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 마리, “기억·서사”, 김병구 역, 소명출판, 2004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지나서 작자가 그 ‘사건’을 팔레스타인 사람이든 그 이외 지역의 사람이든 ‘사건’의 외부에 있던 자들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했을 때, 그는 그 텍스트에 ‘사건’의 외부 사람은 내부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바꿔 말하자면 외부의 사람들이 재현ㆍ표상하는 ‘현실’은 ‘사건’의 ‘현실’로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기입한 것이었다. 작자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리얼하게 재현된 ‘현실’이 설령 리얼하게 보이고 아무리 체험자 자신의 증언에 기초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사건’ 자체로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명령을 작자 자신이 직접 텍스트에 써 넣은 것이다. 텍스트는 이 같은 균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하기 위해 이야기된 그 서사가 독자에게 ‘사건’의 기억으로 읽히는 것에 저항하는 듯한, 텍스트의 그 몸짓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 (38p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것인가.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해서 ‘사건’은 우선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전달되어야만 한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진정으로 나누어 갖는 형태로 ‘사건’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와 같은 서사는 과연 가능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정교함의 문제인 것일까. 그렇지만 리얼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수많은 물음이 생겨난다.

다양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의 항쟁 그 한복판에 우리가 서 있는 현재, ‘사건’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는 비평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39p

 

그것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48p

 

기억은─또는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은─‘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에게 찾아온다. 여기에서 주체는 바로 ‘기억’이다. 그리고 ‘기억’이 이와 같이 갑자기 도래하는 것에 대해 ‘나’는 철저하게 무력하며 수동적이게 된다. 바꿔 말하면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 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게 된다. (49p

 

그러나 명시적인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만 사건의 의미가 확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말로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말하여지지 않은 것─말할 수 없는 것─은 사건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렇게 만능인 것일까. 무슨 일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그리고 그것이 무언가 근원적인 체험일수록─우리가 우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 언어라는 것이 철저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건인지 자기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체험을 기성의 언어, 기성의 말로 잘라 낼 때, 우리는 과연 무언가 어색한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가. 사건이 우리가 가진 말의 윤곽에 뀌맞춰져 잘려나갈 때, 우리는 말로 이야기된 사건이 사건 자체보다도 어딘가 왜소화되어버린 듯하고 어딘가 어긋나고 있는 듯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을까. 우리가 가진 말의 윤곽 속에 완전히 담기지 않은 채 넘쳐흐르는 사건의 조각─말하여지지 않은 사건의 잉여 부분─이 거기에 많이 있는 것은 아닐까.

틀림없이 대부분의 사건들에는 거기에서 말할 수 없었고 또한 말로는 절취할 수 없었던 잉여 부분이─사건의 조각이─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조차도 잊어버려서 마치 말로 이야기된 것이 사건의 전부인 양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사건을 언어화하는 일─그때 사건은 항상 과거형으로 표현된다─그것은 사람이 사건을 ‘과거’로 순치하는─길들이는─것은 아닐까. ‘과거’의 것으로서 길들여진 사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안정된 은거지(隱居地)를 발견할 것이다. 과거형으로 언어화된 사건이야말로 일반적으로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참조하는 기억이란 틀림없이 그와 같은 것이다. (53-54p

 

또한 근대는 단지 소설이란 문학 형식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 자체가 소설적인 이야기를 요청한 게 아닐까. 근대에 들어서 사회가 체험한, 격렬한(drastic) 변용. 국민국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는 국민 전체가 어찌할 도리 없이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식민지주의의 침략에 의해서, 조국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귀속되어 있으며 자신들에게 마땅히 귀속되어야 할 대지(大地)로부터 소외되어 간다는 부조리. 근대라는 시대가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심적 외상─그 부조리함 때문에 언어로 명명되고 ‘경험’으로 길들여져 과거로 내던질 수밖에 없는 ‘사건’의 폭력. 그처럼 말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체험, ‘사건’을 서사로서 말하라는 시대의 요청을 소설은 자신의 몸체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소설의 말하기는 그러한 사건의 불가능한 나누어 갖기[分有]의 가능성을 내걸고 있는 게 아닐까. (63p

 

