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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함정에 빠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굳이 이유를 찾는 일' 혹은 '이름짓는 일'이다. 물론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고 이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이러해야만 할 정당한 이유를 찾는 일, 확실히 정의내리려는 일은 도움을 준다. 함부로 무언가를 확정짓거나 하나의 답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판단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려고 이유를 찾는 것 아니냐고? 글쎄. 애초에 함정이었다니까. 물음은 도움을 주지만 세상은 물음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미셸 푸코Michael Foucault는 근대적 '비판' 개념의 정립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런 원리의 이름으로, 이러저러한 정신 규범으로, 그리고 저러한 절차에 의해서, 저런 식으로가 아닌, 저것을 위해서가 아닌, 저들에 의해서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혹은 이런 것도 있다. "비판은 자발적인 불복종이자 성찰을 통한 비순종의 기법일 것입니다. 비판은 한마디로 진실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게임 속에서, 본질적으로 탈예속적일 것입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중)

   이런 이야기다. 오랫동안 '별 생각 없이 생각했던 것들'이 있다. 문득 당연하던 것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한 번쯤은 찾아온다. 그 감각을 꽉 붙잡고 나면 다른 것이 온다. 별 생각없이 생각하던 것들을 돌아보고 속아넘어갔던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의외로 많은 것들이 의외로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면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글은 그러기 위한 '자발적인 불복종'이다. 혹은 괜한 트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필요하다 믿는다. '하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를 문제삼는 것은 귀찮지만 치열한 지평-넓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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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비판' 개념을 인용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물으려는 건 이것이다.

   비평의 문제들 ─ "문학비평을 왜 하는가?" 혹은 "문학비평의 책무/목적은 (있다면) 무엇인가?" "문학비평에 '좋음'이 있다면 무엇인가?" 등등.

   그러니까, 비판을 비판해보자는 이야기다. 답을 내리고 쓰는 글이 아니다. 그래서 무책임한 글이 될 수도 있겠으나,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변명을 먼저 붙인다. 말했듯이 이건 '괜한 트집'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자발적 불순종'이다. 아니, 트집이겠지만 '괜한 것'은 아니라 믿는다. 지금 비평의 가능영역과 위치를 묻는 것은 넓게는 문학의 영역을 묻는 것이기도 하며, 더군다나 나는 아직 문학과 문학비평이 우리의 삶과 강하게 교섭할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주지하건대, 나는 비평의 무용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혹은 '하나의 비평'을 확보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금은 멍청하게(!) 지금의 문학비평을 뜯어봄으로써 소설과 시와 그에 관한 말들이 내 삶에 들어앉은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싶다. 그럴 수 있다 믿고, 그렇게 하고 싶다. 또한 이 작업은 내 나름대로의 비평언어를 정립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어떤 대목에서는 그 가능성들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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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간 내 관심사가 문학에만 치중되어 있었던 탓에, 이 글에서는 '비평'을 말할 때 다른 언급이 없는 한 '문학비평'만을 의미하게 됐다. 원래 예술비평 일반을 다루고 싶었으나, 최근 글 하나를 읽고 '거기까진 함부로 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 관뒀다. (남다은, 임근준 , 조일동 , 김홍중. "비평의 비애, 비평의 자랑." 문학동네, (2013): 1-52)

 이후의 꼭지들은 한 편의 짜여진 글이라기보다 문제들의 정식화─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그럴듯한 답을 찾아가는 것 같지만─과정이다. 공부하며 다음 책을 참조했다 : 소영현.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2017).  좀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한 후 짜여진 글로 묶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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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은 판단과 평가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가. 혹은 포함해야만 하는가. 말인즉 판단과 평가가 비평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루고 있는가.

   바꿔 생각해보자. 판단과 평가가 빠진 비평을 비평이라 할 수 있을까. 빼고 나면 무엇이 남나. 감상이나 취향의 나열 아닐까. 감상문이나 에세이와 비평을 가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얼핏 자명해보인다. 작품을 비평함직한 것으로 문제삼았다면 그것을 깊이 읽고 이 작품이 어떤 것인가 판단하며 작품 속의 어떤 요소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를 엄밀히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비평'이라는 이름을 달고 혹은 '비평가/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사적인 감상이나 에세이를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을 굳이 비평이라 할 수 있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반대로 말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적인 장에 의견을 노출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일이 '비평'이라는 이름을 달 자격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조금 다른 방향으로 물으려 한다. 판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떤 기준을 선제한다는 것이다. 말인즉 어떤 것이 좋고 나쁜가, 좋고 나쁘다면 왜 좋고 나쁜가를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무엇인가. 비평가의 개인적인 가치관인가. 혹은 이데올로기인가. 그렇다면 판단하고 평가하는 비평은 선제하고 있는 틀로 작품을 재단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그건 최소한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말로, 작품을 왜곡시키고 기존 가치관의 자기강화나 이데올로기의 선전을 위해 봉사하게끔 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과장일까)

   그런 비평은 좋은 비평인가. 아닐 것 같다. 여기 비평이 빠지는 함정이 하나 있다. 텍스트를 진지하게 대하는 일은 일종의 줄다리기다. 텍스트를 통해서 다른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텍스트를 벗어나는 위험을 맞게 된다. 그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리고 그것을 비평가 개인의 역량 문제로 둘 것인가 비평의 방법론 자체로 문제삼을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리고 여기서 돋아나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대한다는 것─이른바 바르트 식의 이상적인 텍스트 이론에 관한 것이다. 텍스트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 그러니까 텍스트를 '다른 무엇인가를 반영하는 통로' 정도로 이해할 때, 텍스트 자체에서 음미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빠져나간다. 맞는 지적인 것 같다. 그러나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대한다는 게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비평이 지켜야 할 룰인가.

   혹은 그 사이의 무언가는 없을까. '작품에 내재적인 것들'에만 공허하게 천착하지 않고, 작가가 아니라 비평가로서 말해내야만 할 것들을 충분히 말해내기. 그러나 텍스트를 다른 무엇을 위해 봉사하게끔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하기. 이것은 동시에 성취할 수 없는 것인가. 텍스트 안에만 머물면서 텍스트 바깥을 말해내는 일은 불가능한가. 판단과 평가가 아닌 방식의 비평언어는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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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론적 비평은 필요하다. 이건 좀 쉽게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가. 혹은 어떤 글이 잘 쓴 글인가. 물론 이것은 시공간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해당 언어공동체(혹은 장르, 혹은 문학장) 안에서는 최대한 건실하게 서 있어야 한다. 세계의 모든 것은 예술적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예술을 좋은 예술이라 할 수는 없다. 창작은 기술이며 우연이 아닌 이상에야 잘 갈고 닦은 기술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 창작론적 비평은 해당 장 내에서 창작 활동을 채찍질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창작론적 비평은 예술장의 언어에 불과한가. '그것 뿐이냐'면 간단치 않다. 이를테면 서사 기반 문학은 태생적으로 재현과 관련된다. 이러저러하게 있는 세계의 어떤 것을 재현할 것이냐가 첫째가 되고, 그것을 '어떻게' 재현─어떻게 서사화할 것인지가 둘째가 된다. 세계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작업은 윤리와 연관한다. 비평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재현의 윤리'라는 단어는 괜한 것이 아니다. 어떤 주체를 선택하고 그 중 누구를 발화하게 하며 어떤 이를 조연적 역할로 등장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의 <귀향>(조정래, 2016) 영화 논쟁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영화라는 장르 특성상 서사 외에도 카메라의 시점, 시각적 재현 문제가 중첩되어 더 적나라한 예시에 해당할 것이다. (자세한 것은 손희정, 그리고 여기서 촉발된 "문학동네" 제23권 제2호(통권87호)에 [논쟁]으로 실린 송효정과 권명아의 글을 참조 ─이 논쟁은 창작론을 넘어 대중과 정동이라는 문제까지 확장되었으며 언급한 것들 이외에도 영화비평계에서 수많은 논의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창작의 방법론을 묻는 비평의 영역은 우리의 삶을 확실히 겨냥하고 있다. 무엇을 선택하는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서사화하는가,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어떤 정치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통치되고 있는가를 가시화하는 물음이다. 창작의 기술을 넘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통치되는/하는 일'을 물을 수 있는 삶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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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과 시간의 문제. 오래 전의 작품을 지금 여기서 묻는 일은 의미가 있는가. 문학사적 의미 이상이 있는가. 혹은 비평은 '현재성', '현장성'에 집중해야 하는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면 왜 벗어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하여 비평의 시의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런데 그 전에 시의성은 비평의 책무인가? 어쩌면 이 물음은 문학이론과 비평 혹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구분(소영현)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비평은 문학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는 않는 것 같다. (아카데미즘을 평가절하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비평은 지금 여기를 염두에 둘 때 '비평으로서의 효과'를 가진다.

   그렇다면 문학 작품을 통시적으로 조망하는 일은, 이러저러한 것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서사화해 왔음을, 이런 방식의 통치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드러낼 수 있겠다. 시의적으로! 그렇다면 비평은 과거의 작품까지도 정당하게 영역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견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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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지는 물음들은 동질이형으로 보인다.

   * 공시적 고찰은 어떠한가. 같은 시대에 태어난 다른 작품들은 공시적으로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가. 공유하고 있다면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가. 그러니까 비평이 그것을 공시적으로 다루고 분석─재배열─의미화하는 일이 가능할 만큼 '지금 여기'와 잘 연관하고 있는가.

   * 작가에 관한 총론(작가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한 작가의 커리어를 훑으며 '이 작가는 대체적으로 어떤 작가다' 혹은 '이 작가가 이 시기에 쓴 작품은 이러이러한 바를 말하며 다른 시기의 작품과는 이러이러한 차이를 보인다'와 같은 식의 비평.

   * 비평이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비평은 우리의 삶과 어떻게 관계맺는가. 다만 여기서는 서두에 인용한 푸코의 비판 개념보다 좀 더 좁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자. 비판이라는 자세, 가 아니라, 작품을 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말하는 상식적인 의미의 비평─출판/유통되는 텍스트들 자체를 염두에 둔다.


