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본주의의 형성과 전개 - 김동택.




   39p


   이 시대가 자본의 시대로 서술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중혁명 가운데서도 산업혁명이 정치혁명을 압도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혁명의 시대는 정치혁명에 의해 산업혁명이 어느 정도 통제되었다는 의미에서 비교적 사회적 균일성이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1848년 혁명의 실패는 이 모든 것을 역사의 무대에서 제거해버렸다. 1848년의 혁명은 단기간의 폭발 끝에 실패로 돌아갔고, 본격적으로 진행된 경제활황은 오직 발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모든 사회제도들의 방향을 돌려놓았다. 이러한 사태의 발전을 두고 그는 산업혁명이 정치혁명을 삼켜버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홉스봄은 혁명의 실패와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팽창이 불가피하게 그 시대를 부르주아가 승리하는 시대로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곧 부르주아의 승리가 반드시 부르주아의 정치적 지배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당시 부르주아는 구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세력으로부터 이탈하여 기존 지배체제와 타협하는 노선을 걸어갔다. 다만 홉스봄은 시대의 의미, 즉 자본의 시대가 갖는 경향 자체가 불가피하게 자유주의적 발전이었다는 측면에서, 이 시대를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시대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40p


   1848년에 발생했던 혁명들은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모두 성공했으나 또 모두 재빨리 실패했다는 점이며, 둘째 사회혁명을 예상케 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혁명의 특성은 이후 유럽에 두 가지 결정적인 사태발전을 낳게 했다. 전자의 경우 유럽에서는 정치혁명이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모든 변화의 동인이 되게끔 했으며, 후자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게끔 한 원인이기도 했는데, 당시 자유주의자들은 노동빈민 계급의 급진화가 사회혁명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구체제의 지배계급들만큼이나 겁을 먹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은 그 시점부터 혁명에 대한 반대자로 돌아서게 되었고, 구체제의 지배계급들과 타협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영구히 혁명세력이 아니게 만들어버렸다. 1848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정작 부르주아들은 혁명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사태의 발전으로, 이후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와 반동으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혁명은 자유주의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홉스봄은 분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을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한편으로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계급적 요규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가 확대되었지만, 정치 체제 자체는 보수화되어가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홉스봄이 서술하고 있는 「자본의 시대」는 모순투성이의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1848년 혁명이 유럽에서의 전반적 혁명으로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상황, 혁명은 패배했고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그대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요구했던 것들이 사회를 변화시켰던 이러한 상황, 부르주아들이 결코 지배자로서 등장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질서가 점점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확대로 나아갔던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홉스봄은 객관적인 토대의 발전양상, 즉 1850년대의 대호황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45p


   대호황이 미친 정치적 영향은 대부분의 정치적 지배자들로 하여금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으며 반대로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패배를 제공했다.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을 압도함으로써 나타난 상대적인 안정은, 바로 그것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진출과 노동계급의 등장, 그리고 급진적인 민주주의 운동은 서유럽에서는 본질적으로 국내문제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또한 적절하게 통제될 수 있었다.

   … 국내외적인 소요의 폭발력을 상쇄시킨 것은 경기의 호황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양한 정치세력의 등장은 정치적 동요를 야기시킬 수는 있었지만, 결코 혁명적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기존의 지배계급들이 아래로부터의 압박이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정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태는 이 시대를 정치적인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자유화의 국면으로 규정할 수 있게 했다. 예컨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융커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적 정책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지배계급이 일종의 수동혁명을 통해 부르주아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우회로를 택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


   64p


   홉스봄이 「자본의 시대」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이 시기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 그러나 바로 그 발전의 결과로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종언이 고해지게 되었다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홉스봄은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대로, 모순을 내장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자본의 시대」를 통해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시대의 모순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홉스봄의 설명을 분석해보면, 이론적으로 자유주의 시대는 부르주아들이 지배하는 시대여야만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지배계급은 여전히 지주귀족들이었다. 어떻게 봉건귀족들이 지배하는 시대를 자유주의의 최대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홉스봄의 설명을 받아들여 부르주아 계급을 자유주의의 담지자라 규정하는 전통적인 명제, 부르주아가 민주주의의 기본세력이라는 명제들을 폐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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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책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각 세부들은 본 텍스트로 넘어가서 발췌. 상기한 내용들은 서론과 결론에 해당하는 대략적인 브리핑.




머리말




   76p


   그리고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급격하고도 광범위한, 언뜻 보아 끝이 없는 확장이 '선진국'들에게 정치적으로 (혁명 아닌)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주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프랑스의) 정치혁명을 삼켜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역사는 한쪽으로 기운 일방적인 시대의 역사이다. 그것은 첫째로 그리고 주로 산업자본주의적인 세계경제의 거대한 진전의 역사이며, 산업자본주의의 진전이 나타내는 사회질서의 역사,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정당화하고 승인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이념과 신조들, 즉 이성과 과학, 진보와 자유주의를 믿는 이념과 신조의 역사였다. 


   78p


   그것은 그 시대의 기조어인 '진보'의 드라마였다. 즉 진보의 드라마는 거대하고, 계몽적이고, 자신에 차 있고 스스로 만족하며, 무엇보다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79p


   그러한 확실성과 자신감은 모두 잘못된 것들이었다. 부르주아의 기고만장한 개가는 단기간의 것이었고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부르주아의 승리가 완결되어가는 듯한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이 틈바귀 하나 없는 튼튼한 한 개의 바위덩이가 아니라 균열투성이인 것이 판명되었다. 1870년대 초, 경제의 확장과 자유주의는 거역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1870년대가 끝날 무렵에 가면 벌써 그것은 그렇게 보이지를 않고 달리 보였다.

   이 전환점이 곧 이 책이 다루는 시대의 종결을 표시한다.




제 1부, 혁명의 서막


제 1장 여러 국민들의 봄


   85p


   그리하여 1848년에 일어난 여러 혁명은 이 책의 내용과 기묘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러한 혁명들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없었던들, 그 후 25년간의 유럽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848년을 '유럽이 전환에 실패한 전환점'의 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유럽은 (전환은 했으되) 혁명적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던 것 뿐이다. 유럽이 혁명적으로 전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해만이 홀로 덩그렇게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혁명의 해는 하나의 전주곡이기는 해도 오페라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대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문을 통과하는 사람이 다음에 부딪히게 될 풍경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건축양식으로 된 대문이 아니었다.


  89p


   한편 온건파는 그들에겐 사회혁명과 똑같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민주주의에 대한 공포에서 나오는 갖가지 거미줄같이 착잡하게 얽힌 속셈에 골몰하고 있었다. 즉 대중들이 아직 군주들을 쓰러뜨리지 않은 곳에서 대중들을 부추겨 사회질서를 허물어뜨리게 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었다. 또 이미 군주제를 일소한 곳에서는 대중들을 거리에서 몰아내고, 1848년의 불가분의 상징인 바리케이드를 치워 없애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리하여 혁명에 의하여 무력해지기는 했어도 폐위당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느 왕을 설득하여 그 훌륭한 대의를 지지하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문제였다.


   92p


   1848년의 혁명은 최대의 약속과 가장 광대한 지리적 범위와 초기의 가장 즉각적인 성공이라는 측면이, 가장 무조건적이고 급격하기 이를 데 없는 실패라는 그 뒤의 측면과 결합돼 있는 근대 유럽의 역사상 단 하나밖에 없었던 혁명이라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 그 특정적 목적들이 결국은 달성되기에 이르렀지만, 그것들이 혁명에 의해서 또는 혁명적 맥락 속에서 달성되지는 않았다.

   … 이 모든 혁명들에는 그 밖에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혁명의 패인으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그 혁명들은 사실인즉, 노동빈민들의 사회혁명이었거나 아니면 노동빈민의 사회혁명을 눈앞에 예상시키는 혁명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 혁명들은 바로 그 혁명의 힘에 의하여 권력의 자리에 올라서고 또 화려한 빛에 감싸이게도 된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을 - 훨씬 더 급진적인 정치가들의 몇몇까지도 - 겁을 먹게 했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구체제의 지지자들만큼 겁을 먹게 했던 것이다. 

   '만약 사회질서가 진실로 위협받는 날에는, 만약 사회질서의 기본이 되는 대원리들이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되면, 가장 단호한 반체제파와 가장 열렬한 공화주의자들 대부분이 가장 앞서서 보수당의 대열에 가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혁명을 한 것은 의문의 여지도 없이 노동빈민들이었다. 도시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죽어간 것도 그들이었다. 


   95p


   … 그리고 2월혁명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수행됐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사회혁명으로서도 수행됐던 것이다. 그 목표는 그저 아무 공화국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2월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1840년대의 온건한 반체제파는 … 대결보다는 절충과 외교 쪽을 더 좋아했다. … 다른 모든 권력들이 조만간에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그런 양보만 얻게 된다면, … 그것으로 기꺼이 물러서려는 용의가 있는 그런 자들이었다라고.

