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요즘들어 타인의 고통을 너무 쉽게 만나고 있다. 실제로 근 몇년 간 수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또 도저히 어루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아픔들이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을 냉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SNS만 열면 쏟아져 나오는 타인의 아픔들, 그 아픔들을 ‘위로’하는 수많은 발언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야만 하겠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는 ‘고통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고통까지 상품화해버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진열대의 상품을 보듯이 타인을 만날 수 있다. 터치 몇 번으로 내 눈앞의 액정 안에서 편리하게 보고 듣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말도 가벼워졌다. ‘그래서는 안 돼’, ‘저런, 아프겠다’, ‘우리 바르게, 착하게 삽시다’ 따위의 말들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약속이 돼 버렸다.

말은 화폐와 닮았다. 사람들과 소통(교환)할 수 있는 합의 혹은 약속이다. 그런데 닮는 정도를 넘어서 말이 정말 화폐로 기능할 때가 있다. ‘다른 말’이 용납되지 않을 때다. 그 때 말은 발화자가 정체성을—특히 ‘바람직한 것’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어떤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돈으로만 물건을 살 수 있는 시장교환 체계와 같다. 문제는 물건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는 물신화의 사태이며,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말한다’는 일에 이런 물신의 논리가 그대로 기입되어버리는 것이다. 좋아요 몇 번, 리트윗 몇 번이면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 된다. 대신 그 과정에서 배제되는 말들이 생긴다. 복잡한 것은 나쁜 것이 되고 단순하게, 좋은 게 좋은 것이다.

그래서 도발적인 질문을 하나 해야겠다. 타자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할 수 있다, 라고 쉽게 말하고 쉽게 슬퍼할 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 모든 게 가능한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다음 ‘가능하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굳건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어서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타인의 고통을 쇼핑몰 진열대에서 빼낼 수 없다. 이를테면 진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나로서 타인을 만나는 것인지, 만들어진 의무감으로 만나는 것인지. 어려운 문제이며, 어렵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일 테다. 문학은 타자를 담을 수밖에 없다. 타자를 편리하게 소비하지 않으면서, 무신경하게 동일화하거나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결국 타자를 말해야만 하는 장르다. 그러나 언어를 통하는 한 그 시도는 실패한다. 문장을 쓴다는 것—누군가를 주어 혹은 목적어의 자리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동시에 대상을 어떻게든 규정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그런 모순에 대한 고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런 고민 자체다.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일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일은 그러므로, 문학의 목표이며 과정인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두 편의 작품—박솔뫼의 「겨울의 눈빛」, 한강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을 다룰 것이다.1 두 작품 모두 타자에게 다가간다는 일의 의미를 엄밀하게 곱씹고 있다. 비교가능한 부분들도 분명히 있어서, 서로 교차하면서 그 차이에 의해 어떤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는지도 눈여겨봐야 하겠다.

 

1. 무력감, 혹은 모멸감

편리함의 반대편에는 무력감이 있다. 타자와 나는 공약 불가능한 남, 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회의에 빠지게 된다. 엄밀히 말해 너의 아픔을 내가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에서 온 무력감은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한다. 0에서 다시 시작할 때에야 가식 없이 타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렴풋하게나마 열린다.

이를테면, 내가 있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박솔뫼의 「겨울의 눈빛」에서 화자는 고리발전소의 사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리핵단지는 혹은 고리발전소는 뭐랄까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뉴스에서 나오는 말 같은 것이고 지난 정권의 금융정책이나 무역지수, 여야결의안 같은 그런 말 있잖아.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알아야 할 것 같지만 영영 알지 못하는 그런 수많은 말들 있잖아.”(135p) SNS에서 접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실감할 수 있는가. 너무나 거대한 일들이 너무나 빠르게 소식이 되어 날아온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은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것들을 내 시야 안에서 감당해야 할 때, 단지 ‘여기가 거기가 아니라는 사실’로 위안해야 할 때 사람은 쉽게 무력해진다. “지금 우리는 K시에 있다. 그렇지? 고리가 아닌 K시에 있지. 그러므로 우리는 괜찮으며 괜찮겠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질문이란 질문은 모두 고개를 젓게 만든다. 질문 앞에 서지 못할 사람으로 간신히 어딘가에 서 있다. 그러니까 K시에. 고리와 70km쯤 떨어진 K시에. … 왜 나는 모든 질문 앞에서 비틀거리나? 나의 이 모든 이유들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나?”(149p)

그들의 고통과 멀리 떨어져 안전한 ‘여기’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기력한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다. 아픔이 꼭 ‘그들’의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게 나였을 수도 있는데 하필 그러지 않아서, 나는 살아남은 사람이 된다. 이로써 살아남은 자들의 지반이 흔들린다. ‘여기’에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은 일종의 모멸감이다. “내가 아는 누구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148p) 혹은, “남자의 친구는 빚을 갚으러 고리에 갔고 나의 친구는 회사에 매일같이 지각을 하고…”(149p) 살아남은 자로서 무거운 질문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박솔뫼의 소설에서 화자의 삶에 다른 곳의 사건이 끼어들고 있다면, 한강의 소설에서는 화자가 타인들의 서사에 기입된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화자 k씨는 그녀와 상관없었던 갈등 속으로 내던져졌다. 그럼으로써 의도치 않게 갈등의 증인이 되었고, 당사자들이 먼저 죽어버린 후 그들의 고통을 곱씹는 사람이 되었다. “나만 살았어. 하마터면 그렇게 소리내 중얼거릴 뻔했다.”(306p) 우연 위에서, 혹은 시간 위에서 k씨는 ‘나만 살았다’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그녀가 희곡을 마무리하지 못했던 것은 ‘잃어버린 사람들’의 고통이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녀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319p) 때문이었다.

이런 무력감의 반대편에서 편리함이 자란 것이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데는 왜 하필 저 아픔이 나의 것이 아닌지를 고민할 틈이 없다. 대신 짊어진 질문에 대답했다는 착각이, 타인의 고통에 참여했고 이걸로 됐다는 위안이 있다. 이에 대한 박솔뫼의 냉소는 신랄하다. “감독은, 모자는 마치 ...... 마치 무언가를 잊고 싶다는 것처럼 자다가 고개를 흔들었어요 하고 말했고 나는 그 대사가 좀 웃긴다고 생각했고 이건 뭔가 좀 뻔하잖아 싶어서 웃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는 그 장면을 혼자서 곱씹었다. 개가 사고에 대한 공포로 악몽을 꾸는 것이라 모두들 생각하고 싶어했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개의 꿈을, 개가 꾸는 꿈을 하고 입에 올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바로 웃음이 나왔다.”(139p)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 사건은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게 편집된다. 자극적인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건 간에 슬퍼하기 쉬운 모습으로 각색되고 유통되어 사람들을 자극한다. 그런 편집의 결과물을 두고 사람들은 사건을 직접 목격했으며 그로써 고통을 분유하고 참여했다는 착각을 한다. 무력감을 피하기 위하여 사건에 참여한다는 감각을 강박적으로 찾아다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솔뫼가 지적하듯이, 그건 여지없이 기만이다.2

 

2. 서사—타자. 시공간에 대하여.

그러나 두 작품이 무력감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잠깐 서술했듯이, 박솔뫼는 타인의 고통이 나의 삶에 끼어드는 형태로, 한강은 내가 타인의 고통 속에 기입되는 형태로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바로 이 전개 방식 자체에 나름의 답이 있다.

소비적인 사건 참여에서 배제되는 것은 타인의 ‘서사성’이다. 어떤 시점의 한 사람이 만들어지려면, 혹은 사건 하나가 구성되려면, 거기 얽힌 수많은 인물들과 다른 사건들이 필요하다. 인간 그리고 세계는 그 자체로 잘 짜여진 이야기인 것이다. 소비하기 편하게 사건을 편집하는 과정에서는 그 사연들이 배제된다. 소비자들에게 닿는 것은 고통을 위한 고통일 뿐, 사건의 본질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따라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그 서사성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동일화하게 된다. 결국 편집 이전의 온전한 상태로 ‘그들’을 만나는 것이 문제다.

