 차이의 영역 안에서 끝없이 분산한다. 쓰는 텍스트는 언어들의 무한성을 감소시키는 어떤 단일한 체계에 의해서도 형태지어지지 않으며, 그래서 영원한 현재성을 지닌다. 바르트가 말하는 쓰는 텍스트란 구체적인 개별 텍스트가 아니라 놀이를 통해 얻어지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텍스트일 것이다.”

바르트의 S/Z 문학 혹은 읽는 텍스트들을 쓰는 텍스트로 변화시키고 문학 텍스트의 독서를 놀이로 되돌리는 전환에 대한 모색이다. 그러한 전환은 읽는 텍스트들에서 복수성(pluralite) 최대로 승인하는 읽기의 방식을 통해 시도된다. ‘다시 읽기(la relecture)’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방식은 텍스트의 문장들을 수많은 읽기의 단위들(lexies) 쪼개어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가 지우고 다시 이름 붙이기(nomination)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지배적인 시니피에는 임의의 조각들로 잘라지고, 텍스트는 시니피에뿐 아니라 시니피앙까지 실어 나르는 무수한 조각들의 거대한 더미가 된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의미를 찾는 일에 다름 아니지만,  이름들은 다른 이름들 앞에서 이내 지워지고 잊혀진다. 이름들의 목록을 성급하게 닫음으로써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이런 읽기의 방식은 최종적 의미로서의 텍스트의 진실이 아니라 텍스트의 복수성을 확정한다. 이렇게 하여 권위적인 텍스트는 끊임없이 부서지고, 읽는 텍스트는 복수적인 텍스트(le texte pluriel) 다시 태어난다.

복수적인 텍스트란 쓰는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관념으로서의 추상적인 텍스트이며, 새로운 방식의 읽기를 통해 생산되는 동시대적인 문학 텍스트라   있다. 개별 텍스트마다 거기에 내재하는 복수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복수성이 압도적인 텍스트에는 상호 작용하는 많은 네트워크들이 있으며, 그것들 간에는 아무런 위계가 없다. 그것은 시니피에들의 구조가 아니라 시니피앙의 은하계이며, 의미의 체계들이 그것을 점유할 때에도 언어의 무한성에 토대를   체계들은 결코 숫자가 제한되지 않는다. 이보다는  복수적인, 또는 ‘불완전하게복수적인 텍스트들에서는 위의 특성들이 다소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바르트는 이처럼 개별 텍스트에서 복수성의 정도를 평가하는 작업을 해석이라고 부른다.

바르트에 의하면 다시 읽기는 텍스트를 조립하거나 구조화하기를 포기하고 텍스트의 평면을 언어의 다면체들로 장식하는 일이다. 그것은 코드들이 서로서로 횡단하는 텍스트의 입체적인 공간을 그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코드란  기원이 잊혀진, 읽는 텍스트 안의 이미 씌어진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 개별적인 코드들은 각기 사슬처럼 연결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이들이 서로 얽혀서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텍스트를 이룬다. 코드들은  텍스트를 횡단하면서 텍스트를 이미 씌어진 거대한 책의 안내서로 만든다. 각각의 코드는 이미 씌어진 책을 참조하는 여러 관점들, 또는 텍스트를 짜는 여러 목소리들  하나이다. 다시 읽기는 여러 개의 코드들이 중첩된 지점들에서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울리도록 텍스트를 연주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읽기는 쓰기의 능동적인 보충물이 되고,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복수적인 텍스트를 얻기 위한 놀이가   있다.

이처럼 바르트의 서사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다섯 개의 코드들 각각이 아니라 그것들의 복합적인 짜임이다. 복수적인 텍스트에는 1차적이고 지배적인 목소리가 따로 없으며, 코드들은  언어에 대한 다른 언어의 지배력을 폐기하면서 끝없이 순환할 뿐이다. 바르트는 코드들의 이러한 네트워크를 땋아 늘인 머리, 또는 여러 가닥의 실로  레이스에 비유한다. 텍스트의 여러 목소리들을 의미의 통일체로 환원하는 단성적인 읽기는 텍스트의 짜임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바르트의 이러한 관점은 문학 수업을 통해 습득되고 우리에게 익숙해진 기존의 독서 방식이 텍스트의 복수성을 거세하고 문학 텍스트를 화석화하여 과거의 것으로 만드는 끔찍한 관습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또한 문학적 고전과 현재적인 텍스트, 읽는 텍스트와 쓰는 텍스트, 복수적 텍스트와 그렇지 않은 텍스트 등의 구분은 텍스트 내적인 특성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읽기의 방식과 태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할  있음을 암시한다.“

 

텍스트의 즐거움.

