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외人外의 장수

2018. 5. 21. 13:42

연구공동체 지평L`Horizon 월간기획 첫 편.  https://wp.me/p9M4yf-3y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드는 생각인데, 이 글은 정말 많은 반박 이후에야 완성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 같다.


§


   요새 '전쟁물'이 재밌다. 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 같은 이야기. 수십만의 병사가 평야와 산지에서 부딪히고 그들을 지휘하는 장수와 책사가 있다.

살아 움직이는 수십만의 병사들을 다룬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승리를 위하여 혹은 피해의 최소화를 위하여 밤낮 머리를 싸매야 한다는 것은 또 어떤 일일까. 그런 중압과 책임감 속에서 탄생한 '완전무결한 전략'을 감상하는 것이 내게는 즐겁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일이 어떻게 흐르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전략.

   반면 그런 전략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파훼되는 것을 감상하는 것도 즐겁다. 이건 도저히 질 수가 없다, 혹은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전장의 어딘가에서 변수가 생긴다. 용맹한 장수 한 사람이나 사연 많은 병사 한둘이 '인외人外' (전쟁물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단어)의 활약으로 판세를 뒤집어버린다. 그러면 아연실색한 책사는 한탄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


   나는 (의외로) 경제학도다. 왜냐고 물으면 좀 식상해져야 한다. 한자어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영단어 Economics도 비슷하다. 어원을 따지자면 οἰκονόμος라는 그리스 어에서 나왔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원래의 뜻은 '가사 관리'였다. 자원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최소 단위를 잘 관리하는 것, 즉 '가사家事'가 바로 국가(폴리스) 차원의 '치세治世' 혹은 '정치'와 다르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런 '치세'가 나의 관심사다.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왜 갈등과 불평등은 해소되지 않을까. 왜 사람들은 자꾸 서로 증오하고 싸울까. 세상이 이럴진대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아직 희망은 있을까. 또는 '완전무결한 전략'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혹은 사회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또 국가의 정책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가. 정책의 효과는 실제로 어떠한가. 사람들에게 재화는 어떻게 분배되고 있고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그 분배는 가능한가, 그리고 정당한가.

   그러나, 또 다시 말하건대, 그런 '완전무결한 전략'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가? 그리고 경제학 혹은 사회과학 학문은 어디까지를 말할 수 있는 걸까? 이 학문의 역할은 도대체 무엇인가?

   바꿔 말하건대 '치세'를 목표로 하는 학문들, 사회에서 어떤 구조나 법칙을 발견해내고 이를 반대로 적용해 사회가 변동하고 인간이 행위·영위하는 것들을 조작하려는(경제정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학문들, 그럴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연구하는 학문들의 '가능영역'을 묻는 일이다. 그 가능영역을 엄밀히 하는 것이 학문적 분석과 적용에 선행해야 한다.


§


   이를테면 현대의 경제학은 그 과학성을 위하여 계량 방법론을 주로 취하고 있다. 어떤 경제 이론이 제시되면 그것을 통계적으로 검증하여 현실설명력을 따진다. 포퍼의 '반증가능성 원리'다.

   통계적 추론은 결국 귀납적 추론이다. 충분히 많은 사례가 어떤 경향을 따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경향이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상황 S 아래, a는 x다. (혹은 a는 x한다) 또 b는 x다. c도 x다. ... 수집된 사례들이 논리 전건이 되어 후건을 도출한다. 어떤 상황 S가 주어지면, 일반적으로 경향 X가 성립한다.

   이 귀납에 기대어 경제학자들은 경기변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조절  ─ 목적함수를 달성하려 한다. 하지만 근본적 한계가 있다.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미래의 사건들을 현재의 사건들로부터 추론할 수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미신이다." (5.1361) 혹은, "태양이 내일 떠오르리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 그리고 이는 태양이 떠오를지 여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6.36311)

   통계와 귀납은 ''필연적 참'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실제로 경제학의 모델은 많은 경우에 예외에 부딪힌다. 완전한 예측이 가능했다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러한 예외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케인즈와 시카고가 몇 번 자리를 바꿨고 이제는 행동경제학이 노벨상을 받았다. (서브프라임 이후에는 민스키의 금융불안정성 가설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가정'을 바꾸는 식이었다. 현실과 더 비슷해 보이는 이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것을 받치는 공리axiom들을 수정했고 경제학의 주류가 달라졌다.

