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현, 「비평의 장소와 비평(가)의 임무: 사회인문학적 지평에서 '비평의 가능성'을 음미하기」, 『사회와 철학』제21집 (2011), p177~206






   2. 비평은 가능한가: 비평의 에세이화를 위한 변론


   IMF 외환위기가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2000년대 전후로 국가가 파산을 할 수도 은행이 망할 수도 있으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기반이란 언제든지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일 뿐이라는 사실, 우리가 상시적 위험사회를 살고 있음을 너나 없는 모두가 인식하게 되었다. 사회의 무드에서 일상 습속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한국전쟁 이후의 가장 심각한 변동기를 거쳤으며 그 변화의 여파는 점점 더 구체화/미세화되고 있다. (185p)

   각주 10) IMF 외환 위기가 한국사회 전반에 전면적인 변화를 야기했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구제금융 신청과 함께 전세계적 자본의 요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시절을 거치면서 '기준'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었고, 흔들리던 거대 담론의 최종적 붕괴가 선언되었다. 국가, 경제, 법 등의 공적 담론이 고정된 것도 신뢰할만한 것도 불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널리 유포되엇으며 삶에서 개인의 욕망 외에는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 미래를 상상할 수 없으며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려운 시절, 모더니티의 진보 이념을 부정하면서 니체가 선언한 바, 영원회귀의 시대 혹은 거대한 허무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3. 비평은 어떻게 가능한가: 비평의 장소와 비평(가)의 임무 (p193~)


  1) 타자의 눈으로 보기

   가라타니가 ... 강조하고자 한 비판은 ... '나의 시점'이 최대하 배제된 객관의 지평이라는 의미에서의 '타인의 시점' 도입이다. 가라타니는 칸트를 통해 "내성이 가진 공범성을 깨뜨리려고 한" 시도, 즉 "종래의 내성(거울)과는 다른 어떤 객관성(타자성)의 도입을 발견"(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2005, p91~3)하고자 한 것이다.

   사실, 타자의 겹눈을 도입하는 것, 이는 비평의 '이차적' 성격 혹은 비평의 사회적 기능을 재확인하고 내화하는 행위이다. ... 그의 관점에 따르면 비평은 해석 공동체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재설정할 수 있는 '내부이자 바깥'의 자리에 놓인다.

   "어떤 자리의 외부인 동시에 내부인 장소, 즉 의심을 품은 채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어떤 영토의 경계는 때때로 가장 놀라운 창조적 사유가 샘솟는 장소이기도 하다."(Terry Eagleton, 『이론 이후』, 2010, p64)

   ... 이는 이데올로기적 지평과 무관하게 비평이 자기가 속해 있는 해석 공동체 혹은 언어 규칙으로부터 끊임없이 떠나고 헤매고 머물렀다 다시 돌아오는 이동성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비대칭적 차이로 만나는 언어 규칙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비평이 지향해야 할 바라면, 사실상 비평이 가능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비평의 '이차적' 존재형식을 자기-인식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스스로 일차적이고 오리지널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비평은 '비평적'일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 「정치, 혹은 비평으로서의 광고」, 『언어와 비극』, 2004, p318) 그리고 그것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오성의 판단능력으로 해소되지 않는 초월의 장소를 위해 '상상력'의 도움을 요청할 때에 그러했듯이 ... 불가능의 층위를 만들어내려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한 도약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 두어야 할 것은, 타자의 눈의 도입이 동일한 시공간의 지평 안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오지 않은 타자, 올 수 없는 타자, 우리의 해석 공동체 너머에 있는 미래의 타자를 고려하는 것, 과거의 눈과 미래의 눈을 겹쳐 놓고 현재를 다시 보는 것, 비평이 타자의 눈을 도입한다는 것은 역사적 지평을 고려한 자리에서 경계 바깥을 상상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의 삶이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도 자신 이외의 것,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유지되며, 삶의 과정이란 타자와의 끊임없는 교환의 과정'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학과 그것을 매개로 한 시대 현실(사회)의 초월적 차원을 복원하려는 시도,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인 것이다.