   비평은 "이중의 불확정성"(소영현)에 놓여 있다. 비평은 태생적으로 대상의존적인데(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까) 그 대상인 문학 또한 확정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이 물음들은 문학 내지 작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묻지 않으면 답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먼저 해석으로서의 비평을 묻자. 바르트를 다시 언급할 수 있다. 그는 책 "저자의 죽음"에서 작가와 작품의 분리를 이야기한다. (편의상 그의 작품─텍스트 두 개념을 구분하지는 말자)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는 창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혹은, 전술했듯, 텍스트를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기호로'만' 읽는 것도 텍스트를 쉽게 곡해하는 길이다. 물론 비평은 작품을 진지하고 엄밀하게 대할 때에 비평이 되는 것이지만, 판단과 평가가 비평의 본질(부분)임을 전제하고 나서도 그 방법이 오직 '해석' 뿐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문제다. 작품을 다른 의미에 봉사하게끔 하는 일은 오히려 작품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는 일이다. 텍스트는 '지금 여기', 혹은 독자 개개인에 강하게 연관할 때에야 오롯이 텍스트로 선다.

   작가론의 가능성을 비슷한 결에서 물을 수 있지 않을까. 한 작가의 작품을 한데 묶을 수 있나. 묶을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작가론은 사실 세계-작가-작품의 고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있고 작가는 무언가를 느낀다. 혹은 경험을 쌓고 알게 모르게 세계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작품에 담는다. 비평은 작품에 담긴 작가를, 작가에 담긴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작품을 작가에 섣불리 복속시키는 일이 아닌가. 한 사람이 쓴 텍스트라는 것 이상으로 작품들을 연관시킬 당위가 있는가? 작가론이 그런 섣부른 시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치사해 보이지만) 이 물음에 답해야 할 것 같다. 이 작가는 이러저러한 소재와 이러저러한 서사화 방식을 자주 사용하며 문체는 어떠하고 어떤 인물들을 조명하며, ... 그러나 만약 저자를 가리고 작품들을 만났을 때도 이런 분석이 가능할까. 생각건대 한 작가의 작품들이 논의가능한 유사성을 가진다는 것은 애초에 그 작품들에는 작가가 필요없다는 것일 수도 하다.

   생각건대 작가론은 '실제로 작가와 작품 사이에 강한 연관이 있으며 그것이 분석 대상으로서 유의미하다' 와 '이것은 단지 작가의 이름을 분류명으로 하는, 애초에 유사성이 있으며 그 자체로 서로 연관성을 보이는 텍스트들에 관한 연구이다'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극 사이의 가치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필요하지 않을까)

   (이는 어쩌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구분을 묻는 일의 반복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공시적 고찰은 어떠한가. 텍스트들은 '같은 시대를 사는 저자들'을 경유하지 않고 묶일 수 있는가. (물론 '저자의 죽음'에 매몰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세계와 연관하는 저자들, 그들이 같은 시공간에서 쓴 텍스트라는 반영론적인 관점이 그렇게 굳건한가. 반영론적 관점─이 물음은 그래서 '비평은 우리 삶과 어떻게 연관하는가'와 거의 같다. 작품은 세계의 반영인가. 반영이라면 그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것을 메커니즘화할 수는 있는가. 또 작가가 세계를 드러내 주는 좋은 이야기꾼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증하는가.

   작품을 '징후' 혹은 '사후적 지표'로 읽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하냐는 (치사한) 물음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내재적인 것에만 머물러서는, 최소한 '사회비평'은 달성할 수 없는 포기 상태로 남는다. 비평이 '이러저러한 방식의 통치'를 문제삼는 것이라면 잠정적으로라도 텍스트 바깥으로 걸어나오는 바로 그 일이 중요하다고 해야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텍스트를 수단화하지 않는 방식, 그리고 텍스트를 작가에 복속시키지 않는 방식은 계속해서 실험되어야 한다. 비평은 스스로를 당연시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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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런 물음들이 빼놓고 있는 것 하나 ; 비평은(문학 또한)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장'은 실재하며 그 안에서 수많은 비평 작업들이 길항하여 담론장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비평은 하나의 작품-비평문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벡터합의 모습일 테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다 합쳐놓고 보면 어떻게든 잘 흘러가겠지'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비평장이 문제시되고 있는 사태들을 상기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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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과 독자의 문제도 있다. 비평은 독자를 고려해야 하나. 아니라면 비평은 문학장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존재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가. 독자를 고려해야 한다면 어떤 독자를 고려하는가. 문학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만한 지식수준과 여유를 갖춘 독자들인가, 아니면 문학장에 포섭될 수 있는 잠재적 독자들─이들은 비평이 '지금 여기'를 겨냥한다면 항상 의식해야 할 이들인데─까지인가. 후자라면 비평은 문학의 독자를 늘리는 데 기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비평은 어디까지 '낮게 내려올' 수 있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이 전반적인 비평 질 저하를 부르지는 않아야 할 텐데 그 중심 잡기는 가능한가.

   지금 비평을 읽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제 소설 권말의 해설도 잘 읽지 않는다. (나도 별로 신용하지 않는다─물론 이것은 '주례사 비평'에 한정될 수도 있겠다) 비평의 과녁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그것을 철회하지 않는 한) 어떻게든 독자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비평은 문인들이 전유해서는 의미 없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어떻게 폐쇄적인 공론장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그것은 제도나 자본논리에만 결부되어 있는 것인가, 혹은 비평의 방법론까지 문제삼을 수 있는 주제인가. 방법론까지 문제삼는 것은 온당한가? 그러니까 필요 이상의 책임론인 것은 아닌가? 내게는 아직 간단한 문제로 보이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Axt", "문학3" 등 일련의 문단 사건들 이후로 등장한 독립 문예지들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들의 궤적을 앞으로도 예민하게 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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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을 독자적인 예술이라 부르는 것은 가능한가. 작품을 다루며 등장하는 텍스트가 그 자체로 다시 작품이 될 수 있나. '유려한 문체의 비평문'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이는 미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도 연관한다.

   혹은 '메타소설'은 비평이라고 이름할 수 있나. 최소한 '비평적'이라고 이름하는 데는 문제가 없나. 문학의 방법을 묻는 문학 작품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들을 '비평적이다', 라고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이 물음 또한 비평 혹은 '비평적'인 게 무엇인지와 닿겠다. 역전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메타소설이 비평이 될 수 있다면 비평은 메타문학적 문학이 될 수 없을까.

   이건 계속 실험해보아야 할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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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모든 정식화(혹은 간략한 답변)는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전제 위에 서 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 전제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은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함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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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답변은 비평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확정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질문을 확정할 수 있다. 생각건대 다음 물음, 더 본질적인 물음은 문학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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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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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아카이빙 용도. 사견이 뒤섞여 있음.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서사물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서사는 놀랄 만큼 다양한 장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들 각각은 마치 어떤 재료라도 인간의 스토리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다는듯이 다양한 매체와 형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영상(정지된 그림과 동영상), 몸짓, 그리고  모든 매체들이 혼합된 일련의 연쇄 등이 가능하다. 서사는 신화, 전설, 우화, 소설류, 서사시, 역사, 비극, 드라마, 코미디, 마임, 회화(카르파치오의  우르술라 연작화를 생각해보라), 스테인드글라스로  , 영화, 만화, 뉴스, 그리고 일상의 대화 속에 들어 있다. (중략)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라는 구분과는 상관없이, 서사는 초국가적이고 초역사적이고 초문화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Roland Barthes, “Introduction to the Structural Analysis of Narratives”, A Barthes Reader, ed. Susan Sontag, New York: Hill and Wang, 1982, pp.251~252

재인용) 박진,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토도로프에서 데리다까지”, 랜덤하우스중앙, 2005, 15p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 동문선, 1997

텍스트ㆍ즐거움ㆍ권력ㆍ도덕성」, 김희영, 7-24p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oeuvre)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텍스트(texte)이다. 작품은 항상 상징적인 /비상징적인 ,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지금까지 해석 비평이 추구해  것이 항상  마지막 시니피에, 총체적이고도 단일한 의미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선조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의미를 이루고 있는  다양한 층과 이탈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바르트는 크리스테바 작업의 도움을 받아 텍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ㆍ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ㆍ의사소통ㆍ재현의 산물이라면(현상 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ㆍ상징화ㆍ생산성(발생 텍스트) 영역이다. ... 작품과 텍스트, 현상 텍스트와 발생 텍스트의 구별은 시간적 상황이나 작품의 현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를 작업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은 소비의 대상이나,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에서 구해 내어 유희ㆍ작업ㆍ생산ㆍ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 존재할 뿐이다.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ㆍ감정ㆍ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자체도 기호드르이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저자의 죽음>, 본서 33) 그러므로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것은  이상 의미가 없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의미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비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 뿐이다. 글을 쓰는 <> 종이 위에 씌어진 <> 불과하듯, 독자도 글을 읽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ㆍ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저자의 죽음>, 본서 33)

 

... 글읽기의 체험을 바르트는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이 바로 즐거움(plaisir) 즐김(jouissance)이다. ... plaisir 텍스트는 문자를 인정하지만(즐거움은 말해질  있는 것이기에), jouissance 작가와 더불이 <감당할  없는 텍스트, 불가능한 텍스트> 시작된다(왜냐하면 jouissance 텍스트는 말해질  없는 것이기에, 혹은 말해진  사이에 놓여 있기에. <텍스트의 즐거움>, 본서 68). 따라서 joussance 텍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그것을 쓰는 것만이 가능하다( 구별은 《S/Z》에서 읽혀지는[lisible] 것과 씌어지는[scriptible] 것의 구별과도 흡사하다). 그렇지만 plaisir jouissance 문학비평의  척도가   있다.  plaisir 텍스트는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글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 주는 텍스트이다. 이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전ㆍ문화ㆍ섬세함ㆍ행복감> 동의어라   있다. 그러나 jouissance 텍스트는 독자ㅢ 역사적ㆍ문화적ㆍ심리적 토대나,  가치관ㆍ언어관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자아가 회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성도 가지지 아니하며, 모든 규범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변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plaisir jouissance 구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으며,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 인류의 태고적부터 권력이 기재된  대상이 바로 언어,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표현인 언어체이다.』(<강의>, 본서 119-120)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는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위해 하는 』(<강의>, 본서 120)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이처럼 바르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언어의 권력성을 문제시한다. ...

그렇다면 이런 언어의 권력성, 지배 견해의 폭력, 상투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 바르트의 초기 저술에 나타난 것은 우선 역사성의 회복에 의한 권력의 자연스러움의 추방이라고 설명된다. ...

