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 마리, “기억·서사”, 김병구 역, 소명출판, 2004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지나서 작자가 그 ‘사건’을 팔레스타인 사람이든 그 이외 지역의 사람이든 ‘사건’의 외부에 있던 자들이 공유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아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했을 때, 그는 그 텍스트에 ‘사건’의 외부 사람은 내부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바꿔 말하자면 외부의 사람들이 재현ㆍ표상하는 ‘현실’은 ‘사건’의 ‘현실’로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기입한 것이었다. 작자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리얼하게 재현된 ‘현실’이 설령 리얼하게 보이고 아무리 체험자 자신의 증언에 기초하여 쓰여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사건’ 자체로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명령을 작자 자신이 직접 텍스트에 써 넣은 것이다. 텍스트는 이 같은 균열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하기 위해 이야기된 그 서사가 독자에게 ‘사건’의 기억으로 읽히는 것에 저항하는 듯한, 텍스트의 그 몸짓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 것인가. (38p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것인가.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해서 ‘사건’은 우선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전달되어야만 한다.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진정으로 나누어 갖는 형태로 ‘사건’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와 같은 서사는 과연 가능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리얼리즘이 보여주는 정교함의 문제인 것일까. 그렇지만 리얼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수많은 물음이 생겨난다.

다양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의 항쟁 그 한복판에 우리가 서 있는 현재, ‘사건’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는 비평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39p

 

그것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48p

 

기억은─또는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은─‘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에게 찾아온다. 여기에서 주체는 바로 ‘기억’이다. 그리고 ‘기억’이 이와 같이 갑자기 도래하는 것에 대해 ‘나’는 철저하게 무력하며 수동적이게 된다. 바꿔 말하면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 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게 된다. (49p

 

그러나 명시적인 말로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만 사건의 의미가 확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말로만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말하여지지 않은 것─말할 수 없는 것─은 사건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렇게 만능인 것일까. 무슨 일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그리고 그것이 무언가 근원적인 체험일수록─우리가 우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 언어라는 것이 철저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건인지 자기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체험을 기성의 언어, 기성의 말로 잘라 낼 때, 우리는 과연 무언가 어색한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가. 사건이 우리가 가진 말의 윤곽에 뀌맞춰져 잘려나갈 때, 우리는 말로 이야기된 사건이 사건 자체보다도 어딘가 왜소화되어버린 듯하고 어딘가 어긋나고 있는 듯한, 바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을까. 우리가 가진 말의 윤곽 속에 완전히 담기지 않은 채 넘쳐흐르는 사건의 조각─말하여지지 않은 사건의 잉여 부분─이 거기에 많이 있는 것은 아닐까.

틀림없이 대부분의 사건들에는 거기에서 말할 수 없었고 또한 말로는 절취할 수 없었던 잉여 부분이─사건의 조각이─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 사건을 체험한 당사자조차도 잊어버려서 마치 말로 이야기된 것이 사건의 전부인 양 생각되는 경우가 많다. 사건을 언어화하는 일─그때 사건은 항상 과거형으로 표현된다─그것은 사람이 사건을 ‘과거’로 순치하는─길들이는─것은 아닐까. ‘과거’의 것으로서 길들여진 사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안정된 은거지(隱居地)를 발견할 것이다. 과거형으로 언어화된 사건이야말로 일반적으로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참조하는 기억이란 틀림없이 그와 같은 것이다. (53-54p

 

또한 근대는 단지 소설이란 문학 형식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 자체가 소설적인 이야기를 요청한 게 아닐까. 근대에 들어서 사회가 체험한, 격렬한(drastic) 변용. 국민국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는 국민 전체가 어찌할 도리 없이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식민지주의의 침략에 의해서, 조국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귀속되어 있으며 자신들에게 마땅히 귀속되어야 할 대지(大地)로부터 소외되어 간다는 부조리. 근대라는 시대가 거기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져다 준 심적 외상─그 부조리함 때문에 언어로 명명되고 ‘경험’으로 길들여져 과거로 내던질 수밖에 없는 ‘사건’의 폭력. 그처럼 말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체험, ‘사건’을 서사로서 말하라는 시대의 요청을 소설은 자신의 몸체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꿔 말하면, 소설의 말하기는 그러한 사건의 불가능한 나누어 갖기[分有]의 가능성을 내걸고 있는 게 아닐까. (63p

 

그러나 그것은 언어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을 소설이라면 갑자기 언어로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내가 시사하고 싶은 점은 그것과는 반대의 것이다. ‘사건’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성격, 즉 재현되는 것의 불가능성 바로 그것을 어떻게든 이야기함으로써, 소설은 거기에서 언어로는 재현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사건’ 그 자체의 소재를 지시하는 게 아닐까. 만일 모든 사태가 언어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면,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이 쓰여지지 않으면 안 될 치명적인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63-64p

 

‘리얼하다’라든지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 또는 ‘리얼리티가 있다’라든지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실물과 재현된 것 혹은 현실과 표상된 것 사이에 놓인 거리를 측량하는 것, 말하자면 표상이 실물의 모습을 얼마나 충실하고도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측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참조해야 할 본래의 모습이나 현실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표상을 ‘리얼한’ 재현이라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생대의 공룡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현대의 전쟁터를 스필버그 자신은 아마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필버그가 공룡이든 전쟁터이든 간에 그것들을 자신의 사건으로서 체험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그것을 과연 그와 같은 형태로─즉 리얼함이라는 것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지고서─재현·표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77-78p

 

리얼리즘의 욕망이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그 때문에 재현 불가능한 ‘현실’이나 ‘사건’의 잉여 그리고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다. (81p

 

내가 여기에서 떠올린 것은 나치의 절멸수용소에서 있었던 동성애자의 ‘사랑’을 그린 마틴 샤면(Martin Sherman)의 희곡을 영화한 씬 마사이어스(Sean Mathias) 감독 작품 <벤트(Bent)>(1997)이다.

...

