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미제라블

지진계 2015. 1. 1. 01:11

두서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단면을 끄집어내서 온갖 아픔을 다 보여주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형사는 이 무자비한 접속사를 이기지 못해서 쎄느 강으로 뛰어 내린 것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비참하든지, 얼마나 불행하든지, 무슨 시련이 있고 슬픔과 절망이 있든지,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살아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살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네들이 모여서 부대끼고 부서지고, 거기 남은 파편과 부스러기들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든다. 세상은 결국 이야기들의 합집합이다. 계속해서 이야기들이 생성하고 투쟁하는 유동의 장. 거기에 영원한 선악은 없다. 18세기나 19세기나 멍청한 건 매한가지니까. 그 사이사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가 있다. 끝까지 살아 내라, 용서하고 이해하고 의지하면서, 사랑해라, 사랑해야 한다고, 불변하는 것은 사랑밖에는 없다고, 위고는 상처뿐인 빠리의 단면을 하수도까지 해부해 보여주면서 억지를 부린다. 그런데 꽤나 설득력 있는 억지다.
   혁명은 그래서 단순한 시대상이 아니다. 바리케이드는 이 접속사의 총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뤄내야 하는 것들. 산탄과 포화를 뚫고, 죽음을 불구하고서도 해내야 하는 것들. 사랑으로 환원시키려면 환원시킬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 그래, 쏴라!
   그의 삶에서도 내내 이 접속사가 끊임없이 연쇄한 것이다. 굳이 아프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수하고 고백하고 혼자 롬므 아르메의 골방에서 죽어 가고. 그저 종달새를 사랑하면서. 양심이든 신앙이든 뭐든, 2000페이지에 달하는 서사 내내 핍진을 부여한 것은 하나의 접속사였다. (주교는 그렇다면 접속사의 화신인가?)
   정말 잔인한 말이다. 채찍질 같이. 다분히 희생적이고 미련한. 우직하게, 우직하게.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몇 천 년 동안.

   백석은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천희라는 여인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에포닌! 비쩍 마른 몸으로 말없이 사랑만 하다가 결국 구멍 뚫린 조개껍질처럼 죽은. 이마에의 마지막 키스를 그녀는 느꼈을까. 지층의 최저에서 앙상한 화석처럼 야위어 가는데도, 그 심연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우스 씨, 저는 당신을 조금 사랑했었던가봐요. 그렇게 담담하게, 당신을 조금 사랑했었던가봐요. 몸에 총구멍이 났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조금 사랑했었다고. 이 말은 해야겠다고.

   그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살아간다. 중요한 건 정밀 묘사가 아니다. 대상들의 삶, 그 방식 자체다. 문학은 사진기가 아니기에. 케이크 자르듯 사회를 툭 세로로 잘라서, 자, 잘 보시오, '불행한 사람들'은 이렇게 생겼소, 가 아니라, 이들의 불행을 보시오, 삶을 보시오. 다 봤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사랑하고, 살아간다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들을 들려 줘야 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부딪히고 깨지고 박살나고 가끔은 겹치기도 하는. 그 파편과 부스러기들을. 그리고 접속사를. 가장 처절한 핍진으로 이야기들을 밀고 나가는 접속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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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은화

2014. 12. 2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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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밤

2014. 12. 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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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일방통행로> 발췌

 

 

중국산 진품들

… 국도(國道)는 직접 걸어가는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그 위를 날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위력을 보여준다. 텍스트 역시 그것을 읽는지 아니면 베껴 쓰는지에 따라 그 위력이 다르게 나타난다. …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한다. 비행기를 탄 사람에게는 단지 펼쳐진 평원으로만 보이는 지형의 경우 걸어서 가는 사람에게 길은 돌아서는 길목마다 먼 곳,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숲 속의 빈터, 전경(全景)들을 불러낸다. 마치 전선에서 지휘관이 군인들을 불러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공사 현장

… 특이하게도 아이들에게는 뭔가를 만드는 작업장을 찾아가는 성향이 있다. 아이들은 건축, 정원일 혹은 가사일, 재단이나 목공일에서 생기는 폐기물에 끌린다. 바로 이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자굼을 모방하기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아이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사물세계, 즉 커다란 세계 안에 있는 작은 세계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

 

깃발…

이별하며 떠나는 자는 얼마나 쉽게 사랑을 받는지! 사라져가는 사람을 비추는 불꽃은 그만큼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 불꽃은 배에서 또는 차창에서 언뜻 실려 오는 한줄기 바람에 힘을 얻는 법이다. 멀어져가는 거리(距離)는 사라져가는 사람에게 물감처럼 스며들어 그에게 은근한 열기를 불어넣는다.

