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중.


   파상력破像力. 이미지를 부수는 힘.


   파상력은 부재하는 대상을 현존시키는 힘인 사상력과는 반대로, 현존하는 대상의 비실체성 혹은 환각성을 깨닫는 힘이다. 파상력은 또한 인식 주체의 내적 표상능력을 의미하는 상상력과는 달리,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영상들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파괴하는 우상 파괴적 권능을 내포한다. 상상력이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내는 유토피아적 힘이라면, 피상력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영상적 투기도 금지하면서 모든 집합적 역량을 지금 이 순간에 집결시키는 메시아적 구원사상을 정초한다. 요컨대 파상력은 '파괴적 성격'의 인식론적 권능이자, 윤리적 에토스이자, 정치적 강령으로 기능하는 벤야민적 사유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 그리하여, 파상력은 바로 망각의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영상이 상기되는 순간 그 망각된 것을 가리고 있던 차폐-기억들이 파괴되어 소멸하고 나타나는 참된 영상을 지각하는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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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중.


   언어는 사물을 죽이고 그 사물을 언어라는 상징 속에서 보존시킨다.

   … 언어가 사물과 맺는 매우 특수한 변증법적 관계 …

   … 언어는 언어가 가리키는 사물을 지양Aufheben, 즉 부정하는 동시에 보존한다. 언어는 감각적 대상을 배제하고 상징화시켜 소통의 도구로 변모시킨다. 언어의 아이러니. 언어는 오직 '상징적 살해'를 통해서만 사물을 제시할 수 있다. … 사물은 자신의 물질성이 그에 해당하는 언어(기호)에 의해서 제거/살해된 이후에 하나의 '기호'로서 우리의 상징적 소통의 '매체'로 구성될 때 비로소 언어에 포섭된다. 사물은 죽음으로써 'X가 되고, X라는 언어 속에 보존된다. 이것이 헤겔이 말하는 죽음/보존으로서의 지양이다.


'지시체의 죽음을 상징으로 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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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中


   구름이 산맥을 덮으면 비가 오듯이, 날이 저물면 노을이 지듯이, 생명은 저절로 태어나서 비에 젖고 바람에 쓸려갔는데, 그처럼 덧없는 것들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눈물겨웠다.

   …

   그러하되, 다시 돌이켜보면, 그토록 덧없는 것들이 이 무인지경의 적막강산에 한 뼘의 근거지를 만들고 은신처를 파기 위해서는 사랑을 거듭 말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사랑이야말로 이 덧없는 것들의 중대사업이 아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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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p

문예비평가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소설을 문제적 주인공의 '여행'으로 표현하고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된다."는 말로서 근대사회의 소설을 가치관의 중심점이 사라진 사회상을 진단하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했다. 현대의 영향력 있는 소설가 중 한 사람인 쿤데라는 소설을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대한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의 형식"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제2장 플롯

1. 플롯의 개념


84p

간단히 말해서 이야기, 즉 스토리가 사건의 시간적 서술이라면, 플롯은 사건의 인과적 서술이다. 플롯은 소설의 주된 재료를 결합하여 작가의 사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

스토리를 더욱 흥미롭게 이끌어가기 위해서 작가는 몇 개의 사건을 감추거나 전달을 지연시킨다. 혹은 사건의 시간 순서를 역전시켜서 전달하기도 한다. 이때 독자는 그 스토리가 하나의 작품으로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럽지만 점차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갈등이 해소되고 숨겨졌던 의미가 밝혀지며 마지막에 가서 독자는 스토리의 모든 부분을 이해한다. 소설의 서두에서는 '가능성'이었던 것이 결말에 이르러서는 '필연성'이 되는 것이다.


