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그 보다가 옛날에 쓴 감상편 하나 발견하고 가져왔다.

지금 이렇게 쓰라면 못 쓸 것 같다. 

2011년 주의!

 

 

 

 

 

 

 

 

          처음 작품을 보고 “유령”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모호한 경계선과 추상적인 질감으로 묘사된 이 그림은 초상이라기보다는 글쓴이의 말처럼 한 폭의 ‘추상화’에 가까웠다. 유령을 떠올리게 된 것은 괜한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흑백 명암으로만 처리된 불확실함, 정의될 수 없는 액체성이 흐릿한 초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그것은 단지 작품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것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우리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성을 담아낸 상징이었다.

 

          박광성 화백의 이 작품은 <실존과 소유>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실존하는가, 실존한다면 소유하는가, 소유한다면 무엇을 소유하는가. 저 흐릿한 실루엣 한 폭에 실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녹아 있다. 그림의 실루엣은 마치 사라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유령처럼 보인다. 흐릿한 검은색 속으로 묻혀 들어가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창백한 살갗을 통해 마지막까지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화백은 우리가 이 유령과도 같이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릴 때 읽었던 단편 소설 한 권이 기억난다. 책의 주인공이 교통사고로 죽고 유령들과 함께 지내며 겪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책을 꿰뚫고 있던 키워드는 ‘기억과 존재’였다. 소설 속 유령들은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점차 흐릿해지다가 결국 소멸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이승과 자신을 연결해 주는 끈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부정당했을 때, 그들이 잊혀 졌을 때에야 그들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저 유령들처럼, 살기 위해서, 아니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실존하지 못함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가장 슬프고 명백한 딜레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에 이유는 없다. 우리의 실존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부유하는 흐릿한 유령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모두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 유와 무 사이에서 존재를 건 줄타기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림의 흐릿한 얼굴은 이미 지워져버린 존재들을 대표하며 검은 그림자 속에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소멸되기를 저항하는 저 얼굴이 우리의 삶을 대변한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시간이 담긴 역사서가 얼굴에 드러나 있다면, 그렇게 존재하려고 애쓴 흔적, 사라지지 않으려 세상에 발버둥친 자국, 그래서 조금씩 잊혀져갈 수밖에 없었던 소멸의 상흔 또한 우리의 얼굴에 담겨 있을 것임을, 저 흐릿한 얼굴이 절박하게 외치고 있다.

 

          삶은 결국 저 얼굴을 다시 분명하고 뚜렷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삶, 아무런 근거도 없는 목적을 향해 흘러가야 하는 삶일 테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간직해야 할 얼굴은 저런 흐릿하고 불분명한 얼굴이 아니다. 어둠 뒤편으로 사라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림 속 실루엣의 절박함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일부일지도 모르지만, 우린 대신 의미 있는 다른 장면들을 저 새카만 구멍에 밀어 넣을 수 있다. 어차피 우리의 얼굴은 우리가 살아온 날들로 구성된다. 그 얼굴들을 의미 없는 공허함으로 남겨 유령으로 소멸해 갈지, 그 자리에 빛을 비추어 존재하지 않던 것마저 실존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것들을 간직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2011.1.21.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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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에우로파> 中


   그날 밤 세 사람은 엉망으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인아는 마치 평균대 위를 걷는 듯 두 팔을 양옆으로 길게 뻗어 균형을 잡으며, 수차례 비틀거리며 휘황한 밤거리를 앞장서 걸었다. 그녀가 대학 시절 동아리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자작곡을 노래했다는 말을 그때까진 실감할 수 없었는데, 어둡고 인적 없는 골목에 다다르자 인아는 낯선 노래의 후렴부를 불렀다.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그 목소리의 개성에 나는 놀랐다. 대화할 때는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노래하는 인아의 목소리는 무척 맑았다. 더욱 특별한 것은, 맑기만 하던 그 목소리가 높은 음역대로 들어갈 때마다 미묘하게 변한다는 것이었다. 차가운 유리잔처럼 섬세한 그 목소리의 표면에, 기묘하게 처연한 슬픔 같은 것이 자잘한 물방울들처럼 응결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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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트, 입 2

2014. 12. 4.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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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언가 큰 작품을 쓰려는 사람은 즐겨야 한다. 한 꼭지가 끝난 다음에는 글쓰기의 진전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자신에게 허락하라.