 

계단 주의!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織造)의 단계가 그것이다.

 

교재

… 운율에 맞게 구상되었으면서 나중에 어느 한 구절에서 리듬이 빗나간 글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이다. 그것은 마치 장벽의 갈라진 틈새를 통해 연금술사의 방 안으로 흘러든 빛살이 여러 결정체, 구, 삼각형들이 빛나도록 하는 것과 같다.

 

벽보 부착 금지!

 

작가의 기법에 관한 13가지 명제

I. 비교적 큰 작품을 쓰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내도록 하고, 하루 작업량을 끝낸 뒤에는 나중에 이어질 작업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

II. 원한다면 이미 이룩해놓은 것에 관해 이야기해도 좋지만 집필을 하는 동안만큼은 이미 쓴 것을 소리 내어 읽지 말 것. 이미 써 놓은 것을 읽으면서 흡족해하면 템포가 더디어지기 때문이다. 이 규칙을 준수한다면 전달하고 싶은 바람이 더 커짐으로써 결국 이것이 작품을 완성시키는 추동력이 된다.

III. 작업환경을 조성할 때 평범한 일상을 벗어나도록 할 것. 맥 빠진 소음 속에서 반쯤 쉬어가면서 하는 작업은 품격을 떨어트린다. 그에 반해 피아노 연습곡 소리나 사람들이 일하면서 지르는 소리들은 유난히 고요한 밤의 정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밤의 정적이 내면의 귀를 날카롭게 만들어준다면, 피아노 연습곡을 치는 소리와 일하는 사람들의 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기괴한 소음들까지도 그 자신 속에 파묻어버릴 수 있을 풍부한 어법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판가름할 시험대가 된다.

IV. 아무 도구나 사용하지 않도록 할 것. 특정한 종이, 펜, 잉크를 좀스럽게 보일 정도로 고집하는 태도가 도움이 된다. 사치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도구들을 풍부하게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V. 어떠한 생각도 자기도 모른 채 흘려보내지 말 것이며, 외국인 등록 일을 담당하는 관청처럼 자신의 노트를 엄격히 관리할 것.

VI.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따라가지 말고 펜을 뻣뻣하게 굴릴 것. 그러면 펜대는 그 영감을 마치 자석의 힘처럼 끌어당길 것이다. 착상이 떠오를 때 그것을 적는 일을 침착하게 주저하면 할수록 그 착상은 그만큼 더 잘 익어서 품에 들어올 것이다. 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

VII. 아무런 착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글쓰기를 그만두지 말 것. (식사시간이라든지 약속과 같이) 지켜야 할 어떤 일정이 있다든지, 아니면 작품을 마친 경우에만 글쓰기를 중단하는 것이 문필가가 명예를 걸고 지켜야 할 계율이다.

VIII.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든 이미 써놓은 것을 깨끗하게 정서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 그러다 보면 직감이 깨어날 것이다.

IX. 글쓰기를 하루도 거르지 말라 - 그렇지만 몇 주씩 거를 수는 있다.

X. 한 번이라도 저녁부터 이튿날 훤하게 날이 밝을 때까지 앉아 있던 적이 없는 작품일랑 결코 완전한 작품으로 여기지 말 것.

XI. 작품의 결미부분은 평소의 작업공간에서 쓰지 말 것. 그 공간에서 결말을 완성할 용기가 나지 않을 테니까.

XII. 집필의 단계 : 사고 - 문체 - 글. 정서(正書)의 의미는 글을 쓸 때 서예를 할 때처럼 정성을 글씨에만 쏟는 데 있다. 사고는 영감을 죽이고, 문체는 그 사고를 묶으며, 글은 그 문체를 보상해준다.

XIII. 작품은 구상의 데드마스크(Totenmaske)다.

 

문방구

수첩달력     북유럽 사람들을 가장 잘 특징짓는 점은 사랑을 할 때 적어도 한 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혼자 외따로 있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우선 스스로 관찰하고 즐겨본 연후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여인에게 가서 사랑을 고백한다는 점이다.

 

팬시용품

… 담배 꼭지에서 담배연기가, 그리고 만년필에서 잉크가, 똑같이 가벼운 필치로 흘러나온다면 나는 문필가로서의 내 직업의 이상향에 있는 셈이다.