1) 선택과 배열의 논리


85p

플롯이란 "걸정적인 감각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도록 사건을 한정하고 연속화하는 법칙의 집합"이다. '사건을 한정한다'는 것은 많은 사건 중에서 어떤 사건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사건을 연속화한다'는 것은 곧 그 사건을 배열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플롯은 이야기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건을 단순히 발생 순서에 따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새로운 순서로 재배열하는 것이다. 독자에게 '결정적인 감각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는 것은 곧 그 소설의 창작 의도에 맞추어 사건을 배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플롯이란 작가의 의도와 목표가 효과적으로 달성되기 위한 배열의 원리이다. 분리되어 있는 에피소드들을 논리적이며 심미적인 조직체로 전달하여 기대됨직한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이며 목표이다. 사건의 분편들을 논리적이며 심미적인 조직체로 독자에게 인지시키기 위해서 작가는 사건을 인과성의 고리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사건들이 유기적이며 통일적인 하나의 완결된 구조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87p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사실들을 선택할 때 우선 고려해야 하는 점은 그 사실이 주제의 전달에 유용한가의 여부이다. 그 사실이 주제 전달에 유용하려면 독자의 상상력을 휘저을 수 있을 만큼 생생한 사실이든지 줄거리가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알려 주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든지 해야 한다. 독자는 작가가 선택한 사실을 통해서만 작품 분석의 열쇠를 얻게 된다. 독자는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왜 작가가 그런 사실을 선택했는가, 왜 나머지 사실들은 버렸는가, 만일 앞에서 다른 사실을 선택해서 썼다면 얼마나 다른 소설이 되었겠는가를 이해한다.


2) 인과관계의 서술


87p

포스터는 <소설의 이해>에서 '플롯은 인과관계를 강조하는 서술'이라는 말과 함께, 무엇이 단순한 스토리이고 무엇이 잘 짜여진 플롯인지를 다음의 예문을 들어 설명하였다.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 이것은 이야기이다. '왕이 죽자 슬픔을 못 이겨 왕비도 죽었다.' 이것은 플롯이다. 시간의 연속은 보존되고 있지만 인과감이 거기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또, '왕비가 죽었다. 사인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니 왕이 죽은 슬픔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은 신비를 안고 있는 플롯이며 고도의 발전이 가능한 형식이다. 이것은 시간의 연속을 유보하고 가능한 데까지 이야기를 떠나 멀리 이동한다. 왕비의 죽음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이야기에 나오면 '그러고 나서는?' 하고 의문을 갖는다. 이것인 플롯에 나오면 '이유는? 하고 이유를 캔다. 이것이 소설이 갖는 두 가지 형상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2, 플롯의 단계

90p~

플롯의 단계 중 행위가 시작되는 첫 번째 단계는 '발단'이라고 한다. 발단의 단계에서는 앞으로 작품이 전개되어 나갈 바탕으로서의 가정들이 제시된다. 이 단계에서 등장인물이 소개되고 배경이 확정되며 사건의 실마리가 나타난다. 작가는 발단의 단계에서 독자에게 작품의 분위기와 인물의 기본적인 성격, 서술자의 어조 등을 제시해야 한다. 동시에 발단에서 작가는 무엇인가 숨겨지고 혼란스러운 듯한 불안의 요소를 보여 줌으로써 이후에 사건이 갈등과 분규로 나아가는 기반을 만든다.

... 다음 단계는 '전개'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사건 해결에 장애가 되는 어려움들이 많아지고 갈등으로 말미암아 긴장이 조성된다. ... 전개 단계에서는 주제의 강조, 등장인물의 심리와 성격의 구축, 이후에 경이로운 결말로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 동일한 사건이나 표현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사건이나 행동, 모티프, 심리적 독백 등과 같은 소설적 요소들이 한 작품의 내부에서 연속되고나 반복될 때, 그리고 그 반복이 '의미 있는 반복'일 때 그 반복되는 요소나 기교를 가리켜 패턴이라고 한다. ... 이 전개의 단계에서는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과의 내적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복선을 깔기도 한다. 복선은 사건을 전개할 때 사건과 사건의 필연성, 가능성을 주기 위해 앞으로 다가올 상황에 대한 암시를 주는 서사적 장치이다. ... 복선을 통해 독자는 사건에 대해 좀 더 흥미를 갖게 되고 앞으로 발생할 사건에 대한 심리적 준비를 하게 된다.