그러나 그것은 언어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을 소설이라면 갑자기 언어로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내가 시사하고 싶은 점은 그것과는 반대의 것이다. ‘사건’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성격, 즉 재현되는 것의 불가능성 바로 그것을 어떻게든 이야기함으로써, 소설은 거기에서 언어로는 재현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사건’ 그 자체의 소재를 지시하는 게 아닐까. 만일 모든 사태가 언어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될 치명적인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63-64p

 

‘리얼하다’라든지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 또는 ‘리얼리티가 있다’라든지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실물과 재현된 것 혹은 현실과 표상된 것 사이에 놓인 거리를 측량하는 것, 말하자면 표상이 실물의 모습을 얼마나 충실하고도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측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참조해야 할 본래의 모습이나 현실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표상을 ‘리얼한’ 재현이라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생대의 공룡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현대의 전쟁터를 스필버그 자신은 아마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필버그가 공룡이든 전쟁터이든 간에 그것들을 자신의 사건으로서 체험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것을 과연 그와 같은 형태로─즉 리얼함이라는 것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서─재현·표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77-78p

 

리얼리즘의 욕망이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그 때문에 재현 불가능한 ‘현실’이나 ‘사건’의 잉여 그리고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다. (81p

 

내가 여기에서 떠올린 것은 나치의 절멸수용소에서 있었던 동성애자의 ‘사랑’을 그린 마틴 샤면(Martin Sherman)의 희곡을 영화한 씬 마사이어스(Sean Mathias) 감독 작품 <벤트(Bent)>(19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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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살아남는다는 게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자체가 폭력적인 그 ‘사건’의 기억을 우리는 어떻게 공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것에 내재하는 폭력성이라는 문제를 접하면서 작품은 결국 막스와 호르스트라는 두 피수용자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로 손쉽게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절멸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그만큼 숭고할 수 있었고, 어떠한 폭악함도 인간의 정신적 존엄까지 빼앗지 못한다는 서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절멸수용소라는 것을 직접 체험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 ‘사건’의 외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바로 우리가 이 세계의 일상을 안심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고 있는 서사가 아니었을까. ‘사건’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폭력이 ‘사건’의 외부, 즉 우리 세계에 침입해 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서사와 우리의 판타지를 그것에 투영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이야기되는 서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사건’을 철조망 속의 사건으로서 그 주의를 둘러싸고,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이라 하며 안심하기 위해 만든 서사는 아닐까. (95-96p

 

그러나 길모퉁이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상이병의 전쟁 기억은 결코 그 분들의 그것과는 동일한 게 아닐 것이다. 일본 사회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달성해 고도의 경제 성장에 엄청난 기세로 매진해나가고 있다는 서사 속에서 상이병은 그와 같은 서사에서 누락되어 있는 사건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란 사건이 결코 종료된 것이 아님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실은 허위의 서사라는 것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상이병은 이미 다른 서사를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 틀림없이 완결되었을 서사가 사실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즉 사건이 다시 현재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상이병에 대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었던 어머니께서 부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125-6p

 

타자에 의한 ‘사건’의 공유를 미칠 듯이 바라는 자들, ‘사건’의 내부에서 살아가는 자들─‘시건’의 폭력을 현재형으로 다시 살아가는 자들의 일이며, 또한 사자들의 일이기도 하다─바로 그들이 ‘사건’을 영유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사건’이 그들을 영유하고 있다. 그리고 말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사건’이란 무릇 그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영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건’을 표상하는 서사란, 사람이 ‘사건’을 영유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영유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타자와 나누어 가지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0p

 