그렇지만 이런 역사성의 회복이 ... 유일한 전력은 아니다. ... 『우리에게는 언어체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 언어체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다』(<강의>, 본서 122) 바로 이것에 바르트에 의해 제시된 권력 담론에 대항하는 두번째 전략이다.  속임수를 그는 글쓰기라 부른다. 언어 안에서 언어와 투쟁하는 작업을 보여 주는 글쓰기,  언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다른 언어를 억압하지 않으며, 미래의 주체가 <어떤 후회도 억압도 없이>, <욕망의 수만큼이나 많은 언어를> 구사하며 즐기는 글쓰기, <법칙이 아닌 변태> 의해 이런저런 언어를 말할  있는 글쓰기, ... 그렇다면 글쓰기의 속임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무한한 이동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 파솔리니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언어가 체제에 수렴되면  그것을 버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  언어가 권력으로 행사하려고 하면,   언어를 과감하게 버리고 <욕망의 진실> 따라 끝없이 자리를 이동해야 한다. 자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 권력이 우리를 이용할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이동 작업은 글을  때는 단상으로, 강의를  때는 이탈이나 소풍으로 나타나며,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언제나 죽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있다』(<강의>, 본서 141)라고 표현된다.

 

 

34p. 「저자의 죽음.

 

발자크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아무도(어떤 <인간>)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 하나의 정확한 사례가  사실을 보다 분며이 해줄 것이다. 최근의  연구는 그리스 비극의 구성상의 모호성을 밝혀 주었는데,  텍스트는 이중적인 의미의 단어들로 짜여져 있어 각각의 인물들은  말들을 일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오해가 바로 <비극적>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각각의 말들을  이중성 속에서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다시 말해 자기 앞에서 말하는 인물들의 귀먹음까지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독자라는 것이다(혹은  경우에는 청자). 이렇게 해서 글쓰기의 총체적 존재가 드러난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에 집결되는  장소가 있는데,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목적지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독자는 역사도 전기도 심리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37-47, 「작품에서 텍스트로

 

1)

텍스트를 계산할  있는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된다. 텍스트로부터 작품을 물질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 아무리 오래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텍스트> 있을  있으며, 오늘날의 문학적 산물 안에서도 전혀 텍스트가 아닌 것이 있다.  차이는 다음과 같다.  작품은 책들의 공간의  부분을 차지하는 실체(substance) 단편이나(이를테면 도서관에서), 텍스트는 방법론적인 영역이라는 점이다.  대립은 라캉의 구별을 상기시킨다.  <현실>(realite) 보여지는 것이나, <실재>(reel) 증명될  있다는. 이와 마찬가지로 작품은 보여지는 것이나(서점ㆍ서류함ㆍ시험 일정표 안에서), 텍스트는 장명되는 것이며, 몇몇 규칙에 의해 (혹은 반하여) 말해진다. 작품은  안에 쥐어지나,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유지된다. 그것은 단지 담론의 움직임 속에서만 존재한다. ... 텍스트는 작품의 분해가 아니며, ... 혹은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있는 것이다.  결과 텍스트는 결코 멈출  없다(이를테면 도서관의 서가에). 텍스트의 구성 운동은 횡단(traversee)이다(특히 그것은 작품을, 여러 작품들을 관통할  있다).

 

2)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는 (좋은) 문학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위계 질서나, 심지어 단순한 장르 구분에도 포함될  없는 것이다. 반대로 텍스트를 구축하는 것은 과거의 분류에 대한  전복의 힘이다. ... 만약 텍스트가 분류의 문제를 제기한다면(게다가 이것이  <사회적>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텍스트가 언제나 어떤 한계 체험을 연루시키기 때문이다. ... 텍스트는 언술행위의 규칙들(합리적인 , 읽혀질  있는 ) 한계까지 나아간다. 텍스트는 정확히 일반 견해(doxa)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 텍스트는 언제나 반론적인(paradoxal) —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반 견해 밖에 있는것이다.

 

3)

텍스트는 기호에 비해 접근하거나 체험되는 것이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signifie) 닫혀진다. 이런 기의에  가지 의미작용의 양상이 부여될  있다. 기의를 명백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헌학), 또는  기의가 은밀하고도 최종적인 , 우리가 찾아내야만 하는 (맑시스트적ㆍ정신분석학적ㆍ주제적, 해석)으로 간주하는 것이 그러하다. 요컨대 작품은  자체로서 하나의 일반적인 기호처럼 작용하며, 따라서 그것이 기호(Signe) 문명의 제도적 범주를 표상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와 반대로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후퇴를 실천한다. 텍스트는 지연시킨다. 그것의 영역은 기표(signifiant)이다. 기표는 <의미의  부분>이나  물질적인 입구가 아닌, 오히려 반대로 의미의 뒤늦음(apres-coup)으로 이해되어야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표의 무한성은 뭔가 <말로 표현할  없는 >(ineffable. 명명할  없는 기의) 관계된 것이 아니라, 유희의 개념에 관계된다. 텍스트 영역에서의 기표의 지속적인 생성은, 성숙의 유기적인 진로나 해석학적인 심화의 진로가 아닌 분리ㆍ중복ㆍ변주의 계열적인 움직임에 따라 이루어진다. 텍스트를 지배하는 논리는 이해(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 정의하는) 아닌 환유이다. 연상ㆍ인접ㆍ이월(移越) 작업은 상징적 에너지(그것이 없다면 인간이 죽어갈) 분출과 일치한다. 작품은 평범하게 상징적인 것이나( 상징성은  고갈되어 정지된다), 텍스트는 근본적으로/완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의 전적으로 상징적인 속성 안에서 구상되고 인지되고 수용되는 작품이  텍스트이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는 언어로 회수된다.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나 탈중심적인 것이며, 닫힌 것이 아니다.

 

4)

텍스트는 복수태(pluriel)이다.  말은 단지 텍스트가 단지 여러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의미의 복수태 자체를, 환원 불가능한 복수태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텍스트는 의미의 공존이 아닌 통과이자 횡단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진보적인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해석이 아니며, 폭발ㆍ분산이다. 텍스트의 복수태는  내용의 모호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짜고 있는(어원적으로 말하면 텍스트는 직물이다) 기표들의 입체적인 복수태라고 불릴  있는 것에 달려 있다.

텍스트의 독자는 한가로운 주체 비유될  있다(자신의 마음속에서 모든 상상계의 긴장을 늦추는). ... 그가 인지하는 것은 이질적이고도 분리된 실체와 전망에서 오는 복수태적인 환원 불가능함이다. , 색채, 초목, 열기, 공기, 미세한 소리의 폭발, 새들의 가냘픈 지저귐, 골짜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 지나가는 소리, 몸짓,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주민들의 옷차림.  모든 사건들(incidents) 반쯤 알아볼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기존의 약호(code)들로부터  것이지만  배합은 유일하며, 그래서 산책을 차이로서만 반복될  있을 뿐인 차이로 설정한다.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 개별성이 아니라) 속에서만 존재할  있다.  독서는 일회적(semelfactive.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모든 연역적ㆍ귀납적인 과학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텍스트의 <문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것이지만, 전적으로 인용과 지시물ㆍ메아리들로 짜여진다.  과거, 혹은 현대의 문화적 언어들이 하나의 거대 입체 음향 속에 텍스트를 여기서 저기로 횡단한다. 다른 텍스트의 <사이 텍스트>(entre--texte) 해서, 모든 텍스트를 사로잡는 상호 텍스트성은 텍스트의 어떤 기원과도 혼동될  없다.

작품의 <원천>이나 <영향> 대한 연구는 계보의 신화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텍스트를 이루는 인용은 익명의, 인지할  없는, 그렇지만 이미 읽혀진 것이다. 그것은 인용부호를 붙이지 않은 인용이다.

 

5)

텍스트는 아버지의 기재 없이도 읽혀진다. ... 텍스트는 아버지의 보증 없이도 읽혀진다. 상호 텍스트성의 복원은 역설적으로 유산을 파기한다.  말은 저자가 텍스트로, 그의 텍스트로 <회귀할>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손님의 자격으로 초대된다는 뜻이다. ...  이상 특권적ㆍ가부장적ㆍ비은폐적인(alethique) 것이 아니라 유희와 관계된다. 말하자면 그는 종이 저자가 된다.

 

6)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구해 (만약 작품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유희ㆍ노동ㆍ생산ㆍ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말은 텍스트가 글쓰기와 글읽기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파기할 (적어도 축소시킬 ) 요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작품 안에서 독자의 투사를 강화함으로써가 아니라, 동일한 의미실천 안에 글쓰기와 글읽기를 연결시킴으로써 가능하다. ...

사실, 소비로서의 읽기는 텍스트와 유희하는 것이 아니다. <유희>(jouer)라는 말은, 여기서  모든 다의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것이다. 우선 텍스트는  자체로써 유희한다(놀이가 가능한 문이나 기구처럼). 그리고 독자는   유희한다. 그는 텍스트를 가지고 유희하며(놀이의 의미에서), 그리하여 그것을 재생산할 실천을 추구한다. 그러나  실천이 수동적ㆍ내적인 모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텍스트는 바로 이러한 축소에 저항한다)그는 텍스트를 연주한다(jouer). ...

텍스트도 이런 새로운 종류의 악보와 아주 유사하다. 그것은 독자에게 실질적인 협동을 요구한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이다. ... 오늘날에는 비평만이 작품을 집행/연주한다. 현대적인 텍스트(난해한) 전위적인 영화, 혹은 그림 앞에서 느끼는 <권태> 바로 독서를 소비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권태란 텍스트를 생산ㆍ유희ㆍ해체할  없다는 것을, 시동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이것은 텍스트에 대한 마지막 접근,  즐거움의 문제를 상정(제안)하게 한다.

즐거움(plaisir???) 아무리 생생하고,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부분적으로는(예외적인 비평의 노력을 제외하고는) 소비의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저자들을 읽을  있다는 것은, 오늘날 그들처럼 다시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오늘날 <그렇게>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소간에 서글픈  인식은,  작품들의 멀어짐이  현대성을 상정하는 바로  순간에, 나를  작품들의 생산으로부터 분리시키기에 충분하다(현대적이란, 우리가 다시 시작할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텍스트는 즐김jouissance?? 연결된다. 기표의 범주에 속하는 텍스트는 나름대로 사회적 유토피아의 성질을 띤다. 역사 이전에(역사가 야만성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텍스트는 사회적 관계의 투명성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언어 관계의 투명성을 구현한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우세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언어들이 자유롭게 순환하는 바로  공간이다.