그러면 살아남는다는 게 폭력일 수밖에 없다는 자체가 폭력적인 그 ‘사건’의 기억을 우리는 어떻게 공유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이 살아남는다는 것에 내재하는 폭력성이라는 문제를 접하면서 작품은 결국 막스와 호르스트라는 두 피수용자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로 손쉽게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절멸수용소라는 극한 상황에서조차 인간은 그만큼 숭고할 수 있었고, 어떠한 폭악함도 인간의 정신적 존엄까지 빼앗지 못한다는 서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절멸수용소라는 것을 직접 체험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 ‘사건’의 외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바로 우리가 이 세계의 일상을 안심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로 하고 있는 서사가 아니었을까. ‘사건’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폭력이 ‘사건’의 외부, 즉 우리 세계에 침입해 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서사와 우리의 판타지를 그것에 투영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기 위해 이야기되는 서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 ‘사건’을 철조망 속의 사건으로서 그 주의를 둘러싸고,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건이라 하며 안심하기 위해 만든 서사는 아닐까. (95-96p

 

그러나 길모퉁이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상이병의 전쟁 기억은 결코 그 분들의 그것과는 동일한 게 아닐 것이다. 일본 사회가 기적과도 같은 부흥을 달성해 고도의 경제 성장에 엄청난 기세로 매진해나가고 있다는 서사 속에서 상이병은 그와 같은 서사에서 누락되어 있는 사건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쟁이란 사건이 결코 종료된 것이 아님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실은 허위의 서사라는 것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 상이병은 이미 다른 서사를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 틀림없이 완결되었을 서사가 사실은 전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즉 사건이 다시 현재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상이병에 대해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었던 어머니께서 부인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125-6p

 

타자에 의한 ‘사건’의 공유를 미칠 듯이 바라는 자들, ‘사건’의 내부에서 살아가는 자들─‘시건’의 폭력을 현재형으로 다시 살아가는 자들의 일이며, 또한 사자들의 일이기도 하다─바로 그들이 ‘사건’을 영유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사건’이 그들을 영유하고 있다. 그리고 말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사건’이란 무릇 그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영유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건’을 표상하는 서사란, 사람이 ‘사건’을 영유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영유한다는 바로 그 사실을 타자와 나누어 가지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0p

 

물량면에서 위력을 발휘한 미군에 대해 탄약마저 바닥이 난 일본 병사들은 적군을 놀라게 하려고 영어를 부르짖으면서 돌격했다. 당시 그 미국인 대위는 말하기를, 돌격해 오는 일본 병사들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Hell with Babe Ruth : 베이브 루스와 함께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베이브 루스란 물론 과거에 유명했던 미국 야구 선수의 이름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베이브 루스인가”라고 하면서 그 노년의 대위는 의아해 했다. “‘헬 위드 루즈벨트’라면 이해가 가지만”이라고 그는 말했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 ……. 사건의 의미를 생각하려고 할 때, 그 말이, 말이라는 것의 물질성, 그것의 불투명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서 생각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그 사건을 완결된 서사로서 그가 영유하는 것을 그 말은 거부한다.

“헬 위드 베이브 루스” ……. 죽음을 향하여 돌격하는 그 순간 왜 그러한 말이 입에서 발설되었는지, 당시 일본 병사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왜 베이브 루스인가. 그러나 베이브 루스라는 이름과 함께 그 고개에서 그 당시 한 일본 병사가 부조리하게 죽어간 바로 그 ‘사건’의 기억이─그때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어둠 속에 비밀로 남겨진 채─우리에게 회귀한다. ‘사건’이라는 것의 바로 그 잉여부분, ‘서사’에 떡 벌어진 아주 컴컴한, 바닥을 알 수 없는 개구부가 있는 곳을 지시하고 있는 듯이.

“헬 위드 베이브 루스” …….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목소리인가. “헬 위드 베이브 루스”라고 귀신들린 듯이 지금 내가 되풀이해서 쓸 때, 그것을 말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기억 속에 있는 그 대위가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일본 병사란 말인가. 아니면 그 일본 병사 속의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말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건’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헬 위드 베이브 루스”라는 그 말은 ‘사건’의 잉여인 표상 불가능한 ‘사건’의 존재를 지시하면서 ‘사건’의 기억을 타자에게로 전이시켜 간다. (152-157p

 

‘사건’에 위장의 플롯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 ‘사건’을 서사로서 완결시켜서 다른 서사를 살아가기 위해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사건’의 폭력을 망각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169p)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한다는 것. 그러한 한에 있어서 ‘사건’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 즉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는 활동 자체가 단 한 차례의 유일무이한 행위인 것은 아닐까. ‘사건’의 기억으로서의 증언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이와 같은 시간적·공간적인 단독성, 그리고 ‘나’라는 인간의 단독성으로 어디까지나 일관되어 있다. ‘사건’의 기억/증언은 말의 이러저러한 물질성 및 대화자의 존재의 불투명성에 의해서 방향성을 상실하고 굴절되고 변형되어 손상당한다. 이리하여 대화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사건’의 흔적뿐이다. 단독적인 존재로서 대화자가 받아들인 그 증언에는 대화자 자신의 서명이 기입되어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증언을 보편적인 이야기로서 말한다거나 타자가 소유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대화자 자신이 체험한 유일무비(唯一無比)의 단독적인 ‘사건’으로서 그 또는 그녀 자신의 말로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72p)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 사실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될 때, 역사(histoire)라는 것이 그 학생에게 갑자기 불투명한 것이 되는 것처럼, 나 자신이 하르둔/듀브와 대치하는 자가 되었을 때―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내가 그 팔레스타인 부부의 입장, 즉 난민이라는 포지션(position)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서사(histoire)는 나에게 부투명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 서사를 이해한다는 것―그것은 ‘사건’이 누구에게 귀속하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그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는 자,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자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 즉 난민의 위치에 놓이지 않은 자들의 특권이라는 점이다. [...] ‘사건’이 인간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사건’에 귀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난민’이라 불리는 자들은 아닐까. 하르둔/듀브인 그의 말과 만나는 것, 그것에 의해서 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자명한 것으로 향유하고 있었던 저 위치에서 내팽개쳐진다. 난민처럼. 그때 서사는 나에게 의미가 흐려져서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고 서사는 ‘사건’이 된다. (181-182)

 

말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 그 불투명함을 상기하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닐까. 투명하게 되어 의미를 확정하고 있다고 생각된 그 말들에 불투명성을 되찾아 주는 것이, 투명한 말이 실은 우리가 ‘사건’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을 겹겹이 방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188

 

‘난민’―‘사건’을 내셔널한 역사/서사로서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자들. 인간이 ‘사건’을 영유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인간을 영유하는 그와 같은 ‘사건’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건’의 기억을 ‘서사’로서 영유하는 게 아니라 ‘사건’으로서 영유하는 것은 바로 이 난민적 삶을 사는 자들뿐이다. ‘사건’의 기억에 대한 나누어 갖기의 가능성은 우리가 ‘난민’에게 생성하는 것, 즉 난민적 삶을 살아가는 것 속에 있다.