다음 단계는 절정이다. 여러 가지 갈등이 얽혀 복잡한 상황은 결국 어떤 사건이 돌발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거나 또는 긴장을 품고 있던 정적인 상태가 깨어져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으로 발전해 나아간다. 바로 이 순간이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때이며 이후로 사건은 갈등이 해결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 마지막 단계는 '결말catastrophe'(!) 혹은 '대단원'이라고 한다. 결말에 이르면 갈등의 결과가 드러나고 문제는 해결되며 새로운 안정상태를 위한 기초가 주어진다.


3. 플롯의 법칙


94p~

소설에서 플롯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법칙은 '그럴듯함'이다. 플롯이 잘 구성된 소설은 스토리가 개연성 있는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소설의 내용은 독자들에게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두 번째 법칙은 '놀라움'이다. ...

... 세 번째 법칙은 '긴장suspense'이다. 작가는 소설을 읽는 독자를 긴장하게 함으로써 이야기의 결과에 대해 지속적으로 궁금증을 갖게 할 수 있다. 긴장이란 가능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식을 포함하며, 그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 긴장이 일어나도록 유인하는 수단은 미리 암시를 주는 것이다. 즉, 찾고 있는 인물의 출현을 암시하는 세부적인 정황을 미리 드러내 보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인물이 거기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고 곧이어 그 기대감을 만족시켜 주면 된다.

... 네 번째 법칙은 '통일성'이다. 구성은 분명히 통일성을 가져야만 한다. 진정한 처음, 중간, 끝을 가진 구성 그리고 그럴듯함, 놀라움, 긴장의 법칙을 다루는 구성은 통일성을 필요로 한다.


95p

플롯의 구성은 그 소설의 의미를 표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작가는 플롯을 통해서 그들의 경험이라는 재료를 조직한다. 어떤 경험을 이해하는 작가 고유의 방법, 즉 그 경험이 작가에게서 갖는 의미를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도 플롯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작가가 제시하는 경험의 의미를 독자가 느끼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무엇이 원인인지 그 인과관계를 분명히 밝혀 주는 것이 바로 플롯의 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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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16.1. 일기.

지진계 2017. 1. 1. 17:41



10. 20.

1.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죽어버리는 대신으로 시를 쓰는 일.

2. 살면서 한 번도 내 뒷모습을(등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건 타인이 없으면 내 등 뒤가 영영 금지된다는 것. 외로움은 필연이며 우리는 타인을 계속 찾아다닌다.

3. 말들은 번식한다.


9.25.

1. 소실점을 생각한다. 어디론가 선이 사라진다. 소실점을 향해 끊임없이 뻗어나가다가. 원근법 때문에 선들은 끝나지 않는 걸음을 걷게 됐다.

글씨들도 마찬가지다. 말할 수 없는 점 하나를 위해 끊임없이 구불구불 걸어가야 하는 선이 있다.

2. 어느 저녁, 사랑해, 라고 쓰는 데 필요한 잉크의 질량을 재고 싶다는 함정에 빠졌다.


9.22.

1. 별을 보다가 문득.

<선생님 : 별및은 수억 년을 달려서 우리에게 와요.> <좀 삐딱한 학생 : 그럼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우리가 죽을 때까지도 별들은 모르겠네요.> 한 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엇갈림에 대하여. 눈이 마주치려면 얼마나.


9.12. 지진.

1. 공명, 진동, 살아있다는 것, 꿈틀대는 힘, 두려움, 보이지 않는 것들.

1.1. '죽은 듯이' 사는 X. 어느날 지진이 도시를 치고 고등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뜻하지 않는 소란과 묘한 축제의 분위기. 비일상의 설렘.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두려움을 나눈다. 죽어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살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뜻하지 않은 진동으로 사람들은 공명하고, 보이지 않는 것의 힘과 그 꿈틀대는 생명력이 가시화된다.

좀 더 큰 여진이 찾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진동 이전의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여진의 세계가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두려움이든 설렘이든 몸을 떨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운동장에 모여 공명할 수 있는 세계다.


9.6.

1. 내 다락 어디엔가 웅크리고 있는 것들.