   그렇기에 타자의 겹눈을 도입하는 것과 상대주의 혹은 무한 다원주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타자의 겹눈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김우창이 가라타니를 거론하며 지적했듯이 장소를 옮겨가면서 비판을 하는 것 외에 비평의 장소적 독립성을 확보할 수 없는 현재적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평의 가능성은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비평'으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간 자리에 있는 비평, 일상적 시야가 포착하지 못하는 지점을 보는 눈으로부터 마련되는 것임에 분명하다. 이런 맥락에서 타자의 눈을 도입하는 것은 비평의 전문성을 회복하는 일을 의미한다. 비평의 전문성은 이론적 무장을 통한 '자족적 글쓰기'가 아니라 비가시의 지점까지 통찰하는 시선의 획득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다. (p194~197)


   2) 망명자의 질문법으로 묻기

   그러나 근대 이후의 지배적인 사유방식이 그러했듯이 어떤 낯선 것도 결국에는 우리의 사유틀에 동화된다. ... 하나의 해석 공동체에 굴절 없이 깊이 몰입하는 것은 비평의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 우리 시대의 비평가는 정신적 이동성을 지향하는 망명자의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Zygmunt Bauman, 『액체근대』, 2005, p328~334) (p197)

   일단 데리다 식의 절대적 환대 상태를 유지하는 일, 대가 없이 타인의 눈의 개입을 허락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Jacques Derrida, 『환대에 대하여』, 2004, p70~1), 동시에 타인의 눈으로 비평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일, 궁극적으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불안정하고 애매한 위치에 놓인 비평이 자신이 머무는 장소 혹은 지반의 정당성을 묻는 일, 이런 것이야말로 현재의 비평에 절실히 요청되는 망명자의 질문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p199)


   4. 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성적 보편성을 위한 비평의 테크놀로지 (p200~)


   타인의 시선을 도입하는 일과 그것을 통해 비가시의 지점까지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아카데미즘/저널리즘의 경계를 넘어서는 '비평'일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작품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통과한 작업이라는 것, 냉철한 분석의 출발점이 감각/감정의 층위라는 것, 비평이 비전문적이거나 무차별적인 비판과 구별되는 특성이 여기에 있다.

   ... 망명자의 질문법이란 타인의 시선을 내 안에 품는 것뿐 아니라 타인과의 정서적 공감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이다. (p200)

   ... 바로 그렇기에 타인의 눈을 도입하고 망명자의 질문법을 체화해야 하는 일 즉 구체적 대상(/사건)에 관한 감성적 사유로서의 비평 행위를 통해 '하나이자 여럿'일 수 있는 보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야말로 삶과 삶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복원하기 위한 첫 번째 행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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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세 개념에 기초한 인간 행동 세계의 시적 통찰과 창작의 원리」

* 이 글은 다음 글을 수정, 보완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세 개념에 기초한 인간 행동 세계의 시적 통찰과 창작의 원리」, 『인간연구』제7호, 2004   

* ‘시학’보다는 ‘비극론’이 더 적합한 명명일 수 있다. 혹은 poietike를 시작술이라기보다 창작술-창작의 기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시학』, 혹은 『peri poietikes포이에티케(창작술)에 관하여』는, 당대의 작품들을 분석하여 창작의 주요 개념과 원칙을 도출, 창작 기술을 이론으로 정립했다. 이는 작품 구성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들에 관해 성찰함으로써 작품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과 원리를 제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세 가지 개념은 포이에티케poietike, 미메시스mimesis, 카타르시스 katharsis다. 이 세 개념의 의미를 서로와의 깊은 연관 속에서 밝히려 한다. 이것들은 『시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서 제대로 정의되지 않고 있다. 당시 『시학』의 목표 독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 즉 뤼케이온의 학생들에게 이 개념들이 너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 세 개념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엮여서 분석의 구조물, 혹은 ‘비판의 그물망’을 형성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카타르시스는 감상자의 감정과 관련하여 이해되곤 하지만, 창작 행위와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조작의 효과이며 절차라는 점에서 미메시스와 상통한다. 미메시스 또한 모방이나 흉내를 뜻하는 것이지만 포이에티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세 개념은 등식이랄만한 관계로 튼튼하게 맺어져 있다.

  포이에티케

poietike는 ‘poie’, ‘t-ike’로 분석된다. ‘poie’는 ‘만든다’는 뜻의 동사에서 왔다. 따라서 포이에티케는 일반적인 의미로 ‘만드는 기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정신활동dianoia를 ‘praktike실천~’, ‘theoretike이론~’, 그리고 ‘poietike제작~’로 나눈다. tekhne기술, 혹은 dunamis능력과 어울려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이에티케를 ‘시학’만으로 정의하는 것은 잘못이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 내는 모든 기술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해야 한다. 다만 『시학』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의 의의는, 더 이상 영감에만 의존하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작품으로서의 시를 조명했다는 데 있겠다.