   가난한 사람들의 힘, 그리고 파리가 보여준 모범example의 힘에 등을 떠밀려 혁명의 물결 위에 올라선 그들 반대파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뜻밖의 좋은 정세를 최대한 이용하려고 시도는 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아니 많은 경우에, 아예 처음부터 그들은 구체제로부터 오는 위험보다는 좌파 쪽에서 오는 위험을 훨씬 더 우려하고 있었다. 파리에 바리케이드가 쌓이자마자 바로 그 순간부터 온건자유주의자들은 모두(그리고 카부르가 말한 것처럼 급진주의자들의 상당수도) 잠재적인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온건파가 그 입장을 급속히 혹은 차츰차츰 바꾸어감에 따라, 혹은 대열에서 이탈해나감에 따라 노동자들, 즉 민주적 급진파 중 비타협 분자들은 고립되었다. 아니면 전에는 온건파였다가 지금은 보수적이 된 세력과 구체제의 연합, 즉 프랑스 사람들의 이른바 '질서당'의 출현이라고 하는 훨씬 더 치명적인 사태에 직면하게도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100p


  혁명은 이와 같이 전반적으로 어디서나 패퇴했다. 그러면 다른 가능성은 없었을까? 거의 확실한 점은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혁명에 말려든 주요 사회집단 가운데서,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재산에 위협이 가해지는 사태에 직면하자 혁명의 강령들을 제대로 관철시키는 기회보다는 질서 쪽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색' 혁명과 맞서게 되자 온건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굳게 손을 잡았다. …

   나중에 살피게 되겠지만, 반동의 1850년대는 경제 면에서 체제적인 자유화의 시대였다. 그리하여 1848~1849년에 서유럽에서는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이 두 가지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 즉 혁명이란 위험스러운 것이라는 사실과, 그들의 실질적 요구사항들(특히 경제문제에서) 중 어떤 것들은 혁명 없이도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지는 혁명세력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102p


   … 지식인의 급진주의는 1848년 이전의 부르주아 사회가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지위를 넉넉히 제공하지 못한 데(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주로 기인한 것이었다.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는 이들 교육받은 사람들을 전례 없이 대량으로 배출시켰지만 이들이 받게 된 대접은 자신들이 품은 야심에 비해 매우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

   … 막상 적색혁명과 맞부딪치자 민주주의적 급진파였던 지식인들까지도 '민중'에 대한 순수한 동정과 자신들의 재산, 금전에 대한 감각의 두 갈래 사이에서 분열하여 곧잘 미사여구의 말재간 속으로 후퇴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는 달리 이들은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다. 극단으로 우경하는 일은 결코 없었고 그저 흔들흔들 동요한 것뿐이었다.


   108p


   그렇다 하더라도 1848년이 단순히 아무 중요성도 없는 짤막한 역사의 에피소드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져온 변화가 비록 혁명가들이 의도했던대로가 아니고, 또 정치체제와 볍률, 제도의 면에서 바로 이런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이루어놓지는 못했지만, 그 변화는 자못 뿌리 깊은 것이었다. 1848년은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전통적인 정치, 즉 군주에 의한 정치의 종언을 의미하였다. …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강자의 가부장제적 권리와 의미에 대한 신앙에도 종말이 왔다. …

   …

   이후 보수주의 세력, 즉 특권과 부의 세력은 새로운 방법으로 스스로를 방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사회질서를 수호하려는 자들은 민중의 정치학을 배워야만 했다. 1848년의 혁명이 일으킨 주요한 혁신이 바로 이것이었다. …


   111p


   루이 나폴레옹의 당선은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즉 혁명과 동일시되었던 이 제도가 사회질서의 유지와 양립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압도적으로 불만에 찬 대중들이라 해서 반드시 '사회전복'에 헌신할 지배자를 선출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는 단순한 무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곳보다 국가의 최상층부에서 조작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종의 민중선동과 홍보, 선전활동에 의해 나라를 통치하는 최초의 근대적 국가원수가 될 것이었다. '사회질서'가 '좌파' 지지자들에게 호소할 능력이 있는 세력인 척 행세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시민이 동원되어 정치에 참가하는 나라가 그러한 시대에서는 그렇게 행세해야만 한다는 것을 실례로 보여주었다. 이리하여 중류계급, 자유주의, 내셔널리즘, 심지어 노동자계급까지도 그 후로는 정치가 펼쳐 보이는 무대풍경에 항상 따라다니는 등장물이 된다는 것이 1848년의 혁명에 의해 분명해졌다. 1848년의 혁명들이 패배함에 따라 그것들은 일시 시계에서 사라졌을지 모르나,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그것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 정치가들의 행동까지도 그것들이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제 2부 전개과정


제 2장 대호황


   119p


   이 호황의 정치적 귀결은 그 중대성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그것은 혁명으로 흔들린 정부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숨돌릴 여유를 주었고, 반대로 혁명가들에게는 그 희망을 박살나게 했다. 그리하여 한마디로 정치는 동면기로 들어가고 말았다.


   120p


   이 평온한 시대는 1857년의 불황과 함께 종지부가 찍힌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이 시기는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의 일시적 중단일 뿐이었으니, 그러한 성장은 1860년대에 한결 더 대규모로 다시 시작되어 1871~1873년의 대호황으로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1857년의 불황은 정세에 전환을 가져왔다. 혁명파들은 "대중은 제법 지속된 이번 번영의 결과 고약한 무감각상태에 빠졌을 것"이라는 점을 시인하면서도 이 불황이 1848년의 재판을 낳기를 기대했지만, 그러한 기대는 실망으로 끝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정치학은 되살아났다. 그 길지 않은 기간에 자유주의 정치의 모든 오랜 현안문제들 -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가적 통일문제, 국체의 개혁, 시민적 자유 등 - 이 다시금 토론대상에 올랐다. 1851~1857년의 경제적 팽창이 1848~1849년의 패배와 피로를 오래 끌게 하면서 정치적인 공백 속에서 이루어진 데 반하여, 1859년 이후의 그것은 차츰 격렬함을 더해가는 정치활동과 때를 같이하면서 일어났다. … 한마디로, 정치학은 경제적 확장의 시기에 되살아났지만 그것은 이미 혁명의 정치학이 아니었다.


   121p


   이와 같은 진보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경제의 확장은 어떻게 이 시대에 와서 이다지도 눈부시게 그 발걸음을 가속화시켰을까 이 질문은 사실 뒤집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19세기 전반을 돌이켜볼 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자본주의적 공업화로 인해 증가일로에 있던 엄청난 잠재적 생산능력과, 그것이 이를테면 그 생산기반을 넓히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즉 그 생산기반을 제약하는 굴레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루고 있는 대조성이다. 그것은 극적으로 성장해갈 수는 있어도, 또 거기에 걸맞는 고용률과 적정임금을 창출하는 능력은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제품의 시장, 즉 축적되어가는 자본에 계속 이윤을 가져다줄 제품의 배출구를 넓힐 줄은 모르는 것같이 보였다.

   …

   … 첫째로는 초기의 공업발전이 - 주로 이윤을 추구하는 공업경제 자체의 자본축적의 압력을 받아서 - 마르크스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성과crowning achievement'라고 표현하게 했던 기차의 발명을 낳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둘째는 - 부분적으로 '근대적 생산수단에 적합한 교통, 전달 수단의 최종적 표현'이었던 철도, 기선, 전신 - 자본주의 경제의 지리적 범위가 상거래의 격증과 더불어 급격히 확대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구 전체가 자본주의 경제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확장된 하나의 세계 창출, 아마도 이것은 이 책이 다루는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태의 발전일 것이다.


   141p


   그러고는 붕괴가 왔다. …

   …

   역사가들은 1873년부터 1896년에 걸쳐서 '대불황'Great Depression이라 불린 것의 존재 자체를 의문으로 생각해왔다. 물론 그것은 1929년부터 1934년에 걸친 '대공황' - 그때 세계의 자본주의는 거의 속력을 잃고 정지한 상태에 있었다 - 만큼 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사람들은 대호황에 뒤이어 대불황이 따랐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역사의 새로운 시대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1870년대의 불황과 함께 그 막을 연다. 그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기는 하지만, 내친 김에 다음과 같은 점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것은 그다지도 튼튼히 뿌리 내린 것처럼 보였던 19세기 중반의 자유주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리고 파괴했다.

   1840년대 말엽부터 187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은 당시의 식자들이 상투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같은 경제성장, 정치적 발전, 지적 진보, 문화적 성취 따위의 모델, 적절한 개량을 거듭하면서 무한한 미래로 지속되어갈 그러한 것들의 모델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특수한 종류의 막간극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취한 바는 지극히 감명적이었다. 이 시기에 산업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제로 발전했고, 그럼으로써 세계라는 말은 지리학적인 표현으로부터 끊임없이 활동하는 현실적 실체로 바뀌었다. 역사는 이때부터 세계사가 되는 것이다.