   끊임없는 가설검증의 길이다. 경제학에서 제시하는 것은, 아니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인과나 궁극적 원리가 아니라 논리적 모델이다. 그 모델이 얼마나 현실에 들어맞는지는 사실 얼마나 적합한 공리를 채택했느냐에 많은 부분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반증불가능한 영역을 늘려나가겠지만, 여전히 그것은 논리적일 뿐 필연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항상 인외人外의 장수가 나타난다!


§


   그러나 나는 경제학 혹은 계량적 사회과학 일반의 무능력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능영역은 있다. 그런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들 덕에 지금의 사회는 유지되고 있다. 수천만 단위의 국민들로 이루어진 국가다. 그 수많은 제각각의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정부 혹은 기업은 물가(가격)와 실업율, 생산량과 분배 양상을 목적에 맞춰야 한다.

   * 그 목적 수준을 어디에 두느냐는 경제학이 논할 것이 아니다. 그건 경제학 밖에 있다. 이건 다음에 더 자세히 다루려 한다. 다만 지금 확실히 해둘 것은 있다. 애초에 경제학은 '효율' 즉 최소 비용 최대 편익을 '선'으로 삼는 학문이다. 그러니까 경제학에게 직접, ('경제학'이라는 이름표를 이마에 붙인 누군가를 상상하라) 왜 평등과 정의를 경시하느냐고 묻는 것은, 소용없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학문을 들자면 그건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의 영역이다. 사실 이건 경제학의 가능성에 관한 체념이기도 하다. 경제학은 혼자서 정의로울 수 없다. 학문이 그렇게 칼같이 나눠져야만 하냐고 묻는다면, 학제간 교섭이 가능한 것이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정해져 있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라 답하겠다.

   이제와서 '수량화'라는 강력한 도구는 버릴 수도 없고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애초에 수량화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영역이다. 개인이 영위하는 '물적 기반'은 '태초부터 셀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일 때에야 말 그대로 숫자를 세면 되지만, 몇천만 국민들로 구성된 국가에서 무엇이 누구에게 얼마나 있으며 어디서 어디로 얼마나 흘러가는지를 셀 수는 없다. 그래서 수리적 모델링이 있고 그것을 검증하는 계량적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럴듯한 공리들 아래, 보통은 이렇게 된다, 라는 공식은 일단 현대의 거대 사회를 불가능에서 구원한다.

   그것만으로도 유능한 책사다. 다만 그 정도가 가능영역임을 항상 가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논리적 추론이지 인과나 필연이 아니다. '항상 그렇게 된다'는 것은 환상이며 아마 지금의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해봐야 '많은 경우에' 그렇게 된다, 정도겠지. 그들은 좀 더 많은 경우에 통하는 것들, 좀 더 현실에 '가까운' 모델들을 찾아가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만 잘 해내면 된다.

첫 번째 결론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내렸다고 하자. 경제학은 '완전무결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책사가 아니다.


§


   그러나 그 너머는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책사들의 문제는 살아있는 사람이 전략과 길항하며 판도를 바꾼다는 것이다. 미제스(Ludwig von Mises ; 1881-1973)에 따르면 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에 관한 학문이기도 하다. 생산과 분배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를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합리성과 이기심, 뿐만 아니라 사랑과 질투와 증오와 사상과 꿈, ... (인외인人外人!)

   이건 태생적 교착 상태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에 관한, 그 중에서도 양화 가능한 것들(경제학에서 '합리적'이라고 약속되어 있는 행위들은 자명히 양화 가능하다)에 관한 학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는 양화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둘의 총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경제학이 속 편하게 선을 그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 우리는 완벽할 수 없어, 라고 겸손해진대도 그 다음이 더 머리 아프다. 양화 가능한 것들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데 양화 불가능한 것들도 경제를 움직인다(심지어 양화 가능한 것들만 다뤄도 인과나 필연은 포기해야 한다). 건드리는 순간 제국주의자가 될 테지만 건드리지 않을 수도 없다. (대표적으로 베커G.Becker의 모델들─그는 결혼, 출산, 범죄 등의 인간 행동을 편익/비용 계산 원리로 설명해내 노벨상을 받았지만 아직도 '경제학 제국주의'라며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경제학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말들 앞에 얄밉게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