타인의 서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공간’에 주목해야 한다. 「겨울의 눈빛」 은 도입부에서 K시의 극장을 이야기한다.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 설명이 자세하다. “그 극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는 극장이 서 있는 거리에서 시작하여 그 반대편 극장까지 머릿속으로 한발씩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133p) 말하려는 ‘단 하나의 극장’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두 개의 극장까지 이야기하는 구체성을 보여준다. 이로써 확보해내는 것은 K시의 구체적인 공간감이다. K시라는 공간을 극장에 정확히 정박시키는 것이다. 이는 해운대라는 공간을 실감하는 열쇠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요트 경기장 인근에 있던 작고 오래된 극장. 나는 K시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아 저 오래된 극장은 저것대로 해운대의 유일한 극장이었겠구나 생각한다.”(137p) 화자가 K시의 극장에서 그녀 나름의 시간을 보냈듯이, 해운대의 사람들도 그 극장, 혹은 그런 성격의 어딘가에서 그들 나름의 시간을 보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이는 해운대와 그곳의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실체임을 감각하는 일이다. ‘여기’가 아닌 ‘그곳’이지만, 그곳과 그들의 서사성이 성공적으로 확보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삽입된 다큐멘터리는 ‘모래밭’과 ‘파라솔’ 등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삶의 터전으로서의 해운대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러면 “해운대, 이제는 갈 수 없는 곳, 그런데 거기가 어떤 곳이었냐면.”(138p) 이라는 연결이 비로소 자연스러워진다. 이제 해운대의 사건은 SNS로 접하는 뜻모를 아픔이 아니라 그곳을 터전삼아 살던 사람들의 서사 전체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까지가 ‘공간’으로서의 해운대가 화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끼어드는 방식이라면, 다른 편으로 ‘누군가와의 경험’으로서의 시간축이 있다. 소설은 잊었던 K시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악을 듣는 것으로, 그리고 특별한 이름을 만나는 것으로 화자는 K시를 떠올린다. 수평적으로 K시와 해운대를 연결시켜 놓고, 시간이 지난 후 수직적으로 K시의 극장에서 일어났던 ‘그 일’과 ‘그 사람’을 귀환시키는 방식이다.

극장에서 해운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화자는 어떤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해운대의 서사 속에 있었던 사람이고, 그와의 교감을 통해 해운대의 서사는 화자의 서사의 일부가 된다. “남자의 친구는 빚을 갚으러 고리핵발전소 사고 복구사업에 지원했다가 죽었다고 했고 또다른 예술가 친구는 개인작업을 위해 고리로 갔다고 했다. ... 그때는 죽은 사람은 없고 모두 살아 있었고 신기하게도 지저분한 사람 없이 모두 청소를 열심히 했다고 했다.”(147p) 살아있었던 해운대의 사람들이 ‘남자’를 통해 화자의 이야기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찾아온 그날의 시간을 우연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3년 전의 일들이 시간축을 타고 ‘지금 여기’로 넘어온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미 공간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해운대의 서사는 화자 자신의 서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라앉아 있던 것은 떠오를 때가 되어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은 것이다.”(133p) ‘그곳’의 ‘그들’이 온전한 서사로서 내 삶에 기입된 후에는 우연과 필연의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이미 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은 언제든지 내 삶에 호출될 수 있다. 그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아픔을 ‘분유’할 수 있게 된다.

한강의 작품에서 k씨가 임 선배와 경주 언니의 이야기에 엮여들어가는 것은 십칠 년 전 김포 바닷가의 콘도에서부터다. 둘이 해변을 걸으며 뒤따르는 k씨를 돌아보는 시선은 “제발 이곳에 둘만 남겨놓지는 말아달라고, 이 시간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곤란과 괴로움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청하는 것 같은 이상하게 간절한 시선이었다.”(296p) k씨는 일찍이 구성되어온 일련의 사건들에 의도치 않게 ‘기입된’ 존재다. 말하자면 ‘하필 내가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하필 나인 것’이다. 우연히 끌어들여진 제3자이지만 어떤 요청으로 인해 제3자일수만은 없게 된 이 사태는 k씨의 위치를 사건의 안도 바깥도 아닌 곳으로 부유시킨다. 이 부유성이 바로 k씨를 둘의 ‘서사’에 온전히 참여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k씨는 작품 내내 지난 일들을 반추하는 것이다. k씨는 임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계속해서 과거로 되돌아간다. 박솔뫼의 작품이 먼저 공간적인 연결에 공을 들였다면, 한강의 작품은 시간축을 주로 넘나들며 타자를 재구성하는 셈이다. k씨가 그들과 보낸 시간은 주로 그들의 아픔을 듣고 목격하는 시간이었다. 기나긴 사연을 나눠 가지는 것만으로 그녀는 이미 둘의 사건에 참여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죽고 3년이 지나 임 선배가 k씨 앞에 나타난 것의 이유는 충분하다. 불가해한 것으로 남았던 셋의 고통을 어떻게든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셋의 이야기를 반추해 보는 방식으로.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k씨의 미완성 희곡은 그런 서사성의 은유일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다음 장면이다. 그녀의 희곡에서 소녀와 승려는 이야기를 나눈다. 소녀는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만 함께 있어달라고 승려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눈 한 송이는 녹지 않고, 승려는 왜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눈이 녹지 않냐고 소녀에게 묻는다. 소녀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317p)

시간 밖에 있다는 것. 이것은 한강이 선택한 작품의 전개 방식 자체다. 계속해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의 제약을 초월한다는 뜻, 즉 시간 밖에서 서로를 만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임 선배가 꿈에서 k씨를 만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서로 악수 한 번 나누지 않았던 둘은 딱 한 번 맞닿았다고, k씨가 임 선배의 딸만큼 어려진 모습으로 만났다고 서술되고 있다.3 이를테면 ‘무시간성’이라 하겠다. 시간축을 넘나들어 서로의 과거를 떠올림으로써, 타인의 고통은 접근가능해지는 것이다.

 

 

3. 나가며 : 부처가 아니라 갱스터

k씨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가 되지 않고 관음보살이 되지 않고, 나무 욕조에 담긴 물이 황금이 되지 않고 그들이 평화를 얻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한강, 320p) 또 박솔뫼의 작품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차라리 한국수력원자력공사를 폭파하고 그곳의 간부들을 납치해서 인질극을 벌이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영화를 보고 싶었다.”(박솔뫼, 143p) “꼭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다면 갱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죄책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저어함이라는 것을 원래부터 모르는 사람들인 것처럼 뭔가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146p) 우리는 어쩌면 스마트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하는 것만으로 더 나은 세상을 오기를 바란 건지도 모른다. 상처와 고통이 없는 세상이라는 불가능한 기적을 너무 손쉽게 바란 건지도 모른다.4 그러나 그렇게 편리한 방법으로 평화는 오지 않는다.

박솔뫼는 ‘차라리’ 가식 없이 깨부수는 영화를 만들라고 말한다. 강아지가 핵발전소 사건을 두려워한다고 믿어버린다든가 하는 편리한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상품화하고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소설의 화자가 바라는 것은 “비에서 시작해서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고 그저 비를 따라가는 것”(150p) 이야기와 ‘모멸감’을 끌어안고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래 살아남”(152p)는 것이다. “내가 손에 쥔 이 감정을 마음을 잊지 않는”(149p) 것이다. 이런 서술들에서 박솔뫼는 냉소적인 문체 사이로 일말의 빛을 보여주고 있다.

한강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조금 더 적극적이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은 일종의 비평적 성격을 지닌다. 앞서 살펴봤듯이 작품은 시간축을 넘나들며 지난 일들을 반추하는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 자체로 과거와 과거의 일들을, 그때 그곳에 있었던 타인들을 서사화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비평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대상은 단순 대상 이상으로 의미화하고 온전한 서사로 보존될 수 있다. 이때 비평이라 함은 ‘분리하다’, ‘선택하다’, ‘판단하다’, ‘결정하다’, 심지어 ‘싸우다’라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즉, 텍스트를 왜곡하는 것들을 치우고 어떤 지배나 억압 구조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5 혹은 ‘타자—고통의 물신화’를 전복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이 도래하리라고 손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타인과 타인의 고통은 진열대의 상품이 아니라 지난하게 구축된 서사, 온전히 보존해야 하는 세계 자체다. 그 앞에 서서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회의에 빠져서도 안 된다. 비평가로서 우리는 무엇이든 말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타인의 고통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배제되었는지를 발견할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다. 발화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누구를 잊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6 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SNS나 하며 부처를 기다릴 게 아니라 직접 때려부수는 갱스터가 되어야 한다.