   제 5장 국민들의 형성


   200p


   배젓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네이션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아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물으면 대뜸 설명하고 정의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

   … 국민국가가 형성되어간 이 시대에는 그것은 '국민들'nations을 주권적 '국민국가'nation-state로 개편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한 개편은 논리상 필연적일 뿐 아니라,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국민국가는 '국민'의 성원이 정주함으로써 지역이 확정된, 한결같이 일관된 영토를 가지는 것이었다. 또 '국민'이란 그 과거의 역사, 공통의 문화, 그 인종적 구성, 그리고 더욱더 그 '언어'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함축적인 의미에는 논리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련의 여러 기준에 의하여 다른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서로 다른 인간집단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또 그것은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오래된 일이지만, 그것이 19세기에 '국민성'nationhood이라고 간주되었던 바로 그것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부인 못할 일도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그러한 인간집단 … 이 19세기적인 영역국가territorial states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그러하다. … 19세기적인 영역국가란 비교적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일반적 강령으로서나마 국민국가가 아닌 것 중에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려고 하는 소망은 그 자체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시기에 국민 및 '내셔널리즘'의 성립과 국민국가의 창출을 더욱 명확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단지 분석을 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 유럽은 두 그룹, 즉 옳건 그르건 간에 그 <국가 내지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민족들'>과 <그 점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민족'>의 두 갈래로 갈려 있었으니 말이다.


   202p


   한 국민의 성립 여부에 관한 '역사적' 기준에서는 지배층 또는 교육받은 엘리트층의 제도와 문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 그러나 내셔널리즘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적인' 입론들은 이와는 매우 달라서 훨씬 더 급진적이고 또 민족적, 혁명적인 내용의 것들이었다.

   그들이 디디고 선 입장은 역사나 문화가 어떠하건, 아일랜드인은 아일랜드인이지 영국인이 아니고, 체코인은 체코인이지 독일인이 아니고, 핀란드인은 러시아인이 아니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착취당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었다. …

   이러한 의미의 국민적 독자성의 기초는, 반드시 당장 식별될 수 있는 육체적 외견의 차이라는 의미의 '인종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으며, 또 언어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형적으로 '비역사적' 내지 '준역사적'인 민족이 역시 '소규모'의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세기 내셔널리즘은 지금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어떤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국민국가'의 주창자들로서는 국민국가란 단순히 국민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즉 궁극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와 기술, 국가조직과 군사력을 발전시켜나갈 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 다시 말하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큰 국민이라는 것을 전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민족은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사실상 부르주아적인 사회발전의 '자연적' 단위라야 했던 것이다.


   205p


   국민국가를 진보의 개념과 결합시켜 양자를 동일시한 사람의 단순한 논법은 소수의 후진민족에게, '실재하는' 민족으로서의 성격을 부인하거나, 역사의 진보에 따라 그들은 더 큰 '실재하는' 민족 내부의 한 지방적 특질 정도의 것으로 되고 말아야 한다고 논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어떤 문화민족(Kulturevolk)에 동화시킴으로써 실제로 소멸시켜버려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것이었다. …

   이와 같은 거론에는 반평등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깔려 있고, 또 그보다도 훨씬 강한 자기 변호가 깔려 있다.


   208p


   국민국가를 형성하겠다는 운동과 내셔널리즘 사이에는 이와 같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전자는 후자에 입각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구조물을 건설하려고 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기를 '독일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단일한 독일국가, 즉 어떤 특정형태의 독일국가가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 이러한 지역에 사는 모든 독일인을 포함하는 독일국가 따위는 거론할 나위도 없는 (가공의) 것이었다.


   210p


   브리튼 섬 전역에 사는 브리튼인은 얼마만큼 스스로 브리튼인이라고 느끼고 있었을까? … 프랑스인은 '위대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 … 독일인들 중에서 도대체 얼마만한 사람이 독일 통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일치된 견해로는 독일 농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민족문제가 정치를 지배하던 1848년의 혁명 당시에도 그렇지 못했다. 이들 나라는 모두 대중적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나라들이었다. 이러한 나라들마저 그러하였으니, 이것은 민족주의의 보편적 존재와 동질성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나라들, 특히 새로이 나타난 나라들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오직 신화와 선전상으로만 내셔널리즘이 당연시되었던 것이다.


   213p


   농민과 산악민들이 외국인의 지배에 대하여 일으킨 반란이, 피압박의식과 배외적 감정, 고래의 전통에 대한 집착, 진정한 신앙, 그리고 인종적 동일성에 대한 막연한 감각 따위와 결합되었을 때 이러한 것을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러한 것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마침 근대적인 민족운동과 결합되었을 경우에만 이러한 반란도 '내셔널리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18p


   민족적 감정이나 민족적 충성심(민족이 국가를 이루게 되었건 그 반대이건 간에)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네이션'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산물이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것이었다. 아니, 비단 새로울 뿐 아니라 사실 '네이션'은 새로이 건설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국민적 통일성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가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 제도란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state)를 의미했으며, 특히 국가적 교육, 국가적 고용, 그리고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병역을 의미했다.


   222p


   한 내셔널리즘이 어떤 고유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에서 동화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열위의 소수민족임을 감수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대항 내셔널리즘(counter-nationalism)을 자동적으로 낳게 했다는 것은 내셔널리즘의 역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유주의 시대는 이 역설을 파악하지 못했다. 자유주의 시대는 자유주의를 승인해주고 스스로 그것을 체현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리고 적당한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지지해주기도 한 '국민성의 원칙'(principle of nationality)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

   내셔널리즘(민죽주의)은 아직도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낼 수 있는 문제, 그리고 그것과 양립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졌다. 여러 국민의 세계는 자유주의의 세계가 될 것이며, 자유주의 세계는 여러 국민들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이 양자간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제 6장 민주주의 세력들


   225p


   내셔널리즘이 여러 나라 정부들에게 승인된 하나의 역사적 힘이었다면 '민주주의', 즉 나랏일에 대한 서민(common man)들의 역할 증대라는 사실 또한 역사적인 힘이었다. 이 시대의 민족주의운동(nationalist movement)이 대중운동화되어 있었던 한, 그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었다. …

   어쨌든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볼 때 중요했던 것은 '대중'들이 무엇을 믿고 있느냐 하는 사실이 아니라, 대중들의 신념이 바야흐로 정치에서 힘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지배계급의 정의에 따르면 대중이란, 그 수가 많고 무지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1848년의 혁명들은 대중이 지배자의 폐쇄된 서클 속으로 얼마나 뚫고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준 바 있었다. 그리고 또 산업사회화의 과정 그 자체가 혁명적이 아닌 시기에도 대중의 압력을 끊임없이 높이고 있었다. …  대중은 그 후로, '잘 다루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제 3부 결과


   제 13장 부르주아의 세계


   443p


   물건이란 거기에 든 비용의 구현이다. 가정용품의 대다수가 손으로 만들어졌던 시대에는 얼마나 공을 들이느냐 하는 것이 재료값과 함께 물건에 얼마만한 비용이 든 것인가를 말해주는 척도가 되었다. 따라서 비용을 들이면 쾌적함도 살 수 있었다. 물건이란 단지 실용품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위와 출세의 상징이기도 했다. 물건은 인격의 표현이자 부르주아 생활의 이념과 현실로서, 또 인간을 '변혁'시키기까지 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의 가치를 지녔다. 이 모든 것들이 가정 안에 표현되고 집약되었다. 그리하여 가정 내에 물건들의 축적이 이루어졌다.

   주택과 마찬가지로 가정 내의 물건들은 '실한'(solid) 것이었다. … 부르주아의 주택이나 거기에 딸린 물건들의 구조는 거대한 철도나 증기선과는 달리, 그 자체가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힘이 될 만한 웅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바깥부분은 오직 기능적으로 되어 있을 뿐이었다. … 그러므로 미美는 장식, 결국 물건의 표면을 보기 좋게 꾸민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튼튼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이중성은 부르주아 세계의 매우 전형적인 분열, 즉 물질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날카로운 분열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세계의 정신과 이상은 물질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물질을 통해서만, 적어도 물질을 구매할 수 있는 금전을 매개로 해서만 표현될 수 있었다. …

   우리는 정신적인 성취의 추구와 물질적인 성취의 추구에는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을 것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의, 그리고 후자가 전자의 불가결한 기초가 되어 있다는 것을 결론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물질과 정신의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위선을 의미했다. 냉철한 관찰자들은 이 위선을 부르주아 세계의 도처에 스며든 한 특질, 나아가 부르주아 세계의 한 기본적 특질로서 파악하고 있었다.


   454p    여성들.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단위인 핵가족제(one-family household)는 가부장 독재인 동시에,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또는 그 이론적 대변자)가 규탄하고 폐기시켰던 제도, 즉 개인예속적 위계질서제의 축소판 바로 그것이었다.