   학문은 말이다. 범주이며 체계다. 심지어 탈구조를 외칠 때도 구조적인 텍스트로 말한다. 분석과 정리, 판단이 없는 학문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특수한 것들을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상위 범주의 것으로, 더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좀 더 많은 경우에 적확한 말들을 찾아간다. 그러다 빠진 것들을 발견하고 점점 더 많은 것을 포섭해간다. 그러나 끝까지 말로 포착할 수 없는 잉여의 것들이 있다.

   사람을 이야기하는 학문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와중 끝까지 랑그에 포섭되지 않는 빠롤들. 심지어 의미가 아닌 방식도 있다. 지난 글에서 나는 그것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분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끝까지 분석하다 보면 구구절절한 이야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나온다. 이를테면 바르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서사는 초국가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Introduction to the Structural Analysis of Narratives")

   생각건대 그건 다른 말로, 세계다. 정말이지 날것의 의미로. 언어와 사유와 사회와 학문이 있기 전에 그 모든 것을 애초에 가능하게 하는 영점으로서의 세계. 한 사람이든 공동체이든 문화현상이든 경제현상이든 어떤 것을 분석하고 학문으로 체계화하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것은 관찰 이전에 그 모든 것들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상태다.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라는 말은 그래서 적확하고 무겁다.



6.41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 세계 속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리고 만일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가치를 가진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건과 어떠어떠하게 있음so-sein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과 어떠어떠하게─있음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우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 속에 놓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다시 우연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교묘하게 우회한 것이다. 일찍이 이 교착을 알아차리고 그의 작업을 이 안으로 한정했다. 대신 그 한정으로 하여금 그 밖에 있는 것들을 더 진지하게 다뤘다. 어떻게 보면 그는 논의를 끝내버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7)

   그러나 나는 지는 싸움이라도 지속해야 한다는 쪽이다. 스스로를 한낱 결과론으로 한정짓지 않기 위해, 학문은 (최소한 어떤 학문들은) 그것들을 말해내야만 한다. 세계 안에서, 세계 안의 말로. 비트겐슈타인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누군가는 치세를 위해, 누군가는 진리를 위해, 누군가는 윤리와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포섭할 수 있는 것들을 넓혀나가야 한다. 그러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라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그냥 저기 있을 뿐인 것들, 그냥 저런 삶일 뿐인 것들을. 하지만 그 앞에서 포기한다면 '책사의 의무'를 저버리는 셈이다.


§


   내 비약들을 질문으로 압축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학문은 말할 수 없는 것들(다룰 수 없어 보이는 것들)까지 포섭하려 애써야 하는가. 둘째, 그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가.

   (사실 엄밀히 하자면 그 앞에는 '과연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기나 한가'라는 질문이 앞서야 할 것이다)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내가 '학문' 혹은 '사유'라고 말해온 것은 '최소한 사회과학 혹은 경제학'의 의미일 것이다. 이런 논의는 자연과학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최소한 인간과 세계를 분석하고 그것을 거꾸로 적용시키려는 목적이 있는 학문에 국한한 이야기다. 이런 고민이 필요없다는 결론 또한 그것대로 유의미한 경계짓기일 것이다.


§


   인외人外의 장수! 전략에 고려하지도 않았던 변수를 가져오곤 하는 저 무지막지한 존재들. 어쩌면 역사를 써온 것은 이 포섭불가능한 존재들이었을지 모른다. 물론 '장수'는 비유일 뿐이다. 그저 살던대로 살아간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자기 삶으로써 뭔가를 뒤바꿔버린 사람들. 사랑과 증오와 질투와 이기심으로, 그저 자기에게 절실한 대로 행했던 사람들.

   인간사를 다루려는 책사가 있다면 그들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냐는 얘기다. 도저히 보편이나 필연 등의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세계가, 그냥 거기 있는 세계가 저기 있다. 침묵과 지는 싸움 사이에.



Posted by 습작생
,

실패를 위하여

2018. 4. 30. 19:26

이 글은 연구공동체 겸 온라인 지면 "지평L`horizon"의 4월 기획에 해당합니다.


