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양의 미래」

2017. 3. 26. 23:57

(용도가 다른 글 두 편.)


소설의 제목 「양의 미래」는 아이러니컬하다. ‘병신 같은 건 싫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마지막에 병신 같은 걸 남기고 죽는 건 싫다. 걱정이 될 테니까 말이다. 세상에 남을 그 병신 같은 것이.’ ‘아무도 없고 가난하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무도 없고 가난한 채로 죽어.’ 소설의 ‘나’는 ‘다음’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럴 여유도 없고, 그럴만한 행복도 없다. 그러니까 당연히 ‘남의 일에 참견할 정도로 한가롭지 못하다.’ ‘나’는 자기 미래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닫는다. 말하자면 시간도 공간도(관계도) 그녀에게는 의미가 없다. 제목의 ‘미래’라는 단어는 그래서 모호해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작가 황정은은 분명히, 작품 구석구석에서 조심스럽게, 미래를 말하고 있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들. 그들이 대를 바꿔가며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오곤 하는 동안 ...’  ‘나는 그대로 책을 덮어버렸고 그 문장들은 내가 적은 바로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난 뒤에도, 어쩌면 백 년이 지난 뒤에도 말이다.’ ‘그들의 자손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미 고양이는 계속 새끼를 낳았을까. 그 새끼들도 새끼를 낳을까.’ 아무리 구차하고 비루한 삶이라도, 그래서 지금과 나만 중요한 삶이어도, 누군가는 우리 삶에 끼어들 것이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어떤 순간이 온다.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고 돌아왔듯이, ‘나’의 삶에 ‘진주’라는 소녀가 끼어들었듯이.

그러나 누군가에겐 다음을 기약하고 타자와 함께하는 일이 녹록치 않다. 작중의 ‘나’는 ‘터널’ 안에 있다.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알 수 없는 검은 공간을 끝없이 걸어가는’ 중인 것이다. 또 터널은 그녀의 내면이기도 하다. 일종의 ‘대피소’로서 언제나 텅 비어 있다. 습한 바람과 곰팡내가 나는, 기분 나쁘고 어두운 공간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구석을 하나씩 키우면서 사는 걸지도 모른다. 생의 구차함과 비루함, 사람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모든 것이 거기 있다. 소설에서 ‘터널’은 관념이라기보다 감각이며, 한 덩어리의 감정이다. 어둡고 습한 그곳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찝찝해진다. 그러나 확인하기는 두렵다. ‘어쩌면 계란 껍데기를 뚫는 것처럼 쉬울 수도’ 있는데도. ‘터널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어느 것도 탐탁치 않다. 터널이 있다면 우리는 확정적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고, 터널이 없다면 구차해질 핑계를 댈 수 없게 되니까.

구차해진다는 것은 ‘아가씨’가 되는 일이다. 얼굴을 찡그린 호재가 되는 일, 또는 쉽게 사라져버리는 아르바이트생이 되는 일이다. 다시는 봄볕을 쬘 일이 오지 않을 거라 예감하는 일이기도 하며, 타인은 아무도 아니라는 말을 혀 끝까지 올렸다가도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일이다. 그렇게 떠도는 ‘양’이 되는 일이다. 누구라도 떳떳하지 못했던 지난 몇 계절동안, 우리는 모두 한두 명 씩의 ‘진주’를 품고 살게 됐다. 이따금씩 소식을 궁금해하며.

이제 문제는, 그런 우리들의 미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삶에 끼어들 것이고 미룰 수 없는 순간들이 올 것이다. ‘나’가 결국 그 서점을 떠난 것처럼,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 같은 말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작가는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터널’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방식과 마찬가지로, 불편함 덩어리로 남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 뿐이다. 질문을 할 뿐이다.