무엇보다 ‘난민’으로 되는 것―이와 같은 모든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장소로서의 조국,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조국을 향하여 그곳으로의 귀환을 타자와 함께 꿈꾸는 난민이 되는 것이다. (194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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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

2019. 2. 2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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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마나한 이야기

2018. 12. 3. 20:05

 

 

1.

   나는 지난 글 '함정인 것 같긴 하지만'에서 이렇게 글을 열었다.

   비평의 문제들 ─ “문학비평을 왜 하는가?” 혹은 “문학비평의 책무/목적은 (있다면) 무엇인가?” “문학비평에 ‘좋음’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 글을 닫았다.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답변은 비평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확정적인 답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질문을 확정할 수 있다. 생각건대 다음 물음, 더 본질적인 물음은 문학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좋은 문학비평은 무엇인가'를 제대로 묻기 위하여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음 질문으로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글 '참 어려운 일입니다'에서 랑시에르를 빌려왔다.

   그러므로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사람들의 감각적 일치와 불일치의 구획이 문학에서 드러남을, 그리고 문학이 그 구획과 관계들 속에 정치적으로 개입함을 의미한다. 미학적 실천은 항상 질문하며,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의 관계에 뛰어드는 ‘행동 방식들manieres de faire’이다. 미학(문학)은 그래서 정치다.

   그러면 이제 '좋은 문학비평은 무엇인가'를 다시 물을 차례다. 랑시에르를 따른다면, 좋은 문학비평이란 문학에서 드러나고 있는 감각적 일치consensus의 구획을 더 선연하게 조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박민정의 '세실, 주희'를 그런 식으로 비평해본 것이다.

2.

   그러나 사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 가지로 나누어야 했다. 첫째, '문학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 둘째, '가능하다면 어떻게 정의되는가.' 전자를 빠트렸기 때문에 내내 찝찝했던 것이다.

   나는 '비평 함수'같은 것에 매료된 셈이다. 텍스트가 아무리 특수해도 함수에다 집어넣으면 비평이 되어 나오는, 뭐 그런. 이를테면 텍스트를 읽는 보편적 방법과 관점이 있어서 대상 범주의 자의성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아야 했다. 랑시에르가 재밌어보였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문학은 내재적으로 정치다. 그러면 문학 비평은 정치적인 담론을 '항상' '직접' 겨냥할 수 있다는 얘기잖아. '와 멋있다!'

   아니, 그런 마스터 키는 없다. 비평은 함수같은 게 아니다. 랑시에르의 예에서처럼 함수는 항상 정의역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앞서서 해결되어야 할 문학 개념의 정의가능성을 건너뛰는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질문들을 혼동하거나 생략하고 있었다.

   생각건대 문학이라는 개념은 정의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있다. 확정된 경계는 아니지만, 어떤 범주를 분명히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문학의 필요조건―혹은 본질―같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A, B, C, ... 등등의 유한한 원소로 이루어진 성질 집합이 필요조건으로서 문학을 정의한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중 하나가 빠진 것이 문학이라고 불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문학은 X다! 라는 선언은 항상 반박 불가능한 반례를 만난다.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이런 문제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이론'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문학 가족'이 있다 하자. 이 가족의 사람들은 물론 서로 닮았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유한한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주먹코와 반달눈, 두가지 요소를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똑같이 공유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들을 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이 정도가 최선이다. 문학에는 공통 본질이 없다. 단지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건 나름대로의 문학 범주를 형성해서, 문학에 관한 담론이 가능할 최소한의 여지를 만든다. 더 풍부한 논의를 위해서는 테리 이글턴이 그의 글('문학 이벤트'. 김성균 역. 우물이 있는 집)에서 취하는 방식처럼, 문학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간의 주장들에 하나하나 반례를 붙이면 된다.

   언뜻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해법같지만, 나는 이런 정의불가능성이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로 빠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가(비트겐슈타인이) 『철학탐구들』에서 질문하듯이, 희미한 인물사진은 인물사진이 전혀 아닐까? 우리가 태양과 우리의 간격을 밀리미터 단위로까지 측정할 필요가 있을까? '대략 그곳 어디쯤에 서있어라'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까? 정확한 경계선이 표시되지 않은 농지는 농지가 전혀 아닐까? 그러니까 개념의 모호함이 때때로 정확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이글턴, 61)

3.

   생각건대 아무리 문학을 정의할 수 없다고 해도 문학이라는 개념이 '무한퇴행'해서 결국 실재하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신성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공통점은 있다 ; 문학은 어떻게든 존재자(존재하는 것들)와 그들의 연관을 드러낸다. 이건 정말이지 하나마나한 이야기다. 그래서 문학의 '본질' 혹은 정의소素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럴듯한 영점을 확보해 준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언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유니콘이나 리바이어던같은 비현실적 존재자들도 어쨌든 인간의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굉장히 넓고 무책임한 생각이지만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의 최대치는 존재하는 것들 뿐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들을 떠올려낸다고 한들 그것은 이미 존재자가 된 후에나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허구의 문제는 '존재론적'으로는 중요할 수 있으나 문학의 권리문제de juris, 그리고 문학이 생산하는 담론들/문학비평의 권리문제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 허구는 언제나,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관념이다)

   그 존재자들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연관한다. 나는 다른 어떤 것과도 연관하지 않는 하나의 주체가 혼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 그런 존재방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하더라도 언술불가능할 것이다(혹은 이야기로서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에 현실적/실체적인 주체가 오직 하나만 있더라도, 하다못해 그것은 관념들과 연관한다. 아무리 추상적 해체적 경향의 시 작품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는 관념, 개념, 혹은 이름, 무엇이든, 복수의 것들이 상호연관하고 있다.

   물론 이건 문학만의 특질이 아니다. 여타 인간의 사유와 행동 일체, 혹은 심지어 세계 전체가 가지는 특질이다. 세계는 실체로든 관념으로든 존재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며(아직 존재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기존의 존재자들을 연관시켜 언제든지 존재하게끔 할 수 있는, 혹은 그런 의미에서 이미 존재자-가능태인 것들―상상력과 허구, 그 세계의 개연성은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오롯이 혼자서 그 근거와 내용과 형식을 완결하는 존재는 없다. (여담 : 그런 '축'이 없더라도 사유는 가능하다―수학의 dynamic modeling에서 자주 등장하는 변수 정의의 recursive form과 관련하여 언젠가 다루고 싶은 주제기도 하다)

   문학과 세계 간의 관계같은 건 없다. 둘은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다. 문학이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학은 이미 세계의 존재방식, 혹은 세계가 주체에게 드러나는 방식 중 하나다. 세계는 언술하거나 인식하는 순간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애초에 세계를 전체로서 '한꺼번에 그대로' 만날 수 없다. 언제나 선택과 초점화가 따라온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대하는 주체는 항상 편집자다. 작가 또한,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혹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자들을―개념과 그들의 연관들을―절취하고 재조립하는 편집자다.