 

나가며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타자에 참여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타인의 고통이 범람하는 지금, 이 질문들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SNS 장에서 활성화되는 공론들의 순수한 의도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엄밀’해져야 할 때가 있으며, 바로 지금이라는 이야기다. 진정성의 문제며 보다 굳건한 가능성의 문제다. 0에서 시작해서 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손쉽게 소비하지 않고 궂은 비평가의 일을 떠안아야 한다. 무력감에서 출발해서 가능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계는 수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텍스트를 타자에게 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이미 스스로 말하고 있는 서사 자체로서의 타자를 맞이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말하건대 우리는 모두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 결국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각주>

1) 박솔뫼. (2013). “겨울의 눈빛”. 창작과비평, 41(2), 132-152.

  한강. (2015).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창작과비평, 43(2), 289-326.

2) 박솔뫼, 147p

3) 한강, 151-152p

4) 김사과. (2017). “우산 속 세계”. 문학3, 통권 제 1호, 창비, 248p

5) 문강형준. (2016). “어떻게 하면 통치되지 않을 것인가”, 문학동네, 2016년 봄호

6) 오카 마리. (2016).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현암사, 182-1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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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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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말하기—비트겐슈타인의 『논고』 독해


 

0.

“이 책의 핵심은 윤리적인 것입니다.”1

비트겐슈타인은 잡지 Des Brenner의 편집인 폰 피케르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뒤이어서 그는 이렇게 쓴다 ; “지금은 들어있지 않지만 내가 한때 서문에 포함시키려 했던 문장 하나를 지금 써보겠습니다. 내가 쓰려고 했던 문장은 이렇습니다. 내 책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제시된 것과 여기에 쓰지 않은 모든 것들. 그리고 바로 이 둘째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책은 윤리적인 것의 영역에 대하여 말하지만 내부로부터 한계가 지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러한 한계를 짓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오늘날 많은 다른 사람들이 헛소리를 하고 있는 분야에서, 나는 그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킴으로써 모든 것을 확고하게 제자리에 놓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

 

긴 인용으로 에세이를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최선의 방법이라 믿는다. 노골적으로 난해한 저서인 『논고』이니만큼, 그 독해에 있어 ‘열쇠’가 필요했다. 치사하지만 저자 자신의 말을 열쇠삼아 『논고』의 독해를 시도하려 한다. 다만 본 에세이의 목적이 『논고』를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데 있음을 확실히 해둘 것이다. 더 욕심을 내자면 『논고』의 외부에서 『논고』를 조망하고 이 기념비적인 저서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차적인 목적이 『논고』의 독해 자체에 있으므로, “윤리”라는 단어로 에세이를 열었으나 거기 얽매이지는 않으려 한다. 이 편지를 인용한 것은 여기에 『논고』를 탄생시킨 ‘방법론’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논고』의 독해에 있어 등대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단어지만, 거기 다다르는 ‘배’로서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론 또한 확고하다. 에세이의 목적에 따라 일단은 ‘배’에 집중할 것이다.

‘내부로부터’ 한계가 지워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복건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던 것은 ‘윤리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윤리에 대해 사람들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그는 썼다. 비유하자면 그의 작업은 영점을 찾는 일이었다. 헛소리를 반복하기보다는, 윤리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하여 먼저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특정하려 했던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은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구체적 출발점이었다. 그런데 말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넓혀나가다 보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경계가 나타난다. 그러면 그 너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내부로부터의 한계 짓기가 뜻하는 바는 이것이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한 엄밀성을 추구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의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방법론이 된 셈이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서문에서 이렇게 쓴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문제들이 제기되는 이유는 우리의 언어가 갖는 논리가 오해되었음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말’에 천착한 것은 그 사유의 연원상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만 언어의 본질과 구조 및 기능에 대한 탐구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는 점 또한 유의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특정짓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닿기 위한 우회로였다. 그렇다면 그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두 말하려 한 셈인데, 이는 곧 세계 전체와 같다고 해야 한다. 실제로 『논고』에서 언어와 세계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분석된다. 다시 말하여 언어에 천착하는 일은 곧바로 세계 전체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이에 관해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문장의 본질을 해명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의 전부다. 고로 모든 사실의 본질을 명시하는 일이다. 모든 존재의 본질을 명시하는 일이다.” (일기, 209p) 그의 사유에는 언어와 세계라는 선명한 축 두 개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때 요청되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하여 말한다” 라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가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지다. 말인즉, 언어와 세계가 연결된다면 언어와 세계를 관통하는 공통의 구조가, 혹은 어떤 일관된 관계라도 주어져 있어야 한다. 이 고민은 그의 초기 사유를 이끌어 간 추동력이었다. “나의 어려움은 종이 위의 기호들과 바깥세상에 있는 사태 간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데 있었다.” (일기, 113p) “세계에는 선험적 질서가 있는가? 만약 질서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일기, 287-9p) 그는 나름의 답을 내렸고, 이는 『논고』의 근본 가정으로 이어진다. 바로 ‘논리’다.

언어의 구조, 나아가 세계의 구조는 다름아닌 논리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이를 ‘요청’ 혹은 ‘가정’이라고 쓴 데는 이유가 있다. 다음은 이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몇 가지 진술들이다. “논리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일기, 25p) “왜냐하면 논리학에는 하나의 보편적 의의를 갖는 어떤 심오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탐구, 89) “즉 사고의 본질인 논리는 하나의 질서, 사실상 세계의 선험적인 질서, 다시 말해 세계와 사고 모두에 공통된 가능성의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탐구, 97) “... 물론 수정처럼 맑은 논리의 정확성은 탐구의 결과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요청”(이다.) (탐구, 107) 혹은 『논고』에서는 이렇게 나타난다.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3.03) “논리학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 논리학에서 가능한 모든 것은 또한 허용되어 있다. 어떤 뜻에서, 우리는 논리학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 (5.473) ‘어째서’ 논리가 언어와 세계의 선험적 질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증은 충분히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마 그는 이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논리’라는 주제의 중요성을 격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작업은 논리의 기초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본질까지 확장되었다.” (일기, 411p) 도입의 경로가 어떠했든 그 중요성은 변하지 않는다.

 

이로써 언어와 논리, 그리고 세계라는 『논고』의 세 중심축이 세워진다. 본 에세이는 이 구도에 따라 『논고』를 조망할 것이다.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특정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론 또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논리학에 기반하여 언어로 세계를 얻는 순서로 이어졌지만, 『논고』는 세계를 먼저 논한다. (1.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별다른 차이는 없다. 전술했듯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언어와 세계는 거울상 양쪽과 같다. 또한 『논고』에서 언어와 세계를 논하는 것은 결국 ‘존재론’이라는 큰 틀에서 진행되는데, 이 때문에 독해를 계속하다 보면 사실상 언어와 세계 사이의 순서를 따지는 일이 무의미함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본 에세이는 편의상 『논고』의 실제 순서를 일단 따라갈 것이다.

 

 

 

1.0

먼저 『논고』를 개괄하자면 다음과 같다.

—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다. (1~2.0) 이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먼저 세계를 정의한다.

— 우리는 사실의 그림을, 즉 세계의 그림을 그린다. (2.1~2.2) 그 중 ‘논리적 그림’을 ‘사고’라 한다. (3~3.0) 사고는 언어, 특히 명제로써 표현할 수 있다. (3.1~3.5)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이론’을 매개로 하여 세계와 언어를 일단 ‘대응’시킨 것이다.

— 그리고 이 대응은 그림 이론의 연속에서 강력한 ‘연관’으로 확장된다. (4~) 사고는 ‘뜻이 있는’ 명제다. 명제의 뜻을 판별하려면 세계와 직접 대응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어떻게’ 세계를 말하는지의 원리가 드러난다. 여기서 요소 명제가 세계에 닿는 언어의 ‘촉수’로서 등장한다.

—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의 목적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언어의 최소 단위인 요소 명제를 발견했으니, 이제 언어의 구조와 기능의 분석이 어느 정도 끝난 셈이다. 다음으로 그는 방향을 반대로 바꾼다. 즉, 요소 명제로부터 다른 모든 명제를 산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바로 진리 함수 이론이다. (4.26~5.5) 이로써 언어의 한계, 즉 세계의 한계가 확보된다. 이는 ‘나’의 한계와 다르지 않다. (5.6 유아론)

— 지금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의 힘을 빌렸다. 이제 그는 논리학 자체를 되돌아보며 ‘세계의 질서’를 찾는다. (6~6.124) 이로써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부분에서는 수학이나 과학, 미학, 윤리학 등을 고찰한다.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계에서 그림을 거쳐 언어로, 언어에서 직접 세계로. 그러면 세계의 한계가, 세계의 질서가 드러난다.