 

 

  개의 명제가 텍스트론의 분절을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 텍스트의 이론 자체가 메타 언어적인 나열로 충족될  없기 때문이다. ... 텍스트에 대한 담론은  자체가 텍스트, 연구, 텍스트에 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무관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며, 어떤 언술행위의 주체도 심판ㆍ선생ㆍ분석자ㆍ고해 신부ㆍ해독자의 입장에 두지 않는, 그런 사회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론은 다만 글쓰기의 실천과 더불어서만 성립될  있다.

 

 




박진, “서사학과 텍스트 이론”, 랜덤하우스중앙, 2005

178-9p

바르트의 S/Z 하나의 구조, 혹은 모델로부터 모든 서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이런 관점은 텍스트의 ‘차이 사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차이는 텍스트의 개별성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텍스트들과 언어들과 체계들의 무한성에 연결된 차이로서, 각각의 텍스트는  차이의 귀환이다. 바르트는 차이의 무한한 패러다임을 통해 개별 텍스트를 놀이(jeu) 되돌릴 것을 제안한다.”

“ ‘읽는 텍스트(le texte lisible)’(S/Z p.10)” ; 닫힌 체계, 단일한 구조, 화석화, 다시   없는 과거적 텍스트.

읽는 텍스트의 독자는 놀이의 즐거움 대신에 수동성과 진지함에 빠져든다. 바르트는 그러한 독서가 순수한 놀이가 아닌 언어의 노동이며, 독서를 통해 의미를 발견하는 일은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씌어진 것들의 거대한 체계를 견디는 일임을 폭로한다.”

읽는 텍스트와 대비되는 개념은 ‘쓰는 텍스트(le texte scriptible)’(p.11) 이다. 쓰는 텍스트는 그것을 다시 쓰는 독자에 의해 무한한 차이의 영역 안에서 끝없이 분산한다. 쓰는 텍스트는 언어들의 무한성을 감소시키는 어떤 단일한 체계에 의해서도 형태지어지지 않으며, 그래서 영원한 현재성을 지닌다. 바르트가 말하는 쓰는 텍스트란 구체적인 개별 텍스트가 아니라 놀이를 통해 얻어지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텍스트일 것이다.”

바르트의 S/Z 문학 혹은 읽는 텍스트들을 쓰는 텍스트로 변화시키고 문학 텍스트의 독서를 놀이로 되돌리는 전환에 대한 모색이다. 그러한 전환은 읽는 텍스트들에서 복수성(pluralite) 최대로 승인하는 읽기의 방식을 통해 시도된다. ‘다시 읽기(la relecture)’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방식은 텍스트의 문장들을 수많은 읽기의 단위들(lexies) 쪼개어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가 지우고 다시 이름 붙이기(nomination)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지배적인 시니피에는 임의의 조각들로 잘라지고, 텍스트는 시니피에뿐 아니라 시니피앙까지 실어 나르는 무수한 조각들의 거대한 더미가 된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의미를 찾는 일에 다름 아니지만,  이름들은 다른 이름들 앞에서 이내 지워지고 잊혀진다. 이름들의 목록을 성급하게 닫음으로써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이런 읽기의 방식은 최종적 의미로서의 텍스트의 진실이 아니라 텍스트의 복수성을 확정한다. 이렇게 하여 권위적인 텍스트는 끊임없이 부서지고, 읽는 텍스트는 복수적인 텍스트(le texte pluriel) 다시 태어난다.

복수적인 텍스트란 쓰는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관념으로서의 추상적인 텍스트이며, 새로운 방식의 읽기를 통해 생산되는 동시대적인 문학 텍스트라   있다. 개별 텍스트마다 거기에 내재하는 복수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복수성이 압도적인 텍스트에는 상호 작용하는 많은 네트워크들이 있으며, 그것들 간에는 아무런 위계가 없다. 그것은 시니피에들의 구조가 아니라 시니피앙의 은하계이며, 의미의 체계들이 그것을 점유할 때에도 언어의 무한성에 토대를   체계들은 결코 숫자가 제한되지 않는다. 이보다는  복수적인, 또는 ‘불완전하게복수적인 텍스트들에서는 위의 특성들이 다소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바르트는 이처럼 개별 텍스트에서 복수성의 정도를 평가하는 작업을 해석이라고 부른다.

바르트에 의하면 다시 읽기는 텍스트를 조립하거나 구조화하기를 포기하고 텍스트의 평면을 언어의 다면체들로 장식하는 일이다. 그것은 코드들이 서로서로 횡단하는 텍스트의 입체적인 공간을 그려내는 일이기도 하다. 코드란  기원이 잊혀진, 읽는 텍스트 안의 이미 씌어진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 개별적인 코드들은 각기 사슬처럼 연결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이들이 서로 얽혀서 만들어진 네트워크가 텍스트를 이룬다. 코드들은  텍스트를 횡단하면서 텍스트를 이미 씌어진 거대한 책의 안내서로 만든다. 각각의 코드는 이미 씌어진 책을 참조하는 여러 관점들, 또는 텍스트를 짜는 여러 목소리들  하나이다. 다시 읽기는 여러 개의 코드들이 중첩된 지점들에서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울리도록 텍스트를 연주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읽기는 쓰기의 능동적인 보충물이 되고,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복수적인 텍스트를 얻기 위한 놀이가   있다.

이처럼 바르트의 서사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다섯 개의 코드들 각각이 아니라 그것들의 복합적인 짜임이다. 복수적인 텍스트에는 1차적이고 지배적인 목소리가 따로 없으며, 코드들은  언어에 대한 다른 언어의 지배력을 폐기하면서 끝없이 순환할 뿐이다. 바르트는 코드들의 이러한 네트워크를 땋아 늘인 머리, 또는 여러 가닥의 실로  레이스에 비유한다. 텍스트의 여러 목소리들을 의미의 통일체로 환원하는 단성적인 읽기는 텍스트의 짜임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바르트의 이러한 관점은 문학 수업을 통해 습득되고 우리에게 익숙해진 기존의 독서 방식이 텍스트의 복수성을 거세하고 문학 텍스트를 화석화하여 과거의 것으로 만드는 끔찍한 관습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는 또한 문학적 고전과 현재적인 텍스트, 읽는 텍스트와 쓰는 텍스트, 복수적 텍스트와 그렇지 않은 텍스트 등의 구분은 텍스트 내적인 특성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읽기의 방식과 태도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할  있음을 암시한다.“

 

텍스트의 즐거움.

그렇지만 가장 고전적인 이야기(졸라ㆍ발자크ㆍ디킨스ㆍ톨스토이의 소설) 할지라도 ... 우리는 모든 종류의 책을 똑같은 강도로는 읽지 않는다. 텍스트의 원상태(integrite) 별로 존중하지 않는 어떤 도발적인 리듬이 형성된다. 앎에 대한 우리의 탐욕은 일화의 가장 뜨거운 부분들(이것이 항상 일화의 분절들로서, 수수께끼 혹은 운명의 드러남을 진전시킨다)  빨리 도달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몇몇 구절(<지루하리라고> 예상되는) 스쳐가거나 건너뛰게 한다. 우리는 아무 탈없이(아무도 우리를 지켜보지 않는다) 묘사ㆍ설명ㆍ고찰ㆍ대화를 건너뛴다. 마치 무대에 올라가 무희의 옷을 급히, 그러나 일정한 순서에 따라의식의 에피소드를 존중하면서 서둘러 마치게 하는벗기게 하면서 스트립 쇼를 재촉하는 카바레의 관객과도 같이. 즐거움의 원천, 혹은 문체인 분어법은 여기서  개의 산문적인 가두리를 내세운다. 분어법은 비밀의 인지에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대립시킨다. 그것은 단순한 기능성의 원칙에 의해서 생겨난 틈새이다. 분어법은 언어의 구조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언어를 소비하는 순간에 산출되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예측할  없다. 사람들이 읽지 않을 것을 쓰는 것을 원할 수는 없기에. 그렇지만 읽혀지는 것과 읽혀지지 않는 것의 리듬이 바로 걸작의 즐거움을 만든다. 누가 프루스트를, 발자크를, 《전쟁과 평화      읽었단 말인가?

하나의 이야기에서 내가 음미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내용이나 구조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아름다운 겉봉투 위에 입힌 상처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건너뛰며 머리를 들었다 다시 몰입한다. ...

여기서 독서의  가지 체제가 나타난다. 첫번째는 일화의 분절로 곧장 , 텍스트 양을 고려하며 언어 유희를 무시하는 독서이다. 두번째는 아무것도 건너뛰지 않고 심사숙고하며, 텍스트에 달라붙어 열심히 열정적으로 읽어 나가며, 일화가 아닌 언어를 절단하는 연사 생략을 텍스트의 매지점에서 포착하는 독서이다. 이런 글읽기를 사로잡는 것은 확대(논리적인) 진리의 가려냄이 아닌, 시니피앙스를 여러 겹으로 쌓는 것이다. 마치 눈을 가리고 자신의 손을 만지는 사람을 알아맞히는 놀이에서처럼  흥분감은 점진적인 서두름이 아닌, 일종의 수직적인 난장판(언어와 언어 파괴의 수직성)에서 온다. 각각의 (다른) 다른 손을 덮치는(차례차례로 달려드는 것이 아닌) 바로  순간에 구멍이 생기며, 그리하여 놀이의 주체, 텍스트의 주체를 열광시킨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지루하지 않기 위해서는 빨리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일반 여론에 비해) 이두번째 달라붙는 독서는 현대적인 텍스트, 한계 텍스트에 적합하다. 졸라의 소설  권을 천천히 전부 읽는다면, 당신은  책을  손에서 놓게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인 텍스트를 빨리 단편적으로 읽는다면,  텍스트는 불투명한  당신의 즐거움으로부터 배제될 것이다. 당신은 뭔가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어에 일어나는 것은 담론에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  가두리의 틈새, 즐김의 간극은 일련의 언표들의 연속이 아닌 언술행위 속에서, 언어의 부피 속에서 산출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저자들을 읽기 위해서는 게걸스럽게 먹지도 삼키지도 말고, 이리저리 한가롭게 풀을 뜯거나 아주 가까이 섬세하게 털을 깎는  독서의 여유를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귀족적인 독자가 되어야 한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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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아카이빙 용도. 발췌와 사견이 뒤섞여 있음!!