   그래서 이는 문학을 한정짓지 않으면서도 약한 방식으로나마 문학을 설명한다. 문학은 X다, 라는 정의는 불가능하지만 문학은 이러저러하다, 라는 기술은 가능하다. 물론 다른 범주들과 '문학'을 구분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마나한 작업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비평의 가능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

4.

   애초의 목표는 '좋은 문학비평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 '문학은 무엇인가'를 물었으나, 문학을 정의할 수 없다는 답을 얻었다. 그러나 비평을 묻는 일은 아직 가능하다. 대신 '문학비평'이라는 말을 다시 물어야 한다. '문학비평'이라는 확정적인 실체는 없다. '문학'이 확정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특히 다루는 비평의 한 불확정적인 범주가 있을 뿐이다. '문학'비평이라는 말에는 아쉽게도 관습/제도적인 의미 이상은 없다.

   다만 문학에는 언제나, 세계 자체와 마찬가지로, 존재자들이 있고 그들이 연관한다. 그리고 거기서 개념이나 의미가 발생한다. 비평은 '문학'이라는 불확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든 거기서 발생하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비평을 묻기 위해 대상의 본질이나 범주를 확정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학은 그 개념이 불확정적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 자체와 다름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문학비평은 문학이라는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실 세계를 직격하는 일이다.

   요약건대 문학 혹은 이야기의 내용은 결국 세계의 내용이다. 비평은 대상 자체의 개념이 아니라 내용―물론 이 내용 또한 존재자들과 그 연관에서 발생하는 개념들일테지만―을 대상으로 하며, 그래서 대상 자체의 개념/범주가 불확정적이라 할지라도 비평의 가능성은 확보된다.

   물론 그것이 '좋은 비평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바로 내놓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물음을 일단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비평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앞선 단락들에서 이미 확보했으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비평의 기본적인 책무 같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 ; 비평은 우선 대상 텍스트(문학이든 뭐든)에서 드러나는 존재자들과 그들의 연관 방식을,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개념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잘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텍스트는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세계와 모든 면에서 일대일 대응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그 텍스트에서 초점화하는 세계의 부분을 읽어내되 텍스트가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을 억지로 대상삼아서는 안된다.

   그 다음은 그것들을 판단하는 일이다. 거기서 발생하는 개념들―혹은 그것의 자기강화나 충돌―이 '정당한가'를 묻는다. 이때 비평가는 대상텍스트를 넘어선다. 그는 비록 텍스트의 내용에서 출발했으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과 연관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를 수단으로 삼아 자기 할 말을 하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텍스트는 세계와 독립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개념'이란 참 사소한 말이 된다. 애초에 인간이 개념이 아닌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 개인적인 감각이나 언술할 수 없는 순수한 경험들은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있을지언정 어떻게든 개념이 되어 주체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비평의 대상이 '개념'이라는 말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다. 너무 당연해서 중요하지만 그 이상의 진전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수학적 trivial에 해당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비평이 '개념과 그들의 연관'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아니다. 비평의 '좋음'이 있다면 비평의 주체가 범람하는 대상들(텍스트들) 사이에서 굳이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와 연관한다. 왜 하필 이 이야기를 비평하는가. 왜 하필 세계의 그것을 문제삼는가. 비평의 대상 자체보다는 '왜 하필 그것을 문제삼았는지'가 비평의 요체를 이룬다. 이때 비평은 세계에 대한 능동적인 반항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텍스트라는 우회로를 거쳤더라도 비평은 그 텍스트의 선택을 통해 세계를 직격한다. 텍스트라는 우회로가 비평의 유일한 선택지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말로는 세계 자체가 거대한 텍스트이며 그것을 언술/편집한 개별 텍스트들을 다루는 일은 세계 전체를 다루는 일과 애초에 같은 걸지도 모른다.

5.

   비평의 의의는 이런 것 같다. 비평의 대상은(문학은, 혹은 텍스트는) 세계의 반영이 아니라 세계의 파편들이다. 이는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비평은 그 파편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제 발로 오르는 일이며 그래서 세계 쪽으로 나아가 대면하는 일이다. 세계 전체의 거대함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으며, 파편들에 굳게 발을 디디면서도 파편이 아니라 세계를 치열하게 겨냥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비평의 좋음이라는 단어는 별 의미가 없다. 물론 대상에서 실제로 드러나고 있는 것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비평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덜 좋은 비평이 아니라 틀린 비평이다. 비평의 좋음은 기껏해야 그 다음 과정에 기준이 걸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벌써 세계가 있다. '어떤 비평이 좋은 비평이냐'라는 물음은 차라리, '지금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6.

   결론은 사실 이런 거다―"복잡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열심히 읽고 써라!" 정말이지 하나마나 한 이야기다. 그러나 하나마나 한 이야기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때 고민은 산으로 간다. 그간 내게는 한꺼번에, 그리고 한달음에 전체를 직격하려는 못된 버릇이 있었다. 정말이지 좋은 비평의 자세가 아니었지 싶다.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우직하게 비평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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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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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지진계 2018. 11. 29. 10:22

리베카 솔닛. 김현우 역.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철학자 찰스 그리스월드는 자신의 책 『용서』에서 말했다. "후회는 이야기를 하려는 열망이다."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오래된 상처를 어떻게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지 나는 잘 안다. 이야기를 하는 이는 물 긷는 장치에 묵인 낙타처럼 계속 원을 그리고 돌면서 부지런하게 비극을 길어 올리고, 매번 다시 이야기할 때마다 그때의 감정도 되살아난다. 서사가 없었더라면 희미해졌을 감정이 생생하게 유지되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거의 관련이 없고 지금과는 더욱더 관련이 없는 감정이 서사 때문에 만들어지기도 한다.

39-40


이야기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허구란, 시작이 있고 끝도 있지만, 바다에서 퍼 올렸다가 다시 부어 넣을 수 있는 물 한 잔처럼 덩어리가 있지는 않다.