"지평" 링크 ; https://lhorizon.blog/


4월 기획, 앞선 두 글

단현 "포르노그래피즘, 공적인 신체, 다시 행위" ; https://wp.me/p9M4yf-1B

여정 "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윤리" ; https://wp.me/p9M4yf-24




   나도 포르노로 글을 열자. 과연 포르노를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모든 준비 과정과 반복되는 움직임은 간접으로 경험하기에는 너무 지루하다. 포르노 소비의 중요한 목적 하나가 있다면 자극적으로 구성된 절정에 도달하는 일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편안하게, 오르가즘 혹은 사출의 순간으로.

   적나라한 이야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포르노에 관한 긴 글을 쓸 만큼 다양한 경험이 필자에게는 없다) 의미화와 명명, 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것은 이런 뜻이다.' '이것은 이러저러한 다른 것을 보여준다.' 혹은 '여기에 이러한 이름을 붙이자.' 와 같은 시도들. 물론 사태를 '명료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걸려들기 쉬운 함정이 하나 있다. 개념이나 이름에 잡아먹히는 순간 사유는 포르노가 된다. 언어와 범주로 사고하는 종의 숙명에 관한 이야기다. 말이라는 양날의 칼.

   의미없는 일들이 있고 굳이 의미화할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다. 또 말할 수 없는 것과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말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 사유(철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직은 할 말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말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 너무 성급해지면 함정에 빠진다. 빠졌다는 것도 모르고 성공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간편한 절정'을 지나가버리고 나면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몸'이 아직 저기에 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 텍스트는 다른 둘과 긴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단어들을 쓰겠지만 그 의미(혹은 층위)와 용도는 다른 결에 있다. 그러나 '말을 학살하고 난 뒤의 얼굴'과 '세계에 돌을 던지는 행위', 그리고 '변질'(단현)에 관한 일종의 이어쓰기다.




'Marie Cassady, born Dec. 8, 1912'

Paul Mobley, "If I Live to Be 100: The Wisdom of Centenarians" , October 11, 2016, Welcome books


   이렇게 말해도 될까. 자코메티의 얼굴(몸)들은 '말의 학살'을 '말'해낸다. (보여주기를 통하여 말해낸다. 이때의 '말'은 비유에 가깝다. ) 불필요한 것들을 다 쳐낸듯 앙상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 남아 있다. 자코메티는 신체가 있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우리에게 있는 얼굴과 몸을 이야기하려 한다.

   표정은 기호가 아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언어─개념화할 수 없으며  어떨 때는 '바로 저 표정'을 칭하는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세기를 살아낸 노파의 표정은 그런 뜻─signifié!─이 아닌 무언가를 드러낸다. 얼굴을 빌어 무엇인가가 출현하고 있다. 내 관심사는 여기다. 기호언어가 아닌 방식,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들. 그 출현의 순간.


   이를테면, '신체는 텍스트다.' 라는 흔한 명제가 여기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푸코가 (그리고 단현이) 지적한 단면에서 신체는 '권력이 작용하는 장'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언어의 형태로 존재한다. 타당하고 유의미한 발견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귀여움, 섹시함,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 등 일련의 관념어들. 또는 'X라면 모름지기 Y해야지', 'X는 Y한 거야' 등의 문장들. 기호들이 형성(정의)되고 그 기호들이 관련을 맺는 방식으로 문화와 관습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신체에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다. 만들어진 체계에 따라 내 몸을 가꾸고 다른 이의 몸을 판단한다. 그렇다면 신체는 '문화적 랑그가 출현하는 파롤', 즉 지배적 문법을 관찰할 수 있는 사례적 텍스트다. 또 이렇게 말할 때, 그러니까 "<신체>는 <파롤(텍스트)>이다"라고 말할 때, 신체는 하나의 기호다. ('~하는 텍스트'라는 기의를 갖는 기표가 된다) 이로써 기호로서의 텍스트─신체 가 구성된다. 신체의 텍스트성은 그 독해를 통한 문화비평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해석'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이 남는다. 랑그에 포섭되지 않은 신체, 어쩌면 단현이 남겨둔 "고유한 신체". 기호화─의미화하지 않는 방식의 신체. 거울에서 만나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걸어다니고 몸짓하는 바로 그 신체. 나는 단순한 고깃덩어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해석과 기입의 대상으로 전시되지 않고 '출현하는' 신체가 있다는 것이다. (표정은 이것이 드러나는 '틈'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자코메티와 달리 나는 실패할 것이다. 보여주기라는 우회도 거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려 한다. 그냥 포르노만 되지 않기를!