   … 이상한 것은, … 여자들은 지성이나 지식을 나타내서도 안 되고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찰스 킹슬리는 "착하고 상냥하되 영리한 아가씨가 되지 말지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내에게 한가로움과 사치를 제공할 수 있는 부르주아적 남편의 능력을 남에게 과시해야 하는 부르주아적 아내의 새로운 기능이 집안일을 실제로 꾸려나갔던 옛 아내들의 기능과 상충되는 것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열등성이 현시되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숙녀'란 자신이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 그 명령으로써 자신의 우위를 확립하는 존재로 정의되었다. … 이상적인 부르주아 가정은 위계적으로 상하의 계층이 있는 많은 여성들 위에 남자가 군림하여 이들 여자를 지배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

   여자 하인과 고용주의 관계는 금전적인 관계가 아니라 주로 인간적인 종속적 관계, 실제로는 전인적인 종속적 관계 … 하인들이 걸치고 있는 앞치마나 유니폼, 혹은 그것 없이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증명서, 즉 좋은 행실 또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증명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권력과 복종관계를 상징하는 것 뿐이었다. …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부르주아의 가족구조가 부르주아의 사회구조와 정면으로 모순되었다는 점이다. 가족의 내부에서는 결코 자유라든가 기회, 금전적 관계와 개인적 이익추구 따위가 지배적이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르주아 경제의 이론적 모델이 되어 있었던 개인주의적, 홉스(Hobbes)적 무정부 상태가 가족형태를 포함한 사회조직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도 그 기초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 자본주의의 기조인 본질적인 불평등성은 부르주아적 가족제 속에서도 필연적으로 그 발현이 발견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의 종속은 집단적, 제도적, 전통적인 불평등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바로 그러한 까닭에 그것은 개인적 관계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 우월성이란 불안정한 것이었으므로 그러한 우월성은 영속성 있고도 확실성 있는 형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개인적 우월성은 본질적으로 화폐에 의하여 표현되었고, 화폐는 단지 교환관계를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사람의 사람에 대한 지배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형태에 의하여 보완되어야만 했다. 물론 아녀자들의 종속을 바탕으로 하는 가부장제적 가족구조는 하등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부르주아 사회가 이러한 가족제도를 파괴하거나 변혁시킬 것으로 기대할 만도 했던 - 후세에 가서 이러한 가족제도는 실제로 해체되기는 했지만 - 터에 부르주아 사회의 고전적 국면은 이러한 가족제도를 오히려 강화하고 과장하기까지 하였다.


   469p


   이긴다는 것 또는 살아 남는다는 것은 그것이 적자適者임을 실증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러한 적합성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도덕성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하는 널리 보급된 생각,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에 관한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낡은 부르주아적 윤리가 새로운 사태에 대응하여 자기 수정을 반영한 것일 뿐이었다. 다윈주의는 사회적 다윈주의이건 그 이외의 것이건 간에 단지 과학임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다위니즘이 정식화되기 이전부터도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부르주아가 된다는 것은 단지 우월자가 된다는 것뿐 아니라 옛 청교도들의 그것과도 같은 도덕성의 실현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가 단지 독립적인 인간이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국가나 신 이외의)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율하는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부르주아는 한 사람의 고용주요, 기업가 또는 자본가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주인'(master), '지배자'(lord, Fabrikherr[공장주])였고, '수호자'(patron), '우두머리'(chef)였다. 집에서건 사업에서건 공장에서건 명령권의 독점은 부르주아지의 자기규정에서 결정적인 사항이었다. 그리고 명목적이건 실질적이건 간에 부르주아의 공식적 주장이 그 시대의 모든 산업분쟁의 기본적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광산의 사장, 다시 말하면 많은 노동자의 우머리인 것이다....... 나는 곧 권위 바로 그것이니 나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상과 같은 관계가 나와 노동자 계급 사이에 지켜지게 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하고 있다."


   470p


   지배라는 말은 열등성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부르주아지들 사이에는 아리 계급들의 열위성에 대해서는 중요한 의견 차이가 없었고 다만 그 열위성의 본질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만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밑바닥의 대중들 가운데서도 적어도 존경할 만한 중산계급 하층으로 올라설 수 있을 만한 사람들과, 구원의 가능성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구별하는 노력이 기도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공이 개인적 장점에 기인하는 것인만큼 또한 분명히 개인적인 부르주아적 윤리는 실패를 지성의 결여 때문이라고 돌리기보다는 윤리적인 또는 정신적 박약성의 탓으로 돌렸다. 왜냐하면 사업상의 성공에는 그다지 두뇌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그 반대로 두뇌가 부를 보증해주는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건전한' 견해를 심어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인간을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와 뒤떨어진 자로만 단순히 구별한다는 것은, 술독에 빠져 사는 방탕한 노동자 대중과 '존경할 만한' 노동자들을 구별하는 데는 적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악전고투하는 중산 계급 하층에게도 그러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 밖의 중산계급에게는 적절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은 벌써 명백하였다. 옛 덕목은 이제 성공하고 부유한 부르주아지들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이렇게 해서 계급에 관하여 '생물학적' 우월성의 이론이라는 또 하나의 이론이 그 중요성을 더해가게 되었다. 이 이론은 19세기 부르주아 '세계관'(Weltanschauung)의 일부로서 널리 스며들었다. (계급적) 우월성은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부릊아는 전혀 다른 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류 진화의 높은 단계에 있는 인종에 속하며, 인류의 역사적, 문화적 발전의 유년기 또는 청년기에 머무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배자라는 개념과 지배자적 인종이라는 개념의 거리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그러나 지배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종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의문을 불허하는 우월성이란, 오직 열등자가 이를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그런 열등성을 의미했다.(이러한 열등성 또한 부르주아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고도 자기 처지를 만족스럽게 생각'해야만 했다'. 만일 그렇지 못한 노동자는 부르주아 사회 전체에 대한 '위험한 인물', 즉 '외부의 선동자'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사물을 똑바로 보는 눈에 비치기로는 직능별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지성적이며 최고의 기능을 갖춘 노동자들이라는 것 이상으로 명백한 사실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외부인이 순진하고 근본이 착실한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거짓 신화는 뿌리 뽑히지 않고 되풀이되었다.

   … 보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자 계급의 전투적인 활동가 혹은 잠재적인 지도자는 '선동자'라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물은 순종과 우둔과 어리석음이라는 고정관념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러한 태도는 하층계급의 지도자로서 잠재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중산계급 하층으로 흡수되어 스스로 그런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층계급의 수뇌부를 없애버리겠다는 결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고용주의 절대적 권리인 고용권과 해고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 뒤에는 공산주의의 위험성이 숨어 있다고 공장주들이 말할 때,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사회혁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소유권과 지배권이 불가분의 것이며, 따라서 소유권 침해를 일단 허용하면 부르주아 사회가 망하고 만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474p


   부르주아는 우두머리(master)들의 계급이었던가? 그렇다. 그러면 부르주아 계급은 지배계급이었던가? 이에 대한 대답은 좀더 복잡하다.

   … 지배권력들이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부르주아-자유주의적 정치체제를 세우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그리고 이와 더불어 부르주아지를 키워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부르주아 사회와 부르주아 사상을 오직 거부하기만 한다는 것은 이제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476p


   1848년 이전, 부르주아지의 안정성은 사회혁명의 공포로 말미암아 제약되었다. 1870년 이후에는 날로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 운동의 공포가 또다시 그들의 안정성을 적지 않게 뒤흔들게 된다. 하지만 그 중간 기간, 즉 1848년과 1870년 사이의 시기에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의심과 동요의 여지조차 없는 것으로 보였다. … 이 시대의 기본적 동인을 대표한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지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었단 말인가?


   제 15장 예술


   534p


   부르주아 사회에서 예술가는 '천재'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 가장 물질주의적인 문명에 대해 정신적 내용을 불어넣는 만능의 공급기능을 다 해주기를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요구를 감지하지 못하고는 19세기 후반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 교양 있고 해방된 자, 즉 성공한 중산계급 사이에서 예술은 '자연', 즉 풍경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더불어 전통적 종교의 대체물이었다.


   553p


   어떠한 작품이 '현대적'(contemporary)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작품의 주제에 관련된 것일 뿐 아니라, 변화와 기술혁신을 의미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보들레르가 예민하게도 지적했듯이, 만약 현재를 표현하는 즐거움이 거기에서 찾아질 수 있는 아름다움에서 유래할 뿐 아니라 '현재성의 본질적 성격'에서도 유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뒤이어 계기되는 '현재'는 독자적인 표현형태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것이 아닌 다른 표현형태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현재'를 적절하게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이 현대 - 그것은 동시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 를 이해하는 방법에게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그것은 '진보'였다.

   예술은 부단히 자신을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기혁신의 과정에서 새로운 혁신가들이 나타날 때마다 -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 전통주의자, 속물, 그리고 젊은 날의 랭보가 '직관력'이라 불렀던 그 무엇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탈락됨을 면할 수 없었다.


   554p


   전위예술은 (부르주아 사회를 종종 비판하지만) 부르주아 사회와 지적으로 상호모순되지 않는 예술 - 자본주의 세계의 물질적 현실을, 그리고 실증주의에 의해 파악된 진보와 자연주의를 구현하는 예술 - 을 창조하려는 기도가 좌절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56p


   플로베르의 『감정교육』(1869)은 질풍노도 같았던 1840년대의 청년들이 품었던 이 같은 희망이 1848년의 혁명 그 자체와 그것이 뒤이은 시대에 의하여 이중으로 배반당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1848년에 뒤이은 시대에 부르주아지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부르주아 혁명 그 자체의 이념까지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1840~1848년의 낭만주의는 이러한 실망으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주요 제물이었다.


