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영어에 관한 지론

2016. 12. 3. 15:56



   0.


   수능 영어 지문독해에 왕도가 있을까. Key sentence 찾기? 수직독해? 몇 문장만 읽고 선택지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스킬? 영어 강사들 보면 각종 스킬들이 많다.

   하지만 왕도는 없다. 숙련이 전부다. 어떤 구조의 지문, 어떤 변칙적인 문제든 간에 단단한 기본기를 가지고 독해해 내는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도’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면, 그건 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고 완벽하게 읽어내는 독해력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다. 현역 때 나는 친구들로부터 언어, 외국어 영역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1등급을 놓친 적이 드물었던 건 물론, 오답 자체도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의 비문학 영역, 외국어의 독해 영역에서는 더 그랬다. 친구들 질문은 항상 비슷했다. ‘이 답이 대체 어떻게 나오는 거냐?’ 내 대답도 대부분 비슷했다. ‘그냥 그런 뜻이야, 이 지문이.’ 고3쯤 되니까 나는 ‘철수같은 놈’으로 통했다. 잔재주랄 것 없이 정직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문을 읽고 풀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그것도 다른 친구들보다 정확히. 그러니까 내게 ‘이 답이 대체 어떻게 나오는 거냐’라는 질문은 넌센스였다. 지문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이 답이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고등학교 수준 독해에서는(언어영역이든 외국어영역이든) 그게 전부다. 독해는 수학이 아니다.

   (스킬이랄만한 게 있다면, 지문을 ‘압축’하는 거다. 빈칸 유형은 사실, 사아실 수학에 가깝긴 하다. 하지만 문장들을 건너뛰는 데에 주목해서는 안 된다. 지문 전체를 독해하는 거다. 다른 문장들을 꿰뚫고 있는 몇 문장을 통해서. 지문 전체를 다 읽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리고 어쨌거나 왕도는 다 읽는 거다. 후술.)

   지금도 그렇다. 입시 공부를 떠난 지 4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군생활까지 끼어 있었는데도, 심지어 출제 경향까지 격변(영어는 체감될만한 차이는 없었지만)을 겪었는데도, 마찬가지다. 이번 수능 국어와 영어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었다고 해서 긴장하면서 풀었다. 4년 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풀어서 둘 다 만점 나왔다. 뭐 믿거나 말거나. 이게 무슨 뜻이겠는가. 출제 경향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수능에서 원하는 기초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이게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목표하는 언어능력의 본질이라는 이야기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공식으로 내놓은 자료에도 그대로 나와 있다. 대학에서 문제없이 수학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 능력을 목표로 한다고. 대학교에 가면 수많은 텍스트를 접해야 한다. 텍스트가 필요 없는 전공들도 더러 있지만 소화해야 하는 텍스트가 엄청난 전공들이 더 많다. 철학과 전공을 하나 들었었는데, 1주일에 50p에서 많게는 100p에 이르는 텍스트를 소화해야 했다. 고등학교 비문학은 비교도 못할 난이도다. 한 과목이어서 망정이지, 한 학기에 이런 전공을 세 개정도 듣는다고 해보자. 일주일에 책 한 권에 이르는 분량이다. 영어강의라도 하나 껴 있다고 해 보자. 그 때에도 잔재주가 먹힐까? 5지선다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요약, 정리하고 비평해야 하는 텍스트들에?




   1. 문장


   문장 하나만 먼저 해석해보자. 이번 수능 20번, 요지 문제의 첫 문장이다.

   Many present efforts to guard and maintain human progress, to meet human needs, and to realize human ambitions are simply unsustainable - in both the rich and poor nations.

   너무 길다. 다른 사람들은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천성이 섬세하지 않아서 이렇게 한다. Efforts are unsustainable. 이 정도면 문장의 본질이다. 너무 성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면 궁금해 하라. 그리고 읽어라. 어떤 노력이 어떻게 지속가능하지 못한지. 주어구의 장식들, 술어구의 장식들. 현재의 노력. 인간 진보를 지키고 유지하기.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인간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이런 게 다 지속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부국이든 빈국이든.