48


장소는 우리에게 우리가 되돌아갈 어딘가, 즉 연속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우리 삶의 일부분을 서로 연결하고 일관성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친숙함을 준다. 장소가 제공하는 커다란 눈금 안에서 우리의 문제는 어떤 맥락을 얻고, 광활한 세상은 상실이나 문제 혹은 추함을 해결하고 치유해 준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장소들은 그곳에 우리 자신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곳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또는 다른 자아를 상상하게 해 준다는 이유로, 혹은 그곳에서는 술을 잔뜩 마시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안식처가 되어 준다.

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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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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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려운 일입니다

2018. 10. 14. 03:48





 


이 글은 연구공동체 겸 온라인 지면 "지평L`horizon"의 10-12월 기획에 해당합니다.


"지평" 링크 ; https://lhorizon.blog/


앞선 두 글

단현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 ; https://wp.me/p9M4yf-7I

여정 "크레도: 신학함을 위한 나의 신조들" ; https://wp.me/p9M4yf-7Q






   사실 중요한 것은 부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 이야기를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참 어렵지 않냐는 이야기도 같이 하게 됐다. 제대로 부수는 일부터가 어렵고 뭘 만들어내는 일은 더 어렵다. 멀기만 하다.


*


   비판은 어떤 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비판이 그 대상으로 삼는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 비판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탈피하는 것 ─ 그것을 그대로 둔 채 피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소용 없도록, 작동하지 않도록, 기호로서 중요하지/의미있지significant 않게끔 하여 우리가 더는 그것에 제약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 이 아니겠는가.

단현, "우리 자신에 대한 비판적 존재론, 파레시아, 불온-되기" 中


*


   내 필명 파상破像은 벤야민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에세이 '파괴적 성격Destruktiver Charakter'에서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를 이야기한다. 이 '파괴자'는 기존의 인식을 지배하던 이미지(상像)들─환상과 우상과 이데올로기들, 또 그들의 연결(관계) 방식을 파괴(破)하고 파편과 폐허를 만들어낸다.

   다만 그는 파괴에서 멈추지 않는다. 해체는 구성을 위해야 한다. 와장창! 부수고, 다시 짓기. 파상이란(파상력力이란) 그러므로 기존의 성좌Konstellation를 부순 파편들로 새로운 성좌를 그리는, (재)배치Konfiguration 작업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별자리는 절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 폐허가 오고 다음 별자리가 이어질 것이다. 끝은 오지 않지만, 가능성 역시 지속한다.

   덕분에 나는 현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불가능성이 아니라 계속 다음을 꾸릴 수 있는 태도 혹은 삶의 양식이라고 믿게 됐다. 이를테면 '빠져 나오는' 일을 위하여 다음 디딜 땅을 항상 그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으로 빠져버릴 테니까.

   그러나 그런 포즈를 취하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


   요 몇 달, 문학의 정치성은 내 주요 관심사였다. 도대체 시와 소설을 쓰는 일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뭘 갖다 주나. 나는 '예술이 무엇인가'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이 이 주제에 앞서 있는 것을 발견했고, 한동안 대답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투쟁을 몸소 실천하는 참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문학이 그 자체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작가가 정치적 참여를 해야 하느냐' 또는 '예술의 순수성에  전념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다.  [...] 문학의 정치는 특정한 집단적 실천형태로서의 정치와 글쓰기 기교로 규정된 실천으로서의 문학, 이 양자 간에 어떤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9p)

자크 랑시에르. 유재홍 역, "문학의 정치"(이후 "정치"). 인간사랑, 2009


   문학은 애초에 정치적이다. 문학은 정치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많은 물음이 '해소'된다. 너무 그럴듯한 것들은 대부분 함정이지만, 속는 셈 치고 따라가보기로 했다.


*


1. 정치


   그는 '정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a'가 정치politique와 치안police 두 단어로 번역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통용되는 정치의 의미는 후자다. 기존의 질서를 보호/재생산하는 합의체. 우리의 의회민주주의는 모두가 합의한(그렇다고 여겨지는!) 일치consensus를 유지하는 장치다. 그리고 이 일치는 '분배'에 관한 것이란다. 어떤 것이 어떤 이에게 합당한가. 얼마만큼의 권력을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가. 이 '치안-정치'는 그래서 분배에 관해 어떤 일치를 구성하고 어떻게 그걸 유지할 건지를 주요 문제로 삼는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정치는 감성의 분할로서의 정치다.


   어떤 공통적인 것의 존재 그리고 그 안에 각각의 몫들과 자리들을 규정하는 경계설정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감각적 확실성evidences sensibles의 체계를 나는 감성의 분할이라고 부른다.(13p)

자크 랑시에르. 오윤성 역, "감성의 분할." (이후 "분할")도서출판b, 2008


   부연하자면 '감성'은 '미학'을 칸트적 의미로 감성론Aesthetik이라고 부를 때와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그것을 ─어쩌면 푸코에 의해 다시 검토된─ 칸트적 의미로, 자신에게 느끼게 하는 것을 결정짓는 선험적 형식들의 체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경험 형식으로서의 정치의 장소와 쟁점을 동시에 규정하는, 시간들과 공간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과 소음의 경계설정이다. 정치는 우리가 보는 것과 그것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것, 누가 보는 데 있어서의 능력과 말하는 데 있어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것, 공간들의 속성들과 시간의 가능성들에 관한 것이다. ("분할", 15p)


   감성의 분할, 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sensible의 분배라고 더 명료하게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 노동자들이 밤과 낮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향유하는지, 현대 이전의 여성들(혹은 지금까지도)이 자기만의 방을 경계로 공간을 어떻게 향유했는지, 빈곤층에게 추위나 더위라는 온도가 어떤 의미인지, 그간 어떤 이들의 목소리가 어떻게/얼마나 인정받아왔는지, 어떤 것으로서 드러났는지. 이를테면 말이 아니라 '외침'이나 '킁킁댐'으로 들렸던 목소리들이 있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그래서 정치를 '몫 없는 자들의 몫', 또는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다.