   제 16장 결론


   565p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세상 일은 운명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은 꼼짝 못하고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진보'라는 원리대로라면, 그런 운명 따위는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 빈의 희극작가 요한 네스트로이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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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

흑심

2017. 1. 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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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커튼」 타이핑





17p

   헨리 필딩은 이 장르를 정의 내리고자 즉 그 존재 이유를 규명하고 또한 그것이 해명하고 탐구하고 포착하고자 한 현실의 경계를 확정 짓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양식은 인간 본성이다.” 이 명제는 겉보기와는 달리 결코 진부하지 않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소설에서 재미있고 교훈적이며 기분 전환이 되는 이야기 그 이상을 보지 못했던 터였다. 따라서 아무도 소설에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만큼 일반적인 목표, 다시 말해서 엄격하면서도 진지한 목표를 부여해 주지 못했으며, 또한 아무도 소설을 인간에 대한 성찰의 경지에 올려놓지 못했다.

   톰 존스에서 필딩은 등장인물 한 사람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며 서술을 도중에 갑자기 멈춘다. 그 인물의 행동은 필딩에게 인간이라는 이 기이하고 놀라운 피조물의 머릿속에 결코 자리 잡을 수 없는 모든 부조리 가운데에서도 가장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 기이한 피조물에게 존재하는 설명할 수 없는 것앞에서의 놀라움은 사실 필딩에게 소설을 쓰는 첫 번째 동기, 즉 창작의 이유다. ‘창작(영어로 invention)은 필딩에게 핵심어다. 그는 그 기원으로 라틴어 inventio를 제시하는데, 이 단어는 발견(discovery, finding out)을 뜻한다. 소설을 창작하면서 소설가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설 창작은 그러므로 인식의 행위다. 필딩은 이를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신속하고 명민하게 꿰뚫어 보는 것(a quick and sagacious penetration into the true essence of all the objects of our contemplation)"이라고 정의한다.(훌륭한 문장이다. 형용사 신속한(quick)’은 이 행위가 직관이 근본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특별한 인식 행위임을 잘 보여 준다.)

 

19p

   세르반테스는 전설적인 인물을 낮은 곳, 즉 산문의 세계로 보낸 것이다. 이 산문이라는 단어는 운문이 아닌 언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삶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며 육체적인 성격 또한 의미한다. 소설을 산문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이 단어는 이 예술의 심오한 의미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인물들은 그들의 미덕 때문에 찬양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인물들은 이해받기를 원하는데 이는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혹은 패배했다 해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 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24p

   필딩이 말한 바를 되새겨 보자. “여기에서 우리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양식은 인간 본성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극적 행위들이 진실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열쇠일까?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가리는 장벽이 아닐까?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가 무의미 아닌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운명은 우리의 행운일까, 불운일까? 우리의 굴욕일까, 혹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위안, 탈출구, 이상향, 피난처일까?

 

25p

   돈키호테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질녀가 먹지 못하거나 가정부가 마시지 못하거나 산초의 기분이 유쾌하지 않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짧은 순간 동안 이 문장은 삶의 산문성을 가리는 커튼을 살짝 걷어 올린다.

   규정상 화자는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각각의 작은 사건은 과거가 된 이후부터 구체적인 특색을 잃고 윤곽으로 변화한다. 서술은 기억이다. 즉 그것은 요약, 단순화, 추상화다. 삶 그리고 삶의 산문성의 진짜 얼굴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어떻게 지나간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그 사건들이 잃어버린 현재 시간을 재구성해 줄 것인가? 소설의 기술은 대답을 찾았다. 바로 장면(scenes) 속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장면은 문법적으로는 과거로 이야기된다 해도 존재론적으로는 현재다. 즉 우리는 장면을 보고, 듣는다. 장면이 지금 여기, 우리 앞에 펼쳐지니까.

   19세기는 전 유럽을 여러 번 그리고 완전히 변화시킨 수십 년간의 분쟁 동안 태어났다. 인간 존재에서 근본적인 어떤 것이 그때 바뀌었으며 그 후로도 지속되었다. 역사는 누구나의 경험이 되었다. 인간은 그가 태어난 곳과 같은 세계에서 죽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시계는 어디에서나 큰 소리로 시간을 알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시간이 당장에 헤아려지고 날짜가 매겨지는 소설들 내부에서도 그러했다. 의자나 치마 같은 작은 대상 각각의 형태는 곧바로 그것의 소멸(변형)로 표시된다. 묘사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묘사 : 일시적인 것에 대한 연민, 소멸적인 것에 대한 구원.) 소설 각 장면에는 한번 그늘에서 나오자 끊임없이 세계의 얼굴이 형상을 만들고 또다시 만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32p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에서 250쪽 정도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열다섯 시간이 지났고, 겨우 네 개의 무대 배경, 즉 기차, 예판친의 저택, 가냐의 집, 나스타샤의 집이 등장할 뿐이다.

그때까지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공간에 그렇게 밀도 있게 사건들이 집중되는 것은 연극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 극도로 극화된 행위들(가냐는 미슈킨의 뺨을 때리고, 바랴는 가냐의 얼굴에 침을 뱉고, 로고진과 미슈킨은 동시에 한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뒤로 일상적인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스콧,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시학이다. 즉 소설가는 장면들 속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장면 묘사는 공간을 너무 잡아먹고, 긴장을 유지할 필요성은 행위들의 극단적인 밀도를 요구한다. 그로부터 모순이 생겨난다. 소설가는 산문적 삶의 진실성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장면 속에 사건이 너무 많아지고 우연이 넘쳐나서 산문적인 성격과 그 진실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연극화된 장면을 단순히 기술적인 필요 때문이라든지 결함에 의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의 축적은 예외적이고 믿을 수 없지만 그 무엇보다도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에 들어오게 될 때 얼마나 우리를 경탄하게 하며 매료시키는가!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발자크 혹은 도스토옙스키(소설적 형식의 위대한 마지막 발자크주의자)의 장면들은 아주 특별한 아름다움, 너무나 희귀한 아름다움, 그러나 확실히 실재하며 각자의 삶을 사는 동안에 갖게 되는 (혹은 최소한 스쳐 가는)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35p

   일상. 그것은 단순히 권태, 사소함, 반복성, 범용성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공기의 마법과도 같은 것. 각자는 자기 삶에서 그것을 깨닫게 된다. 옆집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사랑의 고통에 사로잡힌 학생이 한쪽 귀로 흘려듣는 교수의 단조로운 목소리. 이러한 사소한 상황들은 내적 사건에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함을 새기고, 이로 인해 그 사건은 날짜가 매겨지고 잊히지 않게 된다.

 

79p

   나는 프랑스로 이주해 왔던 처음 몇 주를 떠올린다. 파리에서의 이 첫 만남에서는 박해, 포로 수용소, 자유, 조국으로부터의 추방, 용기, 저항, 전체주의, 경찰에 대한 공포와 같은 거창한 말들이 떠돌아다녔다. 이 엄숙한 유령들의 키치를 쫓아 버리기 위해 나는, 미행당하고 있으며 아파트에도 경찰의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속임수를 배울 수밖에 없었노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 중 하나와 나는 서로 아파트와 이름을 바꾸었고, 엄청난 난봉꾼인 내 친구는 마이크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 아파트에서 그의 거창한 사업을 수행했다. 모든 연애담의 가장 어려운 순간이 이별이라면, 내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그 친구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어느 날 숙녀들과 부인들은 내 아파트가 명패도 없이 닫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시간에 나는 파리에서 내가 본 적도 없는 일곱 여인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내 서명이 담긴 편지를 받아 보고 있었다.

   나는 내게 소중했던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싶었지만 그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급기야는 단두대의 날처럼 차갑게 제겐 전혀 재미있지 않군요.”라고 말했다.

   우리를 갈라놓았던 것은 두 가지 미학적 태도의 충돌이었다. 키치를 유난히 참지 못한 사람이 천박함을 유난히 참지 못하는 사람과 부딪혔던 것이다.

 

87p

   예술은 모두 같지 않다. 그것들 각각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을 통해서다. 이 문 가운데 하나는 전적으로 소설의 몫이다.

   나는 전적으로라고 말했는데, 이는 소설이 내게는 하나의 문학 장르’, 나무의 여러 가지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그 고유한 여신을 부정하거나, 소설에서 고유한 독특함이나 독자적인 예술을 보지 못한다면, 소설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소설에는 자신만의 기원과, 그에 고유한 시기들의 리듬이 있는 자신만의 역사가 있다. 소설은 자신만의 도덕을 갖고 있으며 (헤르만 브로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 실존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단면도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이 곧 비도덕적이다. 그러므로 사물들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과 훌륭한 모범을 보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의도다.) 작가의 자아와 특수한 관계에 있으며(‘사물의 영혼이 내는 잘 들리지 않는 은밀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소설가는 시인이나 음악가와는 반대로 자기 영혼의 외침을 침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창조의 지속적 순간을 지니며 (소설 쓰기는 작가의 삶에서 한 시기를 차지하고 있어 작업이 끝나면 작가는 시작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모국어를 뛰어넘어 세계로 열린다.