 

텍스트의 즐거움」,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김희영 , 동문선

 

어떻게 타자에 의해 진술된 즐거움(꿈이나 파티 이야기의 지루함)에서 즐거움을 느낄  있단 말인가? 어떻게 비평을 읽을 것인가? 거기에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비평에서의 나는 2단계의 독자이므로 이런  위치를 이동시켜야 한다.  비평의 즐거움의 속내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는 대신이것은 즐거움을 놓치게  것이 확실하므로비평의 즐거움을 엿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은밀히 타자의 즐거움을 관찰하며, <변태/뒤집음>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 주해는  눈에 하나의 텍스트, 허구, 찢어진 봉투가 된다. 작가의 변태(그의 글쓰는 즐거움에는 어떤 직책도 없다), 그를 읽는 비평가의 변태는  배가 되고, 작가와 비평가를 읽는 독자의 변태는  배가 되어 끝이 없다. // 65p




 

조르주 풀레, “비평적 의식”, 조한경ㆍ이현진 , 지식을만드는지식, 395-429

 

책은 무기력한 물질로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책은 인간이 그것을 읽을  새로운 존재 형태를 부여받는다. 그때 책은  이상 사물이 아니다.

책과의 만남은 표면에서 그치지 않는다. 책을 읽을  독자와  사이에는 아무런 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는  안에, 책은 독자 안에 있다. 안팎이 사라진다.

기이한 상호교류 이어진다. 책을 펼치면 수많은 단어, 이미지, 개념이 솟아오른다. 그때 책은 사물이 아니라 그런 사유를 독자와 공유하는 무엇이다.  책은 사물이 아니라 사유가 되어 독자의 안으로 들어온다.  관계는 전적으로 독자의 의식에 달려 있다. 사물은 스스로 존재할  있지만 사유는 누군가가 사유함으로써 존재한다. 심적 대상으로서의 사유.

이때 심적 대상으로서의 사유 또한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 물질성(사물성) 포기한다. 종이가 아니라 언어, 허구가 된다. 그런데 이로 인해 독자도 객관적 현실 세계에서 벗어난다. 물렁물렁하고 신축적인 상상 세계. 주체와 대상의 대립, 일상적인 부조화가 완화된다. 이렇게 독서는 객관적 현실을 무화하여 독자와 ‘사유 내밀한 관계를 탄생시킨다.

 ‘내밀성 일으키는 현상. 독자는 타자(작가) 사유를 자기 사유인 것처럼 사유한다. 터무니없는 현상. 그것을 타자의 사유인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유한다. 그런데 타자의 사유가  사유가  수는 없으므로, 반대로 나는 타자가 된다. 다른 주체가 된다. ‘ 것이 아닌 다른 술어들의 주어 된다. (나는 나의 사유를 사유한다. 타자는 타자의 사유를 사유한다. 그런데 내가 타자의 사유를 사유하게 된다) 영역의 무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사유하는 ,   심적 세계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타자의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주체가 타자화하는 현상까지 포함한다. 이때 랭보의 “나는 타자다라는 발언이 성립한다. (풀레는 ‘낯선 주체가 설정된다 말하는데, 조금 변주하고 싶다 ; “정확히 말해서 독서란 단순히 일련의 낯선 단어들, 이미지들, 개념들에 자리를 내주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들을 발화하고 엄호하는 낯선 원칙에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다”)

(보론 ; 이런 상상이 가능한 이유는 독서 대상으로서의 사유,  독자가 사유하는 사유,  어떤 결과가 아니라 과정적인 , 실천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 ‘풀레의 사유의 결과 정적인 무엇으로 존재할  있다면, 나는 타자화(풀레화)하지 않고 그것을 사유할  있다. 그러나 풀레의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사유 과정을 사유한다는 것이다. 풀레의 사유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 사이에 약간의 간극이 있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풀레가 되어서 사유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 독서란  자신에 대한 나의 지속적인 지각 행위이기도 하다.” 독서를   나는 독서하고 있지 않은 ‘일상적인 상태의  사유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분열이 일어나는 셈인데, 새로이 탄생한  낯선 주체는 누구인가. ‘나를 대자로서 취급하는또다른 나는 누구인가. 전기적 비평의 맥락에서, 이는 작가일  있다. 그러나,

내가 보들레르나 라신에 대해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그들의 천재성에 아무리 가까워졌다고 해도, ... 그것들은 개별 작품을 생동케 하는 주어의 원리, 고유한 기조, 형태적 완벽성을 명료하게 밝혀 주기에는 부족하다. 그때 내게 중요한 것은 나와 책의, 오로지 책과 함께하는 동일한 관계를 재부에서 절감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작품 외부에는, 지금 작품이  안에서 누리는 특권을 받을 자격이 아무것도 없다. 작품은 나를 밖으로 몰아 작가에게 가게 하기는커녕 나를 온통 붙들어 작품 안에 끌어들일 태세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2 나는 바로 작품이다. 독서에서 작품은 생명을 얻는다.일단 어떤 문학작품이 독서를 통해 생명을 얻으면, 독자는 자기의 삶을 유보하는 대가로 대상에 대한 주체로서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할  있겠다.”






문강형준,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문학동네 16` 봄호 394-412p

 

비평이란 무엇인가? 한자어로 ‘비평이란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한다 뜻이다.

라는 글자는 ‘  ‘견줄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손으로 사물들을 서로 견주고 비교한다 의미를 가진다.

 결과를 왜곡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는 일이  ‘이다.

비평에서 ‘ 가치를 판단하고 비교하는  자체로, ‘해석이라   있고, ‘  해석을 통해 얻은 결과를 다른 힘에 흔들리지 않은 채로 정확하게 말하는 ,  ‘비판이라   있다.

다시, ‘ 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독해와 평가라면 ‘  평가의 힘을 믿으며 그것을 내세우는 일일 터이다.

(지적인 작업과 공적인 행위)

... 다시 말해 비평은,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텍스트를 성실하고 꼼꼼하게 읽는 데에서 그치는  아니며, 자신이 파악한 깨달음과 진리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행동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라   있다.

(고등정규교육과정에서 배우는 문학 수업은 , 까지인  아닐까)

 

지식은  안에 이미 세상의 옳고 그름을 바라보는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고, 정치는 지식을 통해 권력의 메커니즘을 배치한다.

 

판단과 평가는 텍스트 자체를 넘어서야만 한다.

 

(비평가들의 텍스트는 대개 예술 작품일진대) 예술은 반드시 다른 이들(대중) 의해 ‘수용되어야만 한다. ... 사회적 수용과정에서 생겨나는 예술은 궁극적으로 특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 개인의 경험이 사회의 다른 공동체의 경험과 교감하는 것이다. ... “예술은 ...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조직에 작용하고 이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은 어떤 “정신의 특별한 영역 작용하는 미적인 것에서 그치는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감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인 행위이다. ...

예술 하나의 ‘사회적 행위이자 삶의 능력이라고  , 비평의 대상은 ‘예술 자체 아니라 ‘ 자체 된다. 급진적으로 말한다면, 예술은  삶이다. ... 비평적 판단은 좁은 미학적 범주를 뛰어넘어 예술 작품과 우리의 삶이 공통으로 놓여 있는 특정한 , 특정한 시대에 대한 넓은 시야를 요청하는 일이다. 미학적 판단을 (포함하되, 이를) 넘어선 사회적 판단이야말로 우리 시대, 비평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핵심적 기능이다. 이제 비평가의 공부는 텍스트에서 사회로, 예술에서 삶으로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텍스트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하기 위해서 비평에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태도는 ‘비판적인(critical)’ 태도이다. ... (요약 ; ) 푸코에 따르면 ‘비판적인 태도 어떤 종류의 명령에 의해 항시적으로 지탱된다.  명령이란, 15-16세기 ‘통치 기술 확산하면서 “어떻게 통치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항하여 생겨난 저항의 질문이다. ‘통치 기술이란 “기독교에서 신도 개개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생애에 걸쳐 누군가와 총체적이고, 세세한 복종관계를 맺으며 통치되어야 한다는 관념이다.” 비판의 태도가 내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저런 원리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정신 규범으로, 그리고 저러한 절차에 의해서, 저런 식으로가 아닌, 저것을 위해서가 아닌, 저들에 의해서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어떻게 통치하는가라는 억압의 질문은 이렇게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라는 저항의 질문을 낳는다.

 

요컨대 비판적인 태도란 통치하려는 권력이 내세우는 진리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태도, 그럼으로써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 그것으로 통치에 저항하는 거점을 마련하는 태도이다.

 

비판이란 권력의 효과를 유발하는 진리와 진리의 담론을 말하는 권력에 질문을 던질 권리를 주체가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발생하는 움직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 그렇다면! 비판이란 자발적 불순종의 기술이자 성찰하는 고집스러움의 기술일 것이다. 비판은 우리가 한마디로 진리의 정치라고 부를  있는 것의 맥락 속에서, 주체가 불복종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보증하는 일일 것이다.”

 

비평은 이러한 비판의 태도를 가지고 텍스트를 판단하는 일이   비로소 ‘기예 넘어 “ 영역으로 진입한다. 비평에는 지식이 있고(진리인가 아닌가), 윤리가 있고(옳은가 옳지 않은가), 무엇보다 정치가 있다(어떻게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비평은 그래서 단순히 ‘텍스트 읽기’(지식) ‘정치 참여’(정치) 사이의 이항 대립이나 선택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코가 우리에게 말하는바, 비평은 “진리의 정치속에서만 가능하다. 진리와 정치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언제나 요청한다. 진리는 권력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정치는 진리(라고 믿길  있는 ) 정당성의 근거로 삼으려 한다. 비판적인 태도는  둘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권력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로 권력에 복종하지 않기 위해서 진리를 탐구한다.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글쓰기는 특권적인 행위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쓰기로 자기와 타자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글쓰기 특권적이면서 타자를 일방적으로 표상한다는 점에서 월권적 행위이기도 하다. 이때 침해받는 것은 일방적으로 타자로 표상되는 사람의 권리, 특히 /그녀들이 스스로를 표상하는 권리이다. 따라서 ’글쓰기라는 행위, ’글쓰기 타자를 표상하는 행위는 지배의  형태이다.” (55p) “위장된 보편성의 ’글쓰기 타자를 표상함으로써 이들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술렁거림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말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 알아듣는 귀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그렇다면 텍스트를 읽는 것은 권력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텍스트들의 인용으로 텍스트 하나가 탄생한다고 했을   텍스트가 “대상을 표상하는 방식 지금 사회가(텍스트가)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하는지를 드러낸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비판의 방식이 문제이다.”