시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조금 다르게 질문해야 한다. 시인이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시를 짓는 수단과 표현하는 방식은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표현하는 대상이 ‘내용’에 해당한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표현의 수단에 따라, 표현하는 대상에 따라, 그리고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작품을 구분하고 있다. 음악적 운율은 시의 표현 수단이며 방식이다. 형식에 담기는 내용이 중요하다. 바로 이야기muthos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들로부터 분명한 것은 운율보다는 오히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학』) 따라서 시인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며, 시는 이야기, 특히 음악적 운율(리듬과 화음)을 갖춘 언어 속에 담기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없다면 시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사시와 비극, 희극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서정시를 다루지 않았다. 서정시는 개별적인 사실을 드러낼 뿐,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즉 시를 짓는poesis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인이 할 일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일들을,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가능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지만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한다) ... 보편적인 것이란 여하한 성격의 사람이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여하한 말을 하고 여하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인물들에게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하면서도 시가 추구하는 바다.” 시인의 역할은 개별성을 떠나 보편성을 밝혀 주는 것이다. 경험하는 개별적 사실은 우연적이다. 시인은 이야기를 구성하여 인간 세계의 사건이나 행위를 보편으로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비극은 우연성에 의한 존재 세계를 인식 가능하게 해” 준다. (골드슈미트) 시가 되려면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하며, 시인 자신은 숨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전면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상으로써 포이에티케란, 『시학』에서는, 보편성에 잇닿는 이야기를 창작하는 기술로 정의된다. (물론 근현대적 관점에서 개인의 표현은 중요한 문제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이제 시의 본질은 오로지 이야기 만들기다. 여러 가지 사건들pragmata을, 단순한 시간축이나 한 인물을 중심으로 열거하지 않고, 즉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재구성하여 하나의 단일한 행동praxis으로 구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롯의 창작이다.

  미메시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muthos를 “행위의 미메시스”라고 정의한다. 『시학』에서 그는 포이에티케를 서술하겠다면서 난데없이 미메시스를 언급한다. 이는 어떤 등식이 이미 전제되어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포이에티케와 미메시스 둘 다 『시학』에서는 정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대신 그와 마찬가지로 포이에티케와 미메시스를 연결시켰던 플라톤의 입장을 요약하자. 플라톤 또한 포이에티케의 핵심을 미메시스로 파악했다. 그러나 모방이 과연 창조인가? 플라톤은 그렇다, 라고 말하며 창작 활동 자체를 폄하한다. 포이에티케는 본질적으로 미메시스에 불과하며, 창조자는 허상을 진짜인 양 속이는 모방자다. 플라톤은 특히 참된 인식을 가로막으며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참된 행복을 앗아간다는 이유로 시인을 박해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포이에티케의 본질이 미메시스임을 계승하면서도, 그리고 대상과 표상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거리와 괴리 또한 인정하면서도, 시인들의 미메시스가 가지는 긍정적인 가치를 높이 산다. 미메시스로 생겨나는 대상과의 거리는 적극적으로 인식론적인 역할을 한다. 감각적 경험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차이 때문이다. 플라톤은 감각 경험을 진리에의 방해 요소로 생각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대상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지식의 출발점으로 본다. 경험을 존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미메시스는 단순한 조작이 아니라 감각적 대상과 그것에 내재한 형상, 진상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재현하는 창조 행위다. 이로써 시인들은 지위를 회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의 인식론적 가치를 재정립한다. 미메시스는 인간이 최초로 경험하는 학습이다. 미메시스에서 얻는 기쁨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본성이다. 이 기쁨은 단순히 미학적인 쾌락이나 감성이 아니라 지성적인 것이다. 미메시스를 통해 인간은 대상과 표상 사이의 차이, 혹은 표상의 결핍 같은 것을 감지하고 그로써 대상의 본질에 다가간다. 즉, 미메시스는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 때 시적 추론이라는 것은, 창작자에게는 대상의 본질을 작품이라는 표상으로 담아내려는 시도에서, 감상자에게는 표상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통찰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미메시스는 대상의 본질을 재현하고 파악한 결과다. 이런 까닭에 시적 추론 혹은 활동은 미메시스로서 확고한 인식론적 지위를 얻는다.

