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봄밤」

2017. 4. 5. 13:07

0이 아닌


소설 「봄밤」의 인물들은 불운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류마티즘과 알코올 중독이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 죽어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몰락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수밖에 없다. 특히 이 소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에필로그다. 이미 일련의 사건들이 끝난 뒤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요양원을 다녀가는 차에서 영선과 영미가 대화하고, 과거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플롯이 전개된다. 영경과 수환이 마지막에 지었던 표정을 이야기하고 난 후, 소설은 ‘다시’ 끝난다. 요양원 이전의 긴 서사는 건조하게 압축되어 있다. 소설은 철저히 인간의 마지막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마지막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사람도 1보다 크거나 작은 분수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건 한 장 성적표일 것이다. 수환과 영경은 이미 0에 수렴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혹은 지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작가는 그런 건 아니라고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속삭이고 있다. 아무리 비참한 삶이어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라는 게 아니라, 모두 죽어가고 있을지라도 우리에는 ‘그 다음’이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건 하나도 없고,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됐지 않냐고? 뭘 더 바라겠냐고?’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 

도입부에서 영미는 뭘 더 바라겠냐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이기도 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게 없었다면 문제는 단순해진다. 성적표로 사람의 삶을 재단할 수 있는 것도, 그 다음을 재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또한 종우는 수환에게 별 상관도 없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기의 내밀한 기억을 고백함으로써 역으로 수환의 죽음이 종우에게 거세게 밀려들어간다. 수환과의 삶 중 정말 짧은 시간만을 함께했지만, 종우에게 있어서 수환은 이로써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더욱이 수환은 영경에게 두 개의 눈동자로 계속해서 나타난다. 결국 수환의 삶과 죽음은 0이 아니었던 셈이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일반론인 걸지도 모른다. 영경과 수환의 이야기를 그저 불쌍한 주인공들의 비극으로만 보아서는 많은 것을 놓친다. 이미 소설 안에서 작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독자들에게도 영경과 수환의 이야기가 번진다. 일반론적으로. 인간은 타인의 삶을 기억한다. 그래서 인간은 0이 될 수 없다.


기울임체 ; 권여선. (2013). 봄밤. 문학과사회, 26(2), 각각 121p, 1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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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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