 

과연 개개의 인간이 좋든 싫든 처해 있는  위치성별이나 민족, 계급 와는 전혀 무관하게 중립적으로 말할  있을까?”




Posted by 습작생
,

Martin Heidegger.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기상 . 서울:서광사. 1995. 인쇄도서.

 

기울임체는 사견. 인용은 < >. bold 밑줄 또한 발췌  임의로 편집.

 

역자 서문 ; <그는 단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분과도 아니요 임의적인 착상의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인간)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다. 그것은 (인간) 현존재 자체이다.”> 4p

<연도 순으로는 본문, “보탬말”, “머리말순이다.  책의 머리말은 하이데거 본인이 자기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와 사상적/역사적 배경에 해당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형이상학과 밀접하다. “새로운 형이상학의 이해 마련하기 위해 형이상학과 벌이는 싸움의 연속이다.”> (6p)

 

 

1. 본문

 

직접 형이상학 안으로 들어가 사유하기 위하여,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먼저 묻지 않고 ‘형이상학적 물음 먼저 분석할 것이다. ‘ 형이상학적 물음의 전개’, ‘ 물음의 정리 구성’, ‘ 물음에 대한 대답순으로  강의는 구성되어 있다.  이유는 텍스트를 읽다 보면 그려질 것이다.

 

 형이상학적 물음의 전개

형이상학적 물음은 이중적인 특성을 안고 있다. 첫째, <모든 형이상학적 물음은 언제나 형이상학의 문제를 전체  자신 안에 포괄하고 있다. 개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이  자체로서 나름대로 전체를 대변한다.  다음으로 개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은 모두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  물음 속에서 함께 물음이 되는 식으로만 물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물음은 전체로서 물어져야 하며 묻고 있는 현존재의 본질적 상황에서부터 물어져야 한다.> (59-61)

개별적인 형이상학적 물음도 항상 전체를 담지하게 된다. 그리고 개별적인 형이상학적 물음은 묻는  스스로를 문제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묻고 있는 현존재에서 시작해야 한다. (비약으로 보일  있지만…)

그러니까 지금 여기 있는 우리, 학문을 앞에  현존재로서의 우리에서 시작하자. 현존재는 학문 안에서 다른 존재자 관계 맺는다. 다른 말로, 학문은 존재자를 다룰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학문들에서 …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차원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수행하는 것이다.> (63) 학문적 현존재 특수한 지위를 갖는 것인지, 단순히  ‘강의공간 인간들이 “학문적 현존재여서택한 접근법인지는  모르겠다.

이는 존재자를 향하는 뛰어난 ‘세계 관련이다. 그리고 학문적 세계 관련은 특히 인간 실존에 의해자유로운 선택과 태도에 의해 견인된다. <학문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명확하게 그리고 오직 사실 자체에게만 시종 말할 권리를 주고 > 때문이다.  사실성에 의해 존재자는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낼  있게 된다. 학문의 이런 특수한 세계 관련 속에서 인간은 ‘존재자  하나로서 학문을 ‘해나간.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해나감속에 … 인간이라고 불리는  존재자가 존재자 전체에로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침입 안에서 그리고  침입을 통해서 존재자는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열어 보인다. 그리고  열어 제치는 침입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존재자를 이제 비로소  자체가 되도록 도와 준다.>

세계 관련’, ‘태도’, ‘침입 학문적 현존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키워드다.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학문적)세계 관련이 향하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태도를 이끌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침입에 있어 탐구의 논쟁이 다루고 있는 것은 존재자 자체이며, 그것을 넘어선 아무것도 아니다.> (65)

그런데  말들 자체에 주목하라. ‘존재자 자체라고 한정하는 순간 우리는 나머지 부분을 배제하게 된다. ‘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und sonst nichts)  ‘아무것도 아닌 ’,  ‘ 도대체 무엇인가. 존재자 자체를 향한다고 생각했던 학문적 현존재( 드러나는 현상)에서, ‘ 발생하는 것은 어떻게  일인가.

 

 물음의 정리 구성

물음의 정리 구성으로  물음의 대답 가능성을 드러내려 한다.

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우선, ‘ 존재자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건 모순이다. 대답 또한 ‘무란 이런 것이다같은 모습일텐데, 마찬가지로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도대체 무를 대상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의도가 좌절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에 우리는 무에 대한 우리의 물음 제기와 함께 이미 종착역에  있는 셈이다.>

대신 이는 논리학을 최고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무를 파악하고 드러내기 위한 수단은 지성, 방법은 사유라는 것이다. 무는 ‘부정이기 때문이다. <부정은 지배적이고 결코 침해할  없는 “논리학 가르침에 따르면 특수한 지성의 활동  하나이다.> (71)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 ‘부정이라는 상위의 규정 아래에서 정의될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무가 있기에 부정이 있다. 그렇다면 전도가 일어난다. 지성은 무에 예속되어 있다. 무에 대한 물음 제기는 ‘형식적으로는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무를 묻고 있다. <어떻게든지 무가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자체는우선 주어져 있어야 한다. 우리는 무를 만날  있어야 한다.> (73) 그런데 어떻게 만난 것인가? 또는 어떻게 만날  있을 것인가?

<무는 존재하는  일체의 완전한 부정이다. 무의 이와 같은 특성이 종국에는 우리가 무를 유일하게 거기에서 만날  있는 바로  방향을 손가락으로 지시하고 있는  아닐까? 존재하는  일체는  자체가 부정될  있기 위해서, 그리하여  부정 속에서 비로소  자체가 스스로를 알려   있기 위해서, 우선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한다.> (75)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어떻게 우리가유한한 본질 존재로서존재자 전체를  총체성에 있어  자체 그리고 우리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  있는가?> 아마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전체를, 기껏해야 관념적으로 상상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존재자 총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무를 얻을 수는 없다. 우리는 <무의 근본 경험> 통해서만 무를 만날  있다.

우리는 존재자 전체를 파악할  없지만,  전체의 한가운데에 존재자 하나로서 ‘처해 있다.’ 파악하는 것과 처해 있는 것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 생활은 언제나 존재자에 대해 … “전체를하나의 단일성 안에 견지하고 있다.> (77)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자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존재로서 존재자 전체와 만나고 있다. <우리의 현존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권태 있다. <깊은 권태는 현존재의 심연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안개처럼 이리저리 몰아치면서, 모든 사물들과 인간들을,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자신까지도 모두 기묘한 무관심 속으로 휘몰아 넣는다.  지리함이 존재자를  전체에 있어 드러내 보인다.>

존재자 전체를 드러내는 것은 그런 <기분 상태Gestimmtsein> . 이는 <우리를 … 존재자 전체의 한가운데에 처해 있게끔 한다. 기분의 이러한 처해 있음은 그때마다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자 전체를 드러낼  아니라, 이러한 드러냄은 동시에단순한 우연적인 발생과는 거리가 우리 -존재의 근본 사건이다.> (79)

그러나 무를 만나는 것은 아직은 다른 이야기다. 기분은 이따금 전체로서의 존재자 앞에 우리를 데려다주지만, 무는 보통 은폐되어 있다. 그런데  와중에 <인간의 현존재 안에 인간을  자체 앞으로 데려오는 그러한 기분 상태> 있긴 있다. 바로 <불안이라고 하는 근본 기분>이다.

불안은 공포와는 다르다. 공포는 특정 존재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불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불안은 언제나 ~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불안은 아니다. … 불안해하는 그것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결코 단지 규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규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81)

불안은 분명 대상이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규정할  없다. 그러니까, 특정한 존재자를 불안의 이유로서 귀속시킬  없다. 존재자 전체가 그렇게 불안 앞에서 미끄러진다.’ 그런 방식으로 불안은 무를 드러낸다.

<불안이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빠져 나가게 하기 때문에, 불안이 우리를 공중에  있게 한다. 바로 거기에 우리 자신도 존재하고 있는 인간도존재자의 한가운데에서 함께 우리의 손아귀를 미끄러져 빠져 나간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근본에 있어 ‘너에게또는 ‘나에게섬뜩한 것이 아니라 ‘ 누구에게그러한 것이다. 붙잡을 것이란 아무것도 있을  없는  둥실  있음이 모든 것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가운데 오직 순수한 -존재만이 아직 거기에 있을 뿐이다.> (83)

이제 우리는 <불안이라는 근본 기분과 더불어 우리는 현존재라는 사건에 도달하였다.  현존재 안에서 무는 드러날  있고 거기에서부터 무는 물어져야 한다. 무는 어떻게  일인가? (무는 도대체 어찌  셈인가?)> (85)

 

 물음에 대한 대답

현상학적 방법의 고수 : <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안이 일어나도록 하는 변화, 다시 말해 인간을 그의 -존재에로 바꾸는 그러한 변화를 뒤따라 수행함으로써  안에서 밝게 드러나는 무를 그것이 스스로를 알려 오는 그대로  붙잡아야 한다. 이로써 또한 동시에 무를 말하며 이야기하는 가운데에서 자라 나오지 않은 무에 대한 특징들은 단연코 멀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불안은 무를 ‘드러낸다.’ 이는 파악의 방식이 아니다. 존재자가 빠져나간 곳에, 그러니까 비켜난 존재자의 옆자리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존재자 전체와 함께 무를 대하게 된다고 해야 한다. 여기서 “~ 함께”(in eins mit) 중요해 보인다. 불안이 존재자를 없애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존재자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무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이 부정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무에 닿기엔 항상   늦는다. <무는  이전에 대면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미끄러져 빠져 나가는 존재자 전체와 함께 무를 대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87) 존재자와 무가 함께 드러난다.

지금이 가장 난해한 대목.

<불안에는 ~로부터 물러서 피한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  ~로부터 물러서 피함은 무에서부터 시작된다. 무는 어떤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거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쪽에서부터의 거부는  자체 가라앉아버리는 존재자 전체를 미끄러져 빠져 나가게 하면서 가리킨다. 미끄러져 빠져 나가는 존재자 전체를 이렇듯 전체적으로 거부하며 가리키는 무는 이러한 가리킴으로써 불안 속에서 현존재를 죄어 온다이것이  무의 본질  무화(die Nichtung)이다. 그것은 존재자를 없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부정에서 유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무화를 없앰이나 부정에 포함시켜 생각할  없다. 무는 스스로를 무화시킨다.>

그러니까, ‘무가 드러나는 방식으로부터 ‘무화라는 ‘무의 본질 끌어내는 과정. 챕터 전체는 ‘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여전히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무화 작용은 존재자 전체를, 새로운 형태/방식으로, 타자화한다(타자로 드러낸다).