그렇지만 가장 고전적인 이야기(졸라ㆍ발자크ㆍ디킨스ㆍ톨스토이의 소설) 할지라도 ... 우리는 모든 종류의 책을 똑같은 강도로는 읽지 않는다. 텍스트의 원상태(integrite) 별로 존중하지 않는 어떤 도발적인 리듬이 형성된다. 앎에 대한 우리의 탐욕은 일화의 가장 뜨거운 부분들(이것이 항상 일화의 분절들로서, 수수께끼 혹은 운명의 드러남을 진전시킨다)  빨리 도달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몇몇 구절(<지루하리라고> 예상되는) 스쳐가거나 건너뛰게 한다. 우리는 아무 탈없이(아무도 우리를 지켜보지 않는다) 묘사ㆍ설명ㆍ고찰ㆍ대화를 건너뛴다. 마치 무대에 올라가 무희의 옷을 급히, 그러나 일정한 순서에 따라의식의 에피소드를 존중하면서 서둘러 마치게 하는벗기게 하면서 스트립 쇼를 재촉하는 카바레의 관객과도 같이. 즐거움의 원천, 혹은 문체인 분어법은 여기서  개의 산문적인 가두리를 내세운다. 분어법은 비밀의 인지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대립시킨다. 그것은 단순한 기능성의 원칙에 의해서 생겨난 틈새이다. 분어법은 언어의 구조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언어를 소비하는 순간에 산출되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예측할  없다. 사람들이 읽지 않을 것을 쓰는 것을 원할 수는 없기에. 그렇지만 읽혀지는 것과 읽혀지지 않는 것의 리듬이 바로 걸작의 즐거움을 만든다. 누가 프루스트를, 발자크를, 《전쟁과 평화      읽었단 말인가?

하나의 이야기에서 내가 음미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내용이나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아름다운 겉봉투 위에 입힌 상처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건너뛰며 머리를 들었다 다시 몰입한다. ...

여기서 독서의  가지 체제가 나타난다. 첫번째는 일화의 분절로 곧장 , 텍스트 양을 고려하며 언어 유희를 무시하는 독서이다. 두번째는 아무것도 건너뛰지 않고 심사숙고하며, 텍스트에 달라붙어 열심히 열정적으로 읽어 나가며, 일화가 아닌 언어를 절단하는 연사 생략을 텍스트의 매지점에서 포착하는 독서이다. 이런 글읽기를 사로잡는 것은 확대(논리적인) 진리의 가려냄이 아닌, 시니피앙스를 여러 겹으로 쌓는 것이다. 마치 눈을 가리고 자신의 손을 만지는 사람을 알아맞히는 놀이에서처럼  흥분감은 점진적인 서두름이 아닌, 일종의 수직적인 난장판(언어와 언어 파괴의 수직성)에서 온다. 각각의 (다른) 다른 손을 덮치는(차례차례로 달려드는 것이 아닌) 바로  순간에 구멍이 생기며, 그리하여 놀이의 주체, 텍스트의 주체를 열광시킨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는 빨리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일반 여론에 비해) 이두번째 달라붙는 독서는 현대적인 텍스트, 한계 텍스트에 적합하다. 졸라의 소설  권을 천천히 전부 읽는다면, 당신은  책을  손에서 놓게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텍스트를 빨리 단편적으로 읽는다면,  텍스트는 불투명한  당신의 즐거움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다. 당신은 뭔가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어에 일어나는 것은 담론에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  가두리의 틈새, 즐김의 간극은 일련의 언표들의 연속이 아닌 언술행위 속에서, 언어의 부피 속에서 산출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저자들을 읽기 위해서는 게걸스럽게 먹지도 삼키지도 말고, 이리저리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아주 가까이 섬세하게 털을 깎는  독서의 여유를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귀족적인 독자가 되어야 한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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