   이 문장에서 강조하는 건 Such an efforts are simply unsustainable, 이게 끝이다. 만약 이 문장에서 다른 걸 강조하고 싶었다면 다르게 썼을 것이다. 예를 들어, Many present efforts to guard and maintain human progress, to meet human needs, and to realize human ambitions are both unsustainable in the rich and poor nations. 이런 식으로. 이런 문장이라면 effort들이 ‘나라의 빈부와 무관하게’ unsustainable하다는 뉘앙스다. 원래 한낱 전치사구였던 것을 both의 위치 하나만 바꿔서 (both의 품사까지 바꾸긴 했다. 한정사에서 부사로.) 서술어에 더 강하게 밀착시켰다. 그러자 문장의 의미가 바뀌었다. 반대로 말해, 원래의 문장에서라면 in both 이하는 사족이었다는 이야기다. 같은 단어들로 다른 해석이 나오는 건 이렇게 쉽다. 올바르게 독해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문법이 그렇게 중요한가? 적절한 곳에 슬래시(/) 치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문장을 조각조각내서 뭐하게 그러나. 그런 일로 문장의 뉘앙스를, 글쓴이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문법을 잘 안다고 전술한 두 문장의 뉘앙스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까? 아니.

   다음 문장에서 f의 개수를 세 보자. Finished files are the result of years of scientific study combined with the experience of years. 답은 6개다. 그런데 3개밖에 못 찾은 사람들이 있다. 그게 더 좋은 거다. of를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식으로, 영어를 더 자연스럽게 읽는 거다. 모국어로 대화할 때를 생각해 보자. (이 문장을 예로 들자.) 모국어‘로’ 대화하는 거니까 모국어를 사용한다는 의미겠지. 대화하‘ㄹ’(관형사 어미 ㄹ) 이니까 ‘때’를 수식하는 거고 그러면 대화를 하는 시점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아무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 문법, 아니 인간 언어의 문법의 본질은 주어와 서술어다. '뭐가 어쨌느냐'다. 그게 바로 ‘관측하고 말하는 자들’, 우리 인간의 주 관심사다. 나머지는 단어의 뜻만 알고 있으면 된다. 물론 작문, 대화의 영역은 분석보다 건축에 가까우므로 언어의 설계, 작동 원리를 알고 있어야겠지만 독해에서는 아무래도 괜찮다. 이건 꼼수가 아니다. 복잡한 거 다 떼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자는 거다. 다소 성의 없어 보여도, 너무 대충인 것 같아도, 이 날것의 본질에 무감각하다면 길을 잃게 되어 있다. 문장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구성’하는 거다. 생각하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앞서서 독해에 굳이 왕도가 있다면 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빠르게 읽는 거라고 했다. 지금 보여준 바닥이 바로 그 길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추 : 영어 독해에 애로가 몇 가지 있다면, 그 중 어순의 비중이 꽤 크겠다. 한국어와 순서가 다르다. 하지만 문장의 뼈를 잘 읽을 수 있다면 - 문장의 주체와 서술, 그리고 필요할 때는 목적어까지 - 어순은 큰 문제가 아니다. 나 먹다 사과. 나 사과 먹다. 사과 나 먹다. 사과 먹다 나. 사과가 사람을 먹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면, 혹은 그런 ‘문학적’ 맥락이 아니라면, 상술한 4개의 문장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낯설 뿐이지. 이 뼈대에 문장의 디테일들을 살로 붙이는 거다. 연습하다 보면 금방 된다. 정말로.)




   2. 문단


   그 다음은 문단 차원이다. 이번 수능 최고난이도 33번.

Grief is unpleasant. Would one not then be better off without it altogether? Why accept it even when the loss is real? Perhaps we should say of it what Spinoza said of regret that whoever feels it is "'twice unhappy or twice helpless'" Laurence Thomas has suggested that the utility of "'negative sentiments'" (emotions like grief, guilt, resentment, and anger, which there is seemingly a reason to believe we might be better off without) lies in their providing a kind of guarantee of authenticity for such dispositional sentiments as love and respect. No occurrent feelings of love and respect need to be present throughout the period in which it is true that one loves or respects. One might therefore sometimes suspect, in the absence of the positive occurrent feelings, that (). At such times, negative emotions like grief offer a kind of testimonial to the authenticity of love or respect.

   사실 지금부터는 영어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 능력 전반에 관한 문제다. 낯간지럽지만 시 한편만 가져와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진부한 인용이긴 하지만 텍스트의 독해에 관해서는 아무리 남발해도 진부하지 않다. 텍스트를 능동적으로 대하라. 해석하지 말고, 독해하라. 그렇지 않으면 텍스트는 그냥 한글 자모, 영어 알파벳의 나열, 조직되지 않은 문장들의 단순 나열이다.