2. 시를 쓰고 싶다. 내 나라의 말. 내 가장 사소한 습관. 가장 절절하게 보잘것없는 것들. 이왕이면 아름답고 절절하게. 사랑하면 사소해진다.


8,29,

1. 담배 연기가 떠오르는 아침. 변해버린 날씨처럼 나도 어딘가 변해버린 아침. 구름의 뒷면이 궁금해지는 아침. 풀벌레 소리들. 우는 입은 없고 우는 소리만 있는 아침. 우리는 서로 볼 수 없는 곳에서 깜박이고 있다.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나까지 사라져버렸다. 데카르트는 거짓말쟁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근거는 불충분해진다. 나는 어떤 발음으로 울어야 하는지. 깜박이는, 깜박이는 우리.


8.28.

1. 손에 딱 잡히는 얇은 펜이 더 편하다. 비가 하루종일 왔고, 얼룩이 하나 졌다. 담배연기가 뭉실뭉실 떠오르는. 그런 사랑스러운 방식들이 있다. 점점 사소해지게 된다.


8.26.

1. 몸속에 뜨거운 점들이 박혀 있다.

1.1. 내 안에는 열이 자라고 있어요. 나를 죽이거나 죽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겠죠. 그걸 알려면 얼마나 더 자라야 할까요. 나는 해로운 걸 너무 좋아해요. 끊임없이 중독을 찾아다니고 계속 뜨거운 것이 자라요. 가끔은 성가셔요. 왜 불안에 떨어야 하죠. 내 몸도 나의 적. 내 편은 내 것 중에서는 없는 걸까요. 언젠가 이 열이 내 살을 찢고 나올 때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요.


8.19.

1. 팬이 된다는 것. 결정정애를 벗어나려는 노력이 아닐까. '네가 좋아'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일. 내게도 기호라는 것이 있고 그것으로 정체성의 한 축을 세울 수 있다는 일.

1.1. 이진아의 화성. 묘하게 상승하는, 풍선을 매단 듯한 화성.


8.13.

1. 사라지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잔인하다. 사라짐 자체는 아름답지 않다. 사라진 것, 사라지는 모습이 아름다울 때가, 아름다워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사라지면서 반짝이는 것들. 태어나면서 죽어버리는 것들.


7.13.

1. 구름을 핀셋으로 집어 노트 사이에 끼워두고 싶은 저녁이었다. 구름의 분홍색 살은 배일까 등일까, 어느 쪽일 지 생각해 보는 게 재미있었다.

2. 고정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책갈피처럼. 세상은 멈추지 않고 가끔은 닻이 필요하다. 박제된 채로 서로를 영영 바라볼 수는 없는 걸까.

고정되어버리는 순간도 있다. 내 어느 만큼쯤은 아직도 다리 위에 있을지도.


6.25.

1. 나이가 든다는 것은 점점 증거가 불충분해진다는 뜻. 골다공증에 대해 생각한다. 점점 텅 비어버리는 일이다.


6.9.

1. 누구에게나 마법은 있었다. 욕망과 의지를 믿지 않아서 떠나가버린 거지.

2. 공중에서 유리 공들이 기포처럼 돋아나. 나는 그 안에 나 대신 사랑할 심장들을 키우지.

상상, 상상! 남의 상상에 대한 관음.

3. 눈이 아니라 심장이다. 이름붙일 수 없는, 그러고 싶지도 않은 감정들이 있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큰 축복이다. 자그마한 심장 자체가 말 아닌 말로 돋아나는 순간. 어떤 공감도 불가능한 특이점. 이로써 한 사람은 대체불가능한 것이 된다.

4. 솔의 블로그. 그동안 나는 생의 언저리에서 맴돌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본질에 가까워지기. 왜 나는 절절한 말들을 할 수 없는지. 피부의 말이라도 심장을 말하자.


5.23.

1. 작업하면서. 초여름을 견디지 못한 봄꽃들을 봈다. 물 먹은 종이처럼 문드러지고 있었다. 가지에서 떨어지지도 못하고. 은근슬쩍 내가 떨어트려줬다. 그때 느낀 건 안쓰러움이었을까.