 

91p

   카프카가 심리학에서 벗어나 상황의 검토에 집중하게 된 것은 그의 인물들이 심리적으로 설득력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들이 배면으로 물러났음을 뜻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뒤집고, 인간의 삶에 다른 방식의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정체성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함으로써 카프카는 과거의 문학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동시대인들인 프루스트나 조이스와도 구분된다.

   여기에 소박하지만 근본적인 미학적 전환점이 있다. 어떤 인물에 관해서 모든 정보가 주어져야만 그 인물이 생생하고 강렬하며예술적으로 성공적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처럼 실재적인 존재라고 믿게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소설가가 그를 위해 창조한 상황의 공간을 가득 메우기만 하면 된다.

 

96p

   고유한 특수성과 본질에 최대한 다가가려는 각 예술 분야의 노력에서 종종 모더니즘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서정시의 경우, 순수한 시적 환상의 샘이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 수사적, 교훈적, 장식적인 것들을 모두 버렸다. 회화는 다른 수단(예를 들어 사진과 같은)을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 기록적이고 모방적인 기능을 버렸다. 그렇다면 소설은? 소설 역시 역사적 시대 설명이나 사회의 묘사, 이데올로기의 옹호 수단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사회 운동, 전쟁, 혁명과 반혁명, 국가의 굴욕 등 역사 그 자체는 소설가에게 그려야 할 대상,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관심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

 

102p

   소설의 하늘을 환하게 비추었다. 꿈과 현실의 융합을 매력적으로 호소한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의 별이다. 카프카는 너무 일찍 죽어서 그 작가들과 그들의 강령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쓴 소설들이 이 두 미학적 경향을 예고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그 둘을 서로 연결하고 하나의 관점 안에 묶고 있음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발자크나 플로베르, 프루스트가 구체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묘사하고자 할 때 개연성을 위반하면 모두 부적절하고 미학적 일관성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설가가 실존적 문제 제기에 목표를 둘 때, 독자를 위해 개연적 세계를 창조해야 할 의무는 더 이상 규칙이나 필수품이 아니다. 작가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에 실제와 같은 외양을 덧입혀 줄 정보와 묘사와 인과 관계들에 훨씬 더 무심해져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인물들을 명백한 비개연성의 세상에 배치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조차 있다.

   카프카가 경계를 뛰어넘은 후로 비개연성의 국경은 경찰도 세관도 없이 영원히 열려 있다. 이것은 소설의 역사에서 위대한 순간이었다.

   현실을 주의 깊게, 집요하게 들여다볼수록 실제 현실과 모든 사람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프카의 오랜 응시 속에서 현실은 점점 비상식적이고, 따라서 비이성적이고, 따라서 비개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 세상에 대한 이 길고 게걸스러운 시선이 바로 카프카와 그 후의 다른 위대한 소설가들을 개연성의 국경 너머로 이끈 것이다.

 

107p

   농담, 기담, 우스운 이야기. 이것들은 비개연성 속을 모험하는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 완벽한 한 쌍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훌륭한 증거다.

 

123p

   소설가를 누구와 견주어 볼까? 서정 시인과 견주어 보자. 헤겔에 의하면, 서정시의 내용은 시인 그 자신이다. 서정 시인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 언어를 부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느끼는 감정과 영혼의 상태를 독자의 심중에서 일깨우려 한다. 시가 시인의 삶과 동떨어진 객관적인주제를 다룬다 할지라도 위대한 서정 시인은 아주 빨리 그 주제에서 벗어나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초상을 만들게 될 것이다.(stellt sich selber dar.)”

   헤겔은 음악과 시가 그림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이 서정성(das Lyrische)이라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정주의에서 음악은 시보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음악은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내면세계의 가장 은밀한 움직임들을 포착해 낼 수 있으니까. 서정시보다도 훨씬 더 서정적인, 음악이라는 한 예술이 존재한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다. 서정성의 개념은 문학 분야(서정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존재하는 어떤 방식을 가리키므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서정 시인은 자신의 고유한 영혼과 그 영혼을 들려주고 싶은 욕망으로 빛을 발하는 사람의 가장 대표적인 구현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나는 젊은 시절은 서정적 시기라고 생각해 왔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이러한 가설(필연적으로 도식적일 수밖에 없는 가설이지만 도식으로서 내가 보기에는 적절한 가설)을 근거로 보자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소설가의 형성 과정을 표본이 될 만한 이야기의 형태, 신화의 형태로 상상해 보니, 이 과정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로 드러난다. 사울은 바울이 된다.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

 

128p

   반서정주의로의 개종은 소설가의 이력서에라면 반드시 들어 있는 기본 항목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진 소설가는 갑자기 거리를 두고 자신을 본다. 그러고서는 자신이 그렇다고 여기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이런 경험을 해 봐야 소설가는 누구나 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아니라는 점과, 이러한 오해는 그런 다음 이런 사람들에게 희극의 희미한 빛줄기를 던질 줄 알게 되는 것이다.

 

130p

   전설들로 짜인 마법 커튼이 세상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떠나보내면서 그 커튼을 찢었다. 아무런 장식 없는 희극적 산문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기사 앞에 세상이 활짝 열렸다.

   첫 만남을 위해 서둘러 가기 전에 단장을 하는 여자와 같이, 세상은, 우리가 막 태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달려온 구 세상은 단장을 마친 상태, 가면을 쓴 상태, ()해석이 가해진 상태다. 오로지 순응주의자들만이 이 세상에 잘 속는 것은 아니리라. 여하간 반역을 꾀하는 존재들, 즉 모든 것에 그리고 모두에게 너무도 반기를 들고 싶어 하는 존재들은 세상의 어떠한 부분에 순응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은 저항할 만해 보이는 해석된(선해석이 가해진) 것에 대해서만 분노할 것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 유명한 그림은 들라크루아가 선해석의 커튼에 있는 장면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한 젊은 여자가 심각한 얼굴로 가슴을 드러내 놓고 겁을 주고 있다. 그 여자 옆에는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쥔 코흘리개가 있다.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이 그림이 명화의 대열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진부한 그렇고 그런 산문과 낡아 빠진 상징으로 유명세를 얻은 소설은 소설사에서 제외된다. 실제로 세르반테스가 새로운 소설 기법을 개척했던 것은 바로 선해석의 커튼을 찢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이 파괴적 행위는 소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설이라면 그 어느 것에서나 반영되고 이어진다. 이것은 소설이란 예술임을 증명하는 표시이니까.

 

133p

   그중에서도 예술가의 영광이 가장 끔찍하다. 왜냐하면 그 영광이 불멸할 것이라 생각하니까. 그것은 악마가 파 놓은 함정이다. 예술가의 마음속에 불멸을 바라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과대한 야심이 반드시 있어야 예술가는 예술가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정한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영구적인 미학적 가치를, 즉 작가의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야망 없이 글을 쓰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배관공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이지만, 일부러 덧없고,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래서 무익하고, 결국 성가시고, 마침내 해를 미치는 책들을 만들어 내는 평범한 소설가들은 경멸당해 마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성실함이 그 지나친 야망이라는 고약한 기둥에 묶여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에게 내려진 저주다.

 

139p

   작품은 미학적인 설계도를 따라 아주 긴 작업을 거친 끝에 나오는 것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작품은 소설가가 결산의 시간에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짧고 독서는 길고 문학은 엄청난 증식으로 인해 자멸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라면 누구나 솔선하여 부차적인 것은 전부 다 잘라 내야만 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핵심의 윤리를 권장해야만 한다!

 

153p

   국가를 구성하고 조직, , 재판,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행정, 청사, 경찰 등을 갖춘, 이 사는 도덕적 원칙을 개인에게 부과하기 때문에 개인의 행동은 자신의 인격보다는 외부에서 비롯된 익명의 의지들에 의해 훨씬 더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소설이 탄생한 곳은 바로 이런 세계다. 예전에 서사시가 그랬듯이 소설 또한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행위가 문제시되고, 다음과 같이 복잡한 문제로 나타난다. 행위가 복종의 결과에 불과한데도 그것은 여전히 행위인가? 그리고 행위와 일상의 반복되는 동작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또 행위의 가능성이 아주 적은 현대 관료 세계에서 자유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 (in concreto) 무슨 뜻일까?

 

155p

   로렌스 스턴은 자신의 요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젤라스트(agelaste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라블레가 웃을 줄 모르는 이들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리스어로 만들어 낸 신조어다. 라블레는 아젤라스트들에게 진저리를 쳤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비난으로 인해 더는 한 글자도 쓰지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참 똑똑하고 정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과 있을 때면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쁘게 보이지 않고, 시니컬하게 비춰지지 않으며, 그냥 아주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로 그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다 신경 써 가려야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희극을 참아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근엄한 척하는 태도가 그들에게 깊이 뿌리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을 아니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을 멀리 피하게 된다.