만약 미메시스의 대상이 감정이나 관념일 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 시인은 이야기 구성을 통해 우연적, 개별적인 행위와 사건들의 본질을 개연성이나 필연성으로 꿰뚫어 보고, 그것을 통일된 무엇으로 재구성하여 가능성의 세계 속에 표상한다. 그 결과는 우연성과 개별성을 극복하여 현실에 내재해 있는 개연성, 필연성, 그리고 보편성을 드러내 준다. 감상자는 그것을 보고 추론을 통하여 인간 행동의 본질과 보편 원리를 배운다. 이런 통찰은 일차적으로 지성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감성적이며 미학적이다.

이와 같은 예술적 재구성의 작업은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요소들을 제거함과 동시에 일상적 사건들의 고통스러움과 추함을 제거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메시스는 카타르시스가 된다.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여러 장르들 중 우선적으로 비극을 정의한다. “비극이란 진지하며 완결된, 일정한 크기를 가진 행위의 미메시스인데, 각 부분들에 각각의 종류대로 따로 뿌려진 양념된 언어를 수단으로, 낭송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며,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와 같은 격정들의 카타르시스를 수행하는 미메시스다.”(『시학』) 포이에티케, 혹은 포이에티케가 적용되는 포이에시스의 장르로서의 비극은 미메시스로 정의된다. 포이에티케를 미메시스로 정의하는 것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에 이어, 비극을 ‘카타르시스를 수행하는’ 미메시스로 정의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다만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에 대한 언급은 위에서 인용한 구절 한 군데에서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민과 공포를 통해 그와 같은 격정들의 카타르시스를 수행하는 미메시스다.”라는 문장에서 카타르시스에 대한 이해를 온전하게 건져내어야 한다.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부르는 사건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비극 시인은 그 고유한 즐거움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사건과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내부에 일어난 연민과 공포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전통적으로는 비극의 감상자 내부에 새로이 생겨난 부정적 감정이 그 이전에 존재하던 부정적 감정을 씻어낸다고 해석한다. 이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에 기초한 감정의 순화 및 치유 방법의 유비이다. 혹은 프로이트로부터 라캉에 이르는 정신분석학 이론에서 정신적 충격으로 생긴 정신 질환을 동일한 유형의 충격을 통해 해소시키는 치료법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언급들에 의하면 감상자가 공포와 연민을 느끼기 위해 비극을 관람한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다른 관점에서, 카타르시스를 감상자 내부가 아니라 작품 안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작품 내부의 사건 자체가 전개 과정 속에서 정화된다거나, 시인의 미메시스 활동 자체가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설득력을 가진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현실에서 연민과 공포는 고통이지만, 비극을 통해 그 감정은 ‘카타르시스된다.’ 카타르시스된 감정은 감상자에게 고통이 아닌 쾌락을 준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부정적 감정인 연민과 공포가 비극 작품을 통해 감상자의 눈앞에 재현될 때는 그 부정성이 정화되어 감상자에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의 사건과 행동 속에 보편, 혹은 본질로서 내재되어 있는 비극성이 드러날 때는 개별자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실제 사건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표상으로 재현된 사건을 통하여 삶의 비극성을 통찰할 수 있으며, 앞서 미메시스에 관한 절에서 언급했듯이 추론과 배움을 통한 기쁨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음 구절을 근거로서 들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보면 고통스러운 사물이라도 그것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진 표상을 바라볼 때는 즐거움을 느낀다.”(『시학』) 대상이 미메시스라는 예술적 조작을 통해 재현될 때, 대상은 쾌적한 형태로 바뀐다. 이때 느끼는 즐거움은 단순한 심미적 쾌락이 아니라, 추론과 배움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성/지성적 즐거움이다. “모든 사람들은 본성상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형이상학』)

미메시스를 통해 감상자가 느끼는 즐거움은, 재현한 표상을 매개로 한 추론을 통해 표상과 대상 사이, 혹은 현실 세계와 구성된 세계 사이에 작가가 파 놓은 쾌적한 거리를 넘어다니면서 양자 사이의 일치를 파악하는 즐거움이다. 이 거리는 작가가 현실적 대상의 본질을 가리는 추하고 우연적이며 부차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때 생긴다. 이 때 예술적 표상은 모든 방해물과 껍질을 벗고 현실적 대상의 본질과 아름다운 부분을 드러낸다. 이런 예술적 생산은 허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깨끗하게 드러내는 카타르시스이며, 대상을 표상 속에 재구서아는 포이에티케이며, 대상의 본질을 재현하는 미메시스이다.