   어떤 의미에서 정치행위는 정치적 능력이 입증되는 감성의 경계를 추적하기 위한, 이를테면 무엇이 말이고 외침인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갈등이다. ("정치", 10p)


   시간들과 공간들, 자리들과 정체성들,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을 배분하고 재배분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감성의 분할을 형성한다. 정치행위는 감성의 분할을 새롭게 구성하게 하고 새로운 대상들과 주체들을 공동 무대 위에 오르게 한다. 또한 정치행위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며, 킁킁대는 동물로 취급되었던 사람을 말하는 존재로 만든다. ("정치", 11p)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감성의 분할로서의 정치는 그러므로 불일치dissensus에 관한 활동이다. 일치consensus를 유지/재생산하는 치안-정치와는 다른 것이다. 정치는 기존에 합의(당연시)했던 분배 양태를 문제시하고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왔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다음 분배 방식을 위해 마찰한다. 합의체 안에서가 아니라 그 밖에서, 지금 일치의 방식 자체를 질문하면서. 다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이행이 아니라 불일치의 지속이다. 새로운 합의를 구성해냈고 그것으로 되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자들'이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2. 문학(예술, 미학)


   예컨대 문학은 글쓰기 기교의 새로운 동일화 체제이다. 어떤 기교의 동일화 체제란 실천들, 이 실천들의 가시성 형태들과 이해 가능성 양태들 간의 관계들에 대한 체계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규정하는 감성의 분할 속에 개입하는 어떤 방식, 세계가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되는 방식, 이 가시적인 것이 말해지는 방식, 이를 통해 표명되는 역량과 무능들이다. 바로 이 점에 입각해서 공동 세계를 형성하는 대상들의 구획, 이 세계를 채우는 주체들과 이 세계를 보고 호명하며 이 세계에 대해 행동하는 주체들이 지닌 역능들의 구획 속에 "문학으로서" 문학의 정치를, 그 개입양태를 사고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치", 17p)


   문학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지를 드러내며, 그런 방식이 '어떤 이와 어떻게 다른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간 합의되어 왔던 감각체계에 개입한다. 지금,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어떻게 감각하는 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묻는 일이다. 그래서 문학의 기술이란 지금 여기의 감성 분할 양태를 드러내는 정치적 기교다. 문학은 내재적으로 정치적이다!

   이를테면 랑시에르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예로 든다. 플로베르는 영웅이 아니라 보바리의 이야기를 썼다. 농가에서 통속적 삶을 살다가 허영으로 나아가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이야기의 구획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감성과 언어를 독점에서 해방한 것이다.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누구나 이러저러하게 감각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평등하게 이야기가 된다! 플로베르는 그런 것을 증명한 셈이다. 랑시에르는 이를 근대 민주주의의 징후로까지 보았다.

   그러므로 "문학의 정치"라는 표현은 사람들의 감각적 일치와 불일치의 구획이 문학에서 드러남을, 그리고 문학이 그 구획과 관계들 속에 정치적으로 개입함을 의미한다. 미학적 실천은 항상 질문하며,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의 관계에 뛰어드는 '행동 방식들manieres de faire'이다.

   미학(문학)은 그래서 정치다. 정치 또한 미학이다. 애초에.


3. 두 개의 극과 긴장


   하나의 극에는 '숭고'가 있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무한 타자의 세계. 그 앞에서 성급한 재현은 금지된다. 총체성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이는 기존의 행위 방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타자, 새로운 존재 양식을 일치 안으로 끌어들이는 미학이다. 그로써 이질적인 감각을 기존의 구획/관계망에 기입하고, 당연시했던 일치들을 파괴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경향을 '작품을 통한 저항의 기획'으로 명명했다.

   다른 하나는 그 다음을 구성하려는 힘이다. 예술은 새로운 공동 공간을 창출하고 세계에 개입하여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다. 파편들로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는 미래파의 콜라주 기법이나 현대의 생활건축 양식을 구성해낸 바우하우스 운동 등을 랑시에르는 예로 든다. 새로운 일치를 구축해내는 예술. 그는 이 반대쪽 극을 '미적 혁명의 기획'으로 명명했다.' (참조 : 진은영. '숭고의 윤리에서 미학의 정치로─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의 정치'. "시대와 철학", 2009 제 20권 3호, pp.403-437)

   랑시에르는 예술이 저항과 혁명 기획 사이의 긴장 관계라고 봤다. 그렇다, 파괴 없는 구성은 권력을 재생산하며 구성 없는 파괴는 공허하다. 이 둘의 긴장은 또한 미학-정치의 본질이다. 미학-정치는 불일치에서 시작하지만 불일치에 정박하지 않으며, 일치를 향해 나아가지만 일치에서 멈추지 않는다. 단지 진자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


   그러나 불일치는 구성을 위한 힘을 잃기도 한다. 그 발목을 잡는 것, 혹은 구성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의 이름을 물으려 한다. 불일치가 불일치로 남게 되는 사연에 관한 이야기다. 생각건대 많은 불행이 여기서 난다.

   이를테면 폐허의 파편들을 가지고 다음에 올 것의 설계도를 그리는 일은 어떤 조심스런 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폐허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


   박민정 작가의 근작 "세실, 주희"를 가져왔다. 올해의 9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이다. (박민정."세실, 주희." 문학동네, (2017): 1-17)

   '주희'는 뉴올리언스 여행 중, '마르디 그라' 축제에서 친구를 놓치고 홀로 길을 걷다 성희롱을 겪는다.


   주희는 왜 남자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 남자들이 주희를 가운데 세운 채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주희를 에워싼 행렬의 밀도가 높아지며 그들이 외치는 구호가 더욱 또렷하게 주희의 귀에 박혔다. [...] 외치는 사람들의 구호는 같았다. show your tits! show your tits! (2)


   심지어 그 순간의 영상이 포르노 사이트에 업로드된 것을 알게 된다. '주희'는 영상을 본 화요일을 '참회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주희'는 축제에 그녀를 데려간 친구를 한 번도 탓하지 못한다. 영상이 있는 사이트 운영자에게 메일을 쓰기도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주희'는 '그저 잊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이 사건은 작품의 끝까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뉴올리언스에서 돌아온 '주희'는 명동의 대규모 뷰티 편집숍에 매니저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 직원 '세실'과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주희'는 '세실'의 삶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세실'이 '주희'에게 주말에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제안한다. '세실'의 선물과 작문 숙제를 통해 소설에는 일본 우익 기업의 화장품 등 전범 문제가 겹쳐진다.