   ‘기술적으로’ 접근하면 신기하게 풀리는 문제다. 빈칸 문장을 먼저 읽는다. Therefore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게 인과 접속사라는 이유만으로 하나 앞 문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No feelings of love and respect need to be present when one loves or respects, throughout the period. 사랑하고 경외하는 내내 그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빈칸 문장은, One might suspect that () in the absence of the positive feelings. 그렇다면 Positive feeling이 없으면 ‘빈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one no longer loves’, 1번 선택지가 적절하다.

   첫째. 이래도 왜 1번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이 사고 과정을 이해하고 실제로 이렇게 맞췄다고 해도, 이건 도박이다. 첫 번째 경우는 텍스트 독해에 필요한 최소한의 능동성도 없는 것이고, 이런 풀이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두 번째 경우) 것 또한 논리를 가장한 끼워 맞추기다. 편할 대로 읽는 일이다.


   문장 단위 독해가 어느 정도 능숙한 상태라고 하자.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면 빈칸을 먼저 읽는 게 맞다. 긍정적 감정이 없는 상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질문이다. 첫 몇 문장을 읽다 보면 슬픔은 좋지 않다. 없으면 안 되냐, 이런 내용이다. (스피노자 문장은 왜 끼워 넣었는지 의문이긴 하다.) 그리고 Laurence Thomas의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을 기점으로 뉘앙스가 바뀌며, 바로 이 문장이 필자가 주지하는 바에 해당한다. 앞서서 슬픔이 없으면 안 되냐는 이야기를 하다가 Laurence Thomas가 제안한 'the utility of negative sentiments'가 나온다.

   능동적으로 독해하는 독자라면 여기서 지문의 구조화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문장을 독해해 보면 negative sentiments는 사랑이나 경외와 같은 감정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그 다음은 여기에 대한 보론 혹은 확장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를 푸는 스킬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문장은 문맥 안에서라야 쉽게 이해될 수 있고 문맥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가 능동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그 때에야 필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다섯 개의 선택지는 일도 아니게 된다. 스킬이 아니라 독해의 기본, 일반론이다.

   이어서 앞서 살펴본 두 문장이 나온다. 빈칸을 포함한 이 두 문장은 주제문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독해할 때 어렵다. 주제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 그 다음, 마지막 문장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사랑이나 경외의 진실성에 증거를 제공한다. 결국 그 사이의 두 문장은, 주제문에서 마지막 문장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인 셈이다. 이걸 캐치해야 한다! 빈칸을 포함한 문제의 두 문장을 독해하는 일은 이 '주제문을 뒷받침하는 과정'이라는 문맥을 이해해야만 쉬워진다. "실제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내내throughout 그런 감정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 감정이 없을 때 사람들은 '그런 상태가 아니라고' 의심하게 된다." 라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면 성공이다.

   Laurence ~ 문장과 마지막 문장,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두 문장과 빈칸. 이 과정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을 보증해줄 수 있다." ← 긍정적인 상태에 항상 긍정적인 감정이 동반되지는 않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긍정적인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이 긍정적인 상황에 있지 않기 때문인지 의심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이, 긍정적인 상황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문맥을 잡아야만 확신을 가지고 문제를 풀 수 있다. 밑줄 친 접속사들은 지문에는 없지만 이 네 개의 문장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다. 문맥을 잡으면 자연스럽게 돋아나는 숨은 열쇠들이다.


   물론 스킬로만 풀 수 있는 문제들도 있다. 그게 좋은 문제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수능을 치려고 영어 공부를 한다면 그런 문제가 사랑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수능이 끝이 아니지 않은가. 문장 몇 개만 가지고 요지나 주제문, 빈칸을 추론하는 것과, 같은 몇 개의 문장에 주목하더라도 문맥을 통해 접근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다시, 독해의 일반론에 대한 이야기다. 능동적으로 읽어라. 필자가 글을 쓸 때 생산한 문맥은 분해되어 세상에 나온다. 쉽게 말해 DIY다. 독자는 문맥을 다시 구성, 조립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어가 따로 놀고 문장이 따로 놀고 글의 본질과 필자의 진심은 멀어진다. 문제를 푸는 게 능사가 아니다. 능동적으로 독해하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린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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