1. 세계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1) 충분히 알려진, 첫 문장이다.2 설명이 뒤따른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다. (1.1) 왜냐하면 사실들의 총체는 일어나는 일을 확정하며, 그럼으로써 일어나지 않는 일 또한 확정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사실들로 나뉜다.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라는 선언에는 의미가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있다면, 그것들의 완전한 목록은 세계를 완전히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물만으로 진술이 충분한가? 방 하나를 진술해야 한다고 치자. 세계가 사물들의 총체라면, ‘책상, 의자, 책꽂이, 형광등, 에어컨, ...’ 등 사물의 나열만으로 방을 완전히 진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 그것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서로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지까지 진술되어야만 방 하나를 완전히 진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태(atomic facts)들의 존립이다. (2)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다. 먼저 대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하자. (여기서는 개략적인 수준에 그치며 보론에서 완성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예를 든다 ; 우리가 얼룩점을 관측하고 있을 때, 그 얼룩점이 특별히 붉은 색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떤 색을 지니기는 해야 한다.” ‘색깔 공간’을 지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비슷하게 음은 어떤 높이를, 촉각의 대상은 어떤 굳기를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공간과 시간과 색깔(채색성)등이 있겠는데, 이런 것들을 대상의 ‘형식’이라 한다. 형식은 대상들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2.02) (2.0141) 그리고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형성한다. (2.0272) 이제 사태와 대상 간의 관계를 정확히 하자.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다. (2.012) 말인즉, 어떤 대상의 형식은 그 대상이 어떤 성질의 스펙트럼을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며, 이는 어떤 사태를 형성할 수 있는지 또한 결정한다. 방 안에 책상과 의자와 책과 화분의 꽃이 있다고 하자. 책상과 의자가 세트로 있으며, 그 위에 책과 화분이 올려져 있다. 방 안 대상들의 모든 배열과 관계성 총체를 진술했다면, 그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은 사태로 분해될 수 있다. 사태를 ‘atomic’ fact라고 영번역하는 것을 보면 사태는 원자적인 단계의 무엇이다. 예를 들어 ‘책상과 의지와 책과 화분이 어떠한 공간적 관계에 있다’, ‘책은 어떠한 색이다’, ‘꽃의 향기는 어떠하다’, ‘방의 밝기는 어떠하다’ 와 같은 진술들로 사실 전체를 분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첫 번째 진술은 공간적 관계, 두 번째 진술은 채색성, 세 번째 진술은 향, 네 번째 진술은 명도로, 각기 다른 ‘형식’을 진술하는, 네 개의 ‘사태’다. 이를테면 첫 번째 경우는 ‘대상들의 배열’이 사태를 형성하는 가시적인 예일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꽃의 향이 얼마나 밝다’라는 진술은 성립하지 않는다. 꽃의 향은 향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 명도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기라는 ‘대상’은 명도에 관련한 ‘사태’를 구성할 수 없다.

(사실 이 예시는 완벽하지 않다. 보론으로, 이후 단순자로서의 ‘대상’ 개념에 관련하여 언어-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종합할 것이다.)

이제 사실과 사태 간의 관계를 이야기할 수 있다. 다시 쓰자면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이다. (2) 사태들의 연합이나 배열이 아니라, ‘존립’이라고 했다. 한 번만 더 방으로 돌아가자. ‘책상 위에 책이 있다’라는 진술과 ‘책상 아래에 책이 있다’라는 진술은 모두 사태가 될 수 있다. 책상과 책 모두 공간적 형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혹은 ‘책은 검정색이다’, ‘책은 하얀색이다’라는 두 진술도 마찬가지로, 책이 채색성의 형식을 가지므로 동시에 사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이 되는 것은 이 사태들 중 ‘존립하는’ 사실들이다. 책상 위와 아래에 한 책이 동시에 있을 수는 없다. 실제로 책상 위에 책이 있다면, ‘책상 위에 책이 있다’라는 사태가 ‘존립하는’ 사태가 된다. 그리고 ‘책상 아래에 책이 있다’는 사태는 비존립하게 된다. 그런데 책과 책상은 공간적 형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사실상 책과 책상 간의 위치적 관계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가능하다. 옆, 뒤, 앞, 45도 각도의 어딘가, 책상 기준 모든 위치에 책이 놓이는 ‘사태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책상 위에 책이 있다’라는 사태가 존립한다고 판정된다면 나머지 사태들은 모두 비존립하는 것으로 판정된다. 이런 식으로 가능한 여러 대상군과 그 형식으로 말미암은 여러 종류 사태들의 존립/비존립을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존립하는 사태들의 총체가 세계이며 (2.04)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 전체가 세계이기도 하다. (2.05, 2.06, 2.063)

이로써 비트겐슈타인의 세계관을 개략적으로 그리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세계에서 언어로 나아갈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세계와 언어 간의 직접적 관계를 도출할 수는 없으므로 다리 하나를 건널 것이다. 그 다리는 바로 ‘그림 이론’이다.

 

2. 그림 이론. ( “나는 문장이 어떤 의미에서 사태의 영상인지를 명시할 수가 없다! 모든 노력을 포기해버리기 일보직전이다.” 일기, 237p )

우리는 사실들의 그림을 그린다. (2.1) 그림은 현실의 모형이다. (2.12) 우리가 정말로 그림을 그리는지, 비트겐슈타인은 논증하고 있지 않다. 그가 ‘누구나 알 수 있다’며 당연하게 생각한 점들 중 하나다. 반증이 어렵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세계의 상을 우리 안에 맺는다는 발상은 자명해 보인다.

그림은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을 표상하며 (2.11) 그림의 요소들은 현실의 대상들에 대응한다. (2.13, 2.13) 그림에서 요소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2.141)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렇다면 요소들에 대응하는 대상들도 실제로 같은 방식으로 관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2.15) 그렇게 그림은 현실과 연결된다. (2.1511) 우리가 세계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일이었으나 그림이 실제로 세계와 어떤 관계인지, 정확한 모사인지 불완전한 재현인지 혹은 아예 허상인지는 주어져 있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이 푼 문제는 이것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 요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관계만큼은 현실과 정확히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과 현실의 이러한 관계를 ‘모사 관계’ 혹은 ‘모사 형식’이라고 한다. (형식은 앞서 밝힌 의미와 같다. 모사 형식은 사물이 그림의 요소들처럼 서로 관계 맺고 있을 ‘가능성’이다. 2.151) 모사 관계는 그림의 요소들과 실물들과의 짝짓기로 이루어진다. (2.1514) 이는 말하자면 그림 요소들의 촉수다. (2.1515) 사실이 그림이 되려면 그림과 사실 사이에 공통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모사 형식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2.16(1), 2.17)

그런데 앞서 대상의 형식이 어떤 식으로 사태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지 이야기한 것처럼, 모사 형식 또한 비슷하게 기능한다. 그림은 자신과 ‘같은 형식을 가지는’ 현실을 모사할 수 있다. 공간적인 그림은 공간적인 것을, 채색 그림은 색채적인 것을 모사한다. 그러므로 그림이 그 모사 형식 밖에 서 있을 수는 없다. (2.171, 2.174) 그렇다면 어떤 형식의 그림이든 ‘세계를 모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므로, 모든 그림이 공유하는 공통의 모사 형식이 있어야 한다. 그 형식은 바로 논리다. 모든 그림이, 그 형식이 어떠하건, 어쨌든 현실을 모사할 수 있기 위해 현실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논리적 형식이다. 그리고 논리적 형식은 현실 자체의 형식과 같다. (2.18) 모사 형식이 논리적 형식일 때 그 그림을 논리적 그림이라고 부르는데, 그림은 세계를 모사하는 것이므로 모든 그림은 최소한 논리적 그림이기도 하다. (2.181,182) 반대로 논리적 그림이라면 세계를 모사할 수 있다. (2.19) 여기에는 논리학을 궁극적 방법론으로 삼은 비트겐슈타인의 시점이 드러나 있다. 글을 열며 이야기했던, 논리학에 대한 그의 ‘믿음’이 보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림이 ‘어떻게’ 현실과 대응하는지 실마리를 잡은 셈이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됐다. 정확히 말해 그림은,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의 가능성을 묘사함으로써’ 현실을 모사한다. (2.201) 즉 그림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2.203) 그림은 현실과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참이거나 거짓이다. (2.21) 그림이 묘사하는 것, 을 그림의 ‘뜻sinn’이라 한다. 그림의 뜻이 현실과 일치하는지 불일치하는지, 그림이 참인지 거짓인지 인식하려면, 우리는 그림을 현실과 직접 비교해야 한다. 그림 자체만으로는 그 뜻이 참인지 거짓인지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선험적으로 참인 그림도 존재하지 않는다. (2.22 이하)