   주희에게 '가네보'라는 이름이야 여느 유명 화장품 브랜드만큼이나 익숙했지만 '가네가후치 방적'이란 말은 난생처음 듣는 것이었다. [...] 주희는 파우더룸에 접속해 '전범기업'이나 '우익단체 지원'과 같은 단어로 검색해 나오는 글들을 읽어봤다. [...] / 나는 왜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주희는 생각했다. (8)


   소학교 삼학년 때 오키나와에 평화학습 수학여행을 가서 '히메유리의 탑'을 처음 보았어요. 그게 우리 曾祖母를 기억하는 탑이었습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기 전에 여학생들을 인솔해서 명예롭게 자결하신 우리 할머니, 사쿠라코 할머니의 군대 '히메유리 학도대'를 기억하는 탑 말입니다. [...] 사쿠라코 할머니는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있습니다. (11)


   결말에서 둘은 크리스마스날 명동에서 만나 팔짱을 끼고 걷는다. 그리고 명동 반전 집회의 행렬에 섞여들게 된다.


   그때 세실이 주희의 팔짱을 조금 더 힘주어 꼈다. 지금 무슨 시위중인가요? 나는 시위대의 주변에 있으면 안 되는데 …… 외국인은 좀 민감해서요…… 세실은 주희의 어깨에 얼굴을 갖다 댔다. 주희는 세실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예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예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은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16-17)

(밑줄은 인용자)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 팔짱을 낀 '세실'과 '주희'는 언뜻 생각하기에 좋은 우정을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명동의 한복판에서 불일치로 드러나는 '세실' 뿐이다. 이어지는 결말은 이렇다.


   그런 말을 세실에게는 결코 할 수 없었고 주희는 조금 참담해졌다. 세실 상, 다른 길로 갈까요? 주희는 세실에게 진지하게 물었고, 세실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가요. 주희는 순간 뉴올리언스의 펍에 앉아 있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나도 너처럼, 주희가 여행 내내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다. J처럼 무람없이 외국 사람들과 어울려보고 싶었고,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 끝이 고작 포르노 영상이 되리라고는 주희는 예상하지 못했다. J는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며 주희에게 피곤하면 안 가도 돼, 여기서 좀더 마시고 있어, 라고 말했고, 주희는 아니, 따라가고 싶어, 대답했다. 따라가고 싶어.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생각해내자 비참해진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르디 그라, 참회의 화요일이 육박해오는 순간이었다. 행렬은 어느덧 소녀상 근처에 도착했고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몰랐다. (17)


   그러니까 여전히 '세실'은 동상(집회의 '할머니')의 의미를 모르는 채로 명동을 걷고, '주희'는 여전히 뉴올리언스에서의 소외와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녀의 화요일은 앞으로도 '참회의 화요일'일 것이다. '주희'는 '세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것은 '만남'이나 '연대'가 아닌 다른 무엇이다.

   최근에 이 소설에 관한 이견을 많이 접했다. 이견은 주로 (소급하자면) 여기 결말에서 발생했다. 여전히 참회하는 '주희'는 페미니즘 소설의 또다른 클리셰인가. '세실'과 '주희'는 만난 것인가 만나지 못한 것인가. 또 하나의 실패, 공허한 증언인가. 결국 젊은작가상 심사는 시의성 하나에 매달린 것인가. 자극적인 인트로(show me your tits!)는 자극적일 뿐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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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고생스럽게 읽었다.


   나는 왜 한 번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주희는 생각했다. [...] 고등학생 시절부터 주희는 파우더룸에 붙어살았다. [...] 수없이 많은 화장품 회사와 연락을 했지만 그중 어느 곳이 '전범기업'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었다. [...] 주희에게 제품의 퀄리티 외에 다른 것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쥬쥬하우스의 매니저였다. 만약 쥬쥬하우스가 어떤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단체나 사람과 연루되어 있다면 그건 자신뿐 아니라 세실에게도 매우 곤란한 문제일 것 같았다. (8-9)


   '주희'에게 '전범기업'이라는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전범기업의 제품을 쓰는 것이 무엇 때문에 옳지 않은지에 대한 고민이 있나. 잘 모르겠다. 별 생각을 하지 않다가, '쥬쥬하우스의 매니저'가 되고 보니, 곤란한 문제가 됐다. 그것도 '쥬쥬하우스'에 해가 되는 것이 문제다.


   죽지 말고 살아남자고 말하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꾸짖으며 학생들을 독려해 자살하는 선생이라니. 세실이 아주 어릴 적부터 그녀에게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세이젠  할머니는 자신을 남겨두고 죽음을 택한 어머니를 전쟁 영웅으로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하긴…… 전쟁 영웅의 후손들은 전부 그런 식이겠지…… 주희는 그런 생각을 하다 다시 잠에 들었다. (12-13)


   이렇게 '세실'에 관하여, 생각하려다 말기도 한다. '그런 식이겠지'. 옳고 그름은 없다. '그런 식'이라는 말에는 정말이지 편리한 판단이 들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주희'는 '세실'을 환대하고 있던 것이 맞긴 한가.


   "주희씨도 성형을 좀 했겠죠? 한국 여자분들은 성형을 많이 하니까요. 보편적으로."

   주희는 그녀가 '보편적으로'라는 단어를 안다는 사실과, 그렇게 무례한 말을 웃는 얼굴로 한다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주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세실 상,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에요. 일본에선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요?"

   "왜요? 미인이라서 그런 건데요. 또 한국 여자는 성형을 많이 하기도 하고요."

   "한국 여자가 성형을 많이 한다고요? 그러면 일본 여자 대부분은 AV를 찍나요? [...] 그런 말이나 다름없는 거예요. 알겠어요?" (7)


   '세실'의 발언은 말마따나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다. 나 같아도 '주희'처럼 반응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물감이 남는다. 이를테면 '한국 여자는 성형을 많이 한다'는 오해는, 윤리적인 문제인가? 여기서 드러나는 것 역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세실'의 불일치가 튕겨져 나가는 순간이다. (참 조심스러워지는 대목─'세실'이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실'의 잘못(!)은 윤리적인 문제라기보다 오해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항상 윤리가 정확한 옳고 그름의 문제인 것은 아니며, 어떨 때는 편리한 방식으로 불일치를─정작 중요한!─튕겨내기도 한다. 그렇게 불일치가 튕겨나가는  순간 '이방인'이 탄생한다. 또 문제적인 일치들이 유지된다. 이것은 '주희'의 사연이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불행들의 사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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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습속ethos으로서의 윤리와 모럴moral


   랑시에르로 돌아오자. 그는 '윤리'라는 말을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습속ethos로서의 윤리에 '그치는 것'을 싫어했다.