물량면에서 위력을 발휘한 미군에 대해 탄약마저 바닥이 난 일본 병사들은 적군을 놀라게 하려고 영어를 부르짖으면서 돌격했다. 당시 그 미국인 대위는 말하기를, 돌격해 오는 일본 병사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Hell with Babe Ruth : 베이브 루스와 함께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베이브 루스란 물론 과거에 유명했던 미국 야구 선수의 이름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베이브 루스인가”라고 하면서 그 노년의 대위는 의아해 했다. “‘헬 위드 루즈벨트’라면 이해가 가지만”이라고 그는 말했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 …….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려고 할 때, 그 말이, 말이라는 것의 물질성, 그것의 불투명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서 생각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그 사건을 완결된 서사로서 그가 영유하는 것을 그 말은 거부한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 ……. 죽음을 향하여 돌격하는 그 순간 왜 그러한 말이 입에서 발설되었는지, 당시 일본 병사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왜 베이브 루스인가. 그러나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과 함께 그 고개에서 그 당시 한 일본 병사가 부조리하게 죽어간 바로 그 ‘사건’의 기억이─그때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어둠 속에 비밀로 남겨진 채─우리에게 회귀한다. ‘사건’이라는 것의 바로 그 잉여부분, ‘서사’에 떡 벌어진 아주 컴컴한, 바닥을 알 수 없는 개구부가 있는 곳을 지시하고 있는 듯이.

“헬 위드 베이브 루스” …….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목소리인가. “헬 위드 베이브 루스”라고 귀신들린 듯이 지금 내가 되풀이해서 쓸 때, 그것을 말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대위가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일본 병사란 말인가. 아니면 그 일본 병사 속의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말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건’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헬 위드 베이브 루스”라는 그 말은 ‘사건’의 잉여인 표상 불가능한 ‘사건’의 존재를 지시하면서 ‘사건’의 기억을 타자에게로 전이시켜 간다. (152-157p

 

‘사건’에 위장의 플롯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 ‘사건’을 서사로서 완결시켜서 다른 서사를 살아가기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사건’의 폭력을 망각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169p)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한다는 것. 그러한 한에 있어서 ‘사건’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 즉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는 활동 자체가 단 한 차례의 유일무이한 행위인 것은 아닐까. ‘사건’의 기억으로서의 증언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이와 같은 시간적·공간적인 단독성,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단독성으로 어디까지나 일관되어 있다. ‘사건’의 기억/증언은 말의 이러저러한 물질성 및 대화자의 존재의 불투명성에 의해서 방향성을 상실하고 굴절되고 변형되어 손상당한다. 이리하여 대화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사건’의 흔적뿐이다. 단독적인 존재로서 대화자가 받아들인 그 증언에는 대화자 자신의 서명이 기입되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증언을 보편적인 이야기로서 말한다거나 타자가 소유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대화자 자신이 체험한 유일무비(唯一無比)의 단독적인 ‘사건’으로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말로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72p)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사실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될 때, 역사(histoire)라는 것이 그 학생에게 갑자기 불투명한 것이 되는 것처럼, 나 자신이 하르둔/듀브와 대치하는 자가 되었을 때―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그 팔레스타인 부부의 입장, 즉 난민이라는 포지션(position)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서사(histoire)는 나에게 부투명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 서사를 이해한다는 것―그것은 ‘사건’이 누구에게 귀속하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그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는 자,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자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 즉 난민의 위치에 놓이지 않은 자들의 특권이라는 점이다. [...] ‘사건’이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건’에 귀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난민’이라 불리는 자들은 아닐까. 하르둔/듀브인 그의 말과 만나는 것, 그것에 의해서 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자명한 것으로 향유하고 있었던 저 위치에서 내팽개쳐진다. 난민처럼. 그때 서사는 나에게 의미가 흐려져서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고 서사는 ‘사건’이 된다. (181-182)

 

말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 그 불투명함을 상기하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닐까. 투명하게 되어 의미를 확정하고 있다고 생각된 그 말들에 불투명성을 되찾아 주는 것이, 투명한 말이 실은 우리가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을 겹겹이 방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188

 

‘난민’―‘사건’을 내셔널한 역사/서사로서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자들. 인간이 ‘사건’을 영유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인간을 영유하는 그와 같은 ‘사건’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건’의 기억을 ‘서사’로서 영유하는 게 아니라 ‘사건’으로서 영유하는 것은 바로 이 난민적 삶을 사는 자들뿐이다. ‘사건’의 기억에 대한 나누어 갖기의 가능성은 우리가 ‘난민’에게 생성하는 것, 즉 난민적 삶을 살아가는 것 속에 있다.

무엇보다 ‘난민’으로 되는 것―이와 같은 모든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장소로서의 조국,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조국을 향하여 그곳으로의 귀환을 타자와 함께 꿈꾸는 난민이 되는 것이다. (194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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