인간의 사고가 이렇게 성립하는 것이다.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어떤 한 사태를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사태에 관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3, 3.001) 그림은 논리에 따라 현실을 모사하며 논리는 현실 자체의 형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논리적인 것을 사고할 수 없다. 사고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비논리적인 것을 묘사하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점의 좌표를 제시하려는 것’과 같다. (3.02, 03 이하)


3. 명제 (그림 이론의 연속) ( “문장의 본질에 대한 이해만 있다면 전부 스스로 해결될 텐데!” 일기, 171p )

이제 언어로 건너간다.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다. (4.001) 명제는 사고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언어 기호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기호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명제에서 낱말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 명제가 문자 기호 대신 공간적 대상들의 합성이라고 상상해 보라. 사물 상호간의 공간적 위치가 ‘사실’을 형성하듯, 낱말들 사이의 관계가 명제를 형성한다. 낱말들의 단순 혼합물이 아닌 것이다. (3.1 이하)

명제 속에서 사고는, 명제의 요소들이 사고의 ‘대상’들과 대응하도록 표현될 수 있다. ‘대상’은 세계관에서 원자적 역할을 한다. 대상에 대응하는 명제의 요소들을 비트겐슈타인은 ‘단순 기호들’, 혹은 ‘이름’이라고 부른다. (3.221까지) 즉, 이름은 대상을 의미3하며 대상은 이름의 의미이다. (3.20 이하) 이름은, ‘필요하다!’ 명제의 뜻이 확정되려면 명제의 완전한 분석은 단 하나여야 한다. 그러려면 명제를 분해했을 때 최소 단위로서 특정되는 무엇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명제의 단순 기호, 즉 이름이다. 명제는 이로써 ‘특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며, 명제는 ‘분절되어 있다’라는 말이 가능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이름은 더 이상 해부될 수 없는 어떤 것, ‘원초 기호’4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3.21~3.26)

명제는 이로써 현실의 그림이 되며, ‘뜻’을 가진다. 따라서 사고를 다시 설명하자면, ‘뜻이 있는 명제’다. (4, 4.01) 그런데 ‘뜻이 있다’는 말은 숙고할만하다. 명제는 뜻을 보여 주며, 명제가 참이라면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여 준다. 현실이 명제에 의해서 그렇다 또는 아니다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다. (4.022,023) 이로써 현실과 명제 사이의 강한 연관이 성립한다. 앞서서 현실은 (비)존립하는 사태들의 총체라고 했다. 그렇다면 명제를 사태와 연관지을 수 있게 된다. 명제는 사태의 기술이다. 즉, 사태들의 존립과 비존립을 묘사한다. (4.1) 명제의 뜻은 사태들의 존립/비존립 가능성들과 명제와의 일치/불일치이다. (4.2) 즉, 명제는 사실에 대응한다.

 

3.1 요소 명제 ; 대응의 완성

여기까지가 ‘명제’와 ‘사실’의 대응/연관 과정이다. 그런데 앞서 고찰했듯이 ‘사실’은 존립하는 사태들이다. 그렇다면 명제 또한 더 작은 단위로 분석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태에 대응하는 명제의 구성 요소로서 ‘요소 명제’를 제시했다. 가장 단순한 명제, 즉 요소 명제는 어떤 ‘한’ 사태의 존립을 주장한다. (4.21) 사태는 또한 대상들의 결합이었다. 따라서 요소 명제 또한 한번 더 분석될 수 있다. 요소 명제들을 이루는 것은 ‘이름’이다. 요소 명제는 이름들의 연관, 연쇄다. (4.22) 따라서 『논고』의 다음 진술들이 가능해진다 ; 명제가 요소 명제로 이루어져 있으며 명제는 사태들의 기술이므로, 요소 명제가 참/거짓이면 사태는 존립/비존립한다. (4.25) 요소 명제들의 진리 가능성들은 사태들의 존립/비존립 가능성들을 의미한다. (4.3)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가능성들과의 일치 및 불일치의 표현이다. (4.4) 요소 명제들의 진리 가능성들은 명제들의 참과 거짓의 조건들이다. (4.41) 등등.

이로써 세계와 언어 간의 대응 구조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며 언어는 명제들의 총체다. 사실은 사태들의 존립/비존립이며 명제가 이를 묘사한다. (사실 - 명제) 요소 명제는 ‘한’ 사태의 존립을 주장한다. (사태 - 요소 명제) 사태는 대상들의 결합이며 요소 명제는 이름들의 연관, 연쇄다.5 (대상 - 이름)

 

보론 ; 세계와 언어의 존재론적 종합

여기까지의 고찰들을 정리하여, 흐름을 위해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부분들을 보론하려 한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사유를 전개한 방식이 굉장히 산발적이었기 때문에, 『논고』의 순서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개념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여러 개념들이 선후순서 없이 서로를 설명하고 있는 꼴이다. 그래서 잠깐 『논고』의 밖으로 나오려 한다. 외부에서 개념들을 어떤 코드에 따라 조망함으로써 이해를 보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바로 ‘존재론’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와 세계 간의 밀접한 연관으로써 세계 전체에 대한 어떤 본질을 설명하려 했다고 할 때, 그의 연구는 존재론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이 보론에서는 대상과 요소 명제 등을 ‘단순자’의 개념을 빌어 재조명한다.6

존재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게 정론이다. 존재는 규정되어 있는 명확하고 고유한 존재이면서도 다른 존재와의 연관 속에서 무규정적이고 복합적이다.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그간의 연구들은 ‘궁극적 단순자’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하여 나름의 답을 내놓았지만, 플라톤 등의 전통적 존재론은 이 역설을 해소하지 못했다. 궁극적 단순자를 찾아냈다고 생각으나 서로 다른 존재들 간의 결합을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맥락에서 일종의 전회를 꾀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는 사람이 그것을 ‘말함’으로써 성립한다. 이 때 비트겐슈타인의 최소 단위인 ‘대상’은 ‘논리 체계’의 맥락 안에서 전통적인 단순자들과 다른 면을 보인다.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은 존재론적 물음을 아예 재구성해버린 것이다. 대상은 최소단위일 뿐 말해지기 전까지는 애초에 어떤 속성도 가지지 않는다. ‘가능성 자체’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그것을 언명하는 순간 비로소 다른 대상들 간의 관계에 의해 ‘사실’로서 ‘고정’된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존재론은 애초에 고정된 단순자를 가정하는 ’실체존재론‘이었던 데 비해 비트겐슈타인의 존재론은 ’그것에 관하여 말할 때‘에만 그 구체성이 드러나는 ’사실존재론‘이다.

