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 세 번째일 것이다.

   불쾌하게 늘어지기만 하는 오후였다. 견딜 수가 없어서 욕조에 물을 받았다. 늘어질 거면 작정하고 늘어져 보자는 생각이었다. 물을 받는 동안 다운받아 놓은 영화들을 훑었다. 이 영화의 플레이타임이 제일 적절했다. 딱 기분좋은 목욕을 즐길 수 있을 정도. 그렇게 세 번째 감상을 시작했다.


2.

   인간에게 음악은 뭘까. 케케묵긴 했지만 한 번쯤은 꼭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플레이리스트에 몇백 곡씩 집어 넣어 다니면서 왜 음악을 듣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요새는 재즈를 듣는다. 재즈의 묘미는 매번 플레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한 번 보여준 애드립은 그걸로 끝이다. 다음 연주에 똑같은 애드립이 나온다고 해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동일한 애드립이 아니다. 재즈 아티스트들이 연주하는 것은 약속된 소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재즈가 최상의 음악이라고 공연히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음악의 정수는 그래도 여기 있다. 내면성과 현재성.


3.

   예술은 정신을 감각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헤겔은 음악을 그렇게 생각했다. 음악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음악을 듣는다. 그 이유가 뭘까. 왜 우리는 남의 하소연에 그렇게도 심취하나.

   영화에서 남자와 여자는 계속해서 어긋난다.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뜻밖의 구애에 눈살을 찌푸리고, 남자는 여자의 집에서 뜻모를 외국어들에 부딪혀 이방인이 된다. (개인적으로 여자의 집에서 글렌 한사드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영화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말했다. 그 교묘한 소외감이란.) 이건 공간의 문제다. 공간은 구별하고 구별된다. 너의 공간과 나의 공간은 다른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는 서로의 피부를 무시하고 겹쳐져 같은 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 외로움만으로 그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내면에 닿으려는 시도는 대부분 좌절된다. 남자는 전 애인을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곡을 만들며 전 애인을 찍은 홈비디오를 돌려보던 모습) 여자는 남편과의 별거로 심란해한다(건전지를 사러 나갔다 들어오던 밤거리, 자기가 쓴 가사를 남자의 노래에 붙여 부르던 롱테이크 씬. 그리고 스튜디오의 어두운 피아노 방에서 노래를 부르다 울어버리는 후반부의 씬.) 외로움은 각자의 것이다. 둘 사이에는 국경선이 있었다.

   하지만 둘은 영화 중간중간에서 분명히, 맞닿는다. 이 영화의 카타르시스는 거기에 있었다. 손을 스치는 정전기같은 짜릿함. 음악은 공간에 묶여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

   음악은 시간적이다. 같은 노래를 계속해서 반복재생해도 환경에 따라 매번 감상이 다르다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음악의 수명은 딱 곡이 재생되는 동안만큼이다. 재생 버튼을 누를 때 곡이 태어나고, 플레이타임이 다 됐을 때 곡은 죽는다. 라이브도 마찬가지고.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음악은 영생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공용어가 될 수도 있다. 영화 초반부 악기점에서 남자와 여자가 불렀던 Falling Slowly는 분명히 서로가 맞닿는 순간이었다. 가사는 음미할 만하다. 난 당신을 모르지만 당신을 원합니다. 말 앞에서 나는 무력해지고 서로를 겉도는 게임은 끝나지 않고. 그러나 배가 가라앉고 있어도 기회는 남아 있어요. 추락하더라도 당신의 멜로디를 노래해 줘요. 나도 따라 부를테니.

   함께 노래를 부르는 순간, 타자성은 허물어진다. 공간에서 벗어나 같은 시간선 위에 서는 것이다. 그 짜릿한 순간의 이름은 바로 추억이다. 피부가 허물어지고 서로의 존재가 겹쳐지는 지점이다. 내면성은 극복된다. 아니, 기왕 헤겔을 언급한 김에, 지양된다고 말하겠다. 내면을 향해 두더지처럼 굴을 파다가 건너편을 발견하는 것이다.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세계. 주관은 주관성을 잃는다. (그러나 객관적이지도 않으며) 그리고 같은 시간에 올라탄 타자의 내면을 만난다. 동시에 시간은 형식의 무의미성을 벗고 공감으로 충만한 그릇이 된다. 감히 말하자면, 음악의 변증법이라 하겠다. 감상할 때도 마찬가지다. 영화 <라붐>의 명장면이, 그리고 <비긴 어게인>의 이어폰 멀티잭 씬이 괜히 탄생한 게 아니다. 

   대신, 이 모든 건 음악이 흐르는 동안에만 통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이 또한 힘주어 말하고 있다.


   5.

   후반부에 여자의 말, '밀루유 떼베'라는 외국어는 복기할 만하다. 이 고백은 다분히 현재적이다.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에요. 지금은요!

   이 영화의 구성과 전개는 상당히 흥미롭다. 영화는 그 자체로 '음악적'이다. 남자와 여자는 전반적으로 어긋난다.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를 만나는 짜릿한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서 여자는 남자를 다시 만나지 않고 남자는 전 애인에게 연락하며 런던으로 떠난다. 음악이 끝난 것이다.

   중반에서 남자가 곡 작업을 하는 씬이 하나 있다. 남자는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면서 전 애인과 찍은 비디오를 돌려 본다. 나는 그 때에야 깨달았다. 그 비디오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 기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단지 인디 영화라서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의미한 선택이다. 이 씬에서 아름다운 액자가 하나 만들어진다. 우리가 감상한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도 결국 추억이라는 것이다. 초점이 흔들리는 핸드헬드 비디오에 담은.

   그래서 작업을 마무리한 후 여자는 남자에게 말한다. '다시 만나면 불장난밖에 더 하겠어요. 부질없죠.' 라는 식의 멘트. 정말 찬란한 씬이다. 부질없다는 건 당연한 결과다. 우리의 음악은 끝났으니까 그걸로 만족해야 한다. 대신 추억이 남았다. '밀루유 떼베'라는 고백을 '현재적'이라고 한계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이 영화는 플레이타임이 끝나는 순간 정말로 죽어버린다. 대신 필름이 돌아가는 동안 영화 속 인물들은 다른 어느 영화보다도 충실하게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영생하는 영화다. 음악처럼. 말하자면, 스스로 존재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6.

   그래서 Once, 라는 제목은 정말 탁월하다. 짜릿한 영화였다. 플레이타임 동안.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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