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바퀴에서

2015. 4. 4. 14:33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연작 - 태아들의 묘지

2015. 4. 4. 14:3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어떤 아래

2015. 4. 4. 14:3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조금 웃었다.

    글쎄, 이번엔 여행이 아니었어. 그냥 거기서 살았던 거지.

    그러니까, 살았던 이야기를 해봐.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그때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내가 메뉴판을 펼치고 막 마실 것을 고르려는데, 은희 언니는 주변의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사람처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 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


   대체 어딜 가는데, 묻는 동생의 동그란 눈을 나는 마주 본다. 은희 언니가 죽었어, 마침내 소리를 낮춰 말한다.

  

    그녀에게 말해보고 싶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그녀가 지켜보았던 그해,

    생각의 미로 속에서 더듬더듬 내가 움켜쥐려 한 생각들을.

    시간이 정말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망치로 머리를 맞은 짐승처럼 죽지 않도록,

    다음번엔 두려워하지 않을 준비를 하겠다고.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그것만 꺼내놓겠다고.

    무섭도록 무정한 세계,

    언제든 무심코 나를 버릴 수 있는 삶을 향해서.


   (…)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





/




   최근 본 죽음에 관한 이야기 중에 가장 와닿는 것. 필사 하고 싶은 소설. '끊임없이 존재를 묻는 소설가'라는 수식을 단번에 이해하게 한 단편.

   다 베껴 두지 못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나'는 암으로 투병해 본 인물. 죽음을 마주했었다는 것. '삶에 의해 무심코 버려질 뻔' 했다는 것. '은희 언니'도 동생의 죽음을 경험하고 다른 세계, '새벽까지 타는 심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계로 들어선 인물. 베껴 온 두 번째 부분은 '은희 언니'가 죽고 난 후 '나'의 코멘트. 내 안에 있는 가장 뜨겁고 진실하고 명징한 것. 심장만 꺼내 놓겠다고.


   베껴 온 마지막 부분은, '나'가 '은희 언니'에게 말하지 못했던 말. 삶에게 해줄 수 있는 정말 강한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까지 타는 심장에 관한 '은희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작가인 '나'는 '은희 언니'에 관한 소설이 쓰고 싶어져서 '나의 심장'이라는 제목으로 파일을 저장해 둔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첫 문장만 써둔 채. 그리고 '은희 언니'의 죽음 이후 파일을 다시 열고 첫 문장을 바꾼다.


   <베란다 바깥의 차가운 어둠을 오래 내다보다가 책상 앞에 앉는다. 노트북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천천히 마른세수를 한다. '나의 심장'이라고 이름붙였던 파일을 불러내자, 하나뿐인 서늘한 문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밝아지기 전에, 회복이라는 단어를 쓰고.

'지진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실과 상상  (0) 2015.04.27
무라카미 하루키, <잠>  (0) 2015.04.26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0) 2015.01.09
레 미제라블  (2) 2015.01.01
한강, <에우로파> 중  (4) 2014.12.07
Posted by 습작생
,

   작가는 자신이 쓸 수 없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역설적으로 자신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그 순간 언어로는 전달 불가능한 뭔가가 불꽃처럼 다른 사람에게 옮겨붙는다. 상상을 통해서.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김연수의 해설 中

 

 

 

 

 

   미니멀리즘이라고 한다. 추상적, 일반적인 것들을 구체적인 것, ‘글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인수분해하는 일이다. 미니멀리즘의 대가라는 수식이 바로 이것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쓸 수 없는 것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 때 간결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애써 말하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묵직한 목소리로. 그 때 텍스트의 힘은 활자가 아니라 여백, 독자들의 상상에 있다.

 

   많은 것들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고, 혹은 이해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며 살아간다. 그러면 필요한 건, 사실 우리 능력 밖인 것들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일이다. 욕심이나 오만을 인수분해하고, 더 작은 세계에 정착하는 일이다. 그 인수들을 찾아낼 때,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습작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