   미학 개념이라면 어느 것이나(그리고 아젤라스티(agelastie)도 미학 개념 중 하나다.) 끝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것은 미적 부조화였다. 즉 진지하지 않은 것과의 뿌리 깊은 부조화. 부적절한 웃음에 의해 일어난 소란에 대한 분노.

   아젤라스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희극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은 희극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해 희극을 도박이나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하여 희극의 끔찍한 본질을 폭로하니까.

 

159p

   명석한 이에게 찬사를 보내는 미치광이와 미치광이의 찬사를 믿는 명석한 이, 둘 중 누가 더 미치광이일까? 이렇게 우리는 더 섬세하고 너무나도 귀중한 다른 차원의 희극을 경험했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스꽝스럽게 되고, 조롱받거나, 심지어 치욕스러운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웃지 않는다. 대신에, 한 현실이 느닷없이 모호한 상태로 드러나고, 사물이 자기 본연의 명백한 의미를 잃으며,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그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웃는다. , 이게 유머(옥타비오 파스에 의하면, 세르반테스에게서 나온, 현대의 위대한 발명인 유머).

 

162p

   인간의 크나큰 싸움을 선악의 다툼으로 보는 고지식한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이 싸움을 비극의 조명 아래서 이해하는 것, 이것은 정신이 이룬 엄청난 성과였다. 이 성과로 인해 인간이 따르는 진리의 숙명적 상대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적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를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전쟁, 시민 전쟁, 혁명, 반혁명, 민족 전쟁, 저항과 억압들은 비극의 영역에서 쫓겨나 징벌을 내리고 싶어 안달이 난 재판관들의 권위에 휘둘리며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이것은 퇴화일까? 비극 이전의 단계로 인류가 다시 추락한 것일까? 그런데 이 경우에는 무엇이 퇴화되었던 것일까? 범죄자들에 의해 찬탈되어버린 역사 그 자체일까? 아니면 역사를 이해하는 우리의 방식일까? 나는 종종 우리에게 비극이 사라졌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징벌일 것이다.

 

165p

   역사와 역사의 거창한 명분들과 그 영웅들이 사소하게, 심지어는 희극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역사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어렵고 비인간적이며 게다가 초인간적이다. 아니, 어쩌면 탈영병들에게는 이 일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법률적, 도덕적, 어느 모로 보나 탈영병은 유쾌하지 못한 존재, 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 겁쟁이와 배반자에 속하는 존재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가의 시선은 그를 다른 식으로 바라본다. 동시대인들이 벌이는 싸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자로 말이다. 그는 엄청난 살육의 현장에서 비극적 위대함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역사가 벌이는 코미디에 어릿광대로 출현하기를 싫어한다. 사물에 대한 그의 이해는 종종 명석하다. 아주 통찰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로 인해 그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그의 동료들과의 연대가 힘들어진다. 또 인류와도 멀어진다.

 

167p

   하나의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것일지라도 정적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의 결과로서 또 다른 행위가 일어나 사건들의 연쇄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이처럼 셀 수 없는 끔찍한 변화를 초래하며 계속 이어지는 행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어디서 끝이 날까?

 

171p

   미학 개념들은 끊임없이 질문들로 변형된다. 나는 자문한다. 역사란 비극인가? 이를 다른 식으로 말해 보자. 비극의 개념은 개인의 운명 밖에서 의미를 갖는가? 역사가 군중, 군대, 고통과 복수를 자극할 때면 우리는 개인의 의지를 구별해 낼 수 없다. 세상을 덮어 버린 시궁창의 범람이 비극을 완전히 삼켜 버리는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 우리는 공포의 파편들에 감추어진 비극성을, 진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용기를 가졌던 이들이 받은 최초의 충격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으로도 비극의 아주 작은 잔해조차 찾아내지 못하는 공포도 있다. 돈 때문에 일어난 살육. 더 끔찍한 경우는, 환상을 좇다가 벌어진 살육.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어리석음 때문에 일어난 살육.

   지옥(이 세상의 지옥)은 비극이 아니다. 어떠한 비극적 흔적도 없는 공포,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175p

   별 볼일 없는 시골 신사 알론소 키하다는 편력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라 만차의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그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그는 그가 아닌 사람이다. 그는 이발사의 면도용 놋대야를 투구라고 생각하고 빼앗는다. 이발사는 나중에 우연히 돈키호테가 있는 술집에서 자기 대야를 보고는 그것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당당히 자신이 쓴 투구가 면도 대야가 아니라고 한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간단한 것 같은 물건이 이제 문젯거리가 된다. 하기야 머리에 쓴 면도 대야는 투구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함께 있던 짓궂은 무리들은 재미있어 하면서, 진실을 증명할 유일한 객관적인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비밀투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투표에 참여한다. 결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 물건은 투구로 인정받는다. 그야말로 경탄할 만한 존재론적 농담이다!

   돈키호테는 둘시네아를 사랑한다. 사실 그는 그녀를 스쳐가며 봤거나 어쩌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사랑에 빠지긴 했지만 그건 자기 스스로도 말하듯이, 단지 편력 기사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부정과 배신, 사랑의 환멸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모든 서사 문학에 등장한다. 그런데 세르반테스에게는 연인들이 아니라 사랑 자체, 사랑의 개념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를 사랑한다면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단순히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모방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의 예들을 보고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한 보잘것없는 시골 신사 알론소 키하다는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질문과 함께 소설이라는 예술의 역사를 열었다. 개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183p

   정치적 태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상(너무나 연약하고 어렴풋한 그것!)이 아니라 덜 이성적이고 더 견고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185p

   플로베르에게서 어리석음은 예외도, 우연도, 결점도 아니다. 말하자면 교육으로 고칠 수 있는, 지성의 어떤 분자가 부족해서 생기는 양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고칠 수 없다. 천재나 바보나 모든 사람들의 생각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 본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생트 뵈브가 플로베르에게 했던 비난을 기억해 보자. 마담 보바리에는 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아니, 마담 보바리선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난점은 다른 데 있다. 거기에는 어리석음이 너무 충만한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샤를은 생트 뵈브가 보고 좋아했을 멋진 장면에 쓰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멋진 장면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상황들의 정수에 도달하고자 했다. 상황들의 정수, 모든 인간사의 정수에. 그는 어디에서나 어리석음이라는 연약한 요정이 춤추고 있음을 본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 요정은 선도 악도, 지식도 무지도, 에마도 샤를도, 당신도 나도, 있는 그대로 훌륭하게 받아들인다. 플로베르는 이 요정을 존재의 커다란 수수께끼라는 무도회에 초대했다.

 

189p

   카프카는 (플로베르의 표현을 다시 쓰자면) ‘다소 재치 있는 독특한 작품을 쓰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더 큰 영향력을 부여하기를, 그것을 세세하게 파고들고 발전시켜 가기, ‘그 이야기를 믿는 듯이보일 수 있도록 개연성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그렇게 해서 심각한, 심지어 끔찍하기까지 한 것을 만들어 내기를 원했다. 농담의 검은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리석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성은 그럴듯한 거짓말 뒤에 숨어 있는 악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에 직면할 때 이성은 속수무책이다. 폭로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리석음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결백하다. 솔직하다. 벌거벗었다. 그리고 정의할 수 없다.

   털끝만 한 의심도 없이, 털끝만 한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사상을 고수할 힘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어리석음 아닐까? 대리석에 조각된 듯 당당하고 위엄 있는 어리석음 아닐까? 옛날 올림푸스의 여신이 죽을 때까지 영웅들을 따라갔듯이 어리석음이 이 세 인물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 아닐까?

   맞다, 내 생각은 이렇다. 어리석음은 비극적 영웅의 위대함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본성과 떼어 낼 수 없이 어디서나 항상 인간과 함께 존재한다. 침실의 어슴푸레한 빛 가운데서나, 환하게 조명된 역사의 길에서나.

 

203p

   파브리스 델 동고, 아글라야, 나스타샤, 미슈킨, 주위에서 그들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되는지! 그들은 모두 미지로의 여행의 출발점에 있다. 물론 그들은 방황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방황이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방황하는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 거리를 두고 볼 때에야 방황이 방황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거리를 둘 때에만 방황의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미래의 어느 날 지나간 젊음을 향해 어떤 시선을 던지게 될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이미 경험한 어른들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옹호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실존적 증거들은 명백한 것일수록 덜 드러나 보인다. 삶의 나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214p

   확실한 것이 속하는 좁은 가장자리 이면에는 무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다. 대략적인 것, 꾸며 대는 것, 변형된 것, 단순화된 것, 과장된 것, 잘못 이해된 것의 공간, 즉 쥐처럼 서로 교미하여 그 수를 엄청나게 불리어 영원히 소멸치 않는 비진리들의 무한 공간이.