다만, 모두가 서로를 아무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모두가 아무도 아니게 되는 것 아닐까.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질문들에 대답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해본 적이 없다’는 ‘나’의 이야기도 결국 우리에게 왔으니까. 미지근하게 끝나버린 그녀의 이야기가 온전히 우리의 몫이 되어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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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생활 중의 일이다. 슬슬 더워질 무렵, 비가 징그럽게도 쏟아진 다음날이었다. 그곳 도로 가에는 사람 무릎 정도 깊이의 배수로가 있었다. 부대원 몇몇과 함께 이동하던 중, 까투리와 꿩 새끼들이 줄지어 풀밭에서 도로쪽으로 달려오는 걸 봤다. 제일 앞에 있던 까투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수로를 뛰어넘어 도로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문제는 새끼들이었다. 우리는 새끼들이 줄지어 배수로 안으로 다이빙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 배수로에는 아직 센 물살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내리막길을 달렸다. 배수로 끝의 철창 덮개를 들어올리고 몸을 날리다시피 해서 떨어지는 새끼들을 받았다. 그나마도 예닐곱마리 중 세 마리였다. 꿩들은 다시 오르막길을 올랐다. 우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가던 길을 갔다. 그런데 까투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이번엔 한 마리도 못 건졌다. 까투리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혼자 숲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자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다.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왜 이렇게 찝찝하지. 얼마나 많은 새끼들이 그렇게 익사했을까. 우리 책임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한동안 그 꿩들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말년 때, 불침번 초번 근무를 서고 있었다. 열한시가 좀 넘자 아끼던 후임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바람을 좀 쐬야겠다고 외부계단 문을 열어달란다. 어쩌지, 하다가 안색이 너무 나빠 보여 문을 열어줬다. 그 친구는 계단을 조금 내려가 주저앉았다. 내버려두고 복도를 서성이고 있는데 아무래도 찝찝했다. 살짝 가서 훔쳐보니,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삼십 분 남짓을 그렇게 있다가 녀석은 조용히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야간등에 비친 눈밑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혼자 소리도 없이 들썩이는 등에다 대고, 무슨 일이냐고는, 도저히 물어볼 수 없었다. 마음만 복잡해졌다. 내 책임인 건 아니지만, 아직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타인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항상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타인에게 타인 이상이 될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는 일들이 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력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아무도 아니’다. 무력감 앞에서 우리는 점점 뒷걸음질친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포기하게 된다. 속물이 되어간다. 내 한 몸 건사하기 바쁜 소시민이 늘어난다. 그 모든 과정이 지나고 나면 알 수 없는 감정이 하나 남는다. 어디선가 습하고 곰팡내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도 같은.

그 감정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것이다. 소설 양의 미래는 불편하고 찝찝하다. 소설의 끝까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주인공은 도망쳤고, ‘여전하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소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일대일로 은밀한 고백을 한 셈이다. 바로 자신의 ‘터널’을. 해결되지 않은 이 사건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넘어온다. 이제 꼼짝없이, 우리가 이야기할 차례다.

작가 황정은은 독자들의 일상에 섬세하게 균열을 낸 셈이다. 작중의 사건에서 ‘진주’의 사건은 ‘나’의 책임이랄 수 있는 영역과 ‘나’의 책임이 아닌 영역에 묘하게 걸쳐 있다. 어느 한 쪽으로 정해질 수 있었다면 불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판결을 내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불편해지고, 고민하게 된다. 지나친 책임은 폭력이다. 그렇다고 맘편히 넘길 수는 없다. 문제는 타인이 내 삶의 안과 밖 중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다. 내 삶을, 타인에 관해, 어디까지 확장시켜야 하는지가 문제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죽음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물론 함부로 답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다.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문학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소설은 우울하지만, 제목은 분명 양의 ‘미래’다. 고양이들은 대를 이을 것이고, 책에 끄적인 글귀는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한다. 그러려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나’가 결국 이 이야기를 꺼냈듯이. 그렇게 진주의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되었듯이.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데 내가 왜 누군가를 신경써야 해? 진주요, 아줌마 딸, 그애가 누군데요? 아무도 아니고요, 나한텐 아무도 아니라고요.’  이 문장의 다음을 써야 한다. 도망치지 않고. 정말로 모두가 서로를 아무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모두 아무도 아닌 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질문해야 한다. 정말로 아무도 아닌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미지근하게 끝나버린 ‘나’와 ‘진주’의 이야기는 이제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 기울임체는 모두 다음 작품에서 인용 ;

황정은, 「양의 미래」,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7,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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