자세히 고찰해 보자.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사는 뜻이 있는 명제와 뜻이 없는 명제의 구분이었다. 그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명제와 현실 간의 접촉이다. ‘요소 명제’는 이 접촉점에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명제는 복합체이며, 더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다. 그리고 분석이 무한히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3.23과 3.25 등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단순 기호들의 가능성에 대한 요구는 뜻의 확정성에 대한 요구이다.” “명제의 완전한 분석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명제는 분절되어 있다.” (3.251) 그렇다면 명제에 대응하는 사태도 마찬가지다. 비트겐슈타인의 ‘대상’ 개념은 이러한 ‘논리적 요청’을 위해 설정되었다. 말하자면 대상은 존재론적 단순체가 아니라 논리적 단순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대상들이 세계의 실체를 형성한다고도 말한다. (2.021) 얼핏 모순인 것 같지만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실체’라는 개념을 다르게 운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명제는 오히려 그의 존재론을 강화한다. 논리의 맥락에서, 그의 실체 개념은 존재하는 단순자 하나가 아니라 ‘세계의 불변적 형식’이다. 2.0231에 따르면 실체(대상)의 형식은 확정할 수 있으나 ‘실질적 속성’은 미리 확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질적 속성은 명제들에 의해서만, 즉 ‘말해지고 나서’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간의 존재론적 실체는 그 속성을 이미 담지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과감하게 ‘실체는 형식’이라 선언하여 전회를 시도한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가능성 자체로서, 타자들 (명제 속 다른 대상들) 과 강하게 연관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세계는 이미 ‘연관된’ 세계다. 사실, 사태, 대상들의 연관 총체로서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간의 존재론적 단순체들은 의미를 잃는다. 세계와 존재에 관하여 가장 엄밀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고정된 단순자 하나가 아니라 형식 혹은 연관 체계 자체를 다루어야 한다. 이상이 비트겐슈타인의 존재론을 ‘사실존재론’이라 칭하는 이유이며, 이 때 ‘사실’이라 함은 논리적 형식으로서 연관된 그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보론은 여기까지다. 그의 관점을 외부에서 조망하지 않고서는 모호한 개념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유의미한 시도였기를 바란다.

 

4. 진리 함수 이론 ; 내부로부터 한계 긋기

모든 참된 요소 명제들의 제시에 의하여 세계는 완전히 기술된다. 모든 요소 명제들의 제시에 더하여 그 중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가 제시되면, 그로써 세계는 완전히 기술된다. (4.26) 나에게 모든 요소 명제들이 주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것들로부터 나는 어떤 명제들을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단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명제들이며, 그렇게 그것들은 한계 지어져 있다. (4.51)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 함수이다. (5) 요소 명제들의 수가 몇 개이든, 그 진리 함수들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도식 속에 써 넣을 수 있다 ; (TTTT)(p,q), (FTTT)(p,q), ... (5.101)

진리 함수 이론은 비트겐슈타인 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의 목표는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 것이었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철저하게 말하는 것은 곧 진리 함수 이론을 이용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논고』의 고찰은 진리 함수 이론에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정작 이 이론을 실제적으로 증명(예증)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이론을 정의하는 방식 또한 당대의 분석철학(러셀, 프레게 등) 전반에 익숙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이론을 다루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다. (실제로 『논고』에 나타난 진리 함수 이론의 전개를 샅샅이 고찰한 해설서도 많지 않다. 대부분 피해 간다.)

사실 진리 함수 이론은 일종의 트릭에 가깝다. 보론에서 이야기했듯이 요소 명제가 이미 논리적으로 요청되어 있기 때문에, 요소 명제에서 거꾸로 명제 전체를 도출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 이론의 의의는 어떻게든 언어의 정확한 한계 영역을 특정했다는 데 있겠다. 요소 명제에서 명제 전체로의 이행은 명제의 연관 방식을 정확히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명제들의 구조는 서로 내적인 관계가 있다. (5.2) 그 관계는 명제들 간의 ‘연산’으로 묘사된다. 연산으로 한 명제에서 다른 명제가 산출될 수 있다. 특히 연산들 중 요소 명제의 진리함수 자체를 ‘진리 연산’이라고 부르는데, (5.234) 모든 명제들은 요소 명제들의 유한한 수의 진리 연산의 결과가 된다. (5.3, 5.32)

이로써 언어의 체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대상들에 대응하는 이름이 있으며, 이름의 배열/연관으로 요소 명제가 성립한다. 요소 명제에 진리 연산을 가하면 명제 전체를 산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복건대, 모든 요소 명제들이 주어져 있다면 세계는 ‘완전히’ 기술된다. 진리 함수 이론은 결국 세계를 완성한 것과 같다.

 

5. ‘나’와 ‘세계’ ( “역사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 세계가 최초의 세계이며 유일한 세계인데! 나는 ‘내가’ 세계를 어떤 모습으로 발견했는지를 서술할 것이다. ... 세계를 판단하고, 사물을 측정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다.” 일기, 421p )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5.6) 나는 나의 세계이다. (5.63) 진리 함수 이론에 이어 강렬한 언명들이 뒤따른다. 유아론은 『논고』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사실 『논고』 전체에 바탕으로 깔려 있다. 그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해준 발상이 바로 우리가 ‘세계를 말한다’는 점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논고』의 언어 이론, 특히 진리 함수 이론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어떤 면에서 세계는 ‘말해짐으로써’ 성립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말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며, 이 지점에서 ‘나’라는 단어가 『논고』에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드러난 사실에 대하여 말하는 자로서의 ‘관측자’가 필요하다는 표현도 가능하겠다.

유아론은 “오직 나만 존재한다” 또는 “오직 나만 존재할지 모른다”와 같은 주장을 뜻한다.7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유아주의가 전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언어의 한계들이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5.62)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사실들)의 그림을 그리고,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며, 사고를 언어(명제)로 표현한다. 결국 언어로 미루어 세계를 파악하기 때문에 ‘나의 언어의 한계들이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논고』 전체에 걸쳐 논증되어 온 것이다. 이로써 ‘나’는 세계 앞에 단 한 사람의 관측자로 서며, 반대로 세계는 그것을 파악하는 ‘나’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흥미로운 점은, 유아주의가 엄격히 관철되면 그것은 순수한 실재주의와 합치된다는 그의 주장이다. (5.64) ‘실재주의’와 합치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실마리는 다음 진술들에서 찾을 수 있다 ;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주체는 오히려 세계의 한 한계이다. (5.632)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시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그것을 어떤 눈이 보고 있다는 추론을 허용하지 않는다. (5.633) 관측자로서의 자아는 세계 속의 어떤 사실들로부터도 추론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자아는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자아는 세계 속에 속하지 않으며, 대상도 아니다. 세계의 한계 자체를 이룬다.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세계내의 것들과 구별되는, 순수한 실재로서 자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아가 철학에 들어온다. 이 철학적 자아는 ‘형이상학적’ 자아일 수밖에 없다. (5.641)

 

6. 논리로서의 세계 ( “내가 쓰고 있는 모든 글은 하나의 거대한 문제에 대한 것이다: 세계에는 선험적 질서가 있는가? 만약 질서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일기, 287, 289p )

글을 열며 이야기했듯이, 논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세계의 근본적, 선험적 질서에 해당한다. 그는 논리로서 언어와 세계 각각을, 그리고 그 연관을 치밀하게 설명해낸 셈이다. 그리고 세계와 언어의 진술을 어느 정도 끝내고 난 후인 『논고』의 6.1 정도에 이르러 논리 자체에 대해 경탄스럽게 말하기 시작한다. 세계의 질서 자체로서의 논리를 지금부터 고찰해볼 것이다.

논리학의 명제들은 동어 반복들이다. (6.1) 그러므로 논리학의 명제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6.11) 논리학의 명제들이 ‘왜’ 동어 반복인지는 사실 잘 드러나 있지 않다. 아마 ‘항상 참인 법칙들’이라는 의미로 주장한 듯하다. 그러나 이 진술이 이후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면 그 연원이 불분명하다고 해서 불평할 수도 없게 된다.

이어지는 진술들은 다음과 같다 ; 논리학의 명제들이 동어 반복들이라는 것은 언어의, 그리고 세계의, 형식적,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 준다. 명제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연결시켰을 때 동어 반복이 된다면, 이는 명제들 사이에 특정한 구조적 속성이 성립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6.12) 이 때 명제들 사이의 ‘구조적 속성’이란 곧 ‘논리적 속성’에 해당한다. 명제들을 동어 반복이 되게 결합시킨다는 것은 명제들을 ‘아무것도 말하지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때 명제들의 뜻은 사라지고 명제들의 논리적 속성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6.121) 그러면 논리적 명제들은 세계의 골격을 기술할 수 있다. ... 여기에 결정적인 것이 놓여 있다. (6.124. 살 대신 골격, 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주목하라) 결국, 논리학은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초월적이다. (6.13)

이쯤 되면 비트겐슈타인이 논리학에 천착한 것에 끄덕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논리학은 “스스로를 책임지는”(일기, 25p) 원리 자체였다. 논리학은 세계의 골격을 기술하며 세계의 거울상으로서 기능한다. 또한 언어와 세계를 이어 주는 교각 역할까지 해 낸다. ‘필연적인 기호들의 본성 스스로 진술’(6.124)하는 논리학은,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의 ‘거대한 문제’였던 ‘세계의 선험적 질서’와 정확히 같은 것이다.