   런던 옥스퍼드 광장. 때는 구십년대의 어느 하루.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마 마흔다섯쯤 되었을까. 여인은 슈퍼마켓에서 몰래 빼낸 듯한 쇼핑 수레에 소지품을 싣고 천천히 포도를 따라 가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실려 있는 유모차를 내려다보듯,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수레를 밀었다. 수레 속의 소지품은 비닐 봉지에 담겨 있다. 머리에 스카프를 둘렀는데 그 위로 또 털모자를 썼다. 러시아말로 샤프카라 불리는 모자였다. 털이 듬성듬성 빠진 모자였다. 누빈 윗도리에 바지, 그 위로 흙빛의 인조털 코트를 걸쳐 입고 있는 여인은, 멀리서 보면 마치 에스키모 같다. 신발만은 에스키모와 달리 미국 스타일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가 한동안 지내셨던 핼럼가(街) 근처 뉴캐번디시 거리의 쓰레기통에서 여인이 주운 것이었다.

   런던 지하철역에 새로운 설비가 들어섰다. 승객이 앉아서 기다리던 벤치들을 없애고 대신 비스듬히 서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일종의 횃대 모양의 버팀대를 설치한 것이다. 노숙자들이 더 이상 벤치에 누워 잠들 수 없도록 한 탁월한 구상이었다. 여인은 이제 밤이면 역의 아스팔트에 두꺼운 판지를 깔고 옷을 입은 채 잠이 든다. 어머니도 그러셨지만, 밤이면 발이 부어 오르기 때문에 신발 끈은 느슨하게 풀어 두어야 했다.

   한낮이다. 옥스퍼드 광장 너머 보행자 구역에는 비둘기들이 수백 마리씩 모여 있다. 샤프카를 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비둘기들이 종종걸음으로 날아오르면서 여인 쪽으로 몰려든다. 여인은 모티머가(街)의 한 식당에서 얻어 온 묵은 빵을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내더니 잘게 부수어 비둘기들을 향해 뿌려 주었다.

   비둘기들이 여인의 팔 위로 날아올라 앉고 어떤 놈들은 머리 위에서 맴돌며 날았는데 대부분은 땅에 떨어진 빵 조각을 쪼아대고 있었다. 여인은 때때로 무심한 듯 부스러기 빵 조각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곤 했다.

   어렸을 적, 집 뒤뜰엔 새들이 멱 감을 수 있게 돌로 된 확이 놓여 있던 기억이 난다. 혹독히 추웠던 어느 겨울, 당시 지금의 저 여인 나이 또래였을 어머니는 매일 아침 은자작나무 사이로 내린 눈을 헤치고 뒤뜰로 나가, 돌확의 꽁꽁 언 물 위에 빵 조각을 놓아 두셨다. 마테를링크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 역시 새들은 죽은 이들이 전하는 소식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다.

   여인은 새 한 마리를 손에 올려 놓더니, 머리를 흔들고 팔꿈치로 쳐내면서 다른 새들을 쫓았다. 여인이 가슴께로 올려 안은 그 새는,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탁구공보다 좀더 작은 둥근 머리는 털이 반쯤 벗겨져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빵 부스러기를 주었으나 받아 먹지 않았다. 여인이 다른 비닐 봉지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며 찾는다. 그것은 우유가 조금 담긴 아이 젖병이었다. 비둘기의 입을 벌리더니 부리 속으로 몇 방울 떨어뜨려 넣었다.

   날마다 옥스퍼드 광장으로 오기 전, 여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이 대머리 비둘기의 젖병을 준비했고, 다른 비둘기들에게 빵 부스러기 모이를 준 후엔 어김없이 이 대머리에게 우유를 먹였다.