토끼풀의 꽃(으로 추정)을 봤다. 상속(전승, 구전)되지 못하는 이름들을 생각한다. 길에서 숲에서 들에서, 꽃과 나무와 풀들의 이름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 어머니들에게로, 그리고 그 아들 딸들에게로 대물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단종되어가는 이름들이 너무 많음을 생각한다.

돌틈 바위틈에서 아등바등 자라고 있는 무명의 풀들을 뜯어내는 일은 썩 유쾌하지 않다. 어느 만화나 영화 대사처럼, 직시해야만 하는 걸까. 사람의 일에서도,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가해'들을 똑바로 쳐다봐야 하는걸까.


5.19.

1. "나는 옷을 좀 크게 입는다. 아직 살이 되지 못한 질문들이 잠을 잘 곳이 필요하다."

2. 황석영의 바리데기. 가엾은 사람들. 레미제라블의 황석영판.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그리고 어른이 되기.


5.14.

1. 만화 <클레이모어>를 봤다. 중학생 때 학원에서 잠깐 읽었는데 어느새 완결이 나 있었다. 27권의 짧지 않은 분량을 이틀만에 읽어치웠다.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 :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내 안의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는 것. 이유 없이 괴물이 되기란 참 쉬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전사들이다. 매 순간 또 다른 자신과 싸운다. 욕망은 힘이다.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욕망일수록 강하다. 잡아먹히면 분열증, 외면하면 신경증이 된다. 몰락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몰락하며 짓는 표정도 선택할 수 있다.

1.1. 몰락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패배함으로써 패배하지 않는다. (ㅈㅈㅇ 누나의 눈. 우울과 퇴폐, 그리고 선택한 패배의 다각형 사이 어디쯤.)


5.7.

1. 이병률의 여행산문집을 읽다가 : 고향을 여행하는 것은 고향을 얻는 것일까, 잃어버리는 것일까. 고향에서 느끼는 낯섦을 생각해봤다. 유목의 종착지는 모든 공간을 타지로서 재사유하는 것일까. 익숙함과 낯익음에 결별을 고하는 일.


5.2.

' 1. 아픔에 대해 생각한다. 뭐든지 의욕이 없어진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통증만이 중요해진다. 벌거벗는 시간이다.


4.21.

1. 박완서 단편집. 문장이 정말 정갈하다. 웬만한 다른 작가들과는 비교조차 안 된다. 과장이려나. 노작가는, 처음엔 분노와 증오를 증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감정이 다 깍이고 나서 남은 건 사랑이랬다.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통계가 되게 하긴 싫었다고. 이 작가의 단편들은 비극이었지만 단편들을 빛나게 한 것은 사랑이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문장을 그녀는 아주 따듯하게 말하고 있다. 정말 닮고 싶은 마음이다.


4.19.

1. 최인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쉽지는 않은 소설이었다. 그리 가독성이 좋은 문체는 아니어서 솔직히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굉장이 심층적인 상징들이 잘 기획된 작전 아래 배치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현실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게 오정희의 평이었는데, 내 생각에 더 중요한 키워드는, 욕망, 페르소나, 억압, 원죄의식, 정도였다. '낯익은 타인들'은 걸어다니는 가면들, 혹은 '역할'로서의 빈 자리들이다. 거기에 어ㅓ떤 존재가 들어오든 사실 상관없는 것이다. '낯익은 것'이 평소 주체와 관계를 맺던 수많은 페르소나라고 한다면, '타인들'은 그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내용들, 실제의 존재들이다. 가면극에서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들인 것이다. 그 모두가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통합될 수 없는 욕망으로 정신분열을 보인다. 존재는 욕망이지만 존재의 현상은 페르소나다. K는 그 균열을 감지하게 된 것이다. 그 자신이 분열된 욕망, 그저 페르소나의 뒷면을 채우는 존재임을 인지하게 되는 결말이다.


4.16.

1. 겹벚꽃나무, 홀아비바람꽃, 제비꽃.


4.15.