 

7. 철학의 역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들

마무리에 이르렀다. 지금껏 ‘말할 수 있는 것’을 특정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제 이 기반을 가지고 철학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새로이 선언한 철학의 역할은 충분히 알려져있듯 철학사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전회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야기하려 한다. 흔히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을 ‘도시’와 ‘밀림’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 중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응하는 ‘밀림’이 『논고』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개략적으로나마 짚고 넘어가야 비로소 독해가 완결될 것이다.

그는 우선,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라고 확언한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명료해짐’이며, 그러므로 철학은 흐리고 몽롱한 사고들을 명료하고 명확하게 구분 지어야 한다. (4.112) 혹은 이런 진술도 있다 ;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과학의 명제들, 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 상관 없는 어떤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 속에 있는 어떤 기호들에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6.53) 그는 철학의 역할을 새로이 쓴 것이다. 그간의 철학들은 무의미한 명제들을 남발해 왔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종종 곡해되고 그 영역을 침범당해왔다고 여긴 듯하다. 말하자면, 철학은 ‘겸허’해져야 한다. 철학은 생각될 수 있는 것을 구분 짓고, 그로써 생각될 수 없는 것을 구분 지어야 한다. 특히, 안으로부터. (4.114) 글을 열며 이야기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론이자 목적이 다시 드러나는 부분이다. 인상적인 것은 이어지는 다음 진술이다 ;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4.115) 철학의 목적이 사고를 명료화하는 것에 있음은 소극적인 뒷걸음질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명료하게 묘사한다면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목적을 다시금 바꾸어 쓸 수 있다. 결국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의미해야 한다.

혹은 ‘보여 주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밀림’에 해당하는 많은 것들이, 말할 수 없는 대신 ‘보여지는’ 것들 혹은 ‘드러나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6.522) 혹은 ‘초월적인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세계 안에 있는 것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세계 밖에 있는 초월적인 것이다. (6.41)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대신 어디선가 드러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윤리학을 꼽을 수 있겠다 ; 윤리학의 명제들도 존재할 수 없다. 명제들은 보다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 (6.42) 윤리학이 언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리학은 초월적이다. (6.421)

 

7.1

다만 주목할 만한 진술들이 뒤따른다 ; 우리는 윤리적인 것의 소지자로서의 의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6.423)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즉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면) 세계는 선악의 의지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전체로서 이지러지거나 차야 한다. (6.43)

흐름상 생략했던 진술 하나와 『일기』의 발언들도 몇 가지 가져오겠다 ; 의지의 자유는 미래의 행위들이 지금 알려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5.1362) 사물들은 내 의지와의 관계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그 자체일 뿐, 다른 어떤 사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431p) “우리는 스스로의 움직임에 책임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내 의지는 세계의 어떤 부분에는 개입하고, 또 다른 부분들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 내가 어떤 동작이 일어나기를 의지한다는 것은 내가 그 동작을 행하는 데에 있지, 그 동작을 촉발시키는 어떤 다른 것을 행한다는 데 있지 않다. 내가 무언가를 움직일 때, 나는 스스로를 움직인다. 내가 어떤 동작을 할 때, 나는 동작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이든 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447p)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발제를 준비하며 만난 텍스트들 중 가장 빛나는 것들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다고 언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이 도달한 결론은, 무력감이 아니라 유례 없이 전복적인 가능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명제는 성립할 수 없다. 그 뜻을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미리 알려질 수 없다. 그렇다면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요소 명제들 간에는 의존 관계가 없으므로 인과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데, 세계는 어떻게 걸어나가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그 힘이 ‘의지’라고 생각한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단어일 수도 있겠다) 한 시점의 세계는 이미 언어로써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 외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의지는 요청될 수 있다. 언어로서의 세계 이외에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미래에의 의지는, 자유롭다. 그렇게 의지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면, 사실이 아니라 세계의 한계를, 즉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이 아니라 언어들의 연관 체계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 세계는 그 내부에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통채로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0.

“이 책의 핵심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유의미한 시도였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는 체계적으로 독해하려 했고 체계적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사실 말해낸 것보다 말하지 못한 게 더 많다. 특히 분석철학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요구하는 대목들은 소화해낼 수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대신 분석철학의 특수성을 포기하고 철학 일반으로서 『논고』의 내용을 다루려 했다. 아마 분석철학자로서의 비트겐슈타인에 갈증을 느꼈다면 본 에세이에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의 핵심은 윤리적인 것이다. 그것만은 확신하고 싶다. 『논고』의 독해를 위해 『일기』를 참고했다. 읽는 내내 묘한 감정이 들었다. 책의 왼쪽(짝수) 페이지는 전선에서의 일상적인 일기를, 오른쪽(홀수) 페이지는 『논고』의 기반이 된 사유 작업들을 다루고 있었다. 얼핏 차갑기만 한 것처럼 보이는 오른쪽 페이지를 읽다가도 자꾸만 왼쪽 페이지에 눈이 갔다. 독자를 실소하게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인간적이고 사소한 면모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분명히 무거운 고뇌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2차 대전의 포화 속에서 그는 톨스토이의 복음서를 들고 희망과 열정, 실존, 그리고 죽음을, 결국 윤리와 세계를 끊임없이 물었다. 아무래도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학자로서의 비트겐슈타인보다 인간으로서의 비트겐슈타인에 정이 더 갔던 것 같다.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구가 있다. 『논고』와 『일기』를 읽는 내내 자꾸만 이 문장이 떠올랐다. 위화감을 무릅쓰고 마무리에 끌어다쓰고 싶다.

‘좋은 작품은 말하려는 것을 말하지 않고 말해낸다.’

 




<각주>


1) 뒤의 것까지, 다음에서 재인용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분석철학연구회 편, 서광사, 1989, 23p


2) ‘일어난’이 아니라 ‘일어나는’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 특정한 시간점에서 보아야 그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영원성의 관점, 혹은 시간 전체의 관점에서 보아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3)비트겐슈타인은 ‘뜻sinn’과 ‘의미bedeutung’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뜻’은 그림이 나타내고 있는 것에 해당한다. 즉, 그림의 뜻과 현실의 일치/불일치는 그림이 나타내는 사태가 현실에서 존립하는지 비존립하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논고』에서 ‘진리가능성’에 대응시키고 있기도 하다.  ‘의미’는 일상적인 용법 그대로인 것 같다. 즉, ‘지시 대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뜻sinn’은 가능적, ‘의미bedeutung’는 실재적, 이라고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주 관심사인 ‘의미 있는 명제’와 ‘무의미한 명제’를 이야기할 때의 ‘의미’는 ‘뜻’에 해당한다. 이 때 ‘뜻을 결하는 것sinlos’과 ‘뜻하지 않는 것unsinnig’ 또한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세계를 기술하지 않는 것’, 즉 그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거나 판단이 무의미한 것이다. 후자는 ‘참이나 거짓을 뜻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어 반복이나 모순 명제는 뜻을 결(sinlos)하고 있지만 항상 참이나 거짓을 뜻하고는 있다. (unsinnig X) 이 중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무의미한’ 명제는 ‘뜻을 결하는 것sinlos’로 이해되어야 한다.


4)이로써 ‘이름’의 의미가 일상적인 용례와는 구별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은 원초적 기호로서 단순한 어떤 것, 즉 부분들이 없는 어떤 것을 지시한다. (K.T.판)


5) 그런데 요소 명제와 이름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요소 명제는 ‘사정이 이러이러하다’라는 추상적인 형태로 제시되고 있을 따름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름들의 연관’인지 가시화할 수 있는 방법이 『논고』에는 없다.