2. 원한다면 네가 이미 썼던 것에 대해 말해도 좋지만, 아직 진행 중인 글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마라. 그를 통해 생겨나는 모든 종류의 만족감은 너의 템포를 가로막는다. 이러한 체제를 따른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자 하는, 점점 증가하는 욕구가 결국 완성을 향한 모터가 된다.


3. 글쓰는 환경에 있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일상을 피하라. 김빠진 소음을 동반한 반쪽짜리 조용함은 오히려 (작업을) 훼손시킨다. 그에반해 에튀드나 사람들의 뒤섞인 말소리들은, 몸으로 느껴지는 한 밤으 적막만큼이나 글쓰기에 중요할 수 있다. 한 밤의 적막이 내면의 귀를 날카롭게 한다면, 저것들은 글을 쓰는 방법이 시금석이 되는데, 그것이 쌓이게 되면 어떤 기괴한 소음들도 그 속에 파묻혀진다.


4. 필기구 도구를 가려라. 특정한 종이, 펜과 잉크에 까탈스럽게 매달리는 건 도움이 된다. 호화로운 건 아닐지라도 이런 소품들을 갖추어 놓는 건 없어서는 안될 일이다.


5. 떠오르는 어떤 생각들도 의식하지 않은 채 지나가게 하지 마라. 너의 메모 노트를 마치 관청들이 외국인 등록장부를 다루듯 그렇게 엄격하게 활용하라.


6. 너의 펜이 떠오르는 착상에 대해 까다롭게 굴도록 해라, 그러면 펜은 자석같은 힘으로 착상들을 스스로 끌어당길 것이다. 떠오른 생각을 기록하는 있어 숙고하면 할수록 그 생각은 더 성숙하게 자라나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말은 생각을 함락시키지만, 글자는 그를 지배한다.


7.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코 글쓰기를 중단하지 마라. 약속(식사, 선약)을 지켜야 하거나 작품을 끝마쳤을 때에만 글쓰기를 중단하는 것이 문학적 명예의 준칙이다.


8. 착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썼던 것을 깨끗히 정서해보라. 그 위에서 영감이 깨어날 것이다.


9. 하루도 글을 쓰지 않고 보내지 마라.


10. 저녁부터 꼬박 날이 밝을 때까지 거기 매달려보지 않은 어떤 글도 결코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11. 작품의 종결은 평소의 작업실에서 쓰지마라. 거기선 작품을 종결짓기 위한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12. 집필의 단계는 생각 ㅡ 문체 ㅡ 글자의 순으로 하라. 탈고의 의의는 글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면서 다만 멋진 글자모양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생각은 착상을 죽이고, 문체는 사고를 속박하며 글자는 문체에 댓가를 지불한다.


13. 작품은 구상의 데드마스크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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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31p.

 

   내가 연구에서 늘 따르는 방법론상의 원칙 중 하나는, 내가 작업하는 텍스트나 맥락에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철학적 요소로 정의한 것을 규명하는 것이다. 즉, 문자 그대로 발전가능성Entwicklungsfahigkeit이 있는 지점, 그 텍스트나 맥락이 발전할 수 있는 장소locus와 순간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저자의 텍스트를 이런 식으로 해석, 발전시키다 보면 해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을 위반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이는 곧 문제가 되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를 전개시켜가다 보면 저자와 해석자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결정 불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해석자에게는 특히 행복한 순간이지만, 해석자는 바로 그때야말로 자신이 분석하고 있는 텍스트를 버리고 자신의 이야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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