1. 김경주의 기담을 읽다가. 마슐라르를 생각. 이미지의 해석이 아니라, 직접 그 이미지를 체험하는 것. 시는 읽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다, 라는 진부한 설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 어스름한 밤. 나뭇가지들의 뒷면. 하늘에 난 건열. 시를 쓰고 싶어진다.


4.9.

1. 송형과의 고가근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시실이 너무나도 설레는 저녁. 그 모든 절절함을 전부 다 헤아리고 싶은 저녁. 한없이 작아지지만, 동시에 녹아내려서, 내가 아닌 게 되는 저녁. 그렇게 세상의 표정을 조금씩 그려가는 저녁.


4.4.

1. 바슐라르를 읽다가. 비동일성의 지양에 대해. 지금까지의 독해로는, 바슐라르식 몽상, 그리고 시학은 끊임없는 자기로의 천착에 그 본질이 있는 것 같다. '상상'이라는 개념을 '자기'를 기준으로 안이나 밖 어디에 두어야 할지는 더 두고 봐야겠으나, 바슐라르는 세계를 몽상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본인은 그 과정이 반대라고 주장하겠지만) 끊임없이 어떤 특정지점으로 동일화한다.

이건 낭만적인 억지일 수 있다. 하지만 바슐라르 식 사유가 최근의 많은 회의에 해답을 줄 수 있다면, 그건 몽상이라는 세계외적 혹은 前세계적 지점의 힘에 있다. 가능성에 대한 미신이다. 상상, 미개척지, 혹은 원시림.

1.1. 원시림. 말과 사유, 그 모든 '인위'의 이전. 前세계. 환상적 공간. 욕망의 나체. 무엇보다 먼저 태어난 힘. 최초의, 그리고 기저의 의지.


3.26.

1. '뒤틀리는' 꽁트. 사람들의 몸이 뒤틀리고 배배 꼬이는 전염병. 심사가 뒤틀린다는 표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은 배배 꼬여 있다. 그 배배 꼬임이 배배 꼬여서 세상이 굴러간다. 어쩔 수 없지 뭐.


3.11.

1. 이전에 꿩 새끼들을 봤을 때가 기억났다. 대여섯이서 줄줄이 어미를 따라가다가 배수로에 죄다 빠져버렸다. 어미가 그렇게도 울었다. 구덩이는 새끼들 키의 열 배 남짓이었고, 익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몇 마리를 구했다. 그 새끼들은 다시 어미를 따라갔다. 아마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을 것이다. 꿩은 그런 방식으로 살아왔다. 가끔씩 운이 나쁘면 배수로를 만날 뿐이다.


3.8.

1. 비를 맞으며 구름을 피다가 문득, 깊은 바다의 바닥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력에 닻을 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유롭게 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바다의 바닥께를 휘적휘적. 달을 걷는 기분도 그랬을까.

공기의 밀도가 높은 날이면 세계의 질감(질량)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럴 때면 모순에 빠진다. 아득해지면서 선명해진다. (무엇이...?)

2. 빗소리. 비에 젖고 있는 땅. 나는 녹아내리고 넓게 퍼진다.


2.25.

1. 또 복학하는 꿈을 꿨다. 대학로를 혼자서 돌아다녔다. 사람이 많았다. 어쩔 줄 모르고 돌아다니기만 하다가 힘들어서 방으로 왔다. 13년 봄여름의 그 서문 단칸방과 비슷했다. 어둡고 음산한 골목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좁은 길을 지나서 방문을 열었다. 그 때와 똑같이 입구에서 두 번째 방이었다. 단칸은 아니었다. 거실과 방 몇 개가 있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건 똑같았다. 꿈속의 빈방에서 혼자 드러누웠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2. 사람에 무심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나를 침범하려는 것을 악에 받쳐 방어한 걸지도 모르겠다. 쿨한 게 아니라 그냥 고슴도치인 걸지도. 한 사람 한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과소평가했는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계속 무언가 잘못되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량이 넓다거나 성격이 둥근 것이 아니라 긴장 가득한 휴전 상태 같은 것. 그건 선명한 경계선과 타자에 대한 적의를 동반한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좀 더 신중하고 섬세하게 적극적이어야 한다. 타자의 세계를 장악할 수는 없음에, 그래서는 안 됨에 유의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으 하고 내 세계를 열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함부로 이해하려고 하지난 말되 함부로 회의해서도, 함부로 적대해서도 안 된다.