   옥스퍼드가(街)에 쇼핑 나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샤프카를 쓴 이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노숙자 여인이 그 대머리 새에게 말했다. 글쎄, 두터운 벽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저들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풍요한 정원을 꼭 보고 싶어한다면 보도록 내버려 두지 뭐.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수록 : 존 버거, 『Photocopies』, 김우룡 역,  상지사피앤비, 2005

33-35p, 「유모차의 여인」


   서술자는 여인을 관찰하고 있다. 여인은 옥스퍼드 광장에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는, 그 중 대머리인 비둘기에게는 젖병으로 우유를 먹이는 노숙자다. 그런데 서술자는 새가 먹을 빵을 놓아두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고, 여인에게서 어머니를 발견한다. (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 그래서 여인이 끌고 등장한 쇼핑 수레를 '유모차'로 은유하고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진정 일어난 일은 무엇인가. 이 텍스트는 기호화라는 강력한 사건이다. 여기서 여인과 그의 행위는, 혹은 옥스퍼드 광장에서 일어난 사건은, 서술자의 어머니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표화했다. 말하건대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 여인에게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린 바로 그 사건은 서술자 없이는 아무런 근거와 의미도 없다. 문제는 저자와 작품 분석이 아니다. (그래서 이 작업을 비평이라고 부르기에는 난점이 있다)


   생각건대 이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은 작은 텍스트를 내포하고 있다.


   구십년대의 어느 하루, 런던의 옥스퍼드 광장. 노숙자 차림새를 한 중년의 여인이 쇼핑 수레에 비닐 봉지를 싣고 나타났다.

   여인은 비닐 봉지에서 묵은 빵을 꺼내 비둘기들에게 뿌려 줬다. 비둘기 중에 털이 듬성듬성한 것이 하나 있다. 여인은 그 비둘기에게 젖병으로 우유를 먹였다.

   옥스퍼드 가에서 쇼핑하던 사람들이 그 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말했다. "글쎄, 두터운 벽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저들이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풍요한 정원을 꼭 보고 싶어한다면 보도록 내버려 두지 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이 작은 텍스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도 기입되기 전, 그냥 거기에 있는 무엇. 단지 주체(인물이 없어도 된다)와 그의 행위만으로 이루어진 무성無聲의 세계. 말하건대 이것이야말로 텍스트의 신체 다. 행위(말)하기 전의 신체가 여기 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이를 신체─텍스트라 부르려 한다. (주의 ; 이 '행위'는 '여인의 행위'가 아니다. 이 신체─텍스트가 아직 스스로 행위(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말하건대 "유모차의 여인" 텍스트는 관찰자이며 서술자인 주체가 이 신체─텍스트를 자의적으로 기호화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신체─텍스트로 기술한 것 이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술자는 여인을 말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와의 만남에는 실패했다.



   그런데도 포착되지 않은 것이, '아직 기술되지 않은 것'이 있다.


   이를테면 '바로 저 여인'이 '구십년대의 어느 하루'에 '옥스퍼드 광장'에서 '비둘기를 먹이고' '저러한 말을 하'기까지의 경위. 다만 나는 인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서사 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흔히 핍진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들의 총체. 인과가 아니라 구구절절한 핑계나 사연에 가깝다. 혹은 하나의 관점에서 서술된 역사가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사건들의 비유기적 배열에 가깝다.

   고백건대 여기서부터는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저 여인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을, 그 단순한 정보들을 빠짐없이 텍스트화할 수 있다. 마치 소설을 쓰기 전에 신체─텍스트가 만들어지듯이. 이 작업을 '아직 기술되지 않은 것'을 더이상 물을 수 없을 때까지 진행해야 한다. 철저히 기호들과 기호의 연관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서사. 여인에 관하여 가능한 가장 완벽하게 기술한 서사.


   이제 우리는 이것 전체를 동어반복이나 비유가 아닌 방식으로 기호화할 수 있는가? 즉 이것은 '다른 어떤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이 거대한 서사는 다른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냥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을 뿐, 더이상 기호화할 수 없다. 기호들의 연관으로 분해할 수는 있겠지만, 즉 텍스트로 구성할 수 있지만, 그 결과는 기호가 아니다. 기호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호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종의 사고실험으로 이것을 구성해냈듯이, 이 무의미성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규모의 문제였다면 애초에 종결없이 무한히 증식하는, 어떤 운동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상태가 아니라 존재로서, 거기에 있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써낼 수 있다.