 

확대사진들

책 읽는 아이     마침내 아이는 책을 받는다. 일주일 동안 전적으로 그 텍스트의 놀이에 탐닉한다. 텍스트는 눈송이들처럼 온화하고 은밀하게, 촘촘하고 끊임없이 아이를 감싼다. 그 눈송이들 속으로 아이는 무한한 신뢰를 갖고 걸어 들어간다. 거듭거듭 유혹하는 책의 고요함! 책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직은 잠자리에 들면 스스로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시절이니까. 거의 사라져 버린 그 이야기들 속에 나 있는 길들을 아이는 추적해간다. 책을 읽을 때 아이는 귀를 닫아둔다. 책은 너무 높은 책상 위에 있고, 언제나 한 손을 책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는 형상과 메시지를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인공의 모험들을 문자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읽을 줄 안다. 아이의 숨결은 책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 속에 있고, 온갖 등장인물들이 아이에게 입김을 분다.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더 가까이 인물들 속에 섞여 들어간다. 아이는 일어난 사건과 주고받는 말들로부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이는 마치 눈으로 뒤덮인 것처럼 온몸이 방금 읽은 것으로 흠뻑 덮여 있다.

 

골동품

부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심지어 집중적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다보면, 거의 모든 책에서 그 사람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받는 그 사람은 심지어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적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단편소설에서든 장편소설에서든 노벨레에서든 그 사람은 항상 새롭게 변신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의 사실이 추론된다.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부조(浮彫)     한 사람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지내고 얘기를 나눈다. 그리고 몇 주 또는 몇 개월이 지난 뒤 그 여자와 떨어져 지내다보면 그 당시 얘기됐던 것이 다시 생각난다. 그런데 이제 그 모티프는 진부하고 야하고 깊이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야기를 나눌 때 사랑으로 그 위에 몸을 숙여주었던 그 여자만이 그것을 우리 앞에 그늘지게 하고 보호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치 부조처럼 모든 주름들과 구석들 속에 그 생각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지금처럼 우리가 혼자 있으면 그때 이야기했던 내용은 평범한 모습으로, 아무 위안도 그늘도 없이 우리의 인식의 빛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토르소     자신의 과거를 강압과 고난의 소산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 과거를 현재의 순간에 최고로 가치 있게 만들 줄 알 것이다. 우리가 살았던 과거는 기껏해야 운반 중에 모든 사지가 잘려 나간 아름다운 형상에 비유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은 이제 우리가 우리의 미래의 상을 조각해내야 할 소중한 덩어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시계와 귀금속

… 작업하는 도중에 일출을 보는 사람에게는 정오가 되면 마치 왕관을 스스로 자기 머리 위에 쓰는 기분이 든다.

 

화재경보기

계급투쟁을 사람들은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계급투쟁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인지가 결정될 힘겨루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 결말에 따라 승리자는 잘되고 패배자는 좋지 않게 되는 어떤 씨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들을 낭만적으로 호도하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계급이 투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내적 모순들로 인해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단지 그들이 스스로 몰락하느냐 아니면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의해 몰락하느냐이다. 3천여 년 발전해온 문화가 존속하느냐 아니면 종말을 고하느냐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에 달려 있다. 역사는 끝없이 힘을 겨루며 싸우는 두 사람의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악(惡)무한이라는 것을 모른다. 진정한 정치가는 오로지 일정표에 따라서만 계산하는 사람이다. 부르주아계급의 퇴치가 경제와 기술의 발전에서 대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어느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인플레이션과 가스전이 그 신호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가가 언제 개입하고, 위험을 감지하며, 어떤 템포를 취하느냐는 것은 기사(騎士)적인 사안이 아니라 기술적인 사안이다.

 

안경점

시선은 한 인간의 마지막 남은 부분이다.

 

종합병원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카페의 대리석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오랫동안 관찰한다. 주문한 음료의 유리잔이 앞에 놓일 때까지 시간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그의 앞에 놓일 유리잔은 환자를 살필 때 필요한 렌즈다. 그런 다음 그는 서서히 자신의 진찰도구를 펼친다. 만년필, 연필 그리고 담배파이프. 야외극장에서처럼 질서정연하게 카페를 채우고 있는 대중은 그의 임상 실습을 보고 있는 관객이다. 예방을 위해 따라 마신 커피는 생각을 클로로포름 아래 잠기게 한다. 마취 중에 있는 사람이 꾸는 꿈이 외과의사의 손놀림과 무관하듯, 그 생각이 무슨 궁리를 하는가는 사태(Sache) 자체와 더 이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심스럽게 써 내려간 글자를 잘라내고 수술 집도자(Operateur)인 작가는 그 안에다 강조점을 찍는다. 종양처럼 퍼진 말을 태워 없애고 외래어 하나를 은빛 나는 갈비뼈처럼 집어넣는다. 드디어 구두점을 찍음으로써 전체가 깔끔하게 봉합되고 그는 자신의 조수였던 카페 종업원에게 현금으로 보상한다.