카타르시스가 없는 미메시스, 즉 역겨운 재현만을 보여주는 미메시스는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미메시스나 포이에티케는 아니다. 참된 미메시스는 대상을 카타르시스하며, 숭고하고 쾌적하게 재구성한다. 일치와 불일치의 함수 관계 속에서 대상은 카타르시스되어 쾌적한 감상거리로 감상자에게 주어진다. 여기에서 부정적 감정은 연출되는 과정과 감상되는 순간에 기쁨으로 역전한다. 카타르시스에 의한 이 역전이 바로 미메시스의 본질이며 효과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포이에티케다.

  맺는 말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언어를 통한 예술적 창작의 핵심에 인간 행동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두고 있다. 포이에티케는 허위의 조작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한 인식이다. 진리의 핵심과 본질을 보여 주는 창작 행위는 개별적 현실을 요령 있고 아름답게 재현하는 행위, 즉 미메시스다. 이는 또한 본질을 성찰하는 시인, 그리고 시인을 통해 세계를 재인식하는 감상자에게 있어 지성적 정화작용, 즉 카타르시스다. 시의 창작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각각 다른 면을 차지하면서도 하나의 축으로 결합하는 세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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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분명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버려둘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곱씹고 곱씹다 보면 결국 어쩔 수 없는 채로 내버려둬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복기를 멈출 수 없는 일들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골방 안으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벽 하나를 두고 마주앉는다. 다시 한 번 패배한다고 해도, 그 방에서 나오면 우리는 조금은 다른 표정을 짓는 사람이 된다.

소설 웃는 남자는 그런 투쟁에 대한 이야기다. 골방 안에서 어쩔 수 없었던 순간들이 재생한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한다. 이건 절대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곱씹고 곱씹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것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변호하는 방어기제를 버려야 한다. 그의 아버지처럼 잘못한 거라는 말에 화내서는 안된다. 벽지를 뜯어낸 벽을 보아야 한다.

‘다 벗겨내고 보니 벽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흉했다. ... 이 벽을 보기 전에 나는 이런 벽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 누구나 벽 곁에 머물지만, ... 벽의 실상이 이렇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벽은 타인과 나를 안전하게 구분짓는다. 벽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단순해져야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벽이다. 벽지를 뜯어내면 흉한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는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방어하고 있다.

‘내 잘못이 무엇인가. ... 나는 어쩌면 총체적으로, 잘못된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잘못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어디까지가 내 잘못이고 어디서부터 내 잘못이 아닌 걸까. 아무것도 어쩔 수 없다면, 나는 총체적으로 잘못된 존재인가. 연인이 죽는 순간에도, 원래부터가 내 가방을 움켜쥘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판단이고 뭐고 없이 그렇게 하는 인간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인간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어쩔 수 없다고 해서 패배하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작가는 답을 내리지 않고 다만 고뇌하는 한 사람을 보여준다. ‘디디’는 죽었지만, 그 때를 복기하는 ‘나’가 아직 싸우고 있다. 나는 이것을 희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함부로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복잡한 방어기제를 버리고 단순한 것이 되어야 한다. 무력감에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쳐야 한다. 스스로 방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스스로 방을 나와야 한다. 계속해서 질문하고 타인에 관한 한계를 스스로 규정해내는 일이다. 내 잘못이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인간인가. 그게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기울임체 ; 황정은, 「웃는 남자」,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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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아이들」