2.24.

1. CT를 찍었다. 낯선 기계 아래에 바지를 벗고 드러누웠다. 짧은 (얕은) 플라스틱 터널 안을 몇 번 왔다갔다하는 동안, 어쩌면 멀리 잊고 있었던 감정 하나가 되살아난 건지도 모르겠다. 아득함. 깊숙한 아가리. 크레바스의 이미지. 나는 혹시나, 혹시나 싶어서 괜히 심란해지는 보잘것없고 보잘것없는 짐승 새끼 한 마리다. 죽음은 언제나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작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나약한 건가. 링거액이 혈관으로 흘러들어왔다. 차가웠다. 그렇게 응급실에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 건 처음이었다. 유쾌하지는 않았다. 푹 가라앉았다. 혈관에 심해가 흘러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한 번씩 응급실에 실려가 링거를 맞으면 사람도 무거워지는 걸까. 차갑게 차갑게. 어디로 가라앉는 걸까.


2.21.

1. 누군가의 비밀을 듣는 일.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그 사람과 나는 어떤 관계에 빠진다. 나의 X를 너도 아는 일. 그런 음모로 우리는 이어질 수 있다. 그건 우리들을 혼자가 되게 하려는 세상, 운명에 대한 반항 같은 것일지 모른다.


2.3.

1. 메멘토 모리, 의 마침표를 찍었다. 언어에는 관성이 있어서 말이 말을 달고 돋아난다. 나는 영매처럼, 깜박이는 말들이 흩어져 저승으로 가기 전에 주섬주섬 받아적는다.


1.31.

1. 사연 모를 골동품이 있다. 연애하던 A와 B는 그 골동품을 우연히 구하고 호기심이 발하여 골동품의 행보를 거슬러올라간다. 그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헤어진다. "이 물건이 ~했다면, 난 널 사랑할 수 없는 거야." 뭐 이런 식. A는 그 일을 계속한다. "세상은 이런 맹목적인 충동으로 이어져나가는 거야. 알 수 없는 중독. 멍청한 짓인 걸 알면서도." 온갖 모순과 어두움, 회의적인 징조로 가득한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그런 인간의 모순이 가장 강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


1.30.

1. 보르헤스 알레프. 환상으로 환상을 폭로하기.


1.22.

1. "터울". 어원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아름다운 말들이 너무 많다. 입에서 가만 굴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는, 사탕같은 말들.


1.19.

1. 한파. 한 사람의 경험의 끝을 생각한다. 자기 세계의 끝에 선 사람을 생각한다.


1.15.

1. 희망이라는 이름의 미신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끌고 나간다. 확신같은 건 사실 착각이다. 가능한 제일 구차하고 정확한 말은 미신이다. 배신당할 수 있다고 해도 속아넘어가줘야 한다. 불리한 게임이다. 변화의 미분을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에겐 그런 감각기관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게 옳은 길인지 아닌지도, 점점 나아지는 게 맞긴 한건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해내려면 미신인 줄 알면서도 속아넘어가줘야 한다. 그래, 어디 한 번.


15` 가을께, 수첩에서.

   1.

   중요한 것은 한낱 언어로 된 기록이나 기억이 아니라 그 날들에 내가 띠던 빛이다. 그리고 아직도 오늘을 스치며 어딘가로 뻗어나가고 있을, 그 빛들의 살이다.

   2.

   '그 여자애의 정수리에서는 파란 풀내가 났다. 가끔 모자를 쓰고 나온 건 머리카락 대신 돋아난 이름 모를 들꽃 들풀들을 숨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그 풀꽃들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15` 봄여름 언젠가, 수첩에서.

   1.

   "사랑받는 사람은 우리와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의 본질과 하나다. 우리는 단지 사랑받는 자 안에서 우리를 본다. 그러나 사랑받는 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에서 출발한다." -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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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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