 

소화물 운송 및 포장

…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들, 그리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들 혹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장소들을 마주치면서 그 도시는 손에 들려 있는 한 권의 책이 된다. 나는 재빨리 몇 번인가 더 그 책을 들여다본다.

 

긴급 기술 지원대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한 게 있을까. 그런 경우 종이에 적힌 그 진실은 질이 나쁜 사진보다도 못하다. 진실은 우리가 카메라의 검은 수건 밑에 웅크리고 있을 때에는 (마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나 아이처럼) 활자의 렌즈 앞에서 조용히 그리고 정말 친절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한다. 진실은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바란다. 누가 참된 작가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경고음을 셀 수 있었겠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작동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경고음을 작동시키면 귀여운 오달리스크가 벌떡 일어나 이것저것 마구 뒤섞여 있는 규방에서, 즉 우리들 뇌의 상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을 거칠게 낚아채 어깨에 두르고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우리 앞을 빠져나가 사람들에게로 도주한다. 그러나 그렇게 왜곡되고 쫓긴 상태에서도 승리에 차, 사랑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들어서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잘 구성되어져 있으며 얼마나 건강하게 구축되어져 있어야 하겠는가.

 

야간용 의사 호출 종

성적인 만족은 남자를 그의 비밀에서 분리시킨다. 그의 비밀은 섹슈얼리티에 놓여 있지 않다. 그러나 성적 만족 속에서, 아마도 거기에서만, 그 비밀은 잘린다, 풀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남자를 삶에 묶어 두는 족쇄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그 족쇄를 자르고, 그리하여 남자는 죽을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비밀을 상실했으므로. 이로써 그는 새로운 탄생에 이르게 된다. 연인이 그를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해방시키듯이 아내는 그야말로 말 그대로 그를 어머니 대지에게서 분리시킨다. 그녀는 저 자연의 비밀에 싸인 탯줄을 자르는 산파인 것이다.

 

두 번째 안뜰 왼편, 마담 아리안느

예언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어보는 사람은 다가올 것에 대해 자신의 내면이 들려주는 소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포기하는 셈이다. …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징표, 예감, 그리고 신호는 낮이고 밤이고 물결처럼 우리의 신체기관을 통과하고 있다. 그것들을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이용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 다가 올 24시간의 행복은 우리가 깨어나면서 그것을 집어 드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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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Nietzsche, <우상의 황혼, 반 그리스도>, 청하, 1984

 

 

 

<우상의 황혼>

 

   어느 시대에서든 그 시대 최고의 현인(賢人)들은 인생에 대해 다 같이 똑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인생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27)

 

   우리는 당대 최고의 현인들이라는 사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죄다 다리가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발육부진이거나 절름발이거나 데카당들이 아니었을까? 지혜란 썩은 시체 냄새를 맡은 까마귀처럼 지상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28)

 

   과연 어떤 특이 체질로부터, 저 소크라테스식의 등식, 즉 이성=미덕=행복이라는 등식이 나오는가를 나는 알고 싶다. 등식 중에서도 가장 괴이한 등식, 그리고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의 모든 본성을 거스르는 그 등식이 말이다. (29)

 

   사람들이 변증법을 사용하는 것은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을 때뿐이다. 사람들은 변증법이 불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변증법이란, 수중에 다른 무기를 이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이 최후에 움켜쥐는 마지막 필사의 무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30)

 

   도처에서 같은 종류의 퇴락이 조용히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옛 아테네는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 도처에서 사람들이 무절제의 몇 보 직전에 있었다. 정신의 괴물 상태 (monstrum in animo)가 보편적인 위험이 되어있었다. 「본능이 폭군 노릇을 하려고 한다. 우리는 더 강한 폭군의 대항자를 만들어 내야 한다.」(31)

 