『일기』의 다음 구절에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나의 어려움은 역시 여기에 있다 ... 나는 그러한 분석이 계속 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분석을 끝까지 완전하게 실행할 능력은 없다. ... 짧게 말해,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결과물의 형식은 알 수 있지만, 그 형식에 대한 예시는 단 하나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분석이 계속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지만,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문장 종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도달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319p)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닿지 못한 부분인 듯하다. ‘요청’의 측면이 강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6) 이 보론은 많은 부분 다음에 참조하여 작성되었다 ;

남경희, 『비트겐슈타인과 현대 철학의 언어적 전회』, 이화여대출판부, 2005, 17-48p 


7) 박정일, 「비트겐슈타인과 유아론」, 논리연구 9-2(2006), p59-98


 

 

참고자료

     도서

            1차 자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이영철 역, 책세상, 200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전쟁 일기』, 박술 역, 읻다, 2016 (본문에서 ‘일기’)

            2차 자료

            남경희, 『비트겐슈타인과 현대 철학의 언어적 전회』, 이화여대 출판부, 2005

            K.T.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황경식 외 역, 서광사, 1989

            분석철학연구회 편,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서광사, 1989

            George Pitcher, 『비트겐슈타인의 哲學』, 박영식 역, 서광사, 1987

     논문

            2차 자료

            박정일, 「비트겐슈타인과 유아론」, 논리연구 9-2(2006), p5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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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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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을 위하여

2017. 6. 1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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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밤의 마침」

2017. 4. 10. 10:27

다른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상의 소설 「실화」의 첫 문장) 모든 것을 내보인다고 해서 진실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지켜야 할 진실이 없다는 것과도 같다. 얼마나 대단하거나 대단치 않든, 혹은 자랑할 만한 것이든 부끄러운 일이든 간에, 죽을 때까지 혼자 복기해야만 할 일들이 있다. 그런 비밀이 하나 있다면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홀로 “노인이 될 때까지 비밀을 기억할 것”이지만, 삶 내내 ‘비밀의 문장’이 이따금 찾아올 것이다. (편혜영, 「밤의 마침」, 57p)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삶의 한 조각을 떼어 줌으로써 누군가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기억 하나를 끌어안음으로써 함부로 사라질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어떨 땐, 함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다. 그건 외롭고 두려운 일이다.

소설의 비밀 엽서는 그런 의미에서 복잡한 역할을 가진다. “엽서는 세상의 누구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일러줬다. 세상의 누군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는 비밀 때문에 괴롭고 외롭다는 것도 가르쳐줬다.”(39p) 비밀을 공유하는 것과 비밀엽서의 기능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비밀엽서는 비밀이 아니라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엽서의 발신인들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엄밀히 말하여 비밀을 고백하지 않는다. 주어 없이, 비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해진다. 비밀 엽서는 그런 편리한 방식으로 화자의 외로움을 덜어 준다.

그러나 소설의 사건을 촉발하는 한 장 엽서는 그 성격이 다르다. 엽서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의 비밀이 적혀 있다. 그는 다시 문제의 그날을 회상하고, 아내와 ‘그 애’가 무엇을 알고(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결국 엽서는 단지 우연이었음을, 그의 비밀을 아는 것은 그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세계는 이미 이전과 달라져 있다. “한 편으로는 두려웠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결국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그는 엽서에 비밀을 적은 사람의 나약함에 화가 났다. 이 세상에 자신과 비밀이 같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뭔가 고백하고 싶어하는 게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껏 비밀을 담은 엽서가 그를 외롭지 않게 해줬다면 앞으로는 비밀의 동조자 때문에 두고두고 외로울 것 같았다.” (56p) 같은 비밀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은 고백하려 했다. 결국 그의 비밀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다. 이 사실은 그를 외롭게 한다. 무게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밀을 지키고 있었지만 감당하고 있지 않았다.

엽서 탓에 실감하게 된 비밀의 무게는 그의 비밀을 불가해한 것으로, 그에게도 비밀인 것으로 만든다. 이제 그는 비밀을 감당해야 하고 홀로 복기해야 한다. 비밀은 문제가 되었고, 아무에게도 떠넘길 수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비밀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오직 그만이 그리고 좁은 골목과 어두운 밤만이 노인이 될 때까지 비밀을 기억할 것이다.”(57p) 그는 이제 함부로 잊어서는, 마음대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아무도 기억하고 감당하지 않았던 밤은 그렇게 끝난다.

인용 : 편혜영, 「밤의 마침」, 『밤이 지나간다』, 창비, 2014, 31-57p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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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남편」

2017. 4. 8. 16:27

나는 범인의 아내가 아니다


“도미노가 다 넘어지면 끝내주는 그림이 완성될지도 모르지만, 그 그림이 우리와 무슨 상관 있을까. 도미노는 내려다봐야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알 수 있지 않나. ... 내가 완성해나가는 이 그림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저 위에 편히 앉아 그것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최진영, 2010, 109p)

한 사람에게 ‘진실’은 ‘사실’을 편집하여 재구성한 결과다. ‘사실’이 실제로 그를 지나간 사건들이라면, 사람은 사실들을 편집해 기억한다. 그리고 진실을 판단하는 기준은 기억이며, 진실은 기억에 의존한다고 말해야 한다. 세상에는 ‘나의 진실’이라는 게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편집하는가.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진짜에 가까운 사람이 내 남편이라는 확신, 그것 하나로 모든 가난과 피로와 불행을 견뎌왔다.”(124~5p)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수단으로서의 진실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진실을 자기 삶 ‘위’에서 내려다볼 수 없다.

소설의 구조는 선명하다. 처음에는 남편이 결백하다는 게 그녀의 진실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째서 더러운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버렸을까.”(115p) 그녀에게 그는 “늘 안쓰럽고 애달픈 사람”(112p)이었다. 그녀는 그를 변호한다. “다은이가 너무 예쁘니까 자꾸 봤을 테고 혼자 사는 미스 박이 걱정되어 그녀를 보살폈을 것이다.”(115p)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그녀의 편집이다. 그녀의 진실은 다음 문장을 위한 것이다. ‘내 남편은 범인이 아니다.’ 이런저런 기억들 때문에 남편이 결백한 게 아니라 반대로, 남편이 결백하므로 그녀는 그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기억한다. 남편은 범인이 아니므로 당연히 면회를 갈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편집은 ‘그가 그녀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랑은 안 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런 사람이랑은 안 해요. 나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우린 그런 사이 아니에요.”(113p)

그러나, “당연히 아줌마도 미안해해야지. 뻔뻔하긴. 그 서방에 그 마누라야, 아주.”(118p) 라고 경찰이 말한 이후 그녀는 살아나가기 위하여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이제 그녀의 진실은 이것이다. ‘나는 범인의 아내가 아니다.’ “단단히 잘못됐어. 이런 식으로 내 인생이 꼬일 리 없지. 나는 절대 파렴치범의 아내가 아니야.”(125p) 남편이 범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남편이 범인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그녀까지 범죄자 취급했고(마트에서 쫓겨난 일, 현관 앞에서 옆집 사람에게 당한 일 등)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문장의 주어가 바뀐 것이다. 처음에 이 사건은 남편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남편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녀의 일이다. ‘내 남편’이 범인이 아닌 것과 ‘나는’ 범인의 아내가 아닌 것, 둘은 같은 문장이지만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믿는 것은 그의 무엇일까. ... 나는 그라는 인간이 아니라 내 남편인 그를 믿는다.”(121p) 그를 믿는 것과 남편인 그를 믿는 것 사이의 차이처럼.

결말에서는 비틀어질대로 비틀어진 ‘나’의 감정이 폭발한다. 그러나 갑작스럽지는 않다. “무자비해지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 그런 가식으론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었다. 우린 서로를 물어뜯어야 했다.”(119p) “당신, 이렇게 날 망칠 순 없어. 당신을 믿는다고 말해줘야지. 당신은 내 남편이니까. ... 안쓰럽고 애달픈 당신. 당신은 죽을 때까지 그런 사람이어야 해.”(125p) 이제 진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편이 범인이든 아니든 ‘나’는 범인의 아내가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남편은 이미 흉악범이다.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몇 번이나 지갑 속 사진을 꺼내봤다. 머릿속엔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흉악범의 얼굴만 둥둥 떠다녔다.”(126p)

“당신을 어떻게 믿어. 당신이 뭔데. 당신은 날 믿어?”(128p) 소설 말미의 이 문장은 그래서 힘이 세다. 당신이 믿을만한 사람이냐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당신은 무엇이냐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독자 또한) 진실이 한없이 나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살아나가기 위해 좋을대로 믿는 것이 진실이며, 필요없어지면 내팽개칠 수도 있는 게 진실이다. 그래서 남편과 친구가 한 말은 묘하게 대비된다. ‘날 믿어’와 ‘다 잊어’.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이며, 무엇을 잊어야 할 것인가. 확실한 건, 이 사건도 결국 편집된다는 것이다.

 

“” 안의 문장은 모두 인용 ;

  최진영 (2010). 남편. 실천문학, 108-128. 

Posted by 습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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