 

219p

   소설가는 황폐화시키는 이 망각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만 할까? 소설가는 독자가 결코 자신의 소설에 머무르지 않고 오로지 건성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 곧장 잊어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망각을 무시하고 자신의 소설을 잊힐 수 없는 것의 파괴되지 않는 성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221p

   망각이 장악하는 광대한 시간 속으로 이야기는 결국 용해되고 마는 광활한 공간의 세계, 톨스토이는 그런 세계에다 안나의 이야기를 위치시킴으로써 소설이라는 예술의 본질적 성향을 따랐다. 실제로 태고 때부터 존재해 오던 모습 그대로인 서술은, 작가가 더 이상 단순한 스토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위에 펼쳐진 세계로 난 아주 커다란 창들을 활짝 열어젖힐 때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이렇게 스토리들중 한 스토리에 에피소드, 묘사, 관찰, 성찰 등이 덧붙여진다. 작가는 아주 복잡하고 정말 이질적인 소재와 대면하여, 건축가처럼 그 소재에 형식을 입히는 데 몰두했다. 이처럼 소설 기법에 있어서, 그 기법이 생긴 이래부터 계속, 구성(건축술)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획득했다.

   이와 같이 구성이 차지하는 예외적 비중은 소설이라는 예술의 발생론적 표지 중 하나다. 구성은 소설을 다른 문학 예술, 즉 희곡(희곡 건축술의 자유는 상연 시간과 쉼 없이 관객의 주의를 사로잡아야 할 필요에 의해 제한된다.) 또 시와 구별되게 만들어 준다. 시의 독창성은 상상력에 의해 발현되지 전체의 건축술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까. 반대로 소설의 아름다움은 그 소설의 건축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내가 방금 아름다움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구성은 단순한 기술적 기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은 그 자체로 한 작가 표방하는 스타일의 독창성을 보여 준다.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소설은 동일한 구성 원리에 기초한다.) 그리고 구성은 각각의 독특한 소설을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동일한 원리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각각은 모방할 수 없는 건축술로 이뤄져 있다.)

   어느 날 소설의 역사가 끝이 난다면 끝난 이후에도 남아 있을 위대한 소설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어떤 소설들은 줄거리를 말하는 게 불가능하고, 또 그런 이유로 각색도 안 된다. 이 소설들은 있는 그대로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소설들은 품고 있는 스토리덕택에 줄거리를 말할 수 있는 듯이 보이므로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만화로 각색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불멸은 한낱 공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한 소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소설의 구성을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스토리만 남게 된다. 형식은 포기하고 말이다. 아니, 예술 작품에서 형식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각색을 통해서 위대한 소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화려한 무덤을 만들 뿐이다. 그 무덤의 대리석 묘비의 짧은 글귀만이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이름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239p

   문법은 마술을 부려서 다수의 개체를, ‘우리그들로 지칭되기는 하지만 구체적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실체, 단 하나의 주어, 단 하나의 주부主部로 변형할 줄 안다. 그러나 포크너는 소설 형식을 통해서 복수複數라는 마법의 신기를 벗긴다. 단 한 명의 서술자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소설에는 열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그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예순 개의 짧은 장들로 구성된) 이 원정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다.

   복수의 문법적 기만과 더불어 단 한 명의 서술자가 가진 지배력을 없애려는 경향, 포크너의 이 소설(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 상당히 부각되는 이 경향은 초기 소설의 기법에서부터 그리고 18세기에 아주 널리 퍼진 서간체 소설의 형식에서 이미 싹을 틔워 가능성으로서 제시됐다. 이 형식은 스토리와 인물들 사이의 세력 관계를 단번에 무너트렸다. 그로 인해 어떤 인물을 등장시키고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를 스토리의 논리가 독단으로 정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이번에는 인물들이 해방되어 말할 자유를 온전히 얻고 그들 스스로가 놀이의 주인이 되었다.

   하나의 스토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자신의 소설을 각각의 개별적 진실들과 그 환원될 수 없는 상대성의 카니발로 만들 줄 알았던 대담함

 

241p

   한 예술의 역사(한 예술의 총체적 과거’)는 그 예술이 창조했던 것뿐만 아니라 창조했을 수도 있었던 것에 의해, 또 완결된 모든 작품과 더불어 있을 수 있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던 작품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해 본다.

   모든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소설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는 소설끼리 다양한 상호 관계를 맺도록 하니까. 그럼으로써 소설의 의미는 명확해지고 그 명성은 유지되고 망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예술 작품들은 그 역사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면 훌륭한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244p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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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우리는 벌레여도 괜찮다.



  벌레 같은 놈,

  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카프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설령 정말 벌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 내가 사람이냐 벌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워진 짐이다. 붙여진 이름이고 타인이 만든 굴레다. 타자들을 위해 내 존재를 매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벌레나 다름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벌레여도 괜찮다. 세상은 그렇게 돼버렸다. 최소한 카프카의 세대였던 19세기와 20세기의 중간쯤부터. 그러니까 ‘그레고르는 왜 벌레가 되었을까?’하는 물음은 카프카의 문학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벌레여도 괜찮은 우리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변신>의 묘미는 일그러진 개연성에 있다. 작품 내내 그레고르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여겨봐야만 한다. 이건 카프카만의 문법이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것은 그 스스로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벌레가 되든 말든 그레고르는 일을 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사람 구실의 문제다. 전혀 개연성이 없다고 읽는 것은 오독이다. 카프카의 개연성은 작품 너머에 있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사상 두 번째 주기적 공황이 극복된다. 1929년의 공황 전까지 물질 사회는 다시 번영했고 카프카는 그 복판인 1912년에 <변신>을 썼다. 이미 물신이 세계를 집어삼키고도 남았을 때다. 화려한 쇼윈도의 이면에는 벌레가 되더라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프카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문화적, 언어적, 사회적으로 이방인이었고 주변인이었다. 그는 소수자의 어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변신>은 지극히 개연적이며 현실 반영적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19세기 마르크스의 작업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사람은 일을 함으로써 가치를 빼앗긴다. 사람은 이제 사람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하는 X’다. 이 미지수 X에 무엇이 들어가든 상관없다. 벌레든 의자든 귀신이든. 그러니까 <변신>의 낯설음은 당연하다. 그레고르의 ‘변신’,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고민하지 않는 그레고르의 행동에, 문학적 기법으로서의 낯설음은 이중으로 겹쳐 있지만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우리는 모두 ‘원래’ 벌레나 다름없다는 것. 일만 하고 돈만 번다면 뭐라도 괜찮은 존재가 돼버렸다는 것.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카프카가 우리는 낯선 것이다. 사람들이 그레고르를 혐오하는 것은, 벌레여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해내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카프카는 밖에서부터 인간성을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누이 그레테는 그레고르를 보살피던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후반부에서 노골적으로 속내를 터트린다.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돼요. 저것을 보살피고 참아 내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잖아요. 그 누구도, 또 저것은 그런 일로 우리를 비난하진 못할 거예요.” 그리고, “만일 저것이 그레고르였다면, ... 스스로 나가 버렸을 거에요, 틀림없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구절은 공들여 독해할 만하다. 카프카는 사람의 지위나 경제적 능력, 노동력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서 그를 대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그레테의 발언은 엄밀한 의미에서도 적절하다. 문제는 이 인간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는 데 있다. 앞서 말했던 ‘미지수 X로서’의 언어인 것이다. 이어지는 발언 또한 자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가족을 위해서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인간으로서’의 경계를 넘어간다. 인간은 이제 존재가 아니라 가치가 문제인, 벌레든 뭐든 제 구실만 한다면 상관없는 X다. 이로써 인간에게는 사치가 된 인간성과 X로서의 비인간성만이 남는다. 카프카는 이에 대한 고발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건조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결말은 인상적이다.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 가족은 새 삶을 예감한다. “... 잠자 부부는 차츰 생기가 돌아오는 딸의 모습을 보고, 딸이 최근 안색이 나빠질 정도로 근심과 고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탐스러운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성장해 있음을 동시에 깨달았다. 잠자 부부는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딸아이를 위해서 마땅한 신랑감을 구해 주어야 할 때가 곧 오리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전차가 내려야 할 장소에 도착하자 잠자 양이 제일 먼저 일어나 싱싱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잠자 부부의 눈에 그 모습은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느껴졌다.” 결말에서 그레고르는 이미 지워져 있다. 대신 누이 그레테가 ‘그 다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이제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이다. 다음 변신은 그녀의 차례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힘이 세다. 우리는 실재가 아니라 가상에서 살아간다. 수많은 진실들을 쉽게 보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일그러진 세계의 상을 지면에 투영할 수 있다. 그 지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가상에 열린 실재로의 틈이다. 그 목격만으로 인간은 수많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문학은 그런 식으로 세계를 움직인다. 조금씩, 조금씩. 카프카는 그런 면에서 예리한 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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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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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디아Accidia

공부 2017. 1. 2. 17:33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중.


   … 중세에 소위 아키디아accidia라 불리던 '영혼의 병' … '정오의 악마'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던 이 질병의 희생자들은 노동과 기도의 의무를 저버리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며,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오래 머무르며, 생각에 잠겨 있고, 무기력과 정신적 태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에 몰두하며, 주로 책을 읽는다. "부서져버려서 그 눈동자가 머릿속을 바라보게 되어버린 인형"에 비유되는 우울자의 병적인 내향성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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