   소크라테스처럼 이성을 폭군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다른 것도 덩달아 폭군 노릇을 할 위험이 적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합리성이 그 당시에는 구세주로 여겨졌었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거니와 그의 <환자들>도 자기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합리적이 되고 안 되고 할 수는 없었다. — 그것은 예의상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리스의 사고(思考) 자체가 합리성에 경도할 때 보여주는 열광은 하나의 위급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한 가지 선택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멸망하든가 — 터무니없이 이성적이든가…… 플라톤 이후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도덕주의는 병리학적인 조건 속에 있었다. 그들의 변증법 존중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미덕=행복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소크라테스를 모방하여 영원한 햇빛 — 이성의 햇빛을 창출해 내어 어둠의 욕망과 맞서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신중하고, 명철하고, 총명해야 한다는 것. 본능과 무의식에 굴복하는 것은 모두 타락의 길을 걷게 될 터이니까…… (32)

 

   그들은 어떤 일을 탈(脫)역사화 시키면서, — 다시 말해 어떤 일을 미이라로 만들면서,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sub specie aeterni) 자기들이 그것을 영예롭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만지작 거려온 것은 죄다 개념의 미이라들이었다. (35)

 

   「찾았다」하고 그들은 기뻐서 소리 지른다. 그건 감각이다! 다름 아닌 이들 감각들, 그지없이 부도덕하기도 한 이들 감각들이 우리에게 실재 세계의 모습을 속이고 있다. (35)

 

   감각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 <이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증거를 곡해시키게 하는 원인이다. 감각이 생성, 쇠퇴, 변천을 보여 주는 한, 그것은 거짓말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존재는 공허한 허구(虛構)라고 생각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점에서 영원히 옳으리라. <감각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것이다. <실재의> 세계란 날조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 (36)

 

   다시 말해 형이상학이라든가, 신학, 심리학, 인식론 등. 또는 논리학, 응용 논리학인 수학과 같은 공식의 과학, 기호학 등. 그것들을 통해서는 현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37)

 

   그들은 맨 나중에 오는 것을 — 불행하다!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도 — <최고의 개념들>을, 즉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공허한 개념들을, 증발하는 현실의 최후의 향훈을, 최초의 것인 양 맨 앞자리에 놓는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자기네의 존경하는 방식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높은 것이 낮은 것으로부터 생겨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생겼다고 해도 안 된다……교훈! 일류급에 속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가 원인 causasui이어야 한다. 무엇인가 다른 것에 유래를 두게 되면 반박을 사게 되고 가치를 의심받게 된다. 모든 지고의 가치는 일류급이다. 모든 지고의 개념, — 존재, 절대, 선, 완전 등 — 생성되었을 리가 없는 모든 것, 그것들은 따라서 반드시 스스로가 원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지고한 개념들은 서로 비교 불가능한 것들이 아니며 양립 불가능한 것들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신(神)」이라는 엄청난 개념을 획득한다…… 맨 나중의 것, 가장 희박한 것, 가장 공허한 것이 최초의 것, 그 자체가 원인인 것, 그리고 가장 실제적인 것 ens realissimum으로 자리 잡는다…… 인류가 병적인 망상가의 미친 공상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었다니! ……하긴 인류는 그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 오고 있지만……

 

   언어의 형이상학, 즉 이성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의 미개한 배물주의(拜物主義)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 이성이 도처에서 행위와 행위자를 보며, 바로 이 이성이 일반적인 원인으로서의 의지를 믿고, 바로 이 이성이 <자아>와, 존재로서의 자아, 실체로서의 자아를 믿고, 자아라는 실체에 대한 믿음을 모든 것에 투사시키는 것이다. — 그렇게 해서 비로소 그것이 <물(物)>의 개념을 만들어 낸다. (38)

 

   근본적이고 새로운 하나의 통찰을 내가 여기서 네 개의 명제로 압축시켜 준다면 사람들은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해를 더 쉽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순을 반박하게 될 것이다.

   제 1명제. <이> 세상을 가상적이라고 부르는 근거가 되었던 것들이 오히려 그 실재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 다른 종류의 실재성은 절대 입증될 수가 없을 테니까.

   제 2명제. 사물의 <실재적 존재>에 부여해 온 여러 특징들이 바로 비존재의 무(無)의 특징들이다. — <실재 세계>는 현실 세계와는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이룩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이 정신적-시각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 한 그것이 실은 이상적 세계이다.

   제 3명제. 이 세상 아닌 <다른>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생을 헐뜯고, 깔보고, 탓하는 본능이 우리 안에 강하지 않는 한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한 본능이 강할 경우, 우리는 <다른>, 그리고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환각을 가짐으로써 삶에 대해 복수를 하는 셈이 된다.