   "윤리의 지배는 예술의 활동들이나 정치의 활동들에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의 지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영역의 구성을 의미한다. 윤리는 규범이 사실 속에서 해체되는 것이다." (재인용: 진은영, 2009)


   정치나 예술이 '윤리화'할 때, 진짜 옳고 그름의 판단은 기존의 습속, 사실들, 혹은 합의되어 있던 질서 속으로 녹아버린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문학은 정치적이어야지 윤리적이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윤리는 대부분의 경우에 견고한 일치를 구성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이미 거기에 있는 기준으로서의 습속! 불일치가 끼어들고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윤리들마저도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정치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실험하는 기술이다.

   (무조건적으로 기존의 합의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라는 변명, 을 굳이 해야 할까. 요점은 '정작 필요할 때,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 세대는 그런 특이점 한가운데에 있다.)

   그는 습속ethos으로서의 윤리에 대비하여 '모럴moral'을 이야기한다. "모럴이란 선과 악에 대한 관습적 해석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활동을 의미한다." (진은영. '시와 정치: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 "비평문학", 2011 (39), 470-502. 477p) 기존의 방식에 편리하게 안주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다. 그리고 불일치의 '다음'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모럴'은 체계나 기준이라기보다 태도다. 예술의 태도이며 정치의 태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다.

   정치가 모럴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나. 기존의 일치를 당연시하고 어떤 불일치도 상상하지 못하는 공동체를 랑시에르는 "윤리적 공동체"라고 부른다. (진은영, 2009) 여기서 불일치를 가져오는 자는 우연한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 거기서 튕겨져나간다. 그는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다. 목소리는 언어가 아니라 뜻모를 외침이 된다.

   마르디 그라스! 나는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윤리적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다. '주희'는 거기서 튕겨난 불일치, 이방인이었다. '세실'도 마찬가지. "전 세계 여성을 잠재 고객으로. [...] 여성을 환대하는 공간"(박민정, 3)인 명동에서 '세실'은 우연히 거기 있는 일본인 전쟁 영웅 후손이다. 끝까지 동상의 의미를 모를 수밖에. 그렇다면 이 소설은 불일치가 불일치로 남게 된 사연, 그 모든 실패와 불행의 사연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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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주희'와 '세실'의 관계는, 만남이나 연대가 아니다. '주희'는 '세실'을 통해 어떤 '실패의 원리'를 목격한 것이다. 아직까지도 화요일을 참회하고 있게 된 원리이며 '주희'와 명동이 '세실'을 튕겨낸 원리를.

   뉴올리언스에서, 마르디 그라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은 '주희'의 불일치가 튕겨져나가는 사건이었다. 뉴올리언스의 펍에서 '주희'는 언어의 문제라기보다 공통감각의 부재로 소외되고 있었다. 친구인 'J'에게서마저도. 그들은 아마 마르디 그라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뉴올리언스와 마르디 그라스는 먼저 어떤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주희'는 그것을 몰랐다. 그 공간에서 그 공간에 대한, 감각적 불일치. 이는 권력의 비대칭이다.

   아니나다를까 마르디 그라스는 불일치로서의 '주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show your tits!'라는 구호는 그곳의 습속-윤리였다. 그것이 원리이며 권력이다. 도대체 어떻게 "남자들에게는 최고의 축제"라거나 "마르디 그라는 자유와 해방의 축제"라는 말이 가능한지(박민정, 5). 도대체 왜 포르노 사이트의 운영자는 '주희'의 메일에 답하지 않는지. 도대체 어떻게 그 가해자들이 되려 옷을 벗지 않은 '주희'에게 "우린 네 얼굴을 알고 있어, 썅년아."(박민정, 3) 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건지.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불행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주희'는 그 원리를, '세실'의 불일치가 '주희'에게도 명동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바로 그 순간, 문득 깨달은 것이 아닐까. 이야기의 결말은 그런 틈새에 해당한다. 마르디 그라스와 명동이라는 윤리적 공동체는 너무나도 견고했다. '따라가고 싶다'고 말한 자신을 떠올리면 눈을 질끈 감아야 할 만큼.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앞으로도 모를 테고, '주희' 또한 화요일마다 참회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들의 불일치는 불일치 이외에 아무 것도 되지 못했다. 불행은 그런 식으로 발생한다. 내가 소설에서 찾은 것은 정치의 실종과 습속의 과잉이다. 다음 발을 딛기도 전에 거부당한 불일치이며 시작도 하지 못한 비판이다.

   (이 소설이 정치적이지 않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이 정치의 실종을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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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모를 첨언 : '주희'가 보여준 태도들로 인해 '주희'는 화요일마다 참회해도 싼 인물이다, 라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이 소설을 변호하는 것은 '주희'가 스스로를 탓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마르디 그라스와 명동은 다른 공간이다. 단지 닮은꼴이 드러나는 틈이 있을 뿐, 그것이 서로에게 이런저런 구실을 줄 수는 없다. 세상에, 그것이야말로 '대단히 습속─윤리적인' 오해다.

   (또다른 첨언 : '윤리'라는 단어의 비판적 사용에 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습속-윤리'라고 표기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있다─나는 반윤리주의자가 아니며, 랑시에르도 아마 아닐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제 페미니즘 소설은 증언에서 끝나는 일을 그만해야 한다, 라고, 이 글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한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조심스레 생각건대, '증언'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페미니즘 소설이 징벌 서사를 구현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는 섣불리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놓친 층위가 있을지 모르고, 사실 나 또한 서너 번은 판단을 번복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단순히 피해 서사를 소비하는 또 하나의 흔한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그렇지 않기를 시도한 소설이다. 증언이라도 이런 증언이라면 괜찮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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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이 지난한 비평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습속'이라는 이름이며 어떤 불행의 원리다. 폐허에 도착했다고 여기는 순간 습속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진정한 파괴자'로 거듭나는 일은 습속에서 벗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려 있다. 랑시에르처럼 말하자면 '모럴'이라는 태도,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다음 올 것들을 위한 '파레시아'다.

   그래야 비평이고 비판일 테다. 균열과 파편에서 멈추지 않는 일, 다음 성좌를 구축하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 많은 함정과 환상, 기만이 도사리고 있다. 문학이라는 일 혹은 정치라는 일에는 불편함이 필요하다. 편리하게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을 위한 파편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파편을 얻고 나서도 습속에 기댄다면 폐허 이전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행을 낳으며.

   나는 그런 쳇바퀴를 돌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직 모르겠다. 필명의 값을 해낼 수 있을지. 고작 이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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