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우리는 벌레여도 괜찮다.



  벌레 같은 놈,

  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카프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설령 정말 벌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 내가 사람이냐 벌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워진 짐이다. 붙여진 이름이고 타인이 만든 굴레다. 타자들을 위해 내 존재를 매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벌레나 다름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벌레여도 괜찮다. 세상은 그렇게 돼버렸다. 최소한 카프카의 세대였던 19세기와 20세기의 중간쯤부터. 그러니까 ‘그레고르는 왜 벌레가 되었을까?’하는 물음은 카프카의 문학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벌레여도 괜찮은 우리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변신>의 묘미는 일그러진 개연성에 있다. 작품 내내 그레고르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여겨봐야만 한다. 이건 카프카만의 문법이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것은 그 스스로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벌레가 되든 말든 그레고르는 일을 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사람 구실의 문제다. 전혀 개연성이 없다고 읽는 것은 오독이다. 카프카의 개연성은 작품 너머에 있다. 19세기 후반, 자본주의 사상 두 번째 주기적 공황이 극복된다. 1929년의 공황 전까지 물질 사회는 다시 번영했고 카프카는 그 복판인 1912년에 <변신>을 썼다. 이미 물신이 세계를 집어삼키고도 남았을 때다. 화려한 쇼윈도의 이면에는 벌레가 되더라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프카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문화적, 언어적, 사회적으로 이방인이었고 주변인이었다. 그는 소수자의 어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변신>은 지극히 개연적이며 현실 반영적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19세기 마르크스의 작업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사람은 일을 함으로써 가치를 빼앗긴다. 사람은 이제 사람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하는 X’다. 이 미지수 X에 무엇이 들어가든 상관없다. 벌레든 의자든 귀신이든. 그러니까 <변신>의 낯설음은 당연하다. 그레고르의 ‘변신’,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고민하지 않는 그레고르의 행동에, 문학적 기법으로서의 낯설음은 이중으로 겹쳐 있지만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우리는 모두 ‘원래’ 벌레나 다름없다는 것. 일만 하고 돈만 번다면 뭐라도 괜찮은 존재가 돼버렸다는 것.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카프카가 우리는 낯선 것이다. 사람들이 그레고르를 혐오하는 것은, 벌레여서가 아니라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해내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카프카는 밖에서부터 인간성을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누이 그레테는 그레고르를 보살피던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후반부에서 노골적으로 속내를 터트린다.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돼요. 저것을 보살피고 참아 내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잖아요. 그 누구도, 또 저것은 그런 일로 우리를 비난하진 못할 거예요.” 그리고, “만일 저것이 그레고르였다면, ... 스스로 나가 버렸을 거에요, 틀림없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구절은 공들여 독해할 만하다. 카프카는 사람의 지위나 경제적 능력, 노동력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서 그를 대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그레테의 발언은 엄밀한 의미에서도 적절하다. 문제는 이 인간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는 데 있다. 앞서 말했던 ‘미지수 X로서’의 언어인 것이다. 이어지는 발언 또한 자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가족을 위해서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인간으로서’의 경계를 넘어간다. 인간은 이제 존재가 아니라 가치가 문제인, 벌레든 뭐든 제 구실만 한다면 상관없는 X다. 이로써 인간에게는 사치가 된 인간성과 X로서의 비인간성만이 남는다. 카프카는 이에 대한 고발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건조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결말은 인상적이다. 그레고르가 죽고 나서 가족은 새 삶을 예감한다. “... 잠자 부부는 차츰 생기가 돌아오는 딸의 모습을 보고, 딸이 최근 안색이 나빠질 정도로 근심과 고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탐스러운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성장해 있음을 동시에 깨달았다. 잠자 부부는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딸아이를 위해서 마땅한 신랑감을 구해 주어야 할 때가 곧 오리라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전차가 내려야 할 장소에 도착하자 잠자 양이 제일 먼저 일어나 싱싱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잠자 부부의 눈에 그 모습은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느껴졌다.” 결말에서 그레고르는 이미 지워져 있다. 대신 누이 그레테가 ‘그 다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이제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이다. 다음 변신은 그녀의 차례일지도 모른다.


  문학은 힘이 세다. 우리는 실재가 아니라 가상에서 살아간다. 수많은 진실들을 쉽게 보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일그러진 세계의 상을 지면에 투영할 수 있다. 그 지면은 우리가 살아가는 가상에 열린 실재로의 틈이다. 그 목격만으로 인간은 수많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문학은 그런 식으로 세계를 움직인다. 조금씩, 조금씩. 카프카는 그런 면에서 예리한 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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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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