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아이들」

2017. 4. 5. 13:11

아이들의 기억


문학이 질문이라면, 소설가는 그 질문을 위해서 서사를 구성한다. 그래서 소설의 인물이 이야기하는 삶은 빛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질문을 위한 복기로서 압축되고 예리해진다. 그 과정이 문학적 의미의 ‘기억’이며 ‘재현’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단을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할인매장으로 팔려가거나 땔감이 될까 전전긍긍하다 보면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을 휘감기도 했다. 그때마다 완전히 젖지는 않을 거다, 자신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빠지지 않으려고 버둥댈 때나 파도에 몸을 맡겨 둥둥 떠다닐 때나 저편에서는 항구가 보였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열대숲이든, 그곳에서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왔다.’ 소설의 화자는 북항에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건너온 원목들이 쓰임새를 부여받고 공장에서 무언가로 가공된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보다 무엇이 되는가, 라는 질문, 혹은 나는 팔릴 것인가, 라는 질문이 중요한 곳이다. ‘나’의 서사는 이러한 질문들을 위하여(혹은 질문들에 의하여) 소설 끝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서도 ‘완전히 젖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게 됐다. ‘나’의 삶은 그런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닿는다. 이 모습을 위하여 ‘나’가 끌어모은 지난 삶의 조각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전해받은 ‘원목’의 이미지다. 코뚜레와 공장의 목재들과 아버지의 조각 같은 것들은, 무언가가 된다는 것 혹은 되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나’로 하여금 조금씩 생각하게 했다. 그 고민은 끊임없이 어떤 형상을 빚어간다. 그 형상은 앞서 말한 질문으로 수렴하는 ‘나’의 삶 자체다. 혹은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아이들」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래서 유의미하다. 유년의 기억을 이루는 조각들은 없어지지 않고 ‘나’를 구성한다. 어떤 면에서 ‘나’는 끝까지 어린아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나이를 먹고도 떠올리고 곱씹는다. 어린시절 친구가 무심코 한 말에 애처럼 심통이 나는가 하면, 그 심통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 친구들은 어린아이 그대로인 채 남아있었으면 하는 무심결의 소망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정말 우리가, 우리한테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화가 났다.  ... 차라리 유람선을 타러 가자고 불렀으면 나았을걸.) 또한 ‘나’가 서른 살이나 되어 코뚜레의 행방을 물을 거라고 그녀의 어머니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지금을 구성하고 있지만, 정작 지금 그 시절들은 없다. 문학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기억한다. ‘지금쯤이면 아파트는 다 무너져내렸을 텐데. ... 이제 집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외계인들, 그 아파트 아이들도 어딘가에서 그럼 우린?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삶 또한 서사라면, 어떤 질문을 위하여 예리해져야 한다면, 전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었던 시절에 큰 빚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예외없이 지나가버린다. 여기에 문학의 아이러니랄만한 것이 있다. 이따금은 그 향수감으로 삶이 아름다워진다.

* 본문의 기울임체는 모두 다음 작품에서 인용 ; 김금희, 「아이들」, 『창작과비평』 37(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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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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