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길 너머로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타자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든 싫든 수많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인간인데, 왜 항상 타자를 대하는 것은 어렵기만 한가.

처음 만났을 때, 한두운은 ‘나’의 대상이었다. 하루종일 데리고 다니고 보호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청년일 뿐이었다. 접근 금지 펜스를 훌쩍 넘어버리고 미지의 표정을 짓고 침을 뱉고 자해를 하는, “그에게도 ‘자아’라는 것이 있을까” 묻게 하는 대상, 이해할 수 없이 “물음표처럼 구부러”지는 대상이었다. (정용준, 2015, p120, 115) 소설의 전반부까지 ‘나’는 한두운을 이해하려 애쓰다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우진 형’에게서 듣는 이야기들까지 더해져 ‘나’는 한두운을 동정하게 된다.

그러다 소설의 중반부터 분위기가 바뀐다. ‘나’는 동정심에 한두운의 헤드기어를 벗겨주고 한두운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한두운은 말하기 시작한다. ‘나’ 또한 기분이 좋아지고 둘의 관계는 그럭저럭 호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두운의 보호자가 원래의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자 한두운은 다시 짐으로 전락한다. 이야기는 파국으로 끝을 맺는다.

아무것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헤드기어를 벗긴 것은 분명 ‘나’의 호의였지만 결국 파국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중요한 것은 헤드기어를 벗기지 말았어야 하나, 벗길 수밖에 없었냐가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가 아니다. 일단 소설에서 말해진 것은 한두운이 ‘나’에게는 결국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국 대상으로밖에 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한두운의 특이성에 얽매여 그를 궁금해하고 동정하고 자꾸 뭔가를 해주려고 했다. 우리가 타자를 대하는 쉬운 방법 중 하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잘못한 인물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소설의 한 장면만큼은 빛나고 있다. “순간 언덕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다. 우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봤다. 바람이 보였다. 바람이 지나가는 곳으로 나뭇잎과 모래, 이름 모를 날벌레들과 까만 비닐봉지가 함께 날렸다. 투명한 길 하나가 허공 속에 놓인 것 같았다.”(같은 작품, p129) ‘나’가 한두운에게 자기 기억을 이야기해주다가, 바람이 분다. 이 때 어떤 ‘길’이 열린다.

말하자면 화살표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나’의 대학생 시절의 기억은 한두운에 의해서 촉발된다. 그것을 ‘나’가 한두운에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이 순간만큼은 한두운이 ‘나’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한두운은 대상이 아니라 ‘나’의 삶을 자극하는 실체가 된다. 이 때 길이 열린다.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로서 둘은 만난다. 한두운은 웃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한두운의 그림자를 본 기억이 없음을 떠올린다. 이 사건 이전까지 한두운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닫는 장면이다.

그러나 산책이 끝난 후, 이야기의 끝은 여전히 파국이다. 한두운은 결국 ‘나’에게 있어서 하루치의 숙제였다. 앞서 말했듯이 감당해야 할 양이 늘어나자 한두운은 다시 대상화한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조용히 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이 모든 원인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미안하다고 말조차 할 수 없이 부끄러웠던 게 아닐까. 혹은, 인간은 애초에 이렇게 오류투성이라는 자괴는 아니었을까.

다만 산책이 끝난 후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같은 작품, 140p)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늦게나마 한두운이 되려고 해본다. “오른쪽 주먹을 가볍게 쥐고 오른쪽 광대뼈를 툭, 때려봤다.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날 정도로, 정말 아팠다.”(같은 작품, 141p) 그리고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 다른 사람이 된 것은 한두운도 마찬가지다. “아까의 무섭던 눈빛이 아니었다. 선릉과 정릉을 함께 돌아다닐 때의 투명한 눈빛도 아니었다.”(같은 작품, 139p)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파피용’

파피용, 이라는 단어는 둘의 산책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한다. 너무나도 좋은 발음으로. 기억을 나눈다는 것은 내 삶의 조각 하나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 한 조각만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유의미해진다. ‘나’와 한두운은 산책 코스를 한 바퀴 돌고 돌아왔지만, 둘의 관계는 어쩌면 투명한 길을 나란히 걸어 파국이 아닌 다른 결말로 나아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고문헌

정용준, 「선릉 산책」, 『문학과사회』 28(4), (2015): 109-141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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