   제 4명제. 기독교식이든 칸트식 (결국은 약아빠진 기독교식이지만)이든 세계를 <실재> 세계와 <현상> 세계로 나눈다는 것은 퇴폐의 암시에 불과하다. — 쇠퇴하고 있는 삶의 한 징조인 것이다…… (39)

 

 

 

<실재 세계>가 마침내 어떻게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는가. (41-42)

 

하나의 오류의 역사.

 

1. 실재 세계. 현명한 사람, 신심(信心)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그는 그 세계 안에 살고 있으며, 바로 그 세계 자체이다.

(비교적 지각 있고, 단순하고, 설득력 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관념. 「나, 플라톤은 진리이다」는 명제를 바꿔 쓴 것)

 

2. 실재 세계. 아직 도달할 수는 없으나 현명한 사람, 신심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그리고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약속되어 있는 세계.

(그 관념의 진보. 그것은 더욱 정묘하고, 더욱 솔깃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된다—그것은 여성이 되고, 그것은 기독교적이 된다…)

 

3. 실재 세계. 도달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고, 약속할 수 없으면서도 하나의 위안으로서 생각될 때조차 하나의 의무이며 하나의 명령인 세계.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옛날의 태양. 그러나 안개와 회의를 통해 빛나는 그것. 숭고하고, 창백하고, 북국적이며, 쾨니히스베르크적이 된 그 관념)

 

4. 실재 세계—도달할 수 없다? 어떻든 도달되지 못한 세계. 그리고 도달되지 못했다면 알 수도 없는 세계. 따라서 위안도, 보상도, 의무도 없다.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의무를 질 수 있겠는가?

(여명의 어스름. 이성의 첫 하품. 실증주의의 닭 울음소리)

 

5. 「실재세계」—더 이상 쓸모가 없고, 더 이상 의무감도 느낄 필요가 없는 하나의 관념—쓸모없고, 불필요하게 남아돌고 있는 하나의 관념, 따라서 논박되어 버린 관념. 자, 그 관념을 없애 버리자!

(밝은 햇빛. 아침 식사. 유쾌함과 양식(良識 bon sens)의 복귀. 플라톤이 무안하여 얼굴 붉히고, 모든 자유로운 정신이 왁자지껄 내달린다.)

 

6. 우리는 실재 세계를 없애 버렸다. 무슨 세계가 남아 있을까? 보이는 세계일까? 아니다. 실재 세계와 함께 우리는 보이는 세계도 없애 버렸다.

(대낮. 그림자가 가장 짧은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정점. 비로소 짜라투스트라의 등장(INCIPIT ZARATHUSTRA))

 

 

 

 

 

<반 그리스도Der Antichrist>

 

머리말

 

     이 책은 극소수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그 독자들은 아직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 「짜라투스트라」를 이해하는 독자들일 것이다. 내가 어찌 오늘날의 청중을 가진 자들과 나 자신을 혼동할 수 있겠는가?—내일 이후의 날만이 나의 날이다. 어떤 사람은 죽은 후에 태어난다.

     누구든지 나를 이해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또 그 조건 하에서는 나를 필연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조건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우선 내 진지와 내 열정만을 견뎌내기 위해서도 지적인 문제에 있어서 냉혹할 만큼 솔직해야 한다. 그리고 산 위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야 한다. 정치와 민족적 에고이즘의 그 가련하고 덧없는 요설을 내려다보는 일에 익숙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리가 유용한지 혹은 숙명적 불행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가 되어 있어서 물어보지 않아야 한다……오늘날 아무도 감히 제기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더 좋아하는 용기. 금지된 것을 할 수 있는 용기. 미궁에 이르도록 예정된 운명. 일곱 가지 고독을 통해 얻는 한 가지 체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귀. 가장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 이제껏 침묵하고 있었던 진리에 대한 새로운 양심. 그리고 장대한 방식의 경제(經濟)에의 의지. 즉 자신의 에너지와 자신의 열의를 지켜 두려는 의지……자신에 대한 존경.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무제약적 자유……

     좋다. 그러한 자들만이 내 독자들, 내 올바른 독자들, 예정된 내 독자들이다. 나머지야 무슨 상관인가?—나머지는 그냥 인간들일 뿐이다—우리는 힘, 영혼의 드높음—그리고 경멸에 있어서 인간들보다 우월해야 한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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