방법낯설게 함으로써 드러내기. 이는 존재자를 ‘무가 아니라 존재자 열어젖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존재자의 <근원적인 열려 있음(Offenheit)> 생긴다. 무의 무화를 거치고서야 현존재는 존재자  자체를 대면한다. <오직 무가 근원적으로 드러날  있다는 근거 위에서만 인간의 현존재가 존재자에 접근할  있으며 존재자에 관여할  있다.> (89)

정리하자면, 무는 무화 작용을 통해 인간을 존재자  자체 앞으로 데려다 놓음으로써 ‘비로소현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현존재는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 존재자를 ‘낯설게만남으로써, 존재자를 넘어서게 된다. 이를 ‘초월Transzendenz’이라 하자.

<오직 무가 근원적으로 드러날  있다는 근거 위에서만 인간의 현존재가 존재자에 접근할  있으며 존재자에 관여할  있다. … -존재란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한다. 현존재는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으면서 각기 나름대로 이미 존재자 전체를 넘어서 있다. 이렇듯 존재자를 넘어서 있는 것을 우리는 초월이라고 부른다. 만일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의 근거상 초월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만일 현존재가 애초부터 앞서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지 않는다면, 현존재는 결코 존재자에 관계할  없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에도 관계할  없을 것이다.> (89)

지금까지의 흐름을 정리하자. 형이상학적 물음의  가지 특색에서 시작했다. <형이상학적 물음은 전체로서 물어져야 하며 묻고 있는 현존재의 본질적 상황에서부터 물어져야 한다.> (61) 라는 이유로, ‘지금 여기서 학문을 하고 있는 우리 현존재에서 사유를 시작했다. (현상학적 방법의 단면으로 보이는 경로설정)

 ‘학문적 현존재 ‘모든 존재자 실존적으로 추구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관련하고 있다.  와중 ‘오로지 존재자를 묻는다 지점에서  잉여분,  ‘ 관한 물음이 돋아난다. 이로써 ‘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했다. ( = ‘ 형이상학적 물음 전개)

다음은  물음의 ‘정리구성이다. 그러니까  물음 자체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대답 가능한 것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사유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논리학적 접근(무는 ‘무엇인가, 혹은 무는 X) 불가능하다고 보고 ‘무의 근본 경험 접근 경로로 설정했다. 그리고 ‘존재자가 모두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상태로서의 ‘근분 기분’,  ‘불안 가져왔다. 불안을 통해 현존재는 무를 ‘만난다.’ 이런 방법, 말하자면 현상학적 접근으로만 무를 물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남 천착한 것이 지금의 ‘ 물음에 대한 대답부분이 된다. 무는 무화 작용을 통해 현존재(현존재함, 현존재됨) 가능케 한다.

(이를 두고, ‘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무를 기능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라고 해도 될까. 곧바로  본질을 겨냥하는 방식이 아니라, 무가 존재자와 현존재 그리고 존재와 관련해 ‘어떻게 현상하는지 묻는 일로 보인다.)

<이로써 무에 대한 물음의 대답은 얻었다. 무는 대상도 아니고 존재자도 물론 아니다. 무는  자신을 위하여 발생하지도 않으며, 또한 존재자의 곁에 다시 말해 무가 흡사  존재자에 매달려 있는 듯한  존재자의 곁에 있는 것도 아니다. 무는 존재자가  자체 인간 현존재에게 드러날  있게끔 해준다. 무는 이제 비로소 존재자에 대한 대립 개념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근원적으로 존재자의 본질 자체에 속해 있다. 존재자의 존재에서 무의 무화 작용이 일어난다.> (91)

 

이렇게 답을 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남은 의문이 있다. <만일 현존재가 오직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으면서만 존재자에 관계할  있다면, … 그리고 무가 근원적으로 불안 속에서만 드러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실존할  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불안 속에서 둥둥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자신이 이미 그러한 근원적인 불안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든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안은 드물게 일어난다 사실에서 시작하자. 이는 무가 근원적으로 위장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는 자연스런 일이다. 무는 애초에 계속 무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무화 작용은 모든 존재자를 빠져나가게 하면서  존재자들을 ‘가리키고 있기때문이다. 우리가 무에서 돌아선다면 존재자에 몰두하게  것이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자들을 빠져나가지 않게 잡아두려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완전히 존재자에 잃어 버림>이다. (93)

 사이에는 무를 부정으로써 사유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주장을 반복.

그러니까 불안은 대개 억눌려 있다. 불안은 <자신을 소모하고 있는, 그렇게 해서 현존재의 궁극적인 위대함을 보존하려는> 사람(현존재)에게 보다 확실하게 나타난다. (97) <근원적인 불안은 현존재 안에서 어느 순간에라도 고개를 디밀  있다. 그러기 위하여 불안이 어떤 특별한 사건에 의하여 자극되어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동기가 이렇듯 대수롭지 않다는 사실은 불안의 지배(영향력) 그토록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은 언제나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있지만, 아주 드물게만 뛰어들어 우리를 동요 속으로 헤집어 놓는다.> (97) 완결성을 위해 주석을 달자면, 불안은 드물게 나타나지만 그것은  본질에 의한 것이며 ‘은폐되어 있지만 우리 곁에 상주하고 있다 식의 전개로 보인다. <감추어져 있는 불안 때문에( 불안에 근거해서) 현존재가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을 무의 자리지기(Platzhalter des Nichts) 만든다. … 감추어져 있는 불안에 근거해서 현존재가  속으로 들어서 머물러 있는 것은 존재자를  전체에 있어 넘어서는 것이다.  초월이다.> (99) 무를 만나는 일로서의 ‘초월 불안의 은폐적 본질에 관련하여 다시   있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적 인상을 해소하려는 의도일까 싶다.

 

여기서부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의 제목을 특히 유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이러한 <무에 대한 우리의 물음은 형이상학 자체를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어원적으로(어원적으로), 존재자 너머를 묻는  자체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이란, 존재자를  자체 그리고  전체에 있어 파악할  있게끔 다시 소급해 잡기 위해 존재자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껏 무에 관한 물음이 정확히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을 확인해온 셈이다. 처음에 지적했던 형이상학의  특징을 모두 충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에 대한 물음에서 존재자를  자체  전체에 있어 넘어서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로써  물음이 하나의 “형이상학적인물음임이 입증되었다. 그러한 종류의 물음에 대하여 우리는 앞에서 다음과 같은  가지의 특징을 부여하였다. 첫째, 모든 형이상학적 물음은 각기 나름대로 형이상학 전체를 포괄한다. 그리고 둘째, 모든 개개의 형이상학적 물음에서는 그때마다 묻고 있는 현존재가 물음 안으로 함께 끌려 들어오고 있다.>

무에 관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논의를 비판하는 대목이 이어진다. < 변변치 않은 역사적 회고는 무가 본래적인 존재자의 대립 개념이라는 것을, 다시 말해 그것의 부정이라는 것을 내보여 준다. 그러나 무가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 이러한 대립 관계는 좀더 뚜렷한 규정을 받게   아니라, 이제 비로소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본래적인 형이상학적 물음 제기가 깨어나게 된다. 무는 존재자에 대한 막연한 대립자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존재자의 존재에 속하여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103)

 스스로가 존재자의 존재에 속하여 있다는 . 그러므로 헤겔의 명제, ‘순수한 존재는 순수한 무와 동일한 것이다 옳다. 그러니까 <만일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 형이상학 전체를 포괄하는 물음이라면, 무에 대한 물음이 형이상학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종류의 물음이라는 것도 입증이 된다.> 또한 지금의 형이상학이 논리학에 지배되어 있다고 할때, 무에 대한 물음은 논리학의 기저인 ‘부정 근원에 대한 물음과 같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을 속속들이 장악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학문적 현존재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학문적 현존재는 존재자에 천착하는 방식의 실존(세계연관) 추구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학문적 현존재가 ‘무의 물음으로 끌려들어간다는 것은 일견 의문스러울  있다. (다소 의역)

그러나 도입부에서도 잠깐 엿보았듯이 <학문적 현존재는 애초부터  속에 들어서 머물러 있는 바로 그것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며 <학문적 현존재는 무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그가 무엇인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 무가 드러나고 있는 바로  이유 때문에, 학문은 존재자 자체를 탐구의 대상으로 만들  있는 것이다. 학문은 형이상학으로부터 실존하고 있을 때에만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를 언제나 새롭게 획득할  있다.  과제는 지식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에 관한 진리의 ()영역을 언제나 새롭게 열어 밝혀 보이는  있다.>

105~ ; <오로지 무가 현존재의 밑바탕에서 드러나고 있는 바로  까닭에, 존재자가 아주 낯설게 우리를 엄습해   있다. 오직 존재자의 낯설음이 우리를 압박해  때에만, 존재자는 경이를 불러일으키며  자신 경이의 대상이 된다. 오직 경이의다시 말해 무가 드러나는근거 위에서만 “라는 물음이 튀어 나온다. 오직 “ 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근거에 대하여 물을  있고 근거를 제시할  있다. 오직 우리가 물을  있고 근거를 제시할  있기 때문에, 탐구자의 운명이 우리 실존의 손에 주어진 것이다.

무에 대한 물음은 우리묻고 있는 존재자자신을 물음 속에 몰아 넣는다. 따라서  물음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물음이다.