   기호의 총체이지만 모든 기호화에 저항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것.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과연 그런가'하고 되물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 수많은 의미들로 이루어졌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여인이 가슴께의 새에게 말을 건넬 때의 표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로써 나 또한 실패하는 중이다.



   신체를 말하기 위해 텍스트를 경유했다. 말하건대 이 모든 것은 애초의 문제─우리를 가만 바라보는 '몸'에 관한 이야기다.


   "유모차의 여인"이라는 텍스트 : 우리는 타인의 신체를 기호화할 수 있다. 이것이 언제나 오류라는 것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그것은 어떤 비평적 논의를 가능케 한다. 단지, 그러한 방식으로 신체를 기호화하는 일이 가끔은 한계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신체(혹은 그 일부 ; 아마 금월의 특집은 저마다 신체의 '다른 부분' 혹은 '다른 속성'을 이야기하는 셈일 것이다)가 있다는 것이다. 저 신체로 하여금 무엇을 말하게 할 수 있는가 가 아니라, 바로 저 신체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신체─텍스트 : 말할 수 있는 신체는 언제나 행위하고 있다. ("유모차의 여인"의 신체─텍스트로서 '여인의 행위', 즉 최소한의 사건이 먼저 있었음을 기억하자) 행위는 신체를 말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처음과는 다른 의미에서, 신체는 텍스트다. 말투와 습관과 몸짓, 즉 주체의 행위들은 기호와 그 연관으로 텍스트화할 수 있다. 어쩌면 일부러 텍스트화하지 않더라도 이미 텍스트로 거기에 있다. 우리는 언어와 범주로밖에 사고할 수 없는 종種이므로. 그러니까 신체─텍스트는 단현이 이야기한 행위─신체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A하는 X". 혹은 "X는 A한(하)다."


   그 너머 : 신체─텍스트에, 혹은 행위─신체 너머에 있는 것. 아직 기술되지 않은 것. 기호와 연관으로 구성되고 기호를 통해서밖에 사유할 수 없으나 기호의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는 거대한 이야기. 신체라는 텍스트의 등 뒤에 긴밀하게 달라붙어 있으나, 상상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로 존재하고 있으나, 통채로 기호가 될 수는 없는 그것. 말하지 않고 만나야만 하는 신체. 호명할 수 없으며 단지 출현할 뿐인 신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신체. 혹은 하나의 거대한 표정.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화자는 맹인을 만난다. 그것도 무지와 편견이 가득한 채로 만난다. 처음에 맹인은 단지 기표였던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어떤 이야기의 등장인물 정도로. 이를테면 이런 것들.


   "그러니까 맹인이라는 사람이, 상상해보라, 덥수룩하게 턱수염을 기른 모습을! 맹인에다가 턱수염이라니! 어이쿠, 맙소사."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내가 개인적으로 알거나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검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람도 그런 안경을 썼으면 싶었다."


   "언젠가 나는 맹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기가 내뿜는 연기를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이유에서였다. 겨우 그 정도, 맹인에 대해서는 겨우 그 정도밖에는 알지 못했다."


수록 :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김연수 역, 문학동네, 2014, 285-311p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화자는 맹인과 둘이서 TV를 보다가 의문이 생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대성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시느냐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맹인은 잘 모르겠다며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 화자는 말로 설명하려다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자 맹인은 펜과 종이로 무언가를 제안한다. 화자는 펜을 잡고 맹인은 화자의 손을 잡는다. 화자는 눈을 감고 자기가 그릴 수 있는 대성당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인용자가 bold) 나는 말했다.

(같은 텍스트에서 인용)


   영어 원문으로는 "It's really something." 나는 이 'something'을 다른 '말'로 표현하는 일을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신체가 출현하는 순간. 서로가 짓고 있는 표정을 발견하는 순간. 만남의 순간. 기호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기호언어가 아닌 것이, ...