2017. 4. 5. 13:11

아이들의 기억


문학이 질문이라면, 소설가는 그 질문을 위해서 서사를 구성한다. 그래서 소설의 인물이 이야기하는 삶은 빛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질문을 위한 복기로서 압축되고 예리해진다. 그 과정이 문학적 의미의 ‘기억’이며 ‘재현’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단을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할인매장으로 팔려가거나 땔감이 될까 전전긍긍하다 보면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을 휘감기도 했다. 그때마다 완전히 젖지는 않을 거다, 자신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빠지지 않으려고 버둥댈 때나 파도에 몸을 맡겨 둥둥 떠다닐 때나 저편에서는 항구가 보였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열대숲이든, 그곳에서는 언제나 바람이 불어왔다.’ 소설의 화자는 북항에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건너온 원목들이 쓰임새를 부여받고 공장에서 무언가로 가공된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보다 무엇이 되는가, 라는 질문, 혹은 나는 팔릴 것인가, 라는 질문이 중요한 곳이다. ‘나’의 서사는 이러한 질문들을 위하여(혹은 질문들에 의하여) 소설 끝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자신이 없으면서도 ‘완전히 젖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게 됐다. ‘나’의 삶은 그런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닿는다. 이 모습을 위하여 ‘나’가 끌어모은 지난 삶의 조각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전해받은 ‘원목’의 이미지다. 코뚜레와 공장의 목재들과 아버지의 조각 같은 것들은, 무언가가 된다는 것 혹은 되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나’로 하여금 조금씩 생각하게 했다. 그 고민은 끊임없이 어떤 형상을 빚어간다. 그 형상은 앞서 말한 질문으로 수렴하는 ‘나’의 삶 자체다. 혹은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아이들」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래서 유의미하다. 유년의 기억을 이루는 조각들은 없어지지 않고 ‘나’를 구성한다. 어떤 면에서 ‘나’는 끝까지 어린아이다. 그녀는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나이를 먹고도 떠올리고 곱씹는다. 어린시절 친구가 무심코 한 말에 애처럼 심통이 나는가 하면, 그 심통이라는 것도 어린 시절 친구들은 어린아이 그대로인 채 남아있었으면 하는 무심결의 소망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정말 우리가, 우리한테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화가 났다.  ... 차라리 유람선을 타러 가자고 불렀으면 나았을걸.) 또한 ‘나’가 서른 살이나 되어 코뚜레의 행방을 물을 거라고 그녀의 어머니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지금을 구성하고 있지만, 정작 지금 그 시절들은 없다. 문학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기억한다. ‘지금쯤이면 아파트는 다 무너져내렸을 텐데. ... 이제 집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외계인들, 그 아파트 아이들도 어딘가에서 그럼 우린?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삶 또한 서사라면, 어떤 질문을 위하여 예리해져야 한다면, 전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아이들’이었던 시절에 큰 빚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예외없이 지나가버린다. 여기에 문학의 아이러니랄만한 것이 있다. 이따금은 그 향수감으로 삶이 아름다워진다.

* 본문의 기울임체는 모두 다음 작품에서 인용 ; 김금희, 「아이들」, 『창작과비평』 37(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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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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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봄밤」

2017. 4. 5. 13:07

0이 아닌


소설 「봄밤」의 인물들은 불운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류마티즘과 알코올 중독이 일반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 죽어가는 존재라는 점에서, 몰락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수밖에 없다. 특히 이 소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에필로그다. 이미 일련의 사건들이 끝난 뒤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요양원을 다녀가는 차에서 영선과 영미가 대화하고, 과거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플롯이 전개된다. 영경과 수환이 마지막에 지었던 표정을 이야기하고 난 후, 소설은 ‘다시’ 끝난다. 요양원 이전의 긴 서사는 건조하게 압축되어 있다. 소설은 철저히 인간의 마지막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마지막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사람도 1보다 크거나 작은 분수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건 한 장 성적표일 것이다. 수환과 영경은 이미 0에 수렴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혹은 지난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작가는 그런 건 아니라고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속삭이고 있다. 아무리 비참한 삶이어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라는 게 아니라, 모두 죽어가고 있을지라도 우리에는 ‘그 다음’이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가 뭐 어떻게 할 건 하나도 없고,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니 됐지 않냐고? 뭘 더 바라겠냐고?’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 

도입부에서 영미는 뭘 더 바라겠냐고 말한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긍정이기도 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게 없었다면 문제는 단순해진다. 성적표로 사람의 삶을 재단할 수 있는 것도, 그 다음을 재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는 살아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또한 종우는 수환에게 별 상관도 없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기의 내밀한 기억을 고백함으로써 역으로 수환의 죽음이 종우에게 거세게 밀려들어간다. 수환과의 삶 중 정말 짧은 시간만을 함께했지만, 종우에게 있어서 수환은 이로써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더욱이 수환은 영경에게 두 개의 눈동자로 계속해서 나타난다. 결국 수환의 삶과 죽음은 0이 아니었던 셈이다.

소설은 본질적으로 일반론인 걸지도 모른다. 영경과 수환의 이야기를 그저 불쌍한 주인공들의 비극으로만 보아서는 많은 것을 놓친다. 이미 소설 안에서 작용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독자들에게도 영경과 수환의 이야기가 번진다. 일반론적으로. 인간은 타인의 삶을 기억한다. 그래서 인간은 0이 될 수 없다.


기울임체 ; 권여선. (2013). 봄밤. 문학과사회, 26(2), 각각 121p, 1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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