인간 현존재는 그것이  속으로 들어서 머물고 있을 때에만 존재자와 관계할  있다. 존재자를 넘어서는 사건이 현존재의 본질 속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바로  넘어섬이 ( 넘어섬, 이야말로!) 형이상학 자체이다. 바로 여기에 형이상학이 “인간의 자연 본성 속한다는 사실이 작용한다. 형이상학은 강단 철학의  분과도 아니요 임의적인 착상의  영역도 아니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다. 그것은 현존재 자체이다. …

지금까지 풀어 헤쳐  무에 대한 물음이 실제로 우리 자신에 의해 함께 물어져 왔다면, 우리는 형이상학을 밖에서부터 우리 앞으로 갖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제 처음으로 형이상학 안으로 우리 자신을 “옮겨놓은 것도 아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형이상학 안으로 옮겨 놓을  없는데,  까닭은 우리가실존하고 있는 이미 항상  안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이 실존하고 있는 , 어떤 방식으로든지 철학함이라는 사건은 일어난다. 철학은우리가 그렇게 부르고 있는  그것은형이상학을 궤도에 올려 놓는 것으로서, 형이상학 안에서 철학은 자기 자신에 도달하며 자신의 명확한 과제에 도달한다. 철학은 고유의 실존이 전체로서의 현존재의 근본 가능성 안으로 독특하게 뛰어들 때에만 일어난다(궤도에 올려진다). …  자체가 강요하고 있는 형이상학의 근본 물음은 이것이다. “도대체  존재자가 있고 도리어 () 없는가?”>

2. 머리말 : 형이상학의 밑바탕으로 파헤쳐 내려가기

 

데카르트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이렇듯 철학 전체는 하나의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줄기는 자연학이요, 그리고  줄기로부터 뻗어 나온 가지들은 여타의 다른 학문들입니다.” 형이상학이 철학의 뿌리라면, 형이상학은 어느 땅에 내려진 뿌리인가? 하이데거의 작업은 형이상학이라는 뿌리가 의지하고 있는 토양을 묻는 일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다룬다. 그리고 <…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존재의 빛안에서 나타난다. 형이상학이 존재자를 표상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이미 존재가 빛을 밝히고 있다. 존재는 이미 일종의 비은폐성(Άλήθεια=감추어져 있지 않음, 드러나 있음, 진리) 도달해 있는 것이다. 존재가 과연 그러한 비은폐성을 수반하는지, 수반한다면 어떻게 수반하는지, 존재 자신이 형이상학 안에서 스스로를 (알려 오며)  비은폐성으로서 알려 오고 있는지, 어떻게 알려 오고 있는지 등은 어둠에 싸여 있다. 존재는 그것의 탈은폐적 본질에서, 다시 말해 그것의 진리에서 사유되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은 존재자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대답함에 있어 존재의 이러한 사유되지 않은 개방성(드러나 있음)에서부터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의 진리가 철학이라는 나무의 뿌리인 형이상학을 떠받치고 길러 주는 바로  밑바탕이라고   있다.> (15)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자에게 머물러 있게 되고 존재로서의 존재에로 향하지 않게 된다.> (15-17)

존재라는 ,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무엇으로서의 존재.  존재의 빛됨,  비은폐성을, 기존의 형이상학은 사유 없이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자를 가시화하는 빛으로서의 존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탈은폐적 본질’ = ‘존재의 진리 형이상학의 토양이다.

존재의 진리 형이상학의 ‘토양이라는 비유를 조금  확장해서,  물음이 정확히 어느 영역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 철학이라는 나무가 있고 형이상학이라는 뿌리가 있으며, 존재의 진리라는 토양이 있다. 뿌리는 토양에서 자라지만 토양이 ‘나무가 되도록완전히 흡수해버릴 수는 없다. 도리어 뿌리는 토양에 속한다.

이런 이야기다. <어떤 사유가 형이상학의 밑바탕을 경험하려고 시도하는 ,  사유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를 표상하는 대신에 존재의 진리 자체를 사유하려고 시도하는 ,  사유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형이상학을 떠난 것이다. … 그렇게 되면 형이상학의 본질 역시 형이상학이 아닌 어떤 다른 무엇일 것이다.> (17-19) 존재의 진리는 형이상학의 토양-밑바탕이다. 그러나 형이상학 밖에 놓인 물음일  있다. 철학이라는 나무에 속하지 않지만  밑바탕으로서 철학 전체를 가능하게 한다. 혹은 붙잡아 둔다. 다만 형이상학 밖의 사유라고 해서 형이상학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은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는  사유 안에서 극복된다.> (19) 형이상학을 없애는 극복이 아니라 변화시키는 극복이다. 여전히 형이상학은 철학의 뿌리다.

그러니까 철학을 송두리째 바꿔버리자는 말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 동물이라는 , 형이상학적 물음은 여기 ‘있는우리 인간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은 현존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진리에 관한 물음에는 <단순히 철학의 구성틀이 걸려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철학 자체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며, 존재자  자체를 표상하는 사유로서의 철학이 거기에서부터 자신의 본질과 필연성을 받고 있는 바로  존재로부터의 가깝고 멀고가 걸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될 것으로 걸려 있는 것은, 존재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진리에서부터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의 관련을 발생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형이상학이 자신의 밑바탕에 계속 등을 돌린 채로 남아 있어 인간에 대한 존재의 관련이  관련 자체의 본질에 의하여 밝혀지기를여기서의 밝혀짐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에 귀를 기울이게 해준다거부하는가 하는 것이다.> (21-23)

 

그렇다면  지금까지 형이상학의 ‘표상하는 사유  진리와 본질에 도달하지 못했는가? 그런 ‘인식의 진리또는 ‘명제의 진리  비은폐성을 본질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는가? < 까닭은 비은폐성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비은폐성 안에 본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것(das Wesende, 현성하는 )  은폐성이 말하자면 존재자로서 나타나고 있는 비은폐된 것을 위하여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숨어 있기 때문이다.> (25) 은폐되어 있는 비은폐성의 은폐성, 이라고 말해도 될까. 빛이 있어서 우리가 사물을  , 사물에만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빛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물을 밝히는 빛은 스스로를 밝히지 않는다.  비은폐성,  ‘드러냄’, ‘열어젖힘이라는 토대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비은폐성 자체의 본질에 의해 이중으로 은폐된다.

 

문제는  <인간 본질에 대한 존재의 원초적인 관련>(27) 잊어버린 것이 현대 세계를 규정해왔다는 것이다. <존재의 부재가 인간을 오로지 존재자에게만 떠맡기어, 인간이 그의(인간의) 본질에 대한 존재의 관련을 거의 떠나다시피 했고  동시에  떠나 있음이 가리어진 채로 남아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것인가? 상태가 실제로 그러하고 그것도 아주 오래 전부터 이미 그러했었다면 어떻게  것인가? 만일  망각이 앞으로도 더욱더 결정적으로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가려는 징조가 엿보인다면 어떻게  것인가?> 반복이지만, 그러므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지금 사유의 가장 필요한 역할이다.

 

존재와 시간 그런 길을 향해 있는 것이다. 사유에 빠져들다 보면 주어진 것을 사유하는  그치기 쉬워진다. 지금의 형이상학이 그런 꼴이다. 이미 사유된 (존재자)들을 반복해서 사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유로 하여금 존재의 진리가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갖는 관련에 이를  있는 길을 마련하고, 사유로 하여금 존재 자신을  진리에 있어서 알맞게 사유하도록 하나의 작은 길을 열어 주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도된 사유는 바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다.> (29-31)

다시말해 존재의 진리를 묻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인간의 본질을  주체성으로부터 묻지 않고,  기존의 방법을 답습하지 않고,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련하여 사유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현존재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 바로 이런 의도였다. <존재의 인간 본질과의 관련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의 존재자  자체의 개방성(“거기에”)과의 본질적 관계를  낱말로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 인간이 인간으로서  안에 들어서 있는 본질 영역을 지칭하기 위해 “현존재”(거기에 있음)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31)

권말의 이기상 논문 중에서 ; <인간 현존재란 “ 존재와 더불어 존재자에로의 침입이 일어나고 있는 거기에(현장)”이다.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들)  이름은 “이제 비로소 처음으로 존재의 진리의 자리로,  존재의 진리의 마을로 경험되고  그에 상응하게 사유되어야  그것을 지칭한다.”(본문33) “존재 진리의 자리”, “존재의 밝힘으로서의 현존재는 또한 항상 다른 존재자에게 개방되어 있는 존재자이며, 다른 존재자가 스스로를 알려 오고 파악되고 장악될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존재와 시간강독에서 유의해야   하나가 여기에 있다. 현존재라는 개념은 단지 인간을 다르게 이름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방법론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

또한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 이렇게 정의해뒀다. <현존재의 ‘본질 그의 실존에 놓여 있다.> (33) 실존은 존재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열려 있음에 대해 열린   있는 그러한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35)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를 묻는 존재자(그렇다면 현존재) 존재방식. 현존재는  ‘존재자에로의 침입 일어나는 공간, 혹은 ‘이며, 거기에  있는 존재자이기도 하다. 실존은  곳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는 자세나 방식이다. <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생각되어야  것은만일 존재의 진리를 향해  진리에서부터 사유하는 바로  사유의 영역 내에서 사용된다면―“들어서 있음”(Instandigket)이라는 낱말로 가장 멋있게 표현할  있을 것이다.> (35)

 모든 것이 결국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토대를 탐구하려는 작업을 “ ‘존재 시간으로 이름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은 <존재의 진리에 대한 앞선 이름으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존재의 진리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것(das Wesende des Seins)으로서 존재 자신>(39)이었다. 존재는 그렇다 치고,  하필 ‘시간인가?

(‘존재 관한 그리스 어원을 따지다가) < 현전에는 사유되지 않고 감추어진  현재와 지속이 작용하고 있으니,  시간이 현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는 시간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시간은 비은폐성을, 다시 말해 존재의 진리를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유되어야  시간은 존재자의 변화하는 흐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 시간은 분명 전혀 다른 본질을 가지며,  본질은 형이상학의 시간 개념을 통해서는 아직 사유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사유될 수도 없다. 이렇게 시간은 처음으로 경험되어야  존재의 진리를 지칭하기 위해 이제 비로소 숙고되어야  앞선 이름이 된다.> (41) 그러므로 <존재의 진리를 기획 투사하면서 열린  견지하고 있는 존재의 이해는 존재 이해의 가능한 지평으로서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된다.> (43)

 

그러므로 “존재와 시간 작업은, 혹은 존재-물음은, 이름 붙이자면 ‘기초 존재론 것이다. 존재론을 위한 기초를 찾는 , 형이상학의 근거의 근거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기초 존재론은 존재론이 아니다. 시작 부분의 나무-비유에서 ‘존재진리 묻는 일이 어느 영역에 있는지 확정했듯이, <형이상학의 근거에로 파헤쳐 내려가려고 존재의 진리를 사유하는  사유는 이미  걸음을 떼는 순간  모든 존재론의 영역을 떠난 셈이다.> (51)

 

그렇다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물음은 <표상하는 사유로부터 회상하는 사유에로 넘어가는 계기의 마련>이다. (51) 형이상학은 습관적으로 존재자 자체를 표상하게 됐으며 형이상학적 사유는  표상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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