   타인의 신체를 '만날 때' 우리는 '변질'을 겪게 된다. 의미화나 명명으로는 어떻게 해도 포착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감각할 때─기호 언어의 방식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기호가 아니어서 랑그로 포섭할 수 없는 신체가 (혹은 신체의 그런 영역이) 거기 있다는 예감만으로도 우리는 변화를 상상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미신에 그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만남'을 더 치열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이야기 덩어리로서 출현하는 신체, 가 정말로 거기에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기표화해버린' 신체는 그 깊숙한 결을 쉽게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정 이라는 방식이다. 푸코가 이야기했듯, '하필 이러한 방식이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일 (「비판이란 무엇인가」) 이다. 그런 긴장이 없다면, 그런 상상력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체를 신비화하는 일일 것이다.

   기호언어가 아닌 방식일 뿐, 정말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틈을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그 틈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내 몸을 열어젖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만나는 순간, "It's really something"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다시 한 세기를 산 노인의 얼굴로 돌아가자. 나는 저 표정에 관하여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셈이다. 저 주름과 포즈와 안광이 말이 아닌 방식으로 드러내는 게 무엇인지, 엄밀히 말하여 나는 말해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자코메티가 보여준 것, 그 작품의 밑바닥에 침전해 있는 '그것'들의 근처에도, 처음에 예감했듯, 전혀 도달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글이다. 어쩌면 포르노로 글을 열고 포르노로 글을 닫은 꼴일지도 모른다. 아니 실제로 그렇다. 이 모든 것 또한 성급한 명명에 불과하므로.


   그러나 나는 실패하고 싶었다. 실패 없이는 부정조차 이룰 수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실패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릴 것이다. 지금 내게 있는 말들을 더듬어 말이 아닌 방식을 고민하는 일. 말해낼 수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말해내려 안간힘을 쓰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 신체가 짓는 표정이다.


 

Posted by 습작생
,




   작업 여섯 시간째에 A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집앞 구석진 곳에서 공들여 담배를 태웠다. 엄마와 어린 딸이 지나갔다. 엄마는 인스턴트 컵우동을, 딸은 초코 하드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실랑이 중이었다. 이거 먼저 먹을꺼야. 안 돼, 국수 먼저 먹어. 싫어, 이게 더 맛있단 말야.

   불이 다하자 문득, 짭짤한 것이 간절했다. 지갑을 두고 나왔지만 집앞 마트에는 마일리지가 쌓여 있었다. A는 컵우동 하나를 가져와 등록번호를 불렀다. 신분증이 있어야 하는데. 확인해야 해서. 카운터의 아주머니가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 A는 머리를 긁적이다 물건을 진열대에 다시 두고 집으로 들어왔다. 해는 낮지만 아직은 밝은, 건조하고 쌀쌀한 봄 저녁이었다. 아주머니는 A의 얼굴과 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이 이야기를 만들까.


   아무래도 짭짤한 게 간절했다. A는 지갑을 들고 다시 마트로 갔다. 아쉬워서 저녁 삼을 우삼겹도 집어들었다. 카운터의 아주머니가 웃었다. 우리가 난처해서 그래. 가족끼리도 일이 엇갈려서 우리한테 뭐라 그런다니까. A는 뭐 그렇죠, 하고 웃었다.

   그리고 어려 보이는 남자애 둘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A보다 두 층 아래에서 문이 열렸다. 그애들은 휴대폰 액정에 열중하다 제때 내리지 못했다. 문이 닫히다 말고 다시 열렸고, 다시 닫혔다. A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다가 집 비밀번호를 한 번 틀렸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다시금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일까.


   문득, 이라는 방식으로, 혹은 드디어, 마침내, 라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은 이야기가 되곤 한다. 무엇이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로 만드는가. 그 순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다지 상관없어 보이는 말과 일들은 세계의 어느 구석에서 이어지는가. 그리고 그 찰나의 틈새를 들여다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별것 아닌 것들이 이야기가 되는 그때, 세계는 조금 달라진다. 그리고 최소 하나는 분명해진다. 나는 절대 자살하는 종류의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A는 면이 담긴 스티로폼에 끓는 물을 부었다.

'지진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0) 2019.05.10
이야기  (0) 2018.11.29
15.8.15.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에서.  (0) 2017.01.02
16.10.~16.1. 일기.  (0) 2017.01.01
아이디어. 일기.  (0) 2016.12.31
Posted by 습작생
,

차가운

2017. 12. 12. 20:57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오르는 사람들

